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산군 [성산전씨] 시조 26세 휘 흥 ◈ 18본 분파
◈ 二十六世 星山君 諱 興 ◈ 성산 전씨 - 분파도 [가승보]
시조 전흥(全興)은 도시조 전섭의 26세손이며 도순사(都巡使) 전수용(全守龍)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1231년 몽고의 철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대광(大匡)에 오르고 성산(성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성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 있는 원모제에서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경오보내역
高麗高宗王朝(고려고종왕조)에서 文科(문과)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左右獻納(좌우헌납)을 거처
奉翊大夫版圖判書(봉익대부판도판서)에 이르렀다.
高宗十八年(고종십팔년)1231年에 蒙古兵撒禮塔(몽고병살예탑)이 來侵(래침)할 때 忠州(충주)에서는
官奴(관노)가 蘭(란)을 일으켜 龜州城(구주성)을 侵攻(침공)하는 등 나라가 危機(위기)에 處(처)함에
朝廷(조정)에서는 王弟淮安公(왕제회안공)을 撒禮塔(살예탑)에게 보내어 화의를 맺으니 다음해一月에
撒禮塔(살예탑)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西京州縣(서경주현)에 達魯花赤七十二人(달노화적칠십이인)
을 머무르게 하고 撤兵(철병) 하였다. 書記(서기)1232年 六月 드디어 蒙古(몽고)의 兵亂(병란)을 皮(피)
하여 强化(강화)로 天道(천도)하기에 이르렀다.
同年七月公(동년칠월공)은 弟翼等諸將(제익등제장)을 거느리고 西北界諸城(서북계제성)에서 蒙古兵(몽고병)
을 代播(대파)하고 的(적)의 弓矢(궁시)를 노획하였다
同年十二月(동년십이월)에 撒禮塔(살예탑)이 다시 來侵(래침)하여 處仁城(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僧將金允候
(승장김윤후)에 의하여 撒禮塔(살예탑)이 射殺(사살)되었다.
蒙古兵亂(몽고병란)에 大勳(대훈)을 세워 公(공)은 벼슬이 大匡(대광)에 오르고 星山君(성산군)으로 鳳(봉)
하시니 그후 子孫(자손)들이 城主(성주)로 爲貫(위관) 하였다.
묘는長端郡(장단군)서면대덕산하전제리감운현간좌에모셨으며 氣候(기후) 1941년 辛巳(신사)4월에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 황곡후 도퇴곡 임좌에 設壇(설단) 有神道碑(유신도비) 封享(봉향) 하다.
1973年 癸丑(계축)에 양도면 인산리산 이삼육번지國賜峯南麓(국사 봉남록)에 遠慕齋(원모재)을 建立(건립)
하고 子大平孫信(자대평손신)과 함께 位牌(위패)를 모시고 每年陰十月十日時祀(매년음십월십일시사)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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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한 전대평(全大平)을 비롯하여 사평(司評) 전인(全仁), 이부상서
전지(全智)와 조선시대에 판관을 지낸 전진,목사(牧使) 전지덕(全之德), 참의 전복례(全福禮), 직장(直長)
전휴(全休),장령(掌令) 전효명(全孝明), 상호군 전송(全松), 절제사(節制使) 전봉성(全鳳城), 부사 전기선
(全起先), 참의 전전(全詮),그리고 공조참의전흥신(全興信), 현감 전재석(全在奭), 판관 전재봉(全在鳳)
등의 관직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전신(全信)은 고려말 관직이 병부상서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은거하였다.
후에 태종이 즉위하여 徵命하였으나 나가지 않아 곧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조선시대 의사(義士)인 전기업(全起業)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대검과 죽창으로 호군과
싸우다가 전사 한 충의의 인물이다.
항렬
29세 효(孝)/ 30세 창(昌)/
31세 수(壽)/ 32세 몽(夢)/ 33세 경(敬)/ 34세 이(以)/ 35세 광(光)/
36세 응(應)대(大)시(時)/ 37세 성(聖)/ 38세 도(道)위(胃)익(益)/ 39세 겸(謙)종(宗)/
40세 사(思)언(彦)/ 41세 명(明)/ 42세 재(在)/ 43세 석(錫)선(善)/ 44세 순(淳)/ 45세 동(東)/
46세 희(熙)/ 47세 기(起)형(鎣)/ 48세 흠(欽)장(章)우(雨)/ 49세 정(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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