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내게 준 건 투쟁뿐이야"라고 말하는 정치범과 "남자들이 조금만 여자 같다면 폭력도 줄어들거야"라고 말하는 호모가 감옥의 한방에서 동거하면서 시작되는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복사 테이프로 떠돌아다니던 때는 호모라든가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내리던 때가 아니었다. 친구를 통해 화질이 엉망인 이 영화를 누구네집 구석방에선가 테이프로 보았을 때와, 훗날 텔레비전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그래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리나(윌리엄 하트)와 발렌틴(라울 줄리아). 얼핏 정치영화같기도 하고 다다를 수 없는 남성간의 사랑이야기같기도 한 다소 이색적인 이 영화 속 두 연인의 심리를 추적해가다 보면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가치있게 인정하는 일이며 인간이 이렇게 소통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아름다운 에너지야말로 생의 정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과 만나게 된다.
처음에 정치범인 발렌틴은 호모인데다 잡범으로 들어온 모리나를 경멸하지만, 모리나는 빠른 가석방을 위해 발렌틴으로부터 조직의 접선지점이나 암호 따위를 깨내기 위해 침투하는 형식으로 두 연인의 감옥에서의 동거가 시작되지만, 둘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서로의 허위의식을 벗어버리는 생체험을 하게 된다. 정치범인 발렌틴은 그 좁은 감옥 안에서 모리나가 지어내는 환상적인 영화이야기와 보드라운 여성적인 손길과 위로에 마음이 흔들리고, 모리나에게 발렌틴은 인간이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목에 푸른 스카프를 두르거나 그 좁은 감옥 안에서도 손수 만든 것 같은 분홍색 커튼을 치고 발을 꼬거나 비스듬히 누워 끊임없이 발렌틴에게 음식을 먹게 하려는 모리나 역의 윌리엄 하트를 보고 있으면 우습기보다는 또 다른 숙연함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가석방을 앞두고 발렌틴이 모리나에게 해주는 이 말. "사람들이 더 이상 너를 모욕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그게 네가 존중받는 길이야. 더 이상 누구한테도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호하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모리나. 발렌틴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모리나의 전 생이 흔들린다. 결국 발렌틴의 부탁으로 발렌틴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전화를 거는 모리나. 접선이 실패하는 순간 정부요원이어서가 아니라 암호를 알고 있는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발렌틴의 동료로부터 총을 맞게 되는 모리나는 결국 죽어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사랑이란 말은 발렌틴에겐 "당신을 잃게 될까봐서 아직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말"이었다면 모리나에겐 "이제 내 인생을 돌볼 때"라는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주게 하는 말이었다. 어느 쪽이거나 이들의 사랑은 내게 긴 여운과 함께 쓰라림을 남겼다. 그것이 '행복한 죽음'이었는지는 오직 거미여인인 모리나 자신만이 알겠지만.
(신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