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손진숙
시장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운 이웃이나 다름없는 친숙한 얼굴들이다. 길가에 좌판을 벌이고 일렬횡대로 앉아 있는 아줌마들.
뒤집어 놓은 상자 위 소쿠리에는 상추, 오이, 깻잎, 당근, 미나리, 양파, 생강, 무, 배추가 오밀조밀 진열돼 있다. 그들은 싱싱함에서 결코 뒤지지 않으려는 듯 저마다 제 빛을 한껏 뿜어낸다. 엉덩이만 겨우 걸칠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엉클어진 부추를 다듬는 아줌마 앞에서,
“상추 좀 주세요.”
나 말고도 채소를 사려는 사람이 두셋 더 있다. 상추를 담으려고 봉지를 꺼내며 여태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한다. 해가 서쪽으로 서너 자나 기울었는데도.
“돈이 잘 벌리나 보네요.”
“오늘은 돈 벌고 내일은 돈 쓰러 간다. 친정 엄마 제사에…….”
고향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야위고 그은 양 볼에 발그레 피어난다. 천 원어치만 달라고 했는데 자꾸만 더 담는다.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녜요?”
내 말에 뒤에서 기다리던 이가,
“많이 줄수록 좋지, 뭐 그러노?”
아줌마는 비닐봉지를 내게 건네며,
“그런 말 마소!”
그 음성의 여운이 길게 꼬리를 물고 가슴에 다가온다.
바로 옆에도 내 단골인 채소 파는 아줌마가 있다. 시골에서 직접 가꾼 신선한 야채를 펼쳐 놓았다. 파 천 원어치를 산다. 파를 담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감이 담긴 박스로 가더니 감 예닐곱 개를 파봉지에 넣어 준다.
“우리 집 감나무에서 딴 건데 약을 안 쳐서 꼬라지는 이래도 맛은 있다.”고 하면서.
육친 같은 정이 밀려든다. 감을 하나 꺼내 본다. 감치고는 극히 꾀죄죄한 행색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품질 좋은 감보다 달콤한 감촉으로 침샘을 자극한다.
그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아줌마 둘이서 회를 쳐 파는 가게가 있다. 고무대야 두 개에 살아서 꼬리치는 도다리와 전어가 전부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 했다던가. 식구가 일찍 귀가하기를 바라 전어 1킬로를 주문한다. 눈길을 떼지 않고 회 치는 양을 바라본다. 얇은 고무장갑을 끼고 한 점 실수 없이 잘도 썬다.
“어쩜 그리 칼을 잘 다루세요?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썰다가 고무장갑까지 썰어 버렸는데…….”
힐끔 나를 돌아보고 웃으며,
“우리하고 같나? 우린 자고 일어나면 이 짓인데.”
그 차이였다. 하루하루 꾸준하다면 도(道)란 놈이 안 트이고 배길 수가 있으랴.
이번에는 콩나물 파는 아줌마다. 집에서 손수 기른 콩나물을 동이에 담은 채 판다. 적당한 길이에 머리부터 뿌리까지 매끈한 것이 살도 오동통하게 올랐다.
“요새 콩나물이 잘 자라나 봐요.”
“날씨가 따뜻해서기도 하지만, 다 정성이지.”
‘정성’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내 귀에 와 머문다. 정성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던가. 아무리 조건이 좋다 해도 정성 들이지 않고 어떻게 실한 콩나물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 날 정성을 쏟은 콩나물을 받아들고 나도 ‘정성’이라는 화두(話頭)를 붙잡는다.
마지막으로 가지를 팔고 있는 아줌마다. 가지나물은 남편이 좋아한다. 튼실한 자줏빛 가지 너덧 개를 골라 값을 치르고 나니 깻잎이 눈에 들어온다. 깻잎 한 묶음을 달래서 값을 치르려는데 가지 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허리에 두른 앞치마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보이면서도 다른 돈이라는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 옥신각신하다 가지도 깻잎도 놓아두기로 한다. 이미 계산한 물건 값을 다시 내고 싶지는 않다. 쓰디쓴 생 가지를 씹은 기분으로 걷다보니 마침내 시장 골목 끝이다.
시장에 가면 다양한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채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온갖 삶의 이야기들이 생산, 진열, 판매된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푸짐한 덤이 있고, 푸근한 정이 있다. 시장 바닥에서 도를 터득하는가 하면 공안(公案)을 구하기도 한다.
시장도 사람이 부대끼는 곳이라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 어이없는 오해나 마찰이 빚어지기도 한다.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착오로 인해서라면 속히 풀어버려야 한다. 내일이라도 시장에 가면 가지를 파는 좌판을 먼저 찾으리라. 좌판 위의 가지 빛깔이 햇살을 받아서 더욱 먹음직스러울 것이다.
《수필과 비평》2014 -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