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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진야생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진경산수
참고 문헌
1. 浙江片氏世家傳.
2. 通文館志.(당시 조선시대 중국, 일본 등 외교 관계부터 경제적인 통상문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엮어놓은 조선의 외교사이다.)
3. 성호사설.
4. 서포만필.
5. 연려실기술.
6. 대동기문.
7. 동평위공사견문록
8. 사대교린 (조선 외교의 기본 방책과 관련된 외교 사례와 더불어 일선에서 활동한 역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9. 光國志慶錄
10. 임하필기제 14권 문헌지장편.
11. 비변사.
12. 조선왕조실록.
1. 종계변무
짭은 인연, 아름다운 報恩, 조선 욍실의 숙원 문제 “宗系辨誣” 해결되다.
홍순언은 지금 강남의 청담동에서 테어 났으며 그의 손자 효손은 숙천 부사를 지냈다.
홍순언은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의기가 있었다.
후일 종계변무 일을 해결하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보은단동 지금의 롯데 호텔 옆 을지로 2가 자리가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홍순언은 본시 역관으로 조선 사신을 따라 북경을 드나들었다.
사신에는 춘(春), 추(秋)에 가 문안사와 유사시 수정 등등을 요청하는 변절사가 있었다.
홍순언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는 조선의 운명을 달라지게 한 사람이고 임진왜란 하면 유성룡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이름만 익숙하겠지만 실제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장수도 무사도 아닌 중인 출신의 역관 홍순언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조선의 역사를 바로 잡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계기가 참으로 감동이 있다.
1390년 (공양왕2)윤이(尹彛), 이초(李初)는 명나라에 “이성계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고자질했다.그래서 명나라(태조실록)<대명회전; 법전으로 당대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 해놓은 책이다>에는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더구나 <대명회전>에는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는 모두 4명의 고려왕을 죽이고 나라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태조 3년 (1394년 4월)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떨리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죽기를 무릅쓰고 알리니
ㅡ 태조실록 1394년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태조 이성계가 믿기 어려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에서 조선 왕조의 가계에 대해 잘못 기록한 사건이었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당시 이러한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조선은 자신의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입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 절대 참을 수 업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렇지 않다고 진정하였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이라고 가계를 설명하고 또 이인임의 가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고 하였다. 태조의 종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묵묵부답으로 조선의 애를 먹이기도 하고 다음 번 책이 개정될 때 고쳐 준다고 미루기도 했다.
600여 년전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던 문제의 사건을 대명회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부경사범대학교 대명회전 정덕본(1510)
대명회전은 명나라의 법전으로 당대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 해놓은 책이다.
이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대명회전)
이인임은 고려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러한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조선은 자신의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렇지 않다고 진정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이라고 자신의 가계를 설명하고 또 이인임의 가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기 위해 명나라로 갔습니다.“
-황여우푸, 중앙민족대학교수, 중국조선사연구회장
조선은 그후 2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사신을 보냈지만 대명회전의 기록은 고쳐지지 않았다.
종게변무를 고치기 위하여 누차 갔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명나라의 일은 재물이 아니고서는 성사하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역관 홍순언은 말하기를 “외국의 사세는 명나라와 같지 않으니 만약 이 길을 열어 놓는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국가가 퇴폐하는 지경에 이를 것인즉, 이 일은 몇해가 지연된들 무엇이 서럽겠는가? 하며 , 버티고 나갔던 것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조선 정계 최대의 외교 현황이었다.
자신들이 명백하게 잘못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고치지 않는 어떻게 보면 당시 강대국인 명나라의 오만함이 가장 큰 이유였고
또 하나는 조선에서 끊임없이 매달리는 이 외교적인 현안에 대해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있는 외교협상 카드로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신병주 박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홍순언이 변절사를 따라가서 북경에 도착하고 일행과 같이 거리를 산책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뒤 거리 구경을 나갔을 때 집집마다 문 앞에 달린 청사초롱 불 밑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그 밑에는 (술 한잔에 천량)이라고 한 술집 간판이 눈에 띠었다.
집의 형태로 보아 술집이 아니라 어느 지체 높은 양반 집으로 보이는 데다 하릇밤 술값이 가이 천문학적이라 호기심이 발동한 홍순언은 덮어 놓고 그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마중을 나와 혼잣말로 “이제야 우리 아가씨가 소원을 이루나보다”라며 방으로 인도하였다.
일행은 모두 놀래어 숙소로 돌아 갔으나 홍역관 혼자만은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술집에 들어가 노파에게 천량을 치르고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보니 조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홍순언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리고, 아리따운 소녀가 들어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라서 술값이 이렇게 비싼가 생각하며 그 소녀에게 “그대가 오늘 내 술시중을 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아닙니다.”저는 우리 아씨의 몸종일 따름입니다.
저~아씨께서 안으로 모시고 들어오라 하십니다. 라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좁은 복도를 지나 후원으로 들어갔다.
홍순언이 그 뒤를 따라 들어거 보니 기와집이 있고, 처마 끝에 청사초롱을 서너 개 달아 놓아 대낮처럼 환해 눈이 부시었다.
그 눈부신 등빛 속에 칠보단장을 한 여인이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홍순언을 맞이하며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홍순언은 그 여인을 보는 순간 “과연 천하일색이로구나”
감탄을 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서니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방문을 열었다.
홍순언은 호화찬란한 방안을 들여다 보고 객실에서 받은 느낌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어느 고관댁의 귀한 손님으로 온 것이지 술집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손히 절을 올리는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홍순언은 황홀한 자태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어 여인은
“상공께옵서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니 감사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벽을 향해 돌아 앉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것이 아닌가?.
홍순언은 순간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술집 여인이 아닌 듯 한데 어인 연고로 이같이 술장사를 하게 되었소?.
“사실인즉 ...저는 기녀가 아니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삼천량을 쓸 곳이 있사온데 어찌 계집의 몸으로 그런 큰 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부득이 저에게 삼천량을 마련해 주는 분에게 제 정조를 바치고 그분을 서방님으로 모시고 살려고 하였는데 상공은 연세도 많으신 분이라 이 일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눈물을 보인 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홍순언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뭔가?”
“소녀의 아버지는 이 나라의 호조시랑이셨습니다. 호조시랑으로 계실
때 서역과 무역을 하는 친구분이 자신에게 투자하면 1년 내에 2배로 수익금을 남겨 주겠다는 말에 그만 국고금 삼천량을 투자하시었는데 서역과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투자금을 모두 날리게 되었습니다.
황제께서 진노하셔서 처형될 위기에 몰렸으나, 신하들이 3년 말미를 주시면 아버님이 탕진한 국고금을 변제하겠다고 하였으나 이제 3년 기한이 다 되어 가지만 탕진한 국고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무남 독녀 외동딸인 이 소녀가 아버님의 생명을 구하고자 부득이 이같이 술장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홍순언은 이 안타까운 사정과 처녀의 효심에 감동되어.
“나는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이야 꿈에도 몰랐소이다. 하늘에서 내신 효녀에게 잠시나마 불칙한 마음을 품은 내가 잘못이었소. 자, 여기 이것으로 부친을 구하시오.”
홍순언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찼던 전대 두 뭉치를 풀어 놓은 후 소녀에게 손끝하나 대지 아니하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공님!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몸이 상공께 시집을 가지는 못하지만 이제 상공을 수양아버지로 모시고 십사오니 상공의 성함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옷소매를 매달렸다.
“아니요.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복해서 주는 것이니 그리 아시오.”
홍순언이 기어이 뿌리치고 떠나려하니 ,
“정 그러시다면 제 말 한마디만 듣고 가십시오.”
홍수언은 할수없이 도로 앉았다.
“제발 존함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저의 집 가보에 올려 이 은혜를 후대에 까지 전하려 하옵니다.”
하고 애원했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름을 댈만한 사람이 되겠소. 그저 조선에서 온 홍이라는 통역관으로만 아시오.”
하고 아무 미련도 없이 그 집을 나왔다. 여인은 울면서 문 앞까지 나와 그를 전송했다.
홍순언은 숙소에 와서 자리에 누웠으나 물론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호기로 나라의 공금을 모두 썼으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겠는가?
다음날 조양문을 지나 명나라 정부로 들어가서 종계변무에 대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할수없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홍순언의 국고 낭비에 대한 엄히 죄를 묻고 금부에 가두고 말았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이 선조에게 그의 의협심을 들어 3년 말미를 주실 것을 주청하여 즉시 처형되지는 아니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세월은 빨리 흘러 홍순언이 옥에 갇힌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나라에서는 다시금 종계변무 때문에 사신들을 보내기로 조의가 결정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여러 번에 걸쳐 실패한 까닭에 상감께서 엄지를 내리셨다.
“이번에는 정사에 황정욱, 부사에 김계휘를 보내고, 만일에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 정, 부사 뿐만 아니라 말을 옮기는 역관도 그 책임을 물어 모두 참하리라.”
모든 역관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제 역관으로 선발되면 이는 사형선고나 다를것이 없기 때문이다. 역관들의 근심은 점점 높아졌다. 보통 때 같으면 서로 가려고 안달을 했을 것이지만 이번만은 저마다 아니 가려고 발뺌을 하는 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역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역관이,
“이런 때에 홍역관이 있었으면,”
모든 역관들은 불현 듯 홍역관을 생각했다.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겠군,,”
그 역관의 말을 듣던 다른 역관들도 저마다 생기가 흘렀다. 즉 그들의 의견은 이러한 것이었다.
홍역관은 이왕 옥에 갇혀 죽고 말 몸이니 우리가 한 사람 앞에 얼마씩 돈을 모아 홍역관이 없애버린 돈 중 일부를 변상해 주고 그로 하여금 역관으로 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홍순언이 다시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통주에 이르러 홍역관은 3년 전의 일을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음날 일찍 명나라의 수도를 향하여 조양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조양문 앞에서부터 비단이 깔리고 재인, 악인들이 흥겹게 악기를 울리며 환영하는 것이었다. 홍역관은 전에도 물론 사신으로 왔었지만 이렇게 굉장한 환영은 받아 보지 못했었다.
그들 일행은 어리둥절하여 자기네들 외에 다른 귀빈이 어디서 오는 것을 환영하는 줄만 알았다. 그 때 금은으로 호화스럽게 단장한 수레가 그들 앞에 이르자 멈추더니 풍채가 좋은 명나라 고관 한 사람이 내려왔다.
“홍역관이 어느 분이신지요?”
정, 부사를 다 젖혀 놓고 홍역관부터 찾는 것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네, 소인이 홍역관이옵니다.”
하고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큰나라의 위풍당당한 재상이 일개 조그마한 나라의 사신 그것도 말단인 홍역관에게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니가?
“원로에 먼길 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셧습니까?”
이 같은 고관의 말에 사신들 일행과 구경하러 온 명나라 백성들이 깜짝 노랐다.
“누구시온지, 소인을 이렇게 찾으십니까?”
“물론 그렇게 말씀하실것이옵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조용한 자리에서 말씀 올리기로 하고 어서 이 수레에 오르십시오. 저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기다리는 사람이 누굴까?
홍역관은 의아심이 솟구쳤다.
어느덧 수레는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집 앞에 이르렀다. 예부시랑 석성의 집이었다. 객실에 이르자 그곳에는 명나라의 만조백관들이 초대되어 있었다. 그를 안내한 석시랑은 시녀가 내온 차를 권하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나와서 말씀드릴 사람이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시녀를 앞뒤로 거느리며 들어왔다.
“앗”
홍순언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귀부인은 3년 전에 통주에서 그녀의 호성에 감복하여 조선의 국고금을 모두 내어주었던 바로 그 여인이 아니가?.
홍여관에게 공손히 3배를 올린 후 그 귀부인은
“아버님! 그간 존체 건안하시온지요?”
“아 이게 누구요? 그래 부친께서는 무사하시고 건강하신지요?”
“아버님 덕분에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되고, 저도 예부시랑(우리나라 외무부장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만일 아버님이 아니셨더라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되었을지 예측할 수도 없었을 것이옵니다.”
석시랑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자기 아내를 구해준 홍역관에게 깊이 감사했다.
그날 밤 석시랑의 집에서는 만조백관들이 구름처럼 모여 대연회가 벌어졌으며 각조사랑들은 석시랑으로부터 홍순언의 의협심을 전해 듣고 감격하여 깊은 사의를 표하였다.
조선의 정, 부사도 홍역관의 간청으로 석시랑의 집에서 같이 묵고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종계변무는 석시랑의 주선과 홍순언의 의협심에 감복한 각조 시랑들의 주청으로 한달을 넘기고 두달이 다 되어 무사히 승인을 받았고, 홍순언이 탕진한 조선의 국고금도 몇배로 상환이 되게 되었다.
짧은 만남,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 되었다.
-통문관지
곤경에 처한 처한 여인을 돕는 의로운 남자
그리고 그를 비웃는 주위의 사람들!
가엽고 불쌍한 여인을 보고 측은지심으로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홍순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娘子는 다음날 그가 朝鮮譯官 洪淳彦이라는 것을 알고, 父親을 뫼시고 故鄕에 돌아갔으니 온 나라 안에 孝女라고 所聞이 자자했다.
이 때 어양(漁陽)에서 修學하던 才士 石星이 이 所聞을 듣고 故鄕으로 달려가 兪浪子와 결혼 했으며, 그뒤 석성은 禮部侍郞(외무부 차관격)이 되었고, 每年 三, 四次씩 朝鮮使臣行次가 있을 때마다 兪娘子 夫婦는 洪譯官 오셨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
한편 朝鮮에 돌아온 洪譯官은 公金橫領으로 家産을 整理 했어도 二千兩밖에 되지 않아 獄에 갇히어 수년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뒤에 宣祖大王은 大明會典 오류 때문에 또다시 嚴命을 내렸다. 選拔된 正使 副使 譯官들은 議論이 분분할 때 그들이 北京에 갈 때마다 洪譯官을 찾던 일이 생각나서 거기에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듯하여 洪淳彦을 監獄에서 석방하여 종게辨誣使 奏請使에 同行할 수 있도록 임금님께 奏請하여 洪淳彦이 동행하게 되었다. 대신 이번에도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목을 치겠다는 임금님의 엄명이 내렸다.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시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리라.
-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시본말
200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종계변무, 이번에 홍순언이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행길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홍순언의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았다.
1574년 홍순언 종계변무 사행.
홍순언은 이미 십 년 전 종계변무의 임무로 북경에 다녀온 적 있었다.
홍순언-“대명회전을 새로 편찬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잘못 기록된 부분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명나라 예부상서-“분명한 상황을 모르니까 조사해서 당신들이 갈 때 알려 주겠소.
절은 할 필요없소 . 돌아가시오.“
-조천기(朝天記) 중에서
아니나 다를까 一行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멀리서 파발 소리가 나며
홍역관 오셨느냐고 물어 왔다. 무슨 일인지 아무도 몰랐다.
홍역관 自身도 모를 일이었다. 사신 일행은 北京에 當到하여 먼저 동약묘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 이 동약묘는 조양문 2리 밖에 있는 도교사원으로 원나라에 세워졌다.
즉, 자신의 여정이 평안하도록 제사를 지낸 후 조양문으로 가던 곳입니다.
-황여우푸, 중국조선사연구회장.
역관 홍순언은 동약묘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염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홍순언이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양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종계변무를 하러 온 홍순언 일행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애타게 그를 찾는 이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禮部侍郞 石星이 接賓使로 맞와 주었다.
서로 禮를 마치고 나서 明나라 官吏가 (洪譯官이 뉘시오). 하더니 불러 따로 모셧다. 어리둥절해진 홍역관이 따라가 자리에 앉으니 .(이번에 공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禮部의 石侍郞께서 婦人과 함께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홍순언을 맞이한 사람은 明나라의 禮部侍郞.
外務部次官이 朝鮮 譯官을 마중 나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破格的인 接待였다. 當時 明나라 禮部 안에는 主客淸吏司라는 곳이 있었다.
통사판관이라는 이곳의 말단 직원이 조양문으로 나와 朝鮮의 使臣을 맞이해 通官으로 갔었다. 그런데 禮部侍郞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전례 없는 매우 破格的인 接待라는 것을 意味한다.
“공은 通州에서 恩惠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禮部侍郞이 조양문까지 마중 나온 일도 당황스런 일인데 그의 아내는 홍순언에게 절까지 올린다.
禮部舍廊의 아내는 바로 지난날 통주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예부시랑 석성 부인이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셧습니까?. 저를 몰라 보십니까?. 어찌 그렇게 북경 출입이 끊어 지셧습니까?. )고 말했으나 홍역관은 정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절하는 것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아버님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느 날엔들 잊겟습니까“
그로서는 까마득히 잊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홍순언 덕분에 부모님을 모시고 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 여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禮部侍郞 석성도 함께 와서 절을 했다.그리고 (大人 제가 미거하여일찍 찾아뵈옵지도 못해습니다. 容恕하여 주십시오. 또 부인은 아버님 이렇게도 못알아 보십니까?. 제가 아버님 돈 삼천량으로 부친을 구출해 드린 자 올시다.)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어서 기쁘고 고마운 마음 限量 없었다.
石星은 洪淳彦을 극진히 待接하며 이번 사행의 目的을 알게 되었고 곧 바로 도움을 주겠다고 約束을 하였다.
宗系辨誣는 마침 石星이 侍郞으로 있는 禮部의 소관이었다.
홍순언 使臣 一行은 北京에서 머무르며 答을 기다렸다.
石星은 特命까지 내리며 애를 쓰지만 時間은 한 달이 넘게 흘러 갔다.
홍순언이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에 머문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때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이곳에 날아들었다.
대명회전은 조선의 요구대로 바뀌었다.
수정본인 대명회전 만력본(1587)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성계의 세계에 대해 매우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 받았고
선조는 이한이며 신라의 사공이라는 벼슬을 했다.
6대손 긍휴는 고려로 왔다.“
-장선, 북경사범대 역사계 교수.
수정 전후를 대명회전에 비교해봤다.
수정 전 수정 후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이다.
만력본은
“이자춘 ”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고.
정덕본은
이성계의 숙적이었던 “이인임”의 이름이 있다.
이로써 大明會典의 오류도 예부시랑 석성의 도움으로 고쳐졌으니 사신 일행은 귀국 채비를 하였다.
일행이 조선으로 떠나려할 때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과 아내는 선물을 가득 가지고 왔다.
석성의 아내는 (아버님 이렇게 가시면 또 언제 뵈울 수 있을까요?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섭섭하고 아쉽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또 북경에 나오시면 꼭 연락하세요. 이것은 저희들의 성의이오니 받아 주십시오. )
라고 예를 갖추니 홍순언은( 당치 않습니다. 석공께서 조선의 숙원인
종계변무사 일을 도움 주시어 이것만으로도 그 은혜가 너무 큽니다.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석성과 그 부인은 여러번 선물을 가지고 가실 것을 부탁하였으나 너무나 완강하게 사양을 하였다.
사실 홍순언은 종계변무 일을 해결하였으니 사실 그 이상의 선물이 없었다.
석성과 그의 부인은 별수 없이 선물을 가지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홍순언 사신 일행이 조선의 숙원의 사업을 해결하고 압록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뒤쫓아오는 이가 있었다.
석성의 부인이 보낸 선물이었다.
나전함 열 개.
그 안에 그녀가 직접 짠 비단이 열 필씩 들어있었다.
백 필의 비단에 새겨진 “보은(報恩)이라는 글자.
모두 부인이 직접 수 놓은 것이었다.
부인이 그 수를 놓으며 얼마나 은인 홍순언을 그리워 했겠는가?.
사실 조정은 역관 홍순언에게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순언이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보면 당시 선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수 있다.
(금수의 나라를 예의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
“이렇게 종계변무에 성공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다시 왕통의 정통성이라든가 왕실의 계보를 바로 잡았다는 외교적 자신감.
그리고 일반 사대부나 백성들에게 왕실의 떳떳함을 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성과물이었습니다..
이래서 국가에서 큰 경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신병주 박사
홍순언은 사신 일행은 종계변무를 성공시키고 임금님 이하 신료들 만백성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바빠졌다.
한양에 도착하여 우선 조예변무를 성공시킨 일을 먼저 궁성으로 파발을 보내고, 사사로이 선물을 받은 것은 일부는 집으로 보내고 느긋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고개길도 가벼이 넘으니 궁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대문에 당도하니 이미 환영 나온 중신들이 가득했다.
후일 명나라에서 선물 받은 것을 빼돌렸다고 비난 받는 곤역도 있었다.
使臣 一行은 歸國하여 두둑한 賞을 받았고, 역관 홍순언은 이 일로 나라를 빛낸 인물이 되었다.
선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들에게 “광국공신(光國公臣)”의 칭호를 내리는데, 열아홉 명의 광국공신 중 역관은 단 한 명이었다.
홍순언은 2등으로 정철이나 유성룡보다도 높은 고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후 우림위장에 임명받았다.
우림위장은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종2품에 해당된다.
이는 역관이 도를 수 없는 자리였다.
당연 실료들의 반대가 많았고,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선조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선조는 홍순언의 업적에 비해 마음이 차지 않아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를 하사하기도 한다.
군호를 하사한다는 것은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조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했다.
“이곳은 조선의 숙원이었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홍순언에게 선조가 집과 노비를 하사하여 그가 살았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당시 은혜를 입었던 여인이 “報恩”이라고 수놓은 비단을 선물했기 때문에 이곳은 “報恩丹洞”혹은 “보은거리”라고 불리게 되엇습니다.“
(지금의 을지로 2가 일대 조선 호텔, 롯데 호텔)
-이상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보은단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은 홍순언을 기억했다.
이것이 짭은 인연이 낳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2. 조선시대 역관은 누구인가?.
국제무역상, 전문외교관,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차별 받는 “중인”.
그렇다고 홍순언이 여인과의 우연한 인연만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가 역관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외교관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국제감각, 세련된 매너 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고위관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학식까지 갖추어야 했다.
역관은 그야말로 다방면의 재능이 요구되는 전문직이었다.
그 시절 역관이 될려면 역과의 시험에 통과해야 했는데 그 시험 과목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中國語, 몽골어, 이문(吏文),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소학.
게다가 역관이 된 후에도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은 평생 계속 되었다.
외국에 출장을 가기 전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당연히 출장도 가지 못하고 월금도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역관들은 그 시절 실력을 가장 철저히 검증받았던 전문직이었다.
유학을 가지도 못했던 시절, 역관들은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노걸대.
조선 역관들이 공부했던 초급 중국어 회화책이다.
예를들면
고려 상인 세 명이 중국에 장사하러 가면서 겪게 되는 백여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서 오고 가는 대화로 꾸며져 있다.
홍순언도 이 책으로 공부했을 것이다.
백여 가지 상황 중 몇 가지를 재현해보면,
“주인 아저씨 안녕하셨는가?”.
“아이고 왕씨 나리가 아니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건강하시고요?”
“당신네 여관에는 말먹이가 있었던가?”.
“마초도 곡식도 모두 있습니다.”
“검은 콩은 한 말에 두 냥 반이고 말먹이는 한 냥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속이는 거는 아니겠지?”.
“나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리께서는 단골 손님으로 저희 가족과 같으니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믿지 못하신다면 어서 다른 여관에 가서 물어 보시죠”.
“됐네. 그냥 한 번 말해 본 것 뿐 일세.”
요즘 쓰이는 회화책 같은 경우는 굉장히 문명화 되어 있다고 해야 되나, 좀 예의있고 교양있는 이런 게 있는데 이 책에는 더 실감나게 되어 있어서 더 재미있고 흥미가 있다고 하겠다.
노걸대의 주인공이 상인들인 만큼, 대부분의 대화가 물건을 사고 팔고 흥정하는 이야기다.
“이 인삼은 좋은 것인가?”.
“이 인삼은 신라 인삼입니다.”
“그저 그런 정돈데”.
“당신 무슨 말씀을 하시오?. 이 인삼은 제일 좋은 것이오. 뭐가 그저 그렇다고 하시는 거요.”
“당신이 생각하는 값이나 들어 봅시다.”
“이 좋은 말 다섯 마리는 한 마리가 은자 팔량이니 합이 40량이요.”
“당신처럼 그렇게 값을 매기면 고려땅에 가서도 살 수 없어요.”
“정말로 말을 사려는 것이오?. 그냥 놀리는 것이오?”.
“이 친구 ,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사지 않는다면 내가 정신 나갔소? 무엇하러 여기까지 와서 흥정을 하겠소?”.
“흥정이라고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말하면 최대한의 협상을 나한테로 이로운 쪽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에서는 이로운 흥정, 물건값을 깍는 것이죠. 이렇듯 조선에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하는 것, 이것이 조선의 역관들이 했던 임무였다고 하겟습니다.‘
-황지연 교수, 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
이 노걸대는 대부분 물건을 사고 팔고 흥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 왜 역관들은 하필 노걸대를 교과서로 사용했을까?.
당시 역관들의 임무에는 통역 외에 국제무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홍순언도 당연히 무역에 관여했다.
그렇게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다 석성의 부인이 된 여인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홍순언이 여인을 위해 쓴 3천량의 돈은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억대의 돈인데, 홍순언은 그 큰돈을 여인에게 내 주었다.
지금의 누가 잠깐 만난 여인에게 그 큰돈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통주에서 여인에게 준 돈은 관아에서 빌린 무역자금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와 돈을 갑지 못한 홍순언은 공금횡령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죽는 날까지 옥살이를 해야 하는 홍순언,
그런데 마침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역관의 목을 베겠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죽음이 두려운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의 공금을 대신 갑아주고 죽음의 사행길에 홍순언을 대신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역관들이 큰돈을 융통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전기 역관은 관아에서 빌린 자금이외에도 인삼을 기본 무역자금으로 사용했다.
역관들에게 공식적으로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그 대신에 인삼장
사를 해서 번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한 번에 가져가도록 허용된 양은 인삼 10근이었다.
“
“조선시대 인삼 열근이면, 은으로 하면 250냥, 쌀로 하면 150가마,그때 150가마 하면 굉장히 큰돈입니다.
지금 돈으로 하면 2천만원 정도가 됩니다.“
-김성태 조합장, 강동시장 인삼판매조합.
국제무역은 역관들의 주업무이기도 했다.
결국, 역관들은 사행 경비를 위해 가져가는 인삼과 각종 관청에서 빌려주는 공금을 합쳐서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역관들은 이 무역을 통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가 되기도 했다.
“역관은 조선시대 유일하게 국가로부터 공인된 국제무역상입니다.
역관을 통해 모든 국제무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론 역관 개개인의 성향이나 사업적 수완에 따라 달라지겠습니다만 역관은 쉽게 막대한 자금을 접하고 만들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역관 중에는 조선 제일의 갑부라고 할 인물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이덕일 박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홍순언을 비롯한 역관들은 국제무역상이면서 전문외교관이었다.
모든 외교 실무는 역관들이 맡아 해야 했다.
통역이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전문적인 일들은 역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역관이 하는 일을 가벼운 일로 취급하고 역관은 “같이 설 수 없는 존재”라 여겼다.
작은 기예, 잡기, 가벼운 임무, 같이 설 수 없는 존재.
역관에 대한 차별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백패는 문과응시생들이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에 합격할 때 받는 문서이다.
그러나 역과 합격자는 급제를 할지라도 백패를 받아야 했다.
조선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가 홍패를 받았지만 역관을 천시하면서 문과 합격자와 구별하기 위해 백패를 지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까지 구별했다.
“조선시대 한양은 천계천을 기준으로 해서 북쪽을 북촌이라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북촌은 종친들과 고급 관료들이 살았고, 남촌에는 주로 선비들이 사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개천을 중심으로 중촌이라 하여, 전문기술관료들이나 아니면 역관, 의원들이 살았기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 이들을 보통“중인”이라 불렀습니다.“
-이상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홍순언이 살았던 보은단동도 중촌에 속해 있다.
“아버지는 홍겸이시고, 아들 홍순언, 홍수언 세 분 다 역관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남양홍씨 대종중 중앙종회.
역관은 대대로 역관직을 세습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역관이 되면 역관 이외에 다른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관은 오를 수 있는 자리에도 한계가 있었다.
역관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사역원의 정3품 부정(副正)이 역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사역원 부정(副正)-정3품
그러니 종2품의 우림위장에 역관인 홍순언을 인정할 리 없었다.
홍순언을 파직 시키라는 상소가 연이어 들어왔다.
“홍순언은 출신이 미천하여 왕친위군 장수에 합당치 않으니 바꾸소서.”
“홍순언은 서얼출신으로 남에게 천시당하니 바꾸소서.”
-조선왕조실록 1591년(선조 24년).
선조 17) 주청사 황정욱(黃廷彧)은 조선왕실의 종계를 고친 등본을 가지고 왔고, 1587년 (선조 20)에 유홍(兪泓)을 파견해 <대명회전> 원본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아직 황제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지 않았다. 유홍은 머리를 땅에 짓찧어 피를 흘리며 간청했다. 이에 감동한 명나라 황제는 <대명회전>의 조선종계 부분을 특별히 건내주었다. 그리고 1589년(선조 22)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와 宗系辨誣는 일단락되었다
3. 임진애란과 명군의 파병!
나라의 위기에서 역관 홍순언 다시 활약하다.
역관들의 업무는 사실 모든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고위관료들은 오로지 정책결정에만 관여했고 외교와 경제, 문화와 국방에 이르는 모든 실무는 역관들의 활동과 조언에 의존해야만 했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총 여섯 가지의 언어를 구사하 수 있었는데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오키나와어, 위그르어, 일본어이다.
정조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하는데 몽골이 망한지 오래인데 몽골역관을 왜 계속 두어야 하는가란 문제였고, 몽골이 언제 다시 부흥할지 모르기 때문에 역관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은 문치 못지않게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외교력이 중시 되었다.
이처럼 역관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다.
역관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좌우되던 그 때 다시 한 번 전문외교관인 홍순언이 활약 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이 상륙한 지 하루만에 동래성이 무너지고 20일 후엔 서울까지 함락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나라는 쑥밭이 되고,
임금이 치욕스런 피난을 떠나야 할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적은 해변을 따라 있는 모든 고을은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되니 조정에서는 부득이 도성을 떠나 왕이 피신할 론의를 한 결과 右議政 李楊元을 수성대장으로 삼고 商山君 朴忠侃을 경기 순검사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하고 명원으로도 수로 삼아 한강에 진을 치게 한 후 선조께서 여러 제상들에게 적을 물리칠 계략을 물으니 도승지 이항복이 먼자 아뢰기를 우리나라 병력으로는 왜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족하오니 다만 명나라에 청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는데 倭平秀嘉가 한강을 건너 도성을 점령하여 궁궐을 불살으고 오직 종묘만 남았는데 왜장 小西行長은 해서(海西)의 여러 지방을 거쳐 선봉대는 평양 대동강 남쪽 강변에서 육박해 왔으므로 임금께서는 尹斗壽,金命元, 李元翼으로 하여금 평양을 지키게 하고 崔興源, 兪泓, 정철 등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피난 하시었다가 다시 肅川으로 옮기셨다.
한편, 선조의 피난 행렬은 서북의 변방 평안도와 압록강 일대를 전전긍긍하고 의주에서 머물면서 압록강 거너 건주 여진집단을 통합한 여진족 누루하치가 왜군을 몰아내겠다며 지원군을 파견하겠다고 했으나, 그의 저의를 의심하고 거절하면서 여진족과 지척의 거리에서 명의 파견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오늘에 향락과 안일에만 일삼고 목전에 부귀와 권세만을 다투기에 골몰하던 정부에 대관이나 관리들은 그 마음이 해태할대로 해태하였으며 모든 행동이 부폐할 대로 부폐하였는 바 별안간 개미떼 같이 물밀 듯 침략하여 쳐들어 오는 왜적을 도저히 막아낼 역량과 계획이 막연 하였으므로 결국 선조대왕께서는 북으로 북으로 후퇴하시어 피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 임으로 개성, 평양, 영변을 거치어 의주까지 파천하시게 되었다. 그동안 왜적들은 어느듯 서울을 침범하고 뒤를 이어 송도와 평양을 차지하여 그 형세가 자못 위기일발인 국가 흥망지추에 도달한 것이다.
선조 임금은 의주 행궁에서 해궁 유지를 내렸다.
그 요지는 담과 같다.
행궁 유지(行宮 諭旨)
선조대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가 임금 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나만 존재하기를 도모하다가 하 번은 백성을 화합하는데 실수하고, 한번은 오랑캐를 방어하는데 실폐하여 국가를 잃고 서북 지방으로 옮기어 신의주에 있는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이 유허가 되고 민생이 어육이 돼 버렸으니 멀고 먼 푸른 하늘이어 이것이 우리에게 어찌함인가? 조가 오로지 나에게 있으매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서쪽 남쪽 지방이 아득하여 소식조차 상세히 듣지 못한다.
윤선각(尹先覺), 신립(申笠)의 군사가 용인 등지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 비록 배를 타고 다니며 군사를 거둔다는 말은 들리고 있으나 대중이 다시 흩어지매 다시 합하기란 쉽지 않으니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가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생각조차 갖지 못하였다.
그 무렵에 호남 선비 정현(정현) 등이 전부사 김천일(前府使 )의 상소문을 가지고수로와 육로를 거쳐 이곳에 도달하여 보고하기를 <전부사 고경명(前府使 高敬命)이 김천일로 더불어 의병 수천명을 규합하여 수원에 가서 진치고 있다.>하니 내가 깊이 아름답다. 내가 생각건대 충청도에서 좌우의 몇 개 고을로 지내던 도적을 함몰시키어 해변 일대가 마침 완전 복구 되었다 하니 앞으로 많은 의사들이 의병을 제창하여 임금 돕기를 고경명과 같이 싸울자가 없을까? 내가 깊고 결연히 생각하니 어찌 사민들이 나를 버렸을까? 내가 사민을 생각하여 구제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내가 왕위에 오른지가 거금 25년이다. 비록 어진 정치가 민간에 미치지 못하고 해택이 아래에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가 만물을 살피질 못하여 정치의 조처에 있어서 많이 잃었으나 본 마음인 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구제함에 뜻을 삼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자 매 근년 이래로 변방의 방어가 틈이 많고 군정(軍政)이 폐지 되었으니 돌아 보건데 성과 못이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기가 날카롭고 예리하여 가히 도적을 바어할 수 있다하여 중부와 외부지방을 경계하고 신칙하여 안전 방비를 더 한층 힘써 왔는데 실상 성은 더욱 높으나 지세는 더욱 낮아지며 못은 더욱 깊게 팠으나 민간의 원망은 더욱 깊어 갔으매 뽕잎처럼 떨어지고 기와장 같이 깨지어 이지경에야 이를 줄이야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궁중의 시끄러움이 조밀하지 못하여 민간에 작은 이익까지 그물질하며 형옥이 중도를 잃게 되므로원통한 기색이 평화를 방지하고 왕의 이들이라 하여 산택의 이익을 점검하고 사소한 민간들은 생업을 잃었기 때문에 원망의 소리가 사방의 먼 곳까지 통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은 의당 나를 원수로 삼을 것이다.
내가 장차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러므로 유사에게 명령하여 모두 파직하고 돌려 보냈으나 대체로 이런 등 등을 어찌 나로서 다 아는 바라 하리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역시 나의 허물이라 생각하다가 여기에 까지 이르게 되니 비록 뉘ㅣ우친들 따를 수가 있으랴.
차라리 내가 스스로 희생해서라도 천지와 종묘의 일백 신령 앞에 사죄할까 한다.
나의 손가락을 깨물고 뉘우침이 이와 같으니 거의 사민들은 나의 개과천선으로 유신정치를 다스려 나가리라. 허락해 줄까 한다. 나의 실수한 덕은 대강 열거하며 진술하였으나 지금 이러한 재난은 실지로 망동이라 하겠다. 벌레같이 준동하는 흉적들이 바로 명나라를 넘볼 계획을 가지고 나에게 길 빌려줄 것을 요구하므로 내가 의리로 항거하여 의척 하였더니 섬 오랑캐의 창자에는 우리의 큰 은덕은 잊어 버리고 작은 원망 맺을 것을 생각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종묘사직이 망하고 국민을 포기할망정 군신의 분수와 의리는 버릴 수 있겠는가? 천지신명이 밝게 보고 계시니 거의 큰 의를 우주에 밝히며 가슴을 해와 별 아래 폭로하여 위 아래의 천지신명에 부끄러움이 없을 뿐이고 한 결같이 근심만 할 수가 없으므로 명조에 가서 하소연한 바 황제가 나의 지극한 뜻을 살피시고 요동 총병관 지승훈을 보내어 1만 대군을 인솔하고 평양에 진공할 것을 허락하여 서울까지 이르면서 소탕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
또 호절에 주둔하고 있는 당 왜병 6천명을 인솔하고 아침 저녁으로 강을 건너온다 하니 명나라에서 구원의 소리가 들려오자 사민들은 의당 분발하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분개심이 솟아오르는 너의 많은 사민들은 자기의 할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로부터 조정의 덕택에 오늘날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나의 정치에 잘못을 용서하고 각자의 스스로의 용력 분발하기를 생각지 않을까. 이에 유념하기 바란다.
광분하고 있는 왜놈들의 쌓인 죄악이 이미 가득하여 하늘에서 주륙을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맑은 가을 계절에는 태백산이 바야흐로 높을 것이고 군사의 기세가 있는 곳에는 살벌한 기운이 순화되고 충의가 향해 가는 바에 무슨 일을 구제하지 못 하겠으랴.
크게는 공경명(高敬命) 등과 경기도에서 협력하여 서울을 수복하면 나는 수레를 타고 가서 환영할 것이고 작은 것으로는 왜적이 돌아 가는 길에 잠복했다가 공격을 벌이는데 혹은 앞길을 가로막고 공격하여 혹은 꼬리에서 공격하여 하나의 군마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한 즉 너희들은 살아서 부귀를 누릴 것이고 죽어서 아름다운 이름이 드리우게 될 것이니 돌이켜 보건대 위대하지 않겠는가?
지금 인성 부원군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 전라도 도찰사를 겸직하게 보내어 하여금 위에 덕의를 개유하고 군사의 기무를 총괄하여 독려하라 하였으니 너희들은 그 절도사의 지도를 받아 각각 과감하고 굳센 기백으로 임하여라. 용만(龍灣: 신의주)궁벽한 곳은 하늘이 다하여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고 땅도 다 되었으니 내가 장차 어디로 가며 인정마져 고갈 되었으니 의리만 생각나는 구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발동하매 변방 땅이 일찍 추워 진다.
저 장강을 바라보니 또한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돌아가려는 한가지 생각은 물과 같이 도도히 구비치는 구려. 이 교서가 도착하면 오직 너희 백성들은 그 반드시 나의 괴로운 뜻을 가련히 여기어 슬퍼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아! 하늘에서 이성(李晟: 선조)을 낳았으니 서울을 수복하는 날이 있기를 바라며 원릉(園陵)에 보고함이 결손이 없고 민간에서 가뭄에 구름과 무지게처럼 갈망하는 심정도 위로해 주며 나의 서리와 이슬의 고통을 모면할까 한다. 이와 같이 교시하니 생각하건대 마땅히 알아서 다할 것이다.(호산록:湖山錄)
임란사에 있어서는 <조선 왕조 실록>이나< 비변사 등록>,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 일기>, 사애 유성룡의 <징비록>등 관리들의 안목에서 쓴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백성등에 대한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임진난 때에 충청남도 지빙은 금산을 제외하고는 왜적이 침입하지 않아 평온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왔지만 홍성에는 뒤에 광해가 되는 세자가 많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상주하면서 전쟁의 뒤치다거리를 총지휘했던 곳이라는 점, 공주에는 명나라 장수가 많은 군병과 함께 진주해 있었다.
제봉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선조 23년(1590), 마지막 관직인 동래부사가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동래부사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서 임진왜란을 만난다. 1592년 5월 29일, 고경명을 비롯한 안영, 유팽로, 양대박 등 21개 지역 유생들이 군사를 이끌고 담양 추성관에 모인다. 이 모임에서 고경명은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다. 그는 단 위에 올라 늙고 병 들었음에도 대장이 되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고경명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전라도 각지에서 6천여 의병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1592년 6월 북상하던 고경명 의병은 전주에 이르러 관군이 임진강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6월 24일 각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들에게 격문을 보낸다. 이것이 말 위에서 쓴 그 유명한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이 격문은 당시 식자층을 감동시켰고, 호남의 열혈남아들을 고경명 휘하로 집결시켰다. 식자들은 심금을 울린 이 격문을 후대의 사람들은 최치원의 황소격문이나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으로 평가했다. 그 마상격문은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의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 틈을 타서 기어들어 하늘도 모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고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tfl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뿐, ...아, 각 고을 수령과 각 지방 인사들이여! 어찌 나라를 잊어버리랴? 마땅히 목숨을 저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으로 도와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나서고 혹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힘닿는 대로 모두 다 정의를 위하여 나선다면 우리나라를 위험에서 구해 낼 것인바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고경명 의병은 임금을 구하기 위해 북상 중 호남에 침입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금산의 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관군이 무너지면서 고경문군도 무너지고 말았다. 거병한지 한 달 여 만이었다. 고경명, 만약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동래부사로 있었다면 그는 동래에서 왜군과 만났을 것이다. 왜군과 만남, 그것은 고경명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장원급제 후 평생을 정치가, 학자, 시인, 으로 살아 온 그가 한달 여 동안 의병장이 되고 영원히 의병장으로 불리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서신에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가장 큰 공은 남도 사람들” 화자되는 “약무 호남 시무국가(若無 湖南 是無國家0가 그것이다. 남도는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의병 봉기지 였다.
임금이 義州로 파천(播遷)되자 李恒福, 李德聲은 행궁에 들어가 明나라에 救援兵을 請하러 보내자고 아뢰었다.
(마침 明나라가 天子의 誕辰이 가까우니 聖節使를 급히 보내여야겠다)고 알외니 황연히 깨닫고 임금은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방물이 없다고 걱정이셨다.
李恒福은 (避難 中이오니 무슨 道理가 있사오리까? 글로 事情을 말씀하여 보내시는 것이 도리어 有利할 점이 있을까 합니다.)고 말씀 올리니 그 말이 옳다고 하여 柳夢昇을 聖節使로 보내도록 했다.
聖節使 柳夢昇이 떠나는 날 임금은 左右를 물리치고
그에게 (朝鮮王이 事不如意 하면 明나라로 들어 갈터이니 天子께 잘 말씀하여 內附을 允許토록 당부하라)하므로 柳夢昇은 앞이 캄캄하고 눈물이 비오듯 했다.
이때 李恒福은 柳夢昇에게 작별 人事를 하고 나서 明나라에 들어가면
唐陵君이 계실터이니 잘 일을 만들라고 付託하여 보냈다.
그 사이에 石星은 兵部尙書로 승진 했다.
唐陵君 洪淳彦은 李恒福과 李德聲과 議論을 하고 個人 資格으로 兵部尙書 石星을 찾아 보게 했는데 이 所聞이 벌써 石星의 귀에 들어가 석성은 보교와 護衛軍을 通州까지 보내어 맞아 들였다.
유씨 夫人은 侍女를 앞세우고 쫓아 나오며 (아버지!)하고 소리를 외쳤다. 반가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하고 앉은 後에 먼저 侍郞에서 兵部尙書로 승진된 致賀를 하고 진수성찬(珍羞盛饌)으로 점심을 먹고 난뒤 지난 이야기와 壬辰倭亂 이야기를 했다.
유씨 夫人이 男便 石星에게 (아버님의 나라는 倭敵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義州까지 몽진(蒙塵)을 하였고, 百姓은 모두 魚肉이 되었다는 구려)하고 말하자 石星도 그 말을 받아서 (참 그렇다고는 합니다마는 明나라 朝廷에서는 義州에 있는 임금은 가짜 임금이고, 朝鮮은 倭敵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明나라를 쳐들어 온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고 하자 唐陵君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大監, 倭敵이 남쪽에 있는 明나라 장사꾼을 買收해서 퍼뜨린 거짓 宣傳입니다.
그러자 石星도 정색을 하며 (허허 大人 倭敵의 宣傳이란 말이 안되오. 그렇게 쉽사리 쳐올라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倭敵과 배가 맞았으니까 그렇지요.)한다.
그러나 唐陵君은 朝鮮의 前後 事情을 자세히 말했다.
石星은 한참 말을 듣고 있다가 (그렇다면 임금이 義州까지 蒙塵을 했는데, 臣下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援兵을 請할 사신도 보내지 않고 있단 말이오.) 한다. 唐陵君이 事情 이야기를 하니
石星도 (大人의 말씀에 어디 거짓이 있으리오마는 내가 兵部尙書라고 해서 나랏 일을 내 마음대로 處理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그리고 또 지금은 大人이 個人 資格으로 兵部尙書를 찾아와서 救援兵을 請하는 일은 시리에 조금 어긋 납니다. 그러니 빠리 正式 使臣을 들여 보내도록 주선을 하십시오.그러면 내가 힘이 자라는 데까지 일이 되도록 알선을 하리다.) 이 말을 고맙게 생각하고 唐陵君은 (그러면 곧 使臣이 들어오게 하겠소. )하고 자리를 일어 섰다.
이 때 마침, 난리가 나기 전에 使臣으로 왔다가 아직 돌아 가지 못하고, 玉河館에서 묵고 있던 신점(申點)을 唐陵君은 찾아가서 前後事實을 말한뒤, (곧 돌아가서 李恒福, 李德聲을 만나 靑變使를 빨리 보내되 倭國의 길 빌리라는 國書와 倭將의 講和要請 便紙를 가지고 오게 이르시오.)하고 일렀다.
申點은 駿馬를 타고, 擺撥을 놓아 義州行宮으로 가서 兵曹判書 李恒福을 찾아서 전갈 했다.
兵曹判書 李恒福, 左議政 尹斗壽와 함께 御前으로 가서 唐陵君의 말을 아뢰니 임금은 깜짝 놀라며 기쁜 마음으로 (그러면 어서 사신을 정곤수로 보내도록 하라),그리하여 鄭昆壽는 請兵陳奏使로서 倭敵의 書類를 가지고 晝,夜로 말을 달려 北京에 當到하니 唐陵君이 나와 맞았다.
이튿날 정곤수는 당릉군을 따라 禮部에 가서 정문(呈文)하고, 兵部에 가서 兵部尙書 石星을 만나 禮를 마친 뒤 請兵秦書와 倭敵의 書面을 내 놓고 물러 나왔다.
石星은 이것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御前 會議를 열어 朝鮮에 救援兵을 보내는 일을 議論하는데,
“조선과 왜는 왜국입니다.”
“왜국끼리 싸우는데 우리 명나라가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압록강을 수비하면서 형세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선이 갑자기 새처럼 숨는 것은 분명히 스스로 초래한 재앙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왜국까지 가서 돕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조선을 돕자고 말하는 이는 오직 석성 한 사람 뿐이었다.
大臣들은 모두 反對 하므로, 병부상서 석성이 아뢰기를
(조선은 중국에게 왜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정은 우리의 사정입니다. 만일 왜적이 조선을 점령하게 되면 요동을 칠 것이고, 또 나아가 사내관에 이르면 북경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는 것은 조선을 위하여서만이 아니고, 우리 명나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요동은 북경의 팔 다리와 같고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와도 같습니다. 대명건국이백년 동안에 복주와 절강에는 물길을 통하여 왜적의 근심이 끊일 사이가 없었지만 요동과 천진에는 왜적의 근심이 없었음은 조선이 명나라를 위하여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번 왜적이 조선을 침범한 것도, 우리 명나라를 치려고, 길 빌리라는 것을 반대하고 막다가 화를 입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번 청병진주사가 가지고 온 왜국의 국서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를 위해 희생 당한 나라를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達丹과 싸우고 있는 것은 미구에 개선할 것인즉 먼저 조선에 총포와 화약을 보내고, 나중에 溟河에서 李如松이 돌아 오거든 그 때 그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왜적을 무찌르게 함이 옳은줄로 아뢰오.)고 하니 처음에는 反對하뎐 臣下들도 事理에 맞는 말이라 모두가 首肯을 했다.
皇帝께서도 石星의 말이 옳다고 하며, 곧 朝鮮에 援兵을 보내라고 承認을 내렸다.
그러나 명나라는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며 압록강을 건너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여 과거 사신을 따라 조선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송국신으로 하여금 선조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조선에 군대를 투입했다.
임진년에 명나라가 군사가 우리나라로 나오게 된 것은 그 공이 오로지 석성 한 사람에게 있었으니, 은공은 오직 석성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심유경은 병부상서 석성과 어양절사 출신으로, 석성이 신종에게 주청하여 심유경에게 신기 유격장군을 제수시켰으니 그것도 결코 우리나라를 위해서이지 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양에서 용만(龍灣)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므로, 만일 심유경이 날짜만 약속해 놓고, 부동하지 않았던들 왜는 한 걸음 더 들어오게 되고 대가(大駕)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주상이 이미 나라를 버리고 가게 되었다면 민심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명나라 조정에서는 명나라로서는 한 외변을 위해 재력을 탕진할 수 없으니, 마땅이 조선국을 둘로 나눈 다음 적을 막을 만한 자를 골라서 맡겨주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논이 많았다.
이는 명나라로서는 좋은 계책이었다.
그 때 만일 석성 같은 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다투지 않았다면 이 의논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그의 은공이 망극할 만하다.
“명나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
“조선에서 길을 빌려서 명으로 넘어 간다”는 최종 목표를 알고 있었지요.
어차피 토요토미의 공격에 최종 목표가 명이라고 한다면 조선에 들어가서 미리 막는 것이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전략적인 구상을 서두른 것입니다.
-한명기 겨수, 명지대 사학과.
석성의 주장은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였다.
일본이 만일 조선땅을 점령하면 그 다음은 명나라로 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데 주저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명나라에서는 왜군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동시에 조선도 함께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이 왜와 함께 중국을 치려 한다는 소문이 요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산해관에 홍순언이 도착했을 때
“너희 나라가 왜놈들과 함께 배반을 한 주제에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느냐?.
명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욕을 퍼부었다.
명은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다.
송국신(명관리)-“그대의 나라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말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팔도의 관찰사 중 누구 한 사람도 말하는 이가 없고, 팔도에서 누 구 하나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 없소?.
이것은 명에 대한 음흉한 반역이 분명하오.
제가 일찍이 국왕을 뵌 일이 있기 때문에
국왕이 실제로 피난한 것인지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짐작해 보면 왜적들은 임진란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첩자들을 동원하여 명나라 남부 지역, 복주와 절강, 요동 일원에 까지 거짓 정보를 흘려 명나라와 조선을 이간질하는 선무 공작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며의 援軍이 오기를 기다린 宣祖로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朝鮮으로서는 明의 도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명나라 兵部尙書 石星이 朝鮮에 忠誠을 아끼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唐陵君의 積德이 아니었다면 生覺조차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홍순언은 여인의 사정만으로 측은지심을 내었겠는가?.
거기에는 유씨라는 여인의 어떤 비밀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유씨라는 여인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유씨의 아버지는 항주인으로 호부시랑을 했던 사람이다.
유씨의 어머니의 증조 할아버지 휘지께서는 명황제 영종이 즉위전 세자 당시 태자태사를 하였는데, 태자는 궁녀 원씨를 총애하던 중 영종 황제로 등극하엿다. 그러므로 원씨는 황후가 되려는 망상으로 측근 간신들과 역모를 하여 정실을 내쫓으려 하니 영종도 이에 호응하여 종묘사직이 풍전등화가 되었건만 조정대신들은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이를 막지 못할 때 오직 태자태사 만이 분연히 일어나 어지러운 조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충성심으로 황제께 직접 충간을 하니 영종은 오히려 공을 책하여 혹형으로 다스리고, 투옥시켰다. 그러나 조금치도 굽히지 않고, 혈서로 一片丹心 이라고 써서 충간을 올린다. 지금까지 완강했던 영종도 스승님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그제서야 깨닫고, 마침내 조정은 위기 직전에 화를 모면했다. 영종황제는 태자태사를 옥에서 방면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태자태사의 충성심을 치하하고,
(공은 一片丹心이 아니었더라면 명나라는 망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片자를 따서 성으로 사용하라,)고 사성을 했다.
하여 휘지공이 편씨의 원 시조가 되었으며, 유씨 부인의 할아버지는 한림원 박사 절강 도지사를 했으며, 유씨 아버지는 호부시랑을 하였고, 큰오빠는 병부랑군문교위를 지냈으며, 작은 오빠는 이부시랑을 역임할 정도로 명나라에 명문가 출신이었으니,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랐음이 짐작된다. 그 기품과 몸에 베인 인격에 조선 역관 홍순언은 감동하였을 것이고, 결국, 석성도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조선의 은인 홍수언을 돕고 그 책임으로 감옥에 갇혀 분사한 것이다.
홍순언이라는 인간의 가엽고 불쌍한 여인을 보고, 측은지심을 낼 수 있었던 인격, 유씨 부인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갑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 석성이라는 남자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우리 조선을 구하였던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순언은 가진 돈을 털어 무기를 구입한다.
명에서 반출이 禁止된 武器들이었지만 石星의 許諾이 있었다.
활을 만드는 궁각(물소뿔)1.308편과 화약의 재료인 염초 200근을 구할 수 있었다.
結局, 明은 朝鮮에 派兵을 하게 된다.
壬辰亂 明나라 動員군의 內容을 살펴 보면
壬辰亂 明나라 動員軍 四萬 三千名
提督 寧夏侯 李如松
經略都督 宋應昌
先鋒大將副總兵 査大受
左協大將 李如栢
副總兵 任自强
參 將 李 寧
遊擊 葛逢夏
右協大將 張世
總兵 吳維忠
參 將 趙之牧
````` 尙志
陳邦哲
谷 遂
祖承訓
中軍大將 楊 元
副總兵 楊有翼
王維貞
參 將 李如梅
李如梧
楊召銧
神機遊擊將軍 沈維敬
副官 沈旺嘉
別隊遊擊將軍 片碣頌
副總兵 社師忠
李芳春
施文用
運糧使兼都總將 千萬里
總兵把總 張海濱
遊擊把總 徐 鶴
旗鼓官 韓宗功
李奉陽
贊劃官 劉 黃裳
遠 黃
督飼官 維新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갔을 때도 홍순언은 선조를 수행했으며 선조가 이여송을 만나는 자리에도 있었다. 그만큼 풍부한 경험과 관록을 지닌 역관도 드물 것이다. 선조의 신임도 두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장에 돌아온 홍순언은 통역관이 되어 전장에서 이여송을 따라 다녔다.
홍순언이 이렇게 역관으로 통역 이상으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의 선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금을 써가며 구해줬던 여인이 명나라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던 병부상서 석성의 후처가 되면서, 그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1592년 7월 17일 명의 1차 원정군 요동도사 조승훈이 보병 5천명을 거느리고 바로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성에 육박한 후 곧 칠성문을 공격하던 중 史儒가 선봉장으로 먼저 오르다가 탄환에 맞아 죽고 載朝昇, 張世忠, 馬世隆 등도 모두 전사하고 조승훈만 겨우 살아 남게 되었다.
조승훈의 패전 소식에 다금해진 명은 병부시랑 송응창을 요동방어를 위한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병부상서 석성은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새로운 병력을 조선으로 보내기 위해 응급조치로 일본인들과 도자기 무역을 했던 심유경을 조선으로 보냈다.
심유경은 능수능란한 허세로 소서행장을 구워 삶아서 9월 1일부터 50일 기한으로 휴전을 이루었다. 당시 왜군이 처한 상황도 열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1592년 12월 명은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을 사령관으로 지명하여 4만 8천명의 2차 지원군을 조 선에 파병한다.
안괄은 이여송장군의 해상 통로를 안내하라는 책임자가 되어 군인 10여명을 인솔하고 대산의 방목장 송중손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면서 사냥질이나 하고 술 마시기로 일삼고 안내하는 책임도 태만히 하여 거행하지 않았다. 뜻밖에 일어나는 일도 미치지 못 하였으며 타고 다니는 배까지도 높은 곳에 매어 두고 친히 군사를 인솔하고 아랫 사람들에게 치우쳐 명나라 장수에게는 따르지 않으니 이여송장군이 크게 노하여 곤장 40대를 때리고 즉시 돛을 달고 남하하다가 30여척의 배가 안면도에서 침몰 1만명의 군사가 모두 함몰한 일이 있었다.(1597년 3월 선조 30)
편갈송 장군은 어양총절사로서 군무총경유격장이 되어 이여송 제독의 관하에 소속된 특별부대 이만명과 친병을 인솔하고 평양성에 도착하여 張世o 칠성문을 이여백은 含毬門을 각각 공격하고 편갈송은 駱尙志와 더불어 보통문을 공격하여 적병 천이백팔십오명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왜장 小西行長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버리고 도주 하였다.
이 때 편갈송 장군은 어양별대 이만을 거느리고 진중을 왕래하며 유격전을 벌이니 백전 백승의 전과를 올리고 작전 참모로서도 활약이 뛰어났다.
다시 진격하여 개성을 거쳐 한성을 수복한 후 작전 계획을 세운 즉시로 분발하여 적을 치고 합력하여 싸웠다.
1593년 4월 18일에 왜적은 왕성을 버리고 달아나 편갈송은 군사를 지휘하여 한강을 건너 남진하고 한강 이남 천여리 땅을 모두 수복하엿으며 다시 이여송 제독과 더불어 경기도, 경상도, 황해도등 3도를 두루 돌아 적을 철저히 소탕한 후 10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개선 하였다.
이여송 장군은
그러나 백제관 싸움에서 패전한 후로 화의 교섭위주로 활동을 하다가 명으로 돌아가 1597년 요동 총병관에 임명되었으나 토번의 침범으로 전사하였다.
현재 경남 거제시의 성주이씨가 이 여송의 자손들이다.
여기서 잠깐 편갈송 장군은 누구인가?.
명나라 절강 출신으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고종 매부가 된다.
석성은 편갈송 장군을 전투에 참전시켜 실전 경험을 쌓아 등요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편갈송은 임란 당시 대명국어양총절사(어양은 명나라에 있는 지방의 이름이다. 현 하부성 밀운현의 한 고을인데, 옛날 주나라에서 속해 있던 고죽국이 있던 곳이며, 후에 또한 당나라의 발상지가 되었다.
옛고죽국의 고죽군에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두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효자이었고, 총명하여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아니라 또한 절개가 굳어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주무왕이 약소국 연나라를 치려고 할때에 연나라를 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충간을 했으나 듣지 않자 “너의 녹을 먹지 않겠다”하고 수양산 속으로 들어가 고사리 나물을 캐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 뜻 있는 유생들이 이 어양에 와서 이제조를 짓고, 제사를 지내며 백이, 숙제를 추모하고 학문과 무예를 닦아 국가 유사시는 결사대(관군이 아닌 별대(別隊)를 편성하여 황실을 지킨 친위대 역할을 다하기 때문에 절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여기서 우두머리를 총절사라고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모인 절사들은 남부지방 특히 절강에서 온 선비들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의 병부상서 석성, 외교에 능했던 심유경, 마귀 제독등이 모두 총절사 출신이었으며, 편갈송절사는 당시 어양총절사이었다. 그리고 어양절사 출신이 국가 요직위에 많이 등용되는 등용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왜유격장군으로써 참전하여 왜적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이 점령하고 있는 평양성의 난공불락 보통문을 편갈송장군이 격파한 혁훈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는 결정적인 교두보를 만들었다. 개선 귀국한 후에 또 저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재위동원마귀장군을 제독으로 편갈송장군을 아장제독군문섭병부상서겸 중군 도독으로 도임되었다. 차마제독휘하 좌군, 우군의 남원 실전으로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 중에 편갈송장군의 지략으로 은진, 천안 소사평에서 대첩을 이루고,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 승승장구하여, 울산 서생포에 이르니, 왜적의 총집결본거지 도산옹성이 또한 난공불락이라 급기야 적진을 포위하고, 장기작전으로 왜적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위급하게 된 왜장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은 간계를 써서 명군경리양호에게 많은 금괴를 내놓으며, 거짓 항복을 했다. 양호는 이에 속아서 모든 군사들을 푹 쉬게 하였으니 적은 우리군사들의 정신이 해이해진 틈을 이용하여 맹고역을 해왔다. 여사돌발사태로 인하여 조선군 명군이 합세하여 분전했으나 이때 조선군 장수 정기룡장군이 왜적에게 포위되어 기지사경(幾至死境)으로 고전하는 것을 목도한 양호는 마귀제독과 귀속말을 하고 함께 도주했다. 이를 본 명군들도 슬금슬금 달아났다. 오직 편갈송장군은 홀로 잔여명군 중에서 추종자장졸 약간명과 더불어 분연히 적진으로 돌격하여 격전 끝에 정기룡장군이 구출 되었고, 왜적도 격토 되었다. 그길로 정장군은 군본부가 있는 경주로 가서 유성룡, 이덕성, 이원익, 권율 등에게 편갈송 장군의 공훈은 한마디도 없이 명군의 허물만 지탄하여 장계를 올리니 마귀, 양호는 즉각 파면이 되고,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양호는 주획 정응태로 하여금 본국에 밀사로 보내어 황제께 무주하여 편갈송장군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만 무사히 귀국하였다.
유독 편갈송장군은 이런 정상도 모른채 추종자 장졸 약간명과 더불어 끝까지 서생포에서 채류하면서 향민규휼에만 진력하였으며, 그 은덕이 너무도 고마운 나머지 그곳을 지금도 울산 서생진 도독동이라 불리어 지고 있다 한다. 도한 그 주민들은 창표당(蒼表堂)이라는 당집을 지어 놓고음력 정월 보름이면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편 편갈송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며 만사를 체념하니 기추종자 부하들마져 모두 귀국시킨뒤 남금오산으로 들어가 은적하였다 한다.
그에게는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포(山浦)등 세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귀국하지 않음으로 조선에 건너와서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명나라 절강성을 닮은 곳을 찾아 후일 풍세와 풍원은 나주군 동강면 곡강 근처 운산리에 자리 잡고, 막내 산포는 전북 만경 뜰에 자리 잡아 번성하였으며 지금은 전국에 이천여 가구로 반창했다. 그후 후손 중에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신 창의사(倡義使) 은림공(隱林公)의 풍공 위열(豊功偉烈)도 있었으며, 왜정 때는 독립 운동 때 순국한 의사 애충공의 공열도 있는 우리나라 삶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명나라 군 편성을 보면 석성의 고향 명나라 남부 출신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이여송, 이여백, 이녕, 갈봉하, 이여매, 이여오, 심유경, 심왕희, 편갈송 등이 남부 출신이고, 북부 출신은 양원 , 양유익, 양소광, 등으로 임진란에는 석성의 남부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웠으나 전쟁의 책임을 물어 남부 출신 병부상서 석성, 신기유격장군 심유경이 제거되자 정유재란이 끝나고, 북부 출신 양원 세력들이 득세한다.
임진란이 끝나고 조선 조정에서는 군비도 조정하지 않고, 서인, 동인 당파싸움으로 론공행상만 일삼고, 왜적이 재침하니 의병은 사방에서 일어 났으나 조정에서는 심유경이 왜적과 내통해서 임금을 속인 것이라 하여 다시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때 명나라에서도 북부 사람들은 성질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아 병부상서 석성과 심유경을 시기 하던 중에 조선국의 구원병 요청사가 들어오니 좋은 기회라 하여 山東 按撫使 李思孝, 薊遼督撫 李化龍, 科臣 徐成楚, 등 북부 인사들이 들고 일어나 (심유경은 임금을 속이고, 왜적과 내통한 매국노이니 중형을 내리고, 병부상서는 나라를 그르친 자이니 관직에서 추방하여 유배시키라)는 상소문이 빗발치듯하고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황제는 하는 수 없이 심유경을 처형하게 하고. 병부상서 석성은 옥에 가두게 했으나 석성은 옥중에서 분통이 터져 분사하고, 말았다.
동천공의 목사로 서애 유성룡 선생이 한탄하였으며, 계묘년에 선조가 평양에 무열사(武列祠)를 세워 사액(賜額)을 내리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심유경은 병부상서 석성과 어양절사 출신으로, 석성이 신종에게 주청하여 심유경에게 신기 유격장군을 제수시켰으니 그것도 결코 우리나라를 위해서이지 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양에서 용만(龍灣)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므로, 만일 심유경이 날짜만 약속해 놓고, 부동하지 않았던들 왜는 한 걸음 더 들어오게 되고 대가(大駕)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주상이 이미 나라를 버리고 가게 되었다면 민심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명나라 조정에서는 명나라로서는 한 외변을 위해 재력을 탕진할 수 없으니, 마땅이 조선국을 둘로 나눈 다음 적을 막을 만한 자를 골라서 맡겨주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논이 많았다.
이는 명나라로서는 좋은 계책이었다.
그 때 만일 석성 같은 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다투지 않았다면 이 의논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그의 은공이 망극할 만하다.
정유재란 발발
잔악 무도한 왜적들은 참패의 원한을 품고 돌아간 후 사년째되는
1597년에 왜적이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 형세가 사년 전에 비하여 더옥 강폭 하였다.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해군에 신이라고 까지 위명이 높으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고금독패인 거북선을 편대하여 바다에 출몰하는 왜적 함대를 여지없이 격파 하였으므로 전일과 같이 함부로 침입은 못하였으나 기세와 형편을 살피어 상육한 왜적은 또다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삼도를 횡행 하면서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불질러 그 참혹한 참경을 참아 형언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변 고을에는 火焰이 충천하고 포성이 천하를 진동하며 가옥을 불사르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몰살시켰다.
선조는 유성룡과 權 恢, 鄭期遠 등을 청원사로 삼아 급히 명나라로 보내 구원을 또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문무 관원들이 상의 하기를 어찌 명나라 대군을 두 번이나 출동하여 해외의 변방을 구원할 필요가 있으리요.
하면서 우리나라 청병을 거절하니 유성룡이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밤낮을 통곡하니 보는 사람마다 감탄해 마지 않았다.
權 恢, 鄭期遠은 午門 밖에 나가 머리를 치며 울면서 호소문을 병부에 제출하니 글의 뜻이 너무나 간곡하여 천심을 감동케 하였는데 병부상서 석성도 이에 감복되어 조선을 구원할 것을 더욱 주장하니 명나라 황제는 급히 조선을 구원하라는 칙서를 내리고 楊鎬를 경리사로 삼고 마귀를 어왜대장군으로 삼아 다시 편갈송을 경락제독중군섭병부상서총독군문으로 삼아 군사 오만명과 장관 팔십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느려고 할 때 麻貴와 楊元이 강가에 머물며 강을 머물며 거너려 하지 않으므로 유성룡,權 恢, 鄭期遠 등이 진전에 꾾어 앉아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위급함이 조석간에 달려 있다”고 애걸하니 편갈송은 그 충성된 말에 감동되어 마귀 제독에게 권유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강을 건너게 해서 즉시 달려 왕성에 이른 후 정예부대로 왕성을 친히 호위하는 한편 제독과 상의하여 여러 장군을 각 지방의 요충지에 파견하여 방어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사기는 점점 왕성하여 전라병사 이복남,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노, 구례현감 이원춘, 산성별장 趙璥 등이 이미 적병에게 피살 되었다.
편갈송은 전략을 다시 세우고 적의 동향을 탐지함에 있어 귀신과 같으므로 마귀 제독이 크게 칭찬하여 모든 군무를 편갈송에게 위임하니 편갈송은 사전에 방비책을 세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공은 여러 자운들이 감히 따를 수가 없었다. 남원 전투에서 패전한 후 왜적은 공주와 천안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바로 달려서 稷山 素沙坪에 이르게 되니 왜적의 사기는 더욱 치솟았다. 편갈송은 장차 적병이 이곳을 경유할 것이 틀림없다는 정보와 예칙을 밝히신 순간 신속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철기 삼천명에 맹장 용장을 동서 좌우에 메복시키고 적의 패주를 예칙하고 요로에 까지 군사를 보내어 배치하고 전초대 삼백명은 제 일선에 돌격 하도록 요소 요소에 메복한 후 적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는r그때였다. 철모르고 몰려 들어오던 왜적은 그 수요 십만이 훨씬 넘고 加藤淸正이라는 적괴가 인솔하여 그 기세가 등등하게 풍우와 같이 몰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정보를 들은 편갈송은 적당한 시각에 있어 신속히 공격에 명령을 내리자 요지에 매복 하였던 맹장과 용장들은 삼백의 유격대와 합세하여 그 형세 백척 폭포가 쏟아지는 듯 총공격은 개시 되었다. 뜻밖에 맹격을 받게된 왜적들은 비록 발악적 최후 힘을 다하여 대항 하였으나 옛날에 초패왕을 잡으려고 회음하 구리산 아래 팔진도를 베풀고 초한승부를 겨룰때와 같이 전고는 천지를 움직이고 포성은 산악이 문어지는 듯 창검이 이르는 아래 적의 주검은 뫼와 같이 쌓이고 스러지는 적 흐르는 피는 냇물과 같았다.이윽고 적의 흔적은 자취가 살아지고 적막한 산야에는 오직 날아드는 까마귀 때만이 지저길 뿐이었다.
이 소사평 격전이야말로 육전으로서는 임진이래 초유의 대 격전이었으며 이 사움에서 여지없이 참패를 당한 악독한 왜적들로 하여금 또다시 제기의 오기를 멸살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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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 피는 흘러 내를 이루고 적병의 사체는 팔십구십리에 까지 쌓였으며 포총성은 삼백리 밖까지 들리며 승전의 북소리가 거듭 울려 퍼지니 왜장 加藤淸正은 겨우 몸만 빠져 달아 났다.
선조 31년 12월에 편갈소은 마제독과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 가서 경주에 진을 치고 백전 백승 하였다. 선조 32년 9월에 울산에 진주하여 우선 군병 오천명을 선봉으로 삼아 세 성을 더 쌓고 군비를 백배로 증강하였다.
그 때 전라 창의사 김흔(金昕)이 진중에 들어와 군무를 도울 뜻을 밝히므로 군무를 맡기고 군중에 두었다. 울산 서생포에 이르러 부총병 등자룡과 조선 통신사 이순신과 더불어 침착하게 작전을 지휘하며 모두 합세하여 적을 전멸시켜 남해 일대를 평정시켰다. 편갈송은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전적이 있었음을 명나라 서나 조선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공훈과 명성은 대단했다. 울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 전세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생포의 층암을 깍아 승첩비문을 새겨 놓고 있다.
그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황제에게 아첨하기를 일삼고 선량한 공신을 모함하여 나라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지 자기의 복리만을 도모하려는 부충음흉한 간신배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정응태라는 자가 있어 백방으로 그의 흉계를 노리고 있던바 편갈송 공적이 크고 영명이 조야에 널리 퍼지는 것을 놀라며 시기하여 황제께 근거없는 거짓말과 허무한 모함과 중상을 함부로 한다는 소식을 들은 편갈송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개연히 말하기를
“내 비록 옛날 위나라 신능군과 같이 절부구조의 신의와 용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유구한 역사의 빛이여 형제와 같은 이웃 나라에 시급한 위난을 구원고저 출정 만리(出征 萬里)에 시석풍진(矢石風塵)을 무릅쓰고 지력을 다하여 싸워 이겼으니 오늘에 나로서는 대의 충절에 사사명을 다하였음은 천하가 공인하는 바이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어지러운 조정에서는 벼슬자리에 서지마라.亂政不居)는 훈계와 같이 간신과 소인배들이 불의에 권세와 비분에 사욕을 도모하려고 서로 다투어 예의와 기강이 이미 어지럽게 된 그 조정에서 내 어찌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하랴!
차라리 금수강산인 명랑한 이 땅에서 나무하고 고기잡는 대자연 속에 있어 마음대로 여생을 즐기는 것이 도리어 쾌활할 것이다.
아! 대장부 세상에 나 큰칼 높이 들고 천하를 호령하여 戰必勝 功必取하고 出將 入相에 부귀공명도 한때에 긴-꿈이로구나!
내 본래 산수에 청담한 락을 좋아하여 蜃氣樓와 같은 紅塵에 迷夢을 깨이는 때에는 나머지 생애를 풍월과 더불어 같이 하리라는 것이 평소 원하는 바이든 지금에 그 무엇을 주저하랴! 오직 나는 이 강산 이 땅위에서 나로부터 내 자손만대에 영원히 누릴 낙원에 터를 개척 하리로다.“
그후 곧 용포와 금포를 벗어버리고 경자년 춘삼월 십오일을 택하여 경주 금오산에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여 바로 그곳에 은거하는 동시에 풍진동고에 친우이었던 시문용, 천만리, 장혜빈, 서학동 제공도 편갈송의 개결한 의지에 감복하여 자최를 같이 하였다.
기해년 9월경에 우리나라 선조대왕은 월사 이정구를 변무사로 하여 수원들을 데리고 명나라에 보내어 편갈송을 비롯하여 무고 받은 사람들의 억울한 모함을 변명하게 하였다.
사절단 일행은 곧 명나라 황제에게 들어온 사명을 전달한 바 정응태등 간신들이 무고한 내용을 변명하는 소장을 써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그날밤으로 쓰게 되었는데 간신들의 음모와 농락으로 촛불 하나 없는 방에서 소서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위하는 성열이 지극하고 겸하여 넓은 학문과 지식이 투철하신 분들이라 비록 어두은 가운데서라도 조금도 서슴치 않고 완초되고 한석봉부사의 총명한 안력과 겸하여 그의 애용하는 안경이 능히 어두운 가운데서도 환히 볼 수 있는 보물이었으므로 조금도 어려울 것 없이 완전히 정서되어 그이튼날 새벽 조회 때에 황제께 어김없이 올리었다.
문장이 찬란하고 사의가 곡진한 것을 보고 겸하여 어제밤 캄캄한 방에서 이글을 쓰게된 경과를 자세히 들은 황제는 크게 놀라는 반면 감탄하기를 마지 하지 않았다.
황제는 즉시 정응태 등을 함부로 무주한 죄과를 엄벌하는 한편 편갈송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에게 사과와 동시 원직에 복귀하게 하고 공훈록에 등록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선조께서 진중의 편갈송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진주와 사천 일대의 왜적이 협천으로 많이 모여 드러 산과 계곡에 출몰하면서 영호남 일대에 널리 퍼져 있어 조선의 군사로는 감히 방어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 한번 승전하므로서 영외의 잔민들로 하여금 병화를 면케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의 선전이 우리나라 군사의 사기를 왕성케 하였으니 후일 적을 소탕함에 있어 반드시 이 一승이 승전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삼가 사자를 보내어 문안을 드리며 아우러 그 노고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다시 진중으로 선조는 揭文을 내리기를
“금일 대인께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에 나와서 흉폭한 왜적을 토벌한 공노는 과인이 어찌 다 구구히 말씀드리오리까. 鎭守地가 畿左로 나누어져서 적의 요충지를 제어하고 부지런히 애써 힘쓰시고 끝없이 공헌과 염려를 다하여 주심에 대하여 감사와 문안을 드립니다.”하였다.
이 두 번의 편지를 참고컨대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저버리고 싸운 공훈을 알 수가 있다.
이런 큰 전공을 명나라에 상정도 못하고 포상마저 받지 못한채 억울한 격분을 이길 길없이 戰陣中 산속으로 은피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로지 편갈송을 시기하는 정응태의 모함이 원인이었다.
편갈송은 한탄하며 동료 施文用, 社師忠, 千萬里, 張海濱, 徐鶴과 같이 경주의 금오산으로 들어가서 樵山魚水로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동정승찹비문
저유년 봄에 섬 왜적들이 또다시 준동하여 조선을 침범하게 되니
천여리 땅이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어 온 천지가 피바다가 되었다.
황제께서 대노하여 대군을 출동시켜 조선을 구원하라는 특명을 내리셨다.
이 때 欽差經略....행병부상서 마귀장군에게 용장 삼십육명과 철기 일천 및 기병 일만 육천, 투창수 팔백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조정에서는 한편 우검 도어사 양호를 경리로 삼고 병부상서 나게를 도총제군문으로 삼아 함께 압록강을 건너 삼로로 분진하여 서쪽 남쪽을 공격하니 백전 백승의 기세로 멀리 진격해 내려와 울산에 이르러 도산을 포위하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 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니 군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하여 군악을 울리면서 적에게 도전하니 옛날 准水의 전투와 적벽의 전승도 이 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아 중국의 군사를 만리 밖에 출동시켜 적을 소탕하고 작은 나라를 구한 적은 상고로부터 없었던 일이다. 조선을 회복시켜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직을 길이 보전하여 왕업이 무궁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하고 장한 일이로다.
아아 황제가 두 번이나 군사를 발동하여 흉적을 격파한 결과를 金銀 玉d과 군사와 말의 소모가 한량없이 많아 이루 헤아릴수 없는 정도였다. 이러한 뜻을 써서 層巖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銘에 이르기를황제의 망극하신 은혜와 군사들의 산하 같은 공적은 창해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명나라 어양총절사 겸유격장 정유년 제독중군섭병부상서 총독제군문 편갈송이 짓고 유격장군 시문용이 썼으며 운량사 겸 도총장 천만리 , 총병파총 장해빈, 유격파종 서학등이 공사를 지휘 감독하여 세우다.
1597년 9월 10일.
이 비문은 편갈송이 짓고, 이 동리의 이름이 지금도 도독동으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창표당이란 제실이 있는데 마귀제독과 편갈송제독이 승첩한 전공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두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바 그 마을 주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 밤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문화제로 지금도 국가로서 관리 보존하고 있다.
소사평 승첩비문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에 세웠다.
흠차병부상서 총독제군군문 편공 갈송 승첩비
1597년 2월 10일.
이 비문은 왜정이 을사 조약 때 전부 파기하여 뽑아 버렸다 한다.
호서, 은진전에서도 편갌ㅇ과 마귀대장과 참전하여 대승하였다.
편도독 용략위덕 대진비
병부상서총독제군문이신 편공갈송은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도독부대도독마귀와 같이 군사를 출동하여 왜적을 정벌하고조선을 회복한 후 여러 장군과 더불어 서생포 뒷산에 올라가서 시를 읊었으니 우연히 올라 옴이여 동쪽 해돋는 곳이로다. 끝없이 일어나는 큰 물살은 만고에 흐르도다. 산이 서북쪽으로 이어 졌으니 하늘에 닿는 것 같도다. 물이 동쪽으로 퍼져 있으니 땅이 물위에 떠 있는 것 같구나. 아아 슬프다. 옛적에 한나라 당나라 명장이 국외로 출전하여 승전을 하고 돌을 깍아서 공적을 새긴다더니 지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만리 밖에 와서 영남과 호남을 바로잡아 회복시키고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니 후세 사람들이 공적을 알지 못할까하여 그 사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위를 깍아서 새겨 두는 것이다.
공께서 말하기를 정유년에 어리석은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범하므로 황제가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발동하여 왜적을 섬멸하고 조선을 구원하였다. r 때 호랑이 같이 날쌔고 힘찬 장군 백여명이 잇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소사평까지 내려와 왜적을 만나 크게 승리를 거두고 계속 추격하여 바다 변방까지 몰아내고 수륙양면으로 진을 치고 사면으로 접전을 하니 깃발이 해를 가려서 날이 어둡고 갑옷과 칼과 창이 별 같이 반짝여서 밤이 밝았으며 바다는 영웅들의 활동할 길을 위해 활짝 펼쳐지고 산에는 북과 뿔 피리 소리가 드높이 솟구쳤다.
四道를 모두 다녀 보았으나 인적은 간 데 없이 내 마음만 무겁고 슬프도다. 천리의 자연적 순환의 이치에 따라 豊臣秀吉은 이미 죽고나니 여러 수장들도 두려워 떨고 있도다. 조선의 군신은 다시 일월을 보게 될좋은 징조로다. 아아 천자의 성스러운 덕과 위용이 온 천하에 충만하여 흉악한 왜적을 소탕하고 조선을 보전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생활을 안정케 하였으니 그 망극한 은덕은 삼강을 벼루로 삼고 오로봉을 붓으로 하여 기록하여도 어려울 것이니라. 그 때의 중국 장사들의 공은 산보다 무거울 것이며 바다 바다 깊을 것이며 공훈과 명훈이 나타나지 않으니 글로 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며 만세까지도 다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글로 적어 바위를 깍아 이를 새기노라. 이 뜻이 조선 백성으로 하여금 길이길이 전이 벽해가 되기 전까지는 중국에 대한 재조변방의 은공을 잊지 않게 하노라. 그 노래에 강한 활을 당기면서 용장의 목을 베었도다.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 강산을 보전하였도다. 군사를 파하고 개선해 돌아오니 진중이 정제되어 있도다. 만약에 천고에 전한다면 뉘가 알지 못하랴. 아득한 빛은 머리 위에 프르렀고 대해의 거센 물결이 눈아레에 출렁인다. 아득한 대마도는 그때처럼 프르렀네. 팔척의 용검을 빼어 들고 공 세우기를 맹세 하였도다.
정유년 2월 10일.
울산 서생포 바닷가에 세웠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일정 때 왜놈들이 없애 버렸다고 한다.
丁酉년 1597년 정유재란 파견 명나라 군 編成은 다음과 같다.
兵部尙書(前副尙書) 田樂
總督 (兵部左侍郞) 那玠
經理 (遼東布政使) 楊鎬
經略東政提督 麻貴
那玠總督 (陳遼東)
總兵高策 步兵 이천오백명.
張隆 馬兵 칠백육십명.
董用威 활 夷兵 삼백명.
楊廉 馬兵 칠백육십명.
祖承訓 步兵 칠천명.
天 馬兵 칠천명.
總兵王成 步兵 천백오십명.
總兵王宗義 馬兵 구백팔십명.
總兵 宇仲 馬兵 칠백육십명.
總兵李輔國 步兵 팔백팔십명.
經理 楊鎬(陣平壤)
總兵 李開先 馬兵 천오백이십명.
總兵 李 勝 步兵 팔백명.
麻貴 馬兵 이천이백구십명.
東征提督朝鮮防海禦倭總兵官 麻貴
提督軍門攝兵部尙書中軍都督片碣頌
總兵 이천칠명.
總兵 吳惟忠 步兵 사천명.
總兵 楊 元 馬兵 이천명.
總兵 李如梅 步兵 이천명.
總兵 李芳春 馬兵 이천명.
總兵 解生隊 馬兵 이천명.
總兵 李 寧 馬兵 이천명.
總兵 牛伯英 馬兵 육백명.
總兵 陳愚哀 步兵 이천명.
總兵 頌 貴 馬兵 삼천명.
總兵 登 馬兵 천사백명.
總兵 芳國器 步兵 삼천백명.
總兵 李化龍 馬兵 삼천오백명.
總兵 楊萬金 馬兵 천명.
기타 將卒 總 십사만 이천명.
總 兵力 십구만구천삼백칠명.(199.307)
남하유왜적문
너희들 왜장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범하고 외로이 이 성채를 지키고 식량이 결핍하여 고기가 솥가운데 있는 것 같이 죽음이 임박한 줄도 모르고 살고 있어 불원간 패망할 것을 잘 알고 있노라. 7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발악하고 있는 동안에 처자와 부모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그 田地와 군 읍이 모두 豊臣秀吉에게 빼앗겼으며 아들과 딸은 볼모로 잡아 가고 너희들은 사지에 몰아 넣고 밤낮으로 조선하여 식량을 운반하고 군사를 뽑아서 국가재정을 탕진하여 너희들 식구들이 초근모피를 먹고 생활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찌하여 이같이 고생을 하고 있느냐.
참으로 秀吉은 흉악한 놈으로서 하루라도 너희들을 살육하지 않는 날이 없어 늘 너희들은 그가 흉악해서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일을 꾀하기는 귀신같고 참혹하기는 사나운 범같으며 죄악이 하늘에 다다라서 죽을래야 죽을 땅이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명나라 장군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 땅을 방위하고 있는 고로 특히 너희들에게 알리는 바이다.
내가 한 사람도 허물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며 한 사람의 왜병도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 너희들을 위해서 수취스러움을 깨끗이 씻어 줄 것이다.
만약 항복하여 우리에게 귀순치 않고 창을 들고 반항하면 원흉 豊臣秀吉을 죽이고 다음 加藤淸正과 小西行長 두 사람을 죽이고 나머지 장관과 병졸들은 벼슬과 상을 줄 것이다.
우리 군대가 바로 대마도와 명호옥을 지나 유십육주를 평정하고 두 도적 괴수의 목을 벰으로서 우리 속국의 울분을 풀고 즉시 秀吉 밑에서 육십육주의 장으로 있던 자를 다시 각각 그 주의 장으로 봉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너희들도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니 상호간에 좋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지위를 뺏는 자는 반드시 남에게 그 지위를 빼앗기는 법인즉 수길은 참으로 남의 지위를 빼앗고 국왕을 살해한 역적이다.
너희들은 대대로 국왕이라 하는데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사부의 제압을 받아 만방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는가.
반드시 보복과 설치를 하려면 가만히 사자를 보내서 상의하여 다 같이 대사를 이루도록 하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결단코 대병을 발동하여 너희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진퇴양란으로 달아날 곳이 없어지고 백성과 더불어 몰살될 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화친을 계책하면서 너희 나라를 (육십육주) 기만하는 전일에 쓴 일이 있는 지략으로 우리 조정을 우롱하고 또한 전일에 심유경을 유혹하던 책략을 써 오늘에 와서도 우리를 우롱한다면 우리의 조정은 어찌 너희들 책략에 넘어가서 너희들에게 우롱되는 바가 되리요!
화친이란 말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너희들 스스로가 깊이 생각해서 빨리 가부를 결정하기 바라며 다시 후회함이 없게 하라. 이런 논고문은 당연히 동심, 동사로 삼가 은밀히 논의할 것이며 누설해서는 안될 것이다. 받는 즉시로 회답하여라.
1597년 5월
이글은 편갈송이 왜적들에게 귀순 투항하라는 논문이다.
중군에게 게시함
작금에 변방에서 군무에 종사하는 신하들의 급보를 통하여 듣건데 요즈음 귀장군께서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강대한 적군을 상대로 혈전을 계속하여 악덕한 강적을 전적으로 무찔렀다는 전승의 쾌보가 우레와 같이 들려 오고 또 경향 각지에서는 환호성이 진동하고 있다고 하니 그 기쁨과 감격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진주, 사천간에 있던 왜적들의 다수가 협천이나 가야산 밑으로 집결하여 전라도로 들어와 각지의 산과 계곡을 출몰하면서 거의 호남 영남 일대를 휩쓸어 인심이 소란하게 되어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의 군대로서는 도저히 이 강적들을 막아 낼수가 없더니 금반에 천행으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던 강적의 일부가 충용무쌍한 천황군대에게 여지없이 패망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영남이외에 사는 잔민들이 다행하게도 흉적의 참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천황의 군대 장성들이 더욱 용기가 활발하여 흉악한 잔적을 소탕함에 있어 모름지기 이 전기 천제일우의 첩전이 이번 소탕 작전의 기초가 되지 아니치 못하였을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삼가 특사를 보내어 장군의 피로가 회복되기를 기다리오며 겸하여 치하와 성의를 펴는 동시에 과인이 보내는 선물은 극히 약소한 것이나 대략 이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오니 특히 照亮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가 편갈송에게 치하한 편지이다.
중군에게 회군을 게시함
일전에 존안을 뵈옵고 감히 위로를 받았습니다.
적군을 대평정한 누래로 모든 것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 간의 안부를 간곡히 사뢰는 바입니다.
분외로 돌보아 주신 염려와 따뜻한 정념에 넘친 만지장서가 과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인의 이른바 白圭라는 ㅇ언
을 一日二復하듯이 과인은 과연 하루에 두세 번씩이나 이 서한을 읽어 보았습니다.그런데 천황의 명령으로 금번에 이 전쟁을 그친다 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천자께서 神身이 불안하시니 변방의 기강까지도 소란하게 되오며따라서 우리의 군사도 정돈하여 전지로부터 환군하도록 하여야 하겟습니다.
다행이 성천자 위령의 덕을 힘입어서 금일에 대인께서 왕명의 사절을 가지고 동방소국에 까지 오셔서 흉괴 왜적을 토벌한 공로는 과인이 어찌 다 구구하게 말씀드리오까. 금일에는 鎭守地가 畿左로 나누어져서적군을 억압하고 제어하는 시설이 이지럽게 되고 이는 군사상 요충이나 화제에 타 폐허로 화하여 버렷습니다.
그러니 종용히 생각하옵건데 지금까지 대인께서 가지가지의 근로와 고통과 공헌과 염려를 극진하여 주심에 대하여 길이길이 감사와 안부를 살피고저 하오며 아울러 관으로서는 嚮導武士가 이미 삼가 왕명을 받들어 京師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다스리게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兵刀(武器) 기물은 마땅이 완전무결하게 저장 보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작금은 춘한이 혹독하오니 자중자애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이만 그치나이다.
순찰사(沈敬澤)에게 올리는 글
흥양군 남양면 편윤혁, 편운표, 편운시, 편정대, 편진옥 등은 순찰사께 글월을 올리나이다.
생등의 선조 휘 갈송공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명나라에서 조선을 구할 적에 어양총절사로서 이제독 여송의 유격장이 되어 요동병 이천명을 거느리고 참장 낙상지와 더불어 평양 보통문을 쳐 부수고 앞을 다투어 돌진하여 시살하니 왜군이 강 얼음을 타고 밤에 도망하므로 그 성을 회복하고 드디어는 개성 한성까지 회복하였습니다. 정유년 명나라에서 재차 구원할 적에 또 마제독 귀의 중군이 도어서 군사 기밀을 돕고 기획하엿습니다. 마공이 군사 일체를 위임하여 소사에서 크게 승첩하므로써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그 외에 안동, 예천, 경주, 울산에서도 특별한 전공이 있어서 제독이 절대 신임하엿습니다. 대개 동정 제장이 백인이 넘되 우리나라 변란에서 가장 분발하여 그 열렬한 공적이 현져하였습니다. 선묘게서 여러번 내리신 어찰과 서생포 층암절벽에 세워 있는 비로도 더욱 믿을 수 있습니다. 거의 전쟁이 끝날 즈음에 정씨의 모함으로 인하여 시문용, 천만리, 외 여러분과 같이 경주 산속에서 은거하고 멍나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감추어짐에 따라 그 위대한 공적 조차 메몰되었으니 신상 필벌하는 천리로 볼 때 이럴수가 있습니까.
혈손이 있기는 하였으나 빈곤하여 처음에 경주에서 거주하다가 광양에 옮겨 살았고 또 낙안으로 옮겼다가 지금 흥양(현 고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침체해서 한을 품고 억울하게 지냈으며 호소할 곳이 없던 차에 지난 1704년 숙묘 갑신에 궁중에서 대보단을 만들어 신종황제께 제사를 올리고 명나라 제장의 후예로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망배하는 예에 참석케하니 이것이 후손으로서 기뿐 일입니다. 또 말하옵건데 선무사, 무열사 및 안동 성주 남원 강진 에다 신위를 배향하는 사당이 있습니다. 같이 은거한 시문용, 천만리, 등 제장의 후예들도 그 후에 자손들이 임군께 아뢰어서 사당을 세우고 그 영을 편케하여 제사를 뫼시고 또 가유약, 초해창, 마귀의 후손도 오래 전부터 대보단 제사를 참사하고 특별이 벼슬을 제수 하셨습니다. 열성조의 융숭한 은혜는 그 지극함이 헤아릴길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생등의 선조는 우리나라를 재차 구원하여 그 특별한 공로와 위대한 업적이 제공에 내려지지 아니하여서 이제껏 배향할 사당이 없습니다. 생들이 답답하고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이에 감히 순찰함하께 앙고합니다. 관대히 살피소서.
철종 1858년 정월
서원기
삼가 살펴보건데 편시의 성과 관향은 절강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겠으니 중국에서 벼슬 하였고 모두 상서공에서 갈라졌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을 지중히 여기신 총독군무유격장의 책략이야말로 이여송, 마귀보다 못지 않았으니 승전한 공로는 직산과 울산 전투에서 이에 능가하는 이가 없었으며 압록강을 건넘에 군사를 재촉하여 이미 쓰러진 영토를 회복하여 조선의 사직을 길이 보전 하였으나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여 동서로 당파가 갈라져 온 공훈이 보양되지 못한채 삼백년이 흘렀으나 중국에서는 이름난 문벌로서 조선을 구원한 충성이야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시조께서 공을 세우신 것을 알면서도 들어내지 못한 후손들의 울분과 한이 이미 오래인지라 애통한 마음 뼈에 사무쳤다. 충의를 지켜온 우리는 명나라 신종황제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외롭고 쓸쓸한 편씨가 팔도에 흩어져 살면서 祠宇를 지으려고 애쓴 결과 다행히 하늘이 다시 밝아 했빛이 그늘에 미쳐 늦게나마 유림들의 공의로 성은을 입었으니 철종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무지일 따름이다.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바친 충성에는 하늘도 감동하여 장사의 공이 산하에 가득하여도 무겁지 않고 북두성 같이 빛나며 충신의 절개는 우주에 뻗쳤으되 사라지지 않고 해와 달처럼 무궁하리라. 이러므로 나주에 서원을 짓고 감명이라 액호를 쓴 것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여 멀리서 천조를 느끼니 감이라 하였고 이미 조선을 구원하면서도 항상 대명을 생각하였으므로 명이라 하였다.
비록 이국 땅에 있을지라도 임향한 일편단심은 꿈에도 만리장성에 있을 것이요. 군사를 부려 왜적을 섬멸한 공은 국사와 야사에 실려 충신의 명의가 사기와 황제가 하사한 비에 까지 실렸으니 편공의 영을 이 사우에 모셨으나 임진왜란 때 세운 공적은 주사로도 쓰기 어렵고 자손들의 한이 풀린 마음은 척해 보다 더욱 깊으리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고래의 예식에 따라 유교 의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향을 밝힌 성의가 길이 보전 되고 특이한 성전으로 선조의 사적을 문양하고 사우에 편히 모시니 후손과 문호가 크게 번창하여 충신들의 사당에 함께 모시게 될 날이 멀지 아니하리라. 나같이 빈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삼가 감명서원에 대한 기를 쓰노라.
나주목사 조희철 근
정조대왕이 지은 선무축문
굳세고 높으신 상서공의 은혜가 주나라 주공, 소공과 같도다.
명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구원하셨으니 개선한 장군의 깃발에 수를 놓아 꽃았도다. 마치 제나라 신하가 송나라를 도와 명성을 떨친 것 같도다.
마귀, 양원 두 장군이 우리 휘하에서 응해주어 경상도 해안과 산천의 만백성이 칭송하는 소리 울려 펴졌도다.
성의 남쪽에 사당을 지었으니 화려한 액호가 크게 빛납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려 장하신 공의 영령을 위로하오니 우리 조선에 억만년 까지 계시옵소서.
편상서위
편갈송 장군의 남아 있는 시
두류산에 올라
오고가지 못하는 마음 창연도 하련만은
남루할사 옷소매는 해동가에 나붓긴다.
앞길이 삼천리라 넘어가기 어려울세
나그네 타향살이 어언간 열두해라
정수는 멀고 먼데 뜬 구름은 꿈 같이 흩어지고
두륜산이 아득한데 바닷물은 하늘에 닿았는 듯
객창에 유유한 심회 하루해가 지루하여
술마시며 청아한 이야기 나누니 자못 이뤄하노라.
높은 곳에 올라 탄식
임금의 명을 받은지 몇해가 지났는고
정처없는 삼년 세월 바닷가에 머물렀네.
세상에는 어진 선비 적으니 세속을 교화하기 어렵지만
사람은 이광이 봉후되지 않은 걸 훌풍히 여기었네.
마음은 항상 구름 밖에 나르는 외로운 기러기로 돌아가고
땅은 서쪽 하늘가에 닿았으니 한조각 배일세.
좌협은 여기서 얼마나 먼 곳인지
바람을 타고 가만히 대청루에 오르려하네.
이장군과 읊음
공산이 적막한데 묻노니 네 두견아
귀촉도 붙여귀에 한 많은 내 소리야
내사정 너와 같아 못내 서러워 하노라
오경에 지는 달은 객창에도 비치련만
천리에 부는 바람 고국 생각 아득하다.
금수에 비친 봄빛 고목에 돌아 왔고
진산 위에 뜬 구름 그림자 앞내로 건너가네.
동쪽으로 온 나그네 꿈속에서 요동 길 찾으려고
산중 초가집 빌어서 낮잠에 잠기네.
이여매장군은 이여송의 동생.
금강산에 올라
이역땅 풍경을 구경하니 그림을 보는듯하고
산세의 기묘함은 금빛처럼 곱기만하다.
구름이 암자를 가렸으니 중을 따라 가야겠고
산봉우리에 걸친 달은 나에게 손을 청해 구경하며 즐기도록하네.
남해에 깊은 수심은 조선을 구원한 탓이었만
중국 하늘은 눈물에 가려 북망대를 볼 수 없네.
만리장성은 눈 앞에 아련하게 보이는데
돌아가지 못하는게 한이 되어 술만 마시네.
남원 광한루에 올라
어느 남원부사가 어느해에 이 누각을 지었는지
내가 처음 이 광한루에 올라오니 어느듯 가을이 왔네.
장군기가 북쪽에서 날리던 날 이나라 국난을 말끔이 씻었더니
장검 빼어들고 남쪽 하늘 바라볼 땐 평화가 감돌았네.
문득 전란이 끝난 것을 보니 이성 땅처럼 느껴지고
모든 문물이 중국과 흡사하구나.
어느때 중국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역적의 무리를 소벌하여 해변의 땅을 평정하게 될 것인가.
왕학사와 취하여 읊음
타관땅에서 옛친구를 만나서 기쁘기 한이 없네.
나라는 작은 나라지만 제세의 인재는 많더라.
산이 첩첩해도 긴 밤 꿈결을 가리지는 못하고
고향생각 간절해도 일생동안 술자리는 어려우네.
고국에 돌아갈 기러기(편지) 끊어지니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고향집 싸리문에 백로에 편지를 전해 볼 까 하노라.
몸이 늙었으니 세상 일일랑 잊어버리고
일생동안 좋은 술로 술자리나 같이할까 하노라.
왕학사와 취하고 읊음
동쪽 나라에 나그네 된 신하가 호탕한 노래 부르며
꿈속에서 부귀영화 누리네.
마음 속에는 나그네 생활이 오래기를 바라는 때도 있고
술에 취해 한가한 이야기로 하루를 금방 보내기도 하네.
금강산에 올라
물욕없는 맑은 인연 나홀로 기쁨을 누리는데
멀리 이역 땅에 나와 싸운지도 몇 해를 지냈는지
묏붕우리 위에 뜬 달이 내 마음을 알려거든
홍운어린 궁궐에서 임금님 모시고
놀이를 즐기게 하여 주렴.
가는 봄을 탄식
남은 꽃 다 지자 두견새만 슬피우네.
이 같은 방초도 사람인들 어찌할 수 없으련만
햋빛마져 무정하게 서쪽으로 기울려하네.
가을비
임금님 뵙고 싶어 일각이 여삼초인데
밤은 깊어 찬비만 내리니 꿈을 기약하기 어려워라.
낙엽소리와 군시들 말굽소리에 고국 생각 잊혀져 가니
유수 같은 세월에 인생살이 허무함이 이런 때에 느껴지네.
달 밝은 밤에 옛 생각
한 조각 밝은 달이 어찌 갈바를 잊었는고
고향 그리워하는 부자의 심정은 아득하여라.
어느 때나 나의 몸이 산봉우리 걸린 달되어
임금님의 축수 술잔 비춘단 말인고.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두견새 소리 들으며 또 실르 읊으니
이슬에 젖은 꽃송이 눈물 짓는 듯 하여라.
원통해 우는 새소리에 자주 단잠을 깨고나니
왠일인지 마음이 뒤숭숭하여라.
봄을 만나니 옛 생각
봄비가 타관의 경물을 적시니
버들가지에 먼저 봄이 왔구나.
좋은 시절을 만났어도 몸은 이미 늙었으니
세상살이 갈데도 많아 어렵기만 하네.
꽃은 눈물 젖은 소매자락을 씻어 주고
호박 술잔에 淄水를 받아 마신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많은 생각에 잠기어
해가 서산에 기운줄도 몰랐네.
바로 느끼고 읊음
경치에 도취되어 돌아갈줄 모르는 손이
한가로이 몇 번이고 술잔만 드네.
구름은 물 위 아래에 떠 있고
물새는 주위를 맴도는데
시름과 회포가 갑자기 일어나니
세월은 사람을 늙기를 재촉하네.
팔년 세월을 물 흐르듯이 보내고
흘러간 물은 다시 오지 않으니
달 밝은 밤 옛생각
이제까지 한 장의 글도 못 올렸으니
임을 사모하는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
소신의 마음은 임금에 달려 있는데
깊은 물과 구름처럼 아득하여라.
중국의 칡넝굴이 동방에서 자라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인생만 늙게하네.
어찌하여 물가에 사는 몸이 되어
한은 깊어져 고국에 핀 국화송이에 맺혔을까.
세 번 싸우고 동래부에서 읊은 시
왕명을 받들고 조선에 나와 이제는 나그네 신세 되었네.
슬픈 노래 부르면 강물도 목매이고
살기 등등할 땐 칼날만 새로웠네.
나라의 운세가 강물 터지듯이 어지러운데
흉적을 무찔러 재앙을 깨끗이 없애리.
한가로운 부자의 심정은
어느 때나 고국에 돌아가는 몸이 될거나.
지리산에 오르다.
산마루에 올라 자경을 바라보며
열사의 칼을 빼니 서릿발 같이 번득인다.
막막한 전쟁터에서
누가 만리 밖의 내 마음을 알아주리.
느낌을 읊음
동녁에 나와서도
북녘만 바라보다 늙었구나.
굼앤들 갈것마는 가는 길
열리지 못했구나.
소신의 참소는 눈물로 덮였으나
일편단심의 충성심은
밝은 햇빛에 비치리라.
눈을 읊음
진눈개비 휘몰아치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
산천을 진동하는데
뉘라서 내 마음을 알리 있을까.
온화한 정을 나눌 수만 있다면
파리한 얼굴의 주름살도 펴지리라.
낮에 꿈을 꾸고 느낌
우리는 무슨 연유로 오랜 세월을
객지에서 보내는 것일까.
슬픈 사연일랑 구름가듯 기러기를 보내고
고향가고 싶은 생각이 나면
밝은 달이 기러기를 머므르게 하네.
바로 느끼는 대로 읊음
꿈에 만난는 것보다 가서 만나려고
여러번 편지를 보냈다오.
마음은 흩어진 구름이 모이기르 기다리고
혼은 두견새와 같이 날라다닌다오.
고향을 떠나올 때는 강물이 맑아 흘렀는데
강을 건니기는 아득하구나.
고향 생각은 잔디밭 속잎 같은데
방초는 곳곳에 새로이 우거졌구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동원 병력 사만삼천명.
정유재란 때 동원 병력 십구만구천삼백칠명.
명는 양란에 걸쳐 총 이십사만이천삼백칠명의 군사와 은화 팔백 팔십이만을 지금했다.
막대한 군비와 병력을 손상한 명나라는 그 후유증으로 점점 쇠락의 길로 접어 든다.
壬辰倭亂 하면 유성룡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이름만 익숙하겠지만,
실제로 壬辰倭亂을 승리로 이끈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장수도 무사도 아닌 중인 출신의 역관 洪淳彦이었다.
마침내 1598년 9월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을 말할 것 같으면 평양성 전투, 소사평 전투, 한산도 전투, 행주성 전투로 사대전을 꼽을 수 있다.
평양성 싸움과 소사평 싸움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공이 있었고 한산도 대첩과 행주 대첩은 우리나라 장수들에게 있었다.
정유재란 때는 소사평 싸움이 아니었으면 왕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요.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리라.
홍순언은 왜란이 끝난 그 해에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한 듯 세상을 떴다.
그리고 400년 뒤, 조선을 도운 죄로 위험에 직면했던 석성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석씨의 시조는 석성이시다.
공의 휘(諱)는 성(星)이요. 자(字)는 공진(拱辰)이며 호(號)는 동천(東泉)이다.
석씨는 원래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이 위나라에 분봉된 후, 그 공실에서 갈리어 춘추시대에 순신으로 일컬어 진, 석, 작을 비롯하여 한, 진, 당, 송등 역대에 큰 명성이 대대로 이어졌다.
석성은 명나라 절강 동명 사람으로 1559년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을 거쳐 후일 병부상서를 역임했다.
석성은 옥중에 두 아들을 불러 나는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 같으니 조선으로 가서 명맥을 보전하라는 유언을 따라 차남 천은 즉시, 공의 명을 따라 1597년 선조 30년 요동을 거쳐 배를 타고 호남을 거쳐 가야산 남쪽 , 군성산 아래 성주 대명동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가 되었다.
그러나 부인 류씨와 장자 담은 차마 부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옥바라지를 하며 남았다가 명조에 잡혀 장항에 유배되었다.
명 희종제 천계초에 제신들이 석 공의 위국 충성과 공훈을 조정에 고하여 다시 복관 되었으며 유족들은 장향에서 돌아 왔으나 , 국정의 어지러움을 보고 공의 유언에 따라 요동을 거쳐 배를 타고 해주에 도착 후, 조선 조정에 망명을 고하니 조정에서는 공의 장자 담을 수양군에 봉하고 해주 땅을 하사 했으며 본적을 해주로 사관 하였다.
석성의 후손들은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귀화했다.
석성은 옥사하기 전 가족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넘어왔고 선조는 그들에게 해주땅을 주어 정착하게 한다.
해주석씨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곧 명이 멸망했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위험에 처해졌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득세하니까.
청나라에서 와 가지고 무조건 명나라 유민을 잡아내라 하니까.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지리산 자락으로 집단 이주하여 살아 오다가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행여 나가면 죽을까봐 그래서 못나가고, 피해서 골짜기까지 왔다고 한다.
석성의 후손들은 이 모든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4백여 년 전, 어려움에 처한 한 여인이 있었고, 그녀를 가엽게 여긴 한 남자가 있었다.
역사를 바꾼 것은 홍순언의 측은지심과 은혜를 잊지 않은 그녀의 마음이 있다.
해주석씨 말고도 우리나라엔 비슷한 이유로 귀화한 성씨들이 많다.
절강신씨, 소주가씨, 삼공마씨, 절강팽씨,
모두 임진왜란 때 우릴 위해 싸운 명나라 후손들이다.
우리의 역사가 된 과거이자 현재가 된 귀한 인연들이다.
역사라는 장대한 광대한 시간을 두고 볼 때 찰나라는 그 짧은 인연이 그들 개인과 가족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필의 비단과 같은 과정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씨줄과 날줄의 교차점에 조선시대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우리의 역관들이 있었다.
홍순언은 여든이 넘은 고령까지 역관으로 일하다 마흔이 넘어 죽은 것으로 돼 있다. 1518년 (중종 13)에 나서 1608년(선조 41)년에 죽었다고 했다.
조선 중인 중 역관만큼 정책에 실무적으로 개입했던 지군이 있었을까? 역관은 단순한 통역자의 역할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개화파와 금지됐던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인 것으로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중심에 섰던 역관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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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진야생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진경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