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란 석가모니께서 깨치신 후 첫법문을 전할 때부터 부파 분열이 시작되기 전까지를 말한다.
그렇게 나누는 이유는 부파로 나뉜다는 게 석존의 법을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므로.
처음 두 파로 나뉘었는데.. 상좌부(上座部 · Theravada)와 대중부(大衆部 · Mahasamghika)가 그것이다.
이 때 주류인 상좌부에서 대중부가 갈라져 나왔기에.. 상좌부는 정통불교라 하는데..
대중부에 비판을 받았듯이 부분적으로 석존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대중부를 보면 대중부는 대중에게 법을 전하며 불탑 수호를 강조한다.
그 말은 상좌부는 재가자와 사회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그 당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주 적어 경전에 주로 의지하는 편인데..
경전은 북방의 <아함경전>과 남방의 <니까야>가 전해 온다.
두 경전은 석가세존의 진설이라 하듯.. 다른 부파에 의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함경전> 구전으로 전해진 것을 2,3 세기 당시 성스러운 문자로 인정받는 산스크리트어[산스어]로
수집정리되어 문자화 되었고, 그것은 3세기 부터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되었고,
고려의 8만대장경 속에 실려 지금에 전하며,
그것은 1998년에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로 완역되었다.
<니까야>는 인도 본토에서 구전되던 것을 평민어인 남방 빨리어로
기원 전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문자로는 처음 수집정리했고..
격침을 걲으며 현재의 <니까야>로 정착되어..
21세기 초 한글로 번역되었다.
결국 우리는 20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비로소
부처님 진설(眞說)로 전해지고 있는 경전을
한글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니..
언어는 그 나라의 자존심임을 본다면.. 21세기에 한글로 번역된 것이 기뻐해야할 뉴스이기만 한 것인지..
만일 근본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자료는 <아함경>과 <니까야>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을 우선하고 실리를 중시여기는 자라면 이미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근본경전으로
서구에서도 잘 연구되어 있는 니까야를 우선 선택하리라.
그리고 시간이 나면 아함경을 참고하겠지.
효진은 <잡아함경>을 우선 선택했다. 빨리어는 모르고 한문은 한글을 의지해 보는 수준이니
당연한 선택이 아닌가^^..
한편 중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는 한문으로 역경된 시기로 보는 게 현명할 것이니,
구마라즙 법사(344~413)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즙 법사는 카슈미르에서 대,소승 모두를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는 대승 경전을 주로 번역했다.
그 말은 라즙 법사님의 스폰서인 왕이 대승경전을 원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들은 상좌부라 부르지 않고 소승이라 불렀다.
소승이란 자기들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며 외부에서 초청하면 그럴 때만 나아가 법을 전하는 소극적 불자들이다.
그에 반해 대승은 불교를 외부에 적극적으로 전하고 사회에 참여하면서 불국을 목적으로 실천하는 불자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수행자가 아닌 왕이라면 어떤 불교를 선택할까?^^..
남방불교는 스스로를 소승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좋아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고 아라한을 목적으로 수행만 한다면 그게 소승 아닌가.
마찬가지다. 대승이라 불리지만 꺠침[깨달음]이 목적으로 수행만 전념하며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라면 그게 소승이 아니냐 말이다. 소대승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니까야>는 말할 것도 없고, <아함경> 역시 출가 수행자를 위한 내용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왜냐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승한 이들이 모두 출가 수행자였기에.
그럼에도 재가자에게 아쉬울 게 없는 것은 세존께서 재가자나 사회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한 내용은 약간이니마 전해오고 있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얼마든지 방편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존의 진설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와 사회인에게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으로
그것이 근본불교요 가르침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입장에 따라 필요한 것을 불교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다.
근본불교의 정신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평등과 자유로 본다.
"사람은 출생 신분으로 차별받지 아니 한다"는 평등과 "누구든 일체 고에서 벗어난다"는 자유라는 것.
불교사를 돌아 볼 때.. 석가모니 사상이 제대로 구현된 적이 있었나?..
아니다. 없었다.
왕정 정치라는 시스템은 인간 모두에게 평등과 자유를 줄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다.
21세기인 지금 대한민국이나 미국은 민주주의 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민주제의 기반은 바로 평등과 자유다.
민주제는 불교를 꽃피울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불교는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제왕적인 전 근대적인 종교에 눌려 맥을 못추고 있다.
그 이유는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으로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불자들 자신이 잘 모르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닌가.
우리 전통 불교라 할 수 있는 대승불교는 1800 여년을 왕권 정치 속에서 익어버린 종교다.
고구려 등 삼국에 전해진 불교가 왕권을 보호하는 불교였는데 그 시스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구 시스템을 불교의 근본정신인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고치는 게 쉽지가 않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름을 행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본 의미는 잘못되 부분만 손보면 바름은 그냥 드러난다는 것으로 확대해석할 이유가 없다.
즉 현재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가 있는 데 그것을 해결하면 그 외 부분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좌부에서는 3세와 일체가 실유라 하는데.. 실유가 아님을 보여주어 그것만 깨뜨려 그 부분만 조심히 보면 그 외 상좌부 교설은 쓸만하다는 것이다.
효진이 <잡아함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니까야>에는 전하지 않는데.. 석가세존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상을 <잡아함경>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방불교는 3특상이라 하야 무상. 고. 무아를 핵심으로 가르치는데
<잡아함경>에는 그것 외에 [공]을 전하고 있다.
하여 근본불교의 핵심은 무상. 고. 무아 그리고 공이 되며..
상좌부불교와 구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