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의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 기재된 남원김씨
각북면(角北面)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도군의 면이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부에 속하였다. 1687년의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 기재된 남원김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지 1702년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는 없다.
가.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상백(金上白)
1687년의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 각북면 1419의 8 남산리(南山里) 8통 2호에 당시의 나이가 70세 무오생(戊午生)인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상백(金上白)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양인(良人) 용(龍), 할아버지는 양인(良人) 무련(武連), 증조할아버지는 부지(不知)이다. 외할아버지는 정병(正兵) 임문이(林文伊) 본은 남원(南原)이다. 본처 자식이 아닌 데려온 자식인 솔자(率子)가 있는데 이름은 고공(古公)이고 나이는 21세 정미생(丁未生), 병인(病人)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대장장이는 야장(冶匠) 혹은 철장(鐵匠)이라고 불렀는데, 주조를 전문으로 하는 주철장(鑄鐵匠), 무쇠를 다루는 수철장(水鐵匠), 담금질을 전문으로 하는 정철장(正鐵匠), 놋쇠를 다루는 유철장(鍮鐵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여기서 유철장(鍮鐵匠)은 유기장(鍮器匠) 즉, 놋갓장이를 말한다.
세종 5년(1423)에 정부가 동전(銅錢)을 주조할 무렵 동광(銅鑛)에 종사한 장인들 중 많은 수가 유철장(鍮鐵匠)으로 전업한 듯하다. 유철장에게도 장세(匠稅)를 부과하였다. 이처럼 각 도 각 읍의 철장과 수철장·주철장·유철장 등은 각기 크고 작은 작업장을 갖추었고, 철장을 제외한 각 장인들은 호조에 정액의 장세를 납부하면서 각기 광산을 채굴하거나 제품을 생산하는 등 독립된 자영수공업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놋쇠는 한자로 유(鍮)라 표기하지만 옛 기록에서는 유석(鍮石)·유철(鍮鐵)·황동(黃銅)·주동(鑄銅)·진유(眞鍮)·두석(豆錫)·주석(朱錫)·향동(響銅) 및 청동(靑銅) 등 그 용어가 다양하다. 그만큼 놋쇠는 구리합금의 대표적인 금속으로, 주된 합금재료인 석(錫, Sn)과 아연(Zn)의 넣는 비율에 따라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성질의 놋쇠를 만들게 된다. 그 하나는 징·꽹과리·대야·양푼·식기·수저 등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와, 다른 하나는 촛대·향로·화로처럼 아연합금의 주물유기이다. 또한, 주물의 경우에도 단순히 구리에 아연만 넣는 데 그치지 않고 석을 함께 첨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동전이나 동종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놋쇠에 대한 기호가 예로부터 유별난 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철유전(鐵鍮典)이란 기구를 두어 철과 유석을 관장하였다. 당시 신라의 종은 아주 이름이 났으므로 자연히 동을 주조하는 여러 가지 합금술이 발달하였을 것이며 각종 종이나 불구, 화로 등의 청동제품과 유기제품의 생산을 가능케 하였을 것이다. 순동(純銅)의 용해도는 섭씨 1,083도로 비교적 높은 온도이지만 청동(靑銅)은 용해온도를 섭씨 900도까지 낮출 수 있다. 따라서 청동기물은 기본 성분인 동을 비롯하여 석을 혼합하고 소량의 납·아연을 넣어 주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청동제품과는 달리 유기제품은 구리와 주석만으로 합금된 ‘방짜’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좋은 질의 놋쇠로 만들었다.「오주서종박물고변 五州書種博物考辯」에 “유는 동에 주석을 넣은 것이며 놋쇠라고 한다. 이것을 만들려면 구리 한 근에 주석 4냥을 합치면 된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식기와 제기 등은 이와 같은 상질의 놋쇠로 제작되었다. 이후 유기의 사용이 더욱 증가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지방마다 놋점(유기점)이 별도로 생겨나 각종 유기를 다루었는데, 일반백성들은 이곳에서 사다 썼으며 반가(班家)나 지방의 부호들은 맞춤그릇을 썼다.
나.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말을백(金末乙白)
1687년의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 각북면 1419의 8 남산리(南山里) 8통 4호에 당시의 나이가 53세 을해생(乙亥生)인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말을백(金末乙白)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양인(良人) 용이(龍伊)이고 김상백(金上白) 아버지와는 형제간이다. 할아버지는 양인(良人) 무련(武連), 증조할아버지는 부지(不知)이다. 외할아버지는 정병(正兵) 임문이(林文伊) 본은 남원(南原)이다.
처(妻)는 양녀(良女) 권잔금(權?金)은 32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本)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정병 막생(莫生), 할아버지는 정병 막부(莫夫) 증조할아버지는 정병 부귀(富貴)이다. 외할아버지는 안청우(安淸祐), 본은 함안(咸安)이다. 솔자(率子)인 유철장(鍮鐵匠)의 이름은 백련(白連)이고 24세 갑진생(甲辰生)이다. 며느리(婦)인 양녀(良女) 정두리덕(鄭斗里德)은 25세 계묘생(癸卯生)이고 본(本)은 연일(延日)이다.
다.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유민(金有民)
1687년의 대구도호부 각북면(角北面) 호적에, 각북면 1432의 8 남산리(南山里) 8통 5호에 당시의 나이가 38세 경인생(庚寅生)인 유철장병인(鍮鐵匠病人) 김유민(金有民)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양정(良丁) 학용(鶴龍)이고, 할아버지는 양인(良人) 용이(龍伊), 증조할아버지는 정병 무련(武連)이다. 김말을백(金末乙白)의 친조카이다.
처(妻)는 양녀(良女) ?용례(?龍禮)는 34세 갑오생(甲午生)이고 본(本)은 현풍(玄風)이다. 아버지는 정병 종립(從立), 할아버지는 정병 기상(己上), 증조할아버지는 정병 기용(己龍)이다. 외할아버지는 장인(匠人) 함순산(咸順山), 본은 상주(尙州)이다. 5세인 딸 봉경(奉京)은 계해생(癸亥生)이고, 유철장(鍮鐵匠)인 아들 순업(順業)은 12세 병진생(丙辰生)이다.
라. 보인(保人) 김승립(金承立)
1735년의 대구도호부 동중면(東中面) 호적에, 동중면 1586의 1 산격리(山隔里) 42통 3호에 당시의 나이가 58세 무오생(戊午生)인 과녀(寡女) 김소사(金召史)가 시노(寺奴) 막선(莫先)과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할아버지는 보인(保人) 김승립(金承立)이다. 남원김씨(南原金氏)이다. 과녀(寡女) 김소사(金召史)의 기록이 1732년의 대구도호부 동중면(東中面) 호적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서 1732~1735년 사이에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보인(保人)은 군포·군미·군전 등을 내는 방식으로 군역을 부담하는 자이다. 군역에는 직접 징발되어 일정한 기간 번(番)을 서거나 노동력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을 흔히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반면에 정군 호(戶)의 경제를 보조하는 봉족(奉足)이 있었다. 15~16세기에 봉족은 정군이나 정군이 속한 국가기관에 포(布)나 쌀이나 화폐 등을 바치는 보인(保人)으로 변하여 갔다. 군역은 정군과 보인의 역을 모두 포괄하였다.
보인은 원칙적으로 포로 납부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군포(軍布)라고 불렀지만, 쌀 등의 곡물이나 동전으로 내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공식적으로 군포 1필이나 쌀 6말[斗], 조 8말, 콩 12말, 그리고 동전으로는 2냥(兩)을 납부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정군과 무관하게 보인으로 책정되어 군영에 포를 바치는 부류가 생겨났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은 이러한 보인을 적극 확보하여 재정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와 아울러 여전히 번상 근무를 하고 있던 기병(騎兵) 등이 아무런 혈연적·사회적 관계가 없는 사람을 보인으로 삼는 일도 생겨났다. 실역(實役)을 지지 않는 대가로 군포를 내고 병조(兵曹)가 이것을 주관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