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의 사자상
김상태(명예교수, 기계IT대학 기계공학부)
스위스는 도시와 호수, 산이 어우러져서 다양한 매력들을 보여주는 나라로서 매년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스위스 루체른은 비교적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이다. 루체른은 파리에서 4시간 반, 밀라노에서 3시간, 취리히에서 1시간, 베른에서 1시간 거리이다.
루체른의 어원은 라틴어 Lucius(민물고기라는 뜻) 또는 Lucerne(등불이라는 뜻)에서 기원을 찾는다. 1415년 스위스 연방이 되었고 1856년 철도가 들어서면서 스위스 도시 전체가 공업화되었다. 루체른은 스위스 내 7위 크기의 도시이며, 스위스 내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를 시행하고 소득세율도 낮다.
루체른은 로이스강을 끼고 있어서 많은 다리가 있다. 대표적인 다리가 1333년 건설된 지붕이 있는 카펠교인데 1993년에 화재 후, 복원되었다. 레오데가르 교회는 도시의 수호성인데 735년에 건축되었으나 1633년 르네상스 스타일로 재건되었다.
“빈사의 사자상”은 스위스 내의 관광명소 가운데 특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으로서, 덴마크 조각가 베르트 토르트발젠이 기획하고 루카스 아혼이 1824년 완성한 작품으로 작은 연못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다.
조각에는 스위스 국기에 있는 십자가 문양이 보이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문양인 백합이 보인다. 사자의 등에 꽂힌 부러진 창과 방패를 배고 잠든 사자의 모습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함과 쓸쓸했던 최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사자상 아래쪽에는 그 당시 전사한 용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의 배경 이야기는 스위스 용병에 관한 이야기로 1792년 프랑스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재위 당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시민들이 엘리제궁을 쳐들어갔다. 군중 대표가 스위스용병 786명의 대표에게 항복하면 스위스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이 사이 루이 16세와 마리는 무사히 도망갔고 결국 스위스 근위병들은 모두 몰살당하였다. 이때 한 용병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유서에는 ”우리 후손의 일자리를 위하여 항복하면 안 된다“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용병들 때문에 유럽 내에서 스위스인들의 신뢰도는 제일이라고 한다.
사실 스위스 용병은 슬픈 역사 이야기이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스위스는 국토의 75%가 알프스 산악 호수지대이고 대부분 평균 해발이 높은 지역으로 춥고 척박하여 가난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형적으로 교통요지라서 유럽 내에서 어느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는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라서 전쟁의 참화에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게다가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차남 이하의 남자들은 스스로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젊은이로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돈 받고 목숨을 바꾸는 용병이었다. 따라서 스위스 내의 남자들의 직업이 외국으로 용병으로 나가는 것이 제일일 정도였다.
용병들의 고용주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현재에도 바티칸 교황청의 치안은 스위스 용병이 맡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 중립국으로 공인되면서 용병산업도 더 이상 못하게 된다. 이에 시계 보석세공업 등의 정밀기계 그리고 스위스 비밀계좌은행(사실은 검은돈 세탁이라고 보면 더 쉽다) 등의 사업에 뛰어들면서 GDP가 8만6천 달러에 이르는 부국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의 히틀러에게 박해받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면서 스위스 비밀은행에 맡겨놓은 돈·보석들이 엄청 많았다. 대부분이 학살당하면서 돈은 원주인한테 못 가고 이 돈들이 스위스가 잘살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용병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이야기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을 경호하는 스위스 근위대이다. 이 근위대는 1506년 설립됐으며 100명의 용병으로 구성되고 스위스에서 태어나 가톨릭을 믿으며 키 174㎝ 이상의 수염이 없는 미혼 남성이어야 입대 가능하다.
신병들은 매년 5월 6일 선서식을 하는데 이 날은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교황청을 침략한 날이다. 로마는 독일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간 '사코 디 로마'라고 하는 로마 약탈이 시작되었다. 로마에는 르네상스식 건물이 많이 없고 바로크식 건물이 많이 지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의 로마 약탈 때문이었다 한다.
당시 180여 명의 근위병 중 147명의 스위스 자원병이 클레멘스 7세 교황을 끝까지 호위하다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려 오늘날까지도 교황청의 수비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맡기게 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근위병이 있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은 몸사림을 했으나 스위스 근위병만은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교황을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바쳤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교황에 대한 충성심은 교황을 감복시켰고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로마교황청의 근위병들은 스위스 젊은이들에게 국한된 자격을 주고 있고 이는 스위스 젊은이들에게 자랑과 명예거리다. 지금의 110명도 모두 스위스인이다.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가 창립된지 500년이 되는 2006년 5월 7일을 기념해 약 70명의 퇴역 근위대원이 28일간에 걸쳐 720㎞의 도보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6월 4일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광장에 도착했다. 720㎞는 1506년 최초의 근위대원으로 선발된 150명이 스위스 벨린초나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까지 걸어온 길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교황청에서 이들을 맞으며 "이번 행진은 최후의 순간까지 교황을 지킨다는 희생정신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으로, 교회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치하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여행 떠나기 전에 관광명소라는 “빈사의 사자상”에 대한 정보를 읽고 무심하게 지나갔으나, 막상 빈사의 사자상을 보는 순간 사자의 표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했다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