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극일(金克一1382∼1456)은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 김서의 간곡한 관직 진출 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을 봉양해야 함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모셔서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아들 김맹(金孟)은 물론 손자 김준손(金駿孫)·김기손(金驥孫)·김일손(金馹孫)의 훈회에도 정성을 기울여 이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하였다. 벼슬은 통덕랑(通德郞)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청도 출신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1498년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사형을 당하였다. 김일손의 죽음은 김해 김씨 일족뿐만 아니라 지역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청도 지역에 16세기 이후 은거의 풍토가 유행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고조할아버지는 포은 정몽주와 교유한 김항(金伉)으로 청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할아버지는 모암 김극일(金克一)로 야은 길재(吉再)에게 수학했고 효성이 지극하여 절효(節孝)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남계 김맹(金孟)으로 김숙자(金叔滋)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형인 김준손과 김기손도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가문 전체가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의 가계는 영남 사림의 정통적인 맥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문 배경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도학과 문학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김일손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소학』과 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7세 때부터 경술과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권오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갈고 닦았다. 이 시기의 수학 경험은 이후 김일손의 생애를 통하여 사고와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아가 운계 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 좌랑·이조 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관인으로서 김일손의 품계는 정5품을 넘어서지 못한 낭관(郎官)이었으나 청요직인 문한(文翰)·언론 삼사·전관(銓官)·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상제와 관제, 인재 등용 제도를 비롯하여 사회·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구를 건의하고, 노산군(魯山君) 입후(立後)를 최초로 거론한 것, 무오사화의 빌미가 된 훈구파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고발하고 스승인 점필재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손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면서도 진취적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대유(金大有1479-1551)는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일손(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