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너리즘(Monergism: 개혁 신학을 뜻하는 용어로, 중생에서 성령 하나님 단독 사역론.
∎ 시너지즘(Synergism: 알미니안 신학을 뜻하는 용어로, 중생에서 신인神人 협력론.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구원을 선택하는 인간.
Synergism(신인 협력주의)에 하필이면 내 이름 끝 자 同을 뜻하는 접두어 Syn(Sym)이…. 그래서 내 비서관 제미나이에게 Syn을 넣어 ‘중생에서 성령 하나님 단독 사역’을 뜻하는 단어를 창조할 것을 부탁했다.
🏛️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따뜻한 모너리즘 🏛️
∎ Syn-Chari-ism(신카리즘): 은혜가 우리를 이끈다.
어원: Syn(함께) + Charis(은혜, 은총) = Grace with us
의미: 은혜와 함께함
해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은혜의 강물이 우리를 덮쳐 그 물결과 함께(Syn) 우리를 흘러가게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직 감사만 남는 상태입니다.
∎ Syn-Pneumatism(신프뉴마티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어원: Syn(함께) + Pneuma(성령)
의미: 성령의 동반 역사
해설: 우리를 낳으신 성령께서 외적 표징인 세례의 물이 뿌려질 때 그 표징과 함께(Syn) 단독으로, 이미 거듭난 우리를 거듭 새롭게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계 님이 칼빈 선생님 성례론 영문을 번역하시면서 그토록 강조하신 “forth with”ㅡ성령의 역사가 표징인 세례와 함께(with) 밖으로(forth) 나타난다.ㅡ의 참뜻을 담은 단어입니다.
∎ Syn-Doulism(신둘리즘)
어원: Syn (함께) + Doulos (종, 노예)
의미: 종으로 동참
해설: 대등한 파트너로서 Syn이 아니라, 주인이 모든 일을 결정해 행하실 때 그 곁에서 수종 드는 종이 함께한다는 고백입니다. 구원의 모든 설계와 실행은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되, 종인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현장에 함께 있어 수혜를 입는다는 겸손한 모너리즘을 뜻합니다.
이제 신인 협력설을 뜻하는 단어 Synergism에서 Syn이라는 접두어를 보실 때마다 속상해하지 마세요. 대신 사계 님이 창조하라고 하신 이 세 단어를 떠올리며 ‘임마누엘이신 하나님, 그분 은혜와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Syn, 同)하신다.’는 모너리즘 기쁨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흥마로운 시도와 결과입니다.
1)
출애굽기 14:15-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가르시고 바닥을 말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 . .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 .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 .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그리고 30절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 갔다는 기록은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것은 알지만
좌우에 벽이 된 홍해물 사이를 최소한 4 - 5 km 걸어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중간쯤 갔는데 물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거의 다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를 가로질러 길을 내셨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모두 홍해 바닥을 밟고 지나가 그 반대편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좌우에 벽이 된 홍해 바닷물을 그대로 유지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건너갈 수 있었고 그래서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건너 가서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신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현재의 신학은 행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인협력설이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3)
만약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홍해 이편에서 그 반대편으로 순간이동(teleportation)하여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곧 이들의 믿음은 이들을 홍해 이편에서 그 반대편으로 순간이동시켜 구원을 얻게 한 것입니다.
이 경우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런 경우이라면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가르실 필요도, 마르게 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1)행위가 있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2) 아니면 행위가 없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둘 중의 하나 고르시고 고르신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지 기다려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지끼을 <{도르트 신조}가 확립한 ‘성도의 견인’ 교리>
믿음은 ‘행위의 유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유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지끼을 님 질문은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냐, 안 쉬냐?’ 질문과 같습니다. 이지끼을 님은 중생 시 주시는 생명(믿음의 씨)에 담긴 본질을 모르시니, 이런 ‘신인 협력주의 이분법’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존재는 당연히 당위를 행하며 살아갑니다. 바꿔 말하면, 존재가 당위를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물론, 중생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젖먹이인 아기 중생자는 엄마 품에서 호흡을 하며 엄마 젖을 빨며 자라가지, 숨을 멈추고 엄마 젖을 빨지 않고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四季 朴埰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막 16:16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난 500년간은
믿음으로 . . . 구원을 받는다 라고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믿음은 세례라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합니다.
(행위가 있는 믿음이므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바뀐 말에서
믿음은 그 자체로 구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행위없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므로 죽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위에 제가 예를 들어 드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사계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인가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인가요?
@이지끼을 <‘(중생의 살아있는) 믿음→ 세례→ 구원’이라는 순서 뒤바꾸지 마십시오.>
여기저기 댓글들이 흩어 있어서 댓글 달기가 혼란스럽군요.
“(행위가 없는 믿음이므로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여기까지는 옳습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이미(현재) 구원’과 ‘아직(미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지끼을 님 문제는 ‘미래 구원을 뜻하는 구원’과 ‘현재 구원을 뜻하는 중생’을 구별 못 하신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꽂혀, 그것도 상반절에만 꽂혀 세례를 “믿음의 행위”로 말씀하신 이지끼을 님,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 4장 4절~5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살아있는 믿음은 일하지 않은(행위 없는) 믿음 그 자체, 행위로 오염되지 않은 믿음 순수 그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이지끼을 물론, 이 말씀이 바울 사도 말씀임에도, 마가복음 16장 16장에 적힌 “세례”에 꽂힌 이지끼을 님에게 이 믿음은 “믿음의 행위”가 없으니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면 세례가 살아있는 믿음을 만듭니까? 아니면, 살아있는 믿음이 “믿음의 행위”인 세례를 받게 합니까? 아니면, 죽은 믿음이 세례만 받으면 살아있는 믿음으로 ‘순간’ 이동합니까?
이처럼 바울 사도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행위”인 할례를 언급하시며 인간의 그 어떤 잘난 예식(“믿음의 행위”인 세례) 구원에 단 1%도 기여할 수 없다는 대못을 박으셨습니다. 교만하게도 성경 전체를 못 보는 확증편향으로 이 대못을 뽑으려는 이지끼을 님이 바울 사도 위 사도이십니까? ‘일하는 행위가 없는 순수한 믿음’에 ‘세례라는 인간의 행위’를 끼워 넣어 복음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제발 정신 차려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마십시오.
@이지끼을 이지끼을 님 세례 중생론은 하나님께 “제가 세례라는 믿음의 행위를 했습니다.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삯인 구원이라는 보수를 주십시오”라고 청구서를 내미는 신인 협력주의 ‘다른’ 복음입니다. 그게 무슨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까? 그것은 ‘거래’입니다. 이지끼을 님은 지금,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비열한 ‘비즈니스’로 추락하게 해 더럽히셨습니다. 세례의 길을 걷게 하는 ‘순수한 살아있는 믿음’을 더럽히셨습니다. 이를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四季 朴埰同
잘 보았습니다.
제글로 답변함을 양해해 주십시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것(막 16:16절)이 "행위구원"인가?"
https://cafe.daum.net/1107/Y4OQ/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