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5. 08
실패 속에서 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다. 실수와 패배는 뼈아프다. 크나큰 실패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그를 통해 배운다. 왜 실수했는지, 왜 패배했는지 분석하다 보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동안 몰랐던 나의 문제, 우리 팀의 문제를 우리가 넘어졌을 때 알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다. 돌이켜보면 실패라고 느껴졌던 그 순간은 실패가 아니었다. 성장을 위한 과정이었다.
최근 우리 마인츠는 2경기 연속 패배를 겪었다. 10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리다가 시즌 막판에 흔들리고 있다. 무너지지 말자고,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문제를 분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 팀 모두 한 마음이다.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 역시 수많은 패배와 실수를 통해 다듬고, 가다듬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또 다른 결과물을 위해 다듬어지는 중이다. 그 과정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볼프스부르크전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평소 보여주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0-3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보 스벤손 감독님은 평소 훈련에서 우리 팀의 철학과 훈련 방식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신다. 운동장 안에서만큼은 그 어떤 팀보다 에너지 넘치게, 열정적으로 임하기를 바라고 요구하신다. 하지만 볼프스전에서는 ‘마인츠 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전술적인 문제보다, 우리의 정신력 문제가 컸다. 감독님은 지난 10경기에서 나온 우리의 열정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부분에서 소극적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우리를 다그치셨다. 상대보다 스피드, 파워, 공을 탈취하겠다는 투쟁심이 부족했고 첫 실점을 이른 시간에 내준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람에 연달아 실점해 버렸다고 하셨다. 다가오는 금요일에 샬케전이 있으니 오늘을 교훈으로 여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경기가 끝나고 마인츠로 돌아오며 나는 지난 날의 내 모습을 새롭게 돌아봤다. 후반기 시작이 참 좋았다. 나조차 상상하지 못한 활약을 하며 자신감이 생겼고, 훈련과 경기가 즐겁고 행복했다. 이대로 흐름을 쭉 이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분명 컨디션이 떨어질 때가 올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딱 요즘이다. 즐거움보다 플레이에 대한 압박감을 느낀다. 시즌 막바지라 플레이 하나하나, 결과 하나하나가 갖는 영향력이 크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이전보다 10%, 20% 더 요구되는 시점이다. 하마터면 이 부분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는데, 볼프스전 패배를 통해 내가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안일하게 생각한 부분은 없는지 돌아봤다. 그런 순간이 주어져 참 감사했다. 승리의 기쁨은 물론 좋지만, 때론 패배가 약이 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지금 이 순간도 내게는 쓴 약이 될 거로 생각하니 떨어진 자신감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한 영상을 봤는데, 내게 깊은 울림을 줬다. NBA 선수 야니스 아데토쿤보의 인터뷰 영상이다. 그가 속한 밀워키 벅스가 NBA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후 진행한 인터뷰였다. 밀워키 벅스는 유력한 우승 후보였기에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 패배였다. 경기 후 선수는 대체로 자기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해 말하기 힘들다. 치열한 승부 끝에 패배한, 야니스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머릿속은 그저 하얘진다. 그런데 야니스는 자기 생각을 소신있게 말했다. 올 시즌은 실패라고 볼 수 있냐는 기자 분의 질문에 야니스는 “당신은 매년 승진을 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매년 실패하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늘 목표를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이런 순간은 실패가 아닌 성공을 위한 과정이라는 게 그의 말의 핵심이었다. 존경스러웠다. 정신없고 실망감이 컸을 텐데 평소 자기 철학이 얼마나 확고한지, 어떤 가치관을 두고 경기에 임했는지 느껴졌다. 실패한 시즌이라 말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 가치관을 말하고, 패배한 경기 속에서 발전하고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만을 말하고 추구하는 요즘 시대에서 야니스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강조했다. 진심으로 멋있는 선수라고 느꼈다. 무엇이 진짜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고심하게 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목표로 했던 성과를 눈앞에 두고 달성하지 못한 적이 너무나 많다. 실패라고 느꼈던 순간도 사실 있다. 홀슈타인 킬에서 승격을 눈앞에 두고 놓쳤다. 2016년 전북현대에서 FC서울과 리그 우승을 두고 치른 경기에서 패배하고 준우승을 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도 떠오른다. 정말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순간들이었다. 경기에서 져서 우승에 실패했고, 러시아 월드컵도 실패한 대회라고 그 당시에는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실패가 아니다. 절망적인 순간에서 얼른 벗어났다.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더 노력했다. 그 결과 우리 전북은 2016년 ACL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에 섰고, 우리 한국 대표팀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라는 더 큰 기쁨과 환희를 선사했다. “성공은 성공이 아니고,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라던 이영표 선배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뒤바뀔 수 있다는 걸 경험한 나로서는 공감이 많이 간다. 그러니 우리가 수없이 겪는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닌가.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라는 책에 아주 소중한 말이 나온다. “중요한 건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을 때 그걸 피하려고 자꾸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거란다. 회피하지 않고 그 고통에서 배움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지.”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실패라고 느껴졌던 순간을 마주하고, 잊으려고 하지 않고, 부족한 점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노력했다. 좌절했던 그 순간은 패배, 실패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결과만 보면 패배가 확실하다. 하지만 진정한 패배는 그 이후 시간이 결정해 준다고 생각한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발판으로 삼아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공은 계속 굴러가고 경기는 다음 주에 또 열린다. 다음 경기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K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했다고, 승격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월드컵에서 실망스러웠다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있었더라면 난 이곳에 서 있지 못했을 거라 확신한다. 모든 건 더 큰 성공을 위한 과정이었다. 야니스의 말처럼 말이다.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실패가 아닌 과정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자칫 안일해질 수 있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노력의 정도는 점수를 매길 수 없다. 결과처럼 뚜렷하지도 않다. 내가 오늘 충분히, 진심으로 노력했는지 아닌지는 자신만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 스스로 떳떳하고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빛을 발한다. 스포츠처럼 노력과 결과가 투명하게 보이는 분야에서는 더 그렇다. 전북에 있을 때, 직접 프리킥으로 골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발잡이 선수는 보통 킥력이 좋아 세트피스를 전담한다. 왼발 스페셜리스트라는 타이틀을 가진 선수는 가치가 높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늘 마음에 아쉬움이 있었는데, 프리킥 골을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난 후부터 계속 연습했다. 훈련이 끝나고 혼자 남자 프리킥을 찼다. 국가대표에 소집되었을 때도 연습했다. 홍철 형이 내 옆에 와서 몇 번 툭툭 차는데 와, 진짜 잘 들어가더라. 역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달랐다. 나는 그런 선수들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했다.
2018년 ACL 16강, 부리람 유나이티드전에서 드디어 성공했다. 나의 첫 직접 프리킥 골! 그 어떤 골보다 값진 골이다. 프로 선수가 된 후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첫 결과였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걸 느꼈다. 그때 골을 넣고 엄청나게 포효했던 기억이 난다. 선수들이 가끔 골을 넣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뻐하는 경우가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 이유는 그 선수만 안다. 그 한 골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을 거다. 우리 민재가 생각난다. 나폴리에서 얼마 전에 우승을 확정 지었다. 민재와 선수들이 우승을 위해 얼마나 큰 압박감 속에서 노력했을까. 그걸 이겨내고 달성한 것에 박수를 크게 쳐주고 싶다.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들은 반드시 위대한 일을 해낸다.
얼마 전에 우리가 상대한 샬케도 그렇다. 샬케는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강등권에 있었다. 분데스리가 강호, 전통적인 팀 이미지가 강한 샬케는 최근 2부로 강등되거나, 승격 후에도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그런 샬케가 우리 마인츠를 상대로 ‘예전의’ 샬케 모습을 보였다. 진짜 절실해 보였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팬들도 그랬다. 홈경기에 원정 팬이 이렇게 많이 온 건 처음 봤다. 고연전이 생각나기도 했다. 경기장 3분의 1을 샬케 팬들이 채웠다. 그들이 얼마나 분데스리가에 잔류하고 싶어 하는지 느껴졌다. 선수들이 이 경기에 목숨이 달린 것처럼 뛰더라. 득점 하나, 실점 하나에 느껴지던 그들의 환희와 좌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최근 여러 차례 겪은 좌절을 통해 샬케는 분데스리가에 대한 간절함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을 거다. 세 번째 골을 넣었을 때 마인츠의 홈구장은 푸른색이 됐다. 우리는 축 처졌고, 샬케는 벤치에 있던 선수들까지 다 뛰어나와 팬들과 기뻐했다. 마치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한 팀처럼 말이다. 우리 마인츠가 가져야 할 모습이었다. 분명 지난 볼프스전보다 나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이번에 상대한 샬케보다 절실함이 부족했다.
다음날 회복 훈련에서 감독님은 우리에게 지난 볼프스전과 샬케전을 준비하며 훈련 과정이 완벽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만족할 만한 훈련을 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일단 잘 쉬고 남은 3경기를 위해 다시 제대로 준비하자고 하셨다. 시즌 막바지가 되면 으레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그 분위기를 다잡는 게 감독님의 몫이라면, 우리 목표를 계속 인지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목표는 확실하다. 유럽 대항전 진출이다.
6위부터 9위까지 팀의 승점 차이가 워낙 촘촘해서 남은 세 경기 승리가 절실하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누구도 우리에게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마인츠는 지금까지 유럽 대항전에 딱 한 번 나가본 팀이다. 그런 마인츠가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리그 3경기를 남겨두고 있는 지금 여전히 그 목표를 손에 쥐고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쁘고, 우리 팀에는 큰 동기부여다. 이루지 못하면 당연히 아쉽겠지만,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진 팀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이 이미 자랑스럽다. 시즌 후 우리 마인츠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성장해 있을 거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얼마나 더 잘 다듬어진 선수로 우뚝 서게 될지 기대된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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