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여름
친구 송명희와 한집에서 아주 친하게 지내니 정말 좋았다. 하루는 담임선생이 종례시간에 송명희 운전수가 박정순 차장이 가자는 대로 잘도 다니더라 하신다. 친구들은 웃고, 나는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보았다. 염려되던 명희가 나와 함께 있게되니 마음을 놓았다는 뜻인것 같다.
어느날 말똥과자 사건이 터졌다. 근처에 과자공장이 하나 있었다. (말이 공장이지 규모는 아주 웃기는거지)... 과자는 밤알의 크기로 밀가루를 뭉쳐놓고 설탕을 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말똥과자라 불렀다. 순전히 우리 학생들을 상대로 판매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 공장 주인이 종이쪽지를 들고 왔다. 그 종이엔, 학생들의 몇학년 몇반의 누구란 이름과 외상값 액수가 적혀있다. 나에게 외상값을 받아달라고 부탁 하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승낙하고, 그쪽지를 가방속에 넣고 학교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속담이 있었던가 그날따라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선생들은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가방을 뒤진 모양이다. 하필 그날 그쪽지가 발각 되었으니... 선생의 호출이 있었다. 선생은 쪽지를 내밀며 "이게 뭐냐"...나는 당황했다. 별수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날 그쪽지의 학생들은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났고... 그들은 공장주인에게 항의하고 공장주인은 나를 원망하고... 나는 그날의 사실을 설명해 주고... 그덕에 외상값은 빨리 받았다 한다. 나는 중학교때 사먹던 '방울떡' 생각이 그리움으로 피어 오른다.
새로 부임한 교감이 나를 부른다. "학생들이 시사에 어두우니 네가 교무실에 와서 신문을 읽고, 시사적인 내용을 발췌하여 매 금요일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시사 강의를 하란다"... 선생님이 시키는데, 못하겠다는 말을 감히 할수있나... 얼마나 했을까 그일이 너무 지겨웠다. 사람이 재미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수 있었겠지만...
현실을, 심각하게 되짚어보던 어느날 내가 여기에서 인생을 이렇게 흘려 보내도 되는 것인가???...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서울로 환도도 하지 않은 때 이지만, 서울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여 떠나기로 작정하고 학력증명을 떼어 미련없이 김천을 떠났다.
김천역에서, "서울표 한장 주세요" 하니 "서울은 못간다 한강 도강증이 없으면 못건너가니 영등포 까지만 갈수있다." 영등포 까지의 표를 들고 개찰을 했다. 짧은 시간 사방을 둘러 보았다. 올때는 기차를 타고 오지 않았으니, 처음으로 서보는 정거장이다. 만감이 오가는 사이 "삐~익" 소리 외치며 기차가 들어온다... 군인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탔으나 영등포에서는 어떻게 하나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 군인 아저씨와 몇마디 오간끝에 사정을 얘기했다. 그 아저씨는 좋은 분이다. "학생 그러면 내표와 바꾸자 내표는 서울의 표이긴 하나 군인표야" 보여주는 표의 뒷면에 군인이란 도장이 찍혔다. 그래도 서울표가 필요하니 바꿔주세요. 해서 서울표를 가지고 '대전' '천안' '수원'을 지나 영등포에 도착했다. 군인 아저씨는 거기서 내릴때 나는 감사하다고 공손히 인사했다.
기차는 영등포를 떠나는데,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한국 헌병과 미군MP 가 나타났다. 기차표를 보는것이 아니고 수상한 자를 색출 하려고 유심히 살핀다. 나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니 거들떠 보지 않지만, 마음속은 쿵당 쿵당 뛴다. 군인표를 쥐고 있어서 그런것이다.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얼마만의 서울인가 감개무량도 잠시... 표를 내고 나오는데, "학생 학생" 큰소리로 부른다. 군인이라는 도장이 찍혔으니... 순간 나는 혼잡한 틈속으로 뛰쳐갔다.
아~ 서울이구나. 얼마나 그렸던가...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는데..... 가족이 아직 서울에 오지않아 고모댁과 삼촌댁의 신세를 지며... 학교를 가려하니 후암동 본교는 아직 군인이... 덕수궁 잔디에서 수업을 받으려, 매일 덕수궁을 드나든다는 것이 낭만이라면 억지 표현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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