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아버지
양상태
“열중쉬어, 차려, 수업 준비 끝.”이라는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하고 나면 “안녕하세요”라며 학급 친구들이 인사를 한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더라”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수업 시간. “지난 시간에 이어, 가시난닷 도셔 오쇼셔”. 수업이 진행되어 가면서 지루한 수업 탓인지, 졸고 있는 학생에게 날아가는 분필 토막은 적중률이 대단했다. 이러한 색다른 경험을 해 본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우리에게 고문을 가르쳤다. 반장이었던 나는 입장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시험 때가 되면 문제를 알려 달라고 치근거리는 급우들이 많았다.
“안 알려 주디?”
“한집에 살면서 그것도 몰라?”
“에이~.”
온갖 의문을 낳던 내가 100점을 받고 나서 의심의 강도는 세어져 갔다. 다른 과목도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아버지 과목인지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수업 준비는 해도 시험문제 출제는 하지 않았다.
교내에서 마주 칠 때가 매우 곤란하였다. 다른 학생들이야 꾸벅 인사하면 되지만 집에서 보고, 수업 시간에 보고, 집에 가면 다시 보게 될 터인데, 이때는 인사하기도, 않기도 참 어색하였다. 웃기도 하고, 어설프게 인사를 하였지만 주로 피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은 것 같다. 문학적인 유전자는 지문처럼 남아 있다. 독후감 발표에서 수상, 교지에 실린 콩트 ‘번데기와의 데이트’ 등 소질은 있는 듯했으나 계승하지 않고 발전시키지 않은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승화시켰더라면 밥 굶기 순위를 다투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약주를 즐겨했다. 밤늦게 귀가해도 요즈음 나처럼 늦잠을 주무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주위에서는 ‘강철 같다’라고들 하였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였던가? 그래서 일찍 가셨나 보다.
쉬는 날에는 가족들과 나들이를 자주 하였다. 우리에게 호연지기를 키워 주려는 깊은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가끔 낚시하러 다녔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살면서도 바다낚시보다는 민물낚시를 좋아했다. 낚아채 손끝으로 전해지는 맛이 다르다 하였다. 나는 낚아채는 맛보다는 딸려 오지 않으려 버티는 고기와의 씨름에 흥미가 있다. 새벽 일찍 따라나서기도 해 보고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찾아가기도 하였다. 자글자글 끓인 매운탕은 우리에게는 밥반찬이었고 아버지께는 술안주가 되었다.
할머니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돌아가셨다. 출상할 때 나는 영정 사진을 들고 갔다. 그날은 살아온 평생 가장 무더운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철모르던 시절이어서인지, 정이 모자란 것이어서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아서 울어야 하는데, 나는 울고 있는 아버지 얼굴을 보면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면서 울었다.
아버지의 된장 구두. 용돈 외 나의 유일한 부수입이던 아버지 구두를 닦던 일도 동생에게 물려주었던 중학교 1학년. 전과와 수련장이 전부였던 초등학교 때 보다 주요 과목마다 사야 하는 참고서가 많은 중학교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역시 중학교는 기회의 땅이었다. 초등 시절과는 달리 단위가 뛰었으며 대우가 달랐다.
그렇게 성장하여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었다. 자식들에게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질지 반대편 거울에 비칠 내가 궁금하기만 하다.
첫댓글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셨군요
잘 쉬었다 갑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셨어요.
아마 아버지와 앞 뒤가 똑 같은 붕어빵일겁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