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행(四川行) 23, 24
“그래서 지금 장로급 인원들은 모두 적의 본진을 치러 갔단 말입니까?”
무정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들렸다. 얼굴 오른쪽의 검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굳힌 무정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들의 구성이 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연륜이 있고 무공수위가 높은 이들은 모두 본진에 억류되어 있는 희명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잠행한 것이었다. 그것이 벌써 삼일전인데 아직까지 소식은 없었다. 그것은 당세극이 주창한 것인데 명군은 희명공주의 안녕을 위해 출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한나라의 국방과 공주중 누가 더 중한지는 생각 없어도 알 수 있는문제였지만 황제의 결정이 그러니 할 수 없었다.
본진으로 간 사람들은 몇몇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무공수위도 상당하고 경험도 풍부하기에 별 걱정은 안하고들 있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희명공주는 본대의 중앙에 세워져 있는 십여 장 높이의 망루 꼭대기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다. 대명의 공주라는 신분을 놓고 봤을 때는 어이없는 대접이라고 대다수의 일행들이 울분을 터뜨렸지만, 언젠가 본 서책에서 서장군의 특색중 하나로 그러한 것을 행한다는 것을 읽은 것 같았다.
인질에게는 모욕이 뒤따른다. 특히나 서장군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런 그들이 희명공주를 가만 놔둘 리는 없었다. 그래서 곁에 놓고 볼 수 없도록 높은 망루를 세우고 거기에 가두어 놓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인질을 대하는 최상의 예우인 것이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흥분하는 이들을 보니 적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음을 짐작하는 무정이었다.
“그래서, 청성이 한 일이 뭐가 있소이까! 우리 당문이 아니면 이렇게 대승을 거둘 수 있겠소이까!”
“뭐라구! 말이면 다인줄 아나! 당문이 잘해서 이렇게 승리한 것인가? 저기 무정대협이 힘써서 그리 된 일이지...... 일개 문(門)주제에 무슨 힘이 대단하다고 저리 유세야 유세는....”
“아니 네가 감히 청성의 이름을 믿고 막말하는 것이냐! 우리가 아니었으면 후방에서 원호는 누가 책임지겠느냐!”
무정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초옥 안에서는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 전투의 공을 서로 가지려하는 청성과 당문이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 혈기에 그런 논쟁하나야 별 흠이 될 것이 없었다. 허나 이것은 매일이다시피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음 계획을 세우자는 미명아래 모여 매일 하는 것이 이 짓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다른 것이 이제까지는 패배의 책임을 서로 돌리다가, 승리의 무훈을 가지려 저 난리들이었다.
“아미타불... 두 분 시주께서는 잠시 조용히 해 주십시오. 지금은 그럴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명각스님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어떻게 저들을 계속 막아내는가에 있습니다. 부디 자중을 부탁드립니다. 아미타불...”
보다 보다 못 참겠는지 명각이 한마디 하자. 아미의 조경사태가 이를 거들었다. 인내와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그들이 나설 정도니 그간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무정은 이해가 갔다.
조경과 명각의 말에 사람들은 잠시 잠잠해 졌다. 허나 그들의 눈은 불만족스러운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제길.... 비구니와 땡중은 한편이라 이건가?”
조그맣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들을만하게 누군가 속삭였다. 아까 무정의 앞을 막은 당문의 사람이었다.
쥐 눈을 쪼륵 굴리며 말하는 것이 여간 얄밉지 않았다. 아미파의 사람들과 명각, 명경의 눈이 깊이 가라 않았다. 거의 내분이 일 지경이었다. 무정의 눈이 반짝였다.
“이봐, 당신....”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중인들의 귀에 흘러들었다. 무정이었다. 그의 눈은 서슬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쥐 눈에게 향하고 있었다.
“선택해라....”
나직한 무정의 목소리는 계속 흘렀다. 그런 그의 몸에서 서서히 살기가 피어올랐다.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인지. 그냥 너 혼자 돌아가던지. 아니면...... 적군과 합세해서 우리를 칠 것인지....”
“ ! ”
쥐 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마도 그게 제일 크게 뜬 눈인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매서운 눈길이 느껴졌다. 순간 그의 눈에 힘이 풀렸다.
“험험, 이무슨 소리를......난 자랑스러운 당문의 제자로써 협의를 지키며...”
“니미 쓰벌, 그럼 닥쳐 이씁새야! 싸움도 우라질하게 못하는 주제에 뭔 말이 그리 많아!”
상귀의 호통소리가 들리며 쥐 눈이 움찔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능멸 당했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와 함께 그의 주위에서 당문 제자 몇몇이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였다.
“앉아!.....”
나직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살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하늘에 맹세하건데 한 번도 느껴 본적이 없는 살기였다. 쥐 눈 일행은 무정을 바라보며 목젖을 젖히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냥 서 있었다.
“허,, 이것 참, 죄송합니다. 무대협. 어린 친구들이니 한번쯤 용서를 해 주시지요.... 소림과 아미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당패성이나섰다. 지금 현재로써는 자신의 당문의 최고 배분이었다. 나서기가 뭣했지만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이들은 그조차 다루기 힘든 녀석들이었다.
당패성의 말에 무정은 서서히 살기를 거두었다. 허나 거두기 전에 한명 한명씩 눈을 마주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눈을 마주칠 때 마다 슬금슬금 그 눈을 피했다.
“아미타불, 무정시주 솔직히 저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륜전에는 어떤 대책도 없는 바, 무시주께서 혹 복안이라도 갖고 계시는 지요....”
불호과 함께 명각이 무정을 향해 의견을 물어왔다. 이제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참이었다.
“...........”
무정은 말이 없었다. 그도 난감했다. 더구나 그는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그럴진대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몸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구여신니의 말을 전해 듣고는 조금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무정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자신이 이들을 이끌어야 했다. 이들을 지켜내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먼저 최전방에 서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무정에게는 답답하기만 할 노릇이었다.
“어르신들이 돌아오십니다!”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나갔던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얼굴 가득히 희색을 띄우며 서로 일어서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온 것만으로도 살아난 것 같은 그들이었다.
무정도 일어섰다. 그의 눈에 문 저쪽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서서히 걸어갔다.
“헉. 이, 이런 장로님들 괜찮으십니까!”
“수혁장로님, 수벽장로님, ......아,....아니...가주님까지!”
“조일사저님..도대체 이게...”
추레한 몰골에 여기저기 피칠을 한 그들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실패였을 것이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대단한 경력을 지닌 사람들었다. 청성의 일검제운(一劍制雲 )도량진인과 야월검(夜月劍)운명진인, 당가주 당세극, 쌍격천노(雙擊天老)수혁, 수벽장로, 아미의 조일사태와 조연(朝捐)사태와 기타 그들의 수족과 같은 제자들이었다. 근 이십 여명이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은 이들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 십여 기의 말이 보였다. 그 위에 여러 사람들이 포개어져 있었다.
무정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완벽한 실패였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장창병만으로 이루어진 선발대만 이천이라면 그 뒤의 병력은 배 이상 되는 병력일 것이었다. 특히나 서장의 기마병은 상당한 위력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무정의 왼팔과 같이 철갑으로 온몸을, 말과 함께 둘러싸고 돌진하는 전법을 쓴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원거리 궁수는 필수적으로 있을 것이었다.
대충 추산해도 오천 이상의 병력이 어림잡아진다. 그 인원을 무공이 있다는 이유로 이십여 명이 간다고 뭐가 될 줄 알았다면 미친 소리일 것이었다. 그의 눈에 묵묵히 서있는 사람들 뒤로 말에 매여진 사람들이 땅에 내려지는 것이 보았다. 대부분 사망자였다.
부상자도 있었지만 상태가 중하게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 ! ”
무정의 눈이 커졌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슴이 요동치며 머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로 물은 의복을 입고 오른손에 중원의 것이 아닌 서장의 검을 꼭 쥐고 혼절한 여자였다. 문득 그는 말위에 엎드리고 있는 그녀의 뒷등과 목선이 많이 친숙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의 신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무정대협도 있었는가?... 이런 꼴을 보이고 말았네......?”
무정을 알아보고 당세극이 허허롭게 말을 붙였다가 머쓱해졌다. 그가 일별도 안 한 것이었다. 무정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친숙한 느낌이 커졌다. 아미의 사람들이 그 여인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듯 작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순간 무정의 코에 아릿한 향기가 느껴졌다.
“............”
그는 말이 없었다. 이 향기는....이 내음은 ......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향기였다. 단 한 번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본적은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 어느덧 당당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향기였다.
무정의 발길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신형을 정지했다.
“흐흑,.... 려군아, 려군아! 눈을 떠 려군아, 응? 무시주가 와 있어! 려군아!”
여신스님의 목소리가 무정의 가슴에 박혔다. 려군, 그랬다. 려군의 향기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려군의 향기였다.
무정은 여신이 안고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왼쪽 팔은.....없었다.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는 것이었다.
무정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었다. 무정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여신의 품에서 려군을 빼앗듯이 건네받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흡사 잠을 자고 있는 듯 했다. 가녀린 그녀의 얼굴선이 무정의 눈에 커다랗게 각인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군데군데 핏자국이 진 지금도 ........
무정에게는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수투를 끼고 있었지만 따스한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멍한 눈길로 손을 그녀의 머리 뒤로 옮겼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나직한 손길로, 그렇지만 힘차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정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두근........두근..’
려군의 작은 고동소리가 자신의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무정의 눈에 격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의 정신이 비로소 되돌아왔다. 자신은 포기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나, 혹은 그 누구에게도..... 미려군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있는 것이었다. 아직은....무정은 신형을 돌렸다.
“고죽노인!. 어디 있나 고죽노인!”
그답지 않은 다급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고죽노인은 저만치 뒤에서 지켜보다 무정의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달려왔다. 그는 무정의 품에 안긴 여자를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설마 무정이 아는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였다.
“살릴 수 있겠나? 아니 ....살려야 해...의원,, 의원 어디있나. 어서!”
무정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횡설수설 일보 직전이었다.
“일단은 저리로 가세 거기가 부상자들을 수용하는 곳이네 몇몇 사람들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리 가서 말해보게.”
고죽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무정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뒤를 아미의 사람들이 우루루 딸려 들어갔다. 그는 그런 무정의 뒤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처음이었다. 무정이 저리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어도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그였다. 미려군이라는 여인.......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이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카약...툇...쓰벌, 노인네, 그만 우리도 가지? 비도 오는데”
옆에서 상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고죽노인은 눈길을 돌렸다. 뭘 그리 빤히 보느냐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는 상귀가 보였다. 참으로 태평하고 눈치 없는 인생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정을 향해 갔다. 더 이상 상대하다가는 복창이 터질 것 같은 그였다.
“니기미.... 말 안하고 다니면 다 대장처럼 되는 줄 아나....쓰벌”
한 마디 투덜거리고는 상귀도 그를 따라갔다. 확실히 천하에 짝이 없게 눈치 없는 그였다.
사천행(四川行)24
"미안하네. 무시주........ 사부가 되어가지고 제자를 이런 꼴로 만들었으니.... 이 죄를 어이 할꼬.......”
조일사태는 고개를 숙이며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듯, 그녀의 표정은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아미타불..... 어찌 그것이 자네의 허물이겠나...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일지니........”
자애스러운 목소리가 한켠에서 흘러 나왔다. 제세활불 구여신니였다. 그녀는 지금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이 방안을 휘돌았다. 지금 방안에는 무정과 구여신니 조일과 조란사태와 함께 아미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방안의 한 구석에는 미려군이 죽은 듯 침상에 곱게 누워있었고, 무정은 그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미려군만을 보면서 앉아있었다.
“하아.....무시주 그러다 정말 몸상하십니다. 식사라도 좀 하시지요....”
구여신니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허나 무정은 묵묵 무답이었다. 그는 벌써 삼 일간 이렇듯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구여신니 일행이 도착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긴가 민가 했지만 놀랍게도 백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청성의 장문 청음검성(淸音劍星) 경세진인(經世眞人)이 백오십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났으며, 당문에서도 사람이 왔다.
전가주 암격제(暗擊帝) 당현(唐炫)이 그의 수하의 원로들과 함께 오십의 제자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실로 당문의 최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당세극이 당황한 표정으로 맞는 것이 중인들의 눈에 좀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온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사람들이었다.
“려군의 목숨은 ........ 괜찮은 겁니까?......”
무거운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무정이었다. 여신은 눈을 감았다. 무정은 저 소리 밖에는 하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묻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조금 맺혔다. 행여나 누가 볼세라. 황급히 소매로 눈을 닦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다시 미려군의 잘려진 왼손이 보였다. 또다시 눈이 젖어왔다. 그녀는 아예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무정과 미려군을 지켜볼 용기가 없는 그녀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조일사태의 이야기가 계속 되풀이되어 생각나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안 된다. 려군아! 무슨 말이냐!”
려군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오른 손에 든 검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애당초 공주의 구출은 요원했다. 그냥 보고 오는 것이 상수였다. 허나 중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십 팔 만리 중원을 한줌 진기로 질타했던 그들에게 그냥 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서 하지 않았다. 특히 당가주 당세극은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사천에서 중원으로 어떻게 힘을 보여 주겠나며 중인들을 도발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야음을 틈타 공주를 구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공주만 구출하면 대명이 군대가 이들을 응징할 것이었다.
그것은 당세극이 가진 야심찬 계획이었다. 당세극은 오기 전에 성도위에 들렸었다. 거기서 마은성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와 약속을 했다. 자신이 공주를 구출 할 테니 군을 움직이라고......... 물론 약속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공하면 대용현지문 사천 당가(大勇泫之門 四川 唐家)라는 휘호를 황제께 주청해서 당문에 걸어주겠다는 마책사의 말도 떨어졌다.
성공만 하면 사천제일의 문파로써 황실의 후광도 업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당세극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허나 그는 이것을 자신만 알고 입을 닫고 있었다. 전가주(前家主) 암격제 당현에게는 절대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세극이 생각하기에 편협한 인물이었다. 오로지 의와 무예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천당가의 업적을 천하에 알리기는커녕 조용히 세상이 모르게 움직였다.
그는 그런 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또 그의 성격상 관부와 손잡는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저 앞의 목책만 넘으면 기병부대가 있을 거요, 그 뒤의 큰 막사가 그들의 본진이고 본진 옆의 망루에 공주가 있을 것이요.....게다가 하늘도 돕고 있소...비도 오고 있으니 성공확률은 훨씬 높소!”
당세극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사천제일의 문파로 성장한 당문이 보이는 듯 했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들은 무림인이다. 저런 군부의 세력쯤은 별 무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형을 날렸다. 어두운 밤하늘에 희뿌연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을 했는지 깨닫는 데는 단 일각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일각 후 그들은 수천의 철갑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본진은커녕 목책뒤의 철갑대 조차 돌파하지 못하는 그들 이었다.
“당가주 이대로 가다간 다 죽소, 용단을 내리시오! 퇴각해야 하오이다.”
청성의 도량진인이 철갑대에 검을 날리면서 소리쳤다. 내력이 실린 검이 철갑인 하나를 멀리 튕겨냈다. 허나 튕기기가 무섭게 다른 철갑인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상당히 훈련이 잘된 군대였다. 이렇게 하다간 채 오십도 못 죽이고 자신의 진력이 고갈되어 죽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철갑인에게 내공이 실리지 않는 검을 휘두르다간 지금 바닥에 누워있는 각파의 제자들 꼴이 될 것이었다.
“안되오! 그럴 순 없소! 저앞의 망루에서 고통 받고 있는 공주를 생각하시오, 황상의 용안을 생각하시오, 대명의 위대한 이름과 강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생각하시오. ”
당세극의 비장감 어린 어투에 일행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들은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기 시작했다. 허나 정작 당세극의 마음에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당문의 현판위에 걸려있는 금빛 글씨가..............
그의 두 눈이 악독하게 변했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고 검은 구슬들을 꺼내었다.
“펑, 퍼펑...”
가죽공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독연(毒煙)이었다.
“당가주, 미쳤소! 이게 무슨 짓이오 독연이라니. 우리까지 죽일 셈이오!”
청성의 운명진인이 얼굴을 굳히며 소리 질렀다. 독연은 바람을 탄다. 이런 전장에서는 바람의 방향이란 없었다. 사람의 움직임으로 인한 공기의 흐름이 난맥으로 엉키기 때문에 적군은 물론 아군도 커다란 피해를 입는 것이었기에 독연은 절대로 쓰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당문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 쌍격천노, 두분은 앞길을 열어주시오!”
당세극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독무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일행은 더욱 난처해졌다. 당가가 설마 저리도 독선적으로 굴 줄은 몰랐다. 그들은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당문의 암기가 없으니 원격을 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자욱한 운무를 뚫고 당세극은 득의한 웃음을 지었다. 품안의 독연은 아직 넉넉했다. 이정도면 충분히 공주가 있는 망루까지 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가주, 이상하오. 우리를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소”
쌍격천노중 당수벽이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는 당세극에게 말했다. 철갑인들이 자신들을 막지 않는 것이었다.
“흐흐 독연이 퍼져있거늘 누가 막는단 말이오, 걱정마시고 전속으로 망루로 갑시다.”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당세극의 신형을 날렸다. 바로 앞에 망루가 있었다. 그는 망루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헛....”
세찬 경풍이 자신의 옆 이마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신형을 뒤로 뽑았다.
“슈카칵....”
이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칼 몇 가닥이 잘려나갔다. 당세극은 기겁했다. 검도 도도 아니었다. 이것은.......지력(指力)이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한 지력.......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뇌....뇌격지(雷擊指)!”
뇌격지는 단 한군데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색랍사(色蠟寺)!...........”
얼굴을 새하얗게 만드는 당세극이었다.
색랍사는 서장의 정교인 라마교의 수많은 줄기들의 하나로써. 그 신도나 수도승은 많지가 않았다. 이들은 얼굴을 밀랍처럼 만들고 다니는데 혹자는 그것이 무공 때문 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얼굴을 아예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색랍사가 무서운 것은 그 무공 때문이었다. 색랍사의 무공은 소뢰음사나. 대뢰음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시초가 대뢰음사였기 때문이었다. 대뢰음사의 관대함을 용서하지 못한 무승들이 모여 만든 사찰이 색랍사였다. 그
들은 아유타왕의 구역으로 가 터를 잡았고 아유타왕은 그들의 무공을 원했다. 그 결과가 이들이 지금 이 전장에 있는 것이었다.
“........”
당세극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색랍사의 무공은 특히나 그 괴이함과 빠름에 특징이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사람인데 그 사람은 언뜻 그림자만 보일뿐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였다.
“크윽.....”
“하악....”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쌍격천노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배에 검상을 입은 듯 구부리며 누르고 있는 그들의 배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세극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그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야야아압.......천밀무격!”
그가 가진 암기가 온 하늘을 수놓았다. 그의 외호인 천밀무격은 당세극의 초식이름이었다. 철질려, 독화접, 비표, 회전자, 혈적자등 온 암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는 내력을 조절했다. 그리고는 온 암기를 삼척 간격으로 늘어뜨려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타당, 따다당”
암기가 튕기는 소리와 함께 쇠끼리 부딪혀 생기는 불꽃이 보였다. . 그의 전방 이장 앞에 두 방향으로 암기가 튕기고 있었다. 당세극의 눈이 빛났다. 그는 왼쪽소매에서 암기 하나를 꺼냈다. 검은청광이 예사롭지 않은 무기였다. 구형태의 철구이었는데 위쪽에 손가락 만한 고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중지에 그 고리를 끼우고는 둥글게 철구를 말아 쥐었다. 그의 오른손이 어깨 뒤쪽으로 제껴졌다가 힘차게 앞으로 밀어졌다.
“환영사진무형(幻影絲晉無形)!”
“까라라라라랑”
엄청난 금속성의 부딛힘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당세극의 마지막 무기가 선보인 것이었다. 구체의 가운데가 살짝 벌어지더니 수만은 작은 편린이 달린 철사들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향해 흔들어댔다. 일장에 가까운 살상 반경이었다. 만일 걸린다면 온몸을 육편조각으로 만들 만한 위력이었다.
“ 크윽........”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한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승복을 입은 사십대의 중년이었다. 그의 왼팔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당세극은 득의한 표정으로 철구를 크게 휘두르려고 했다 . 그 순간 자신의 눈앞으로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철구와 연결된 은사를 휘둘렀다. 허나 검은 마치 은사와 연결된 듯 자신의 몸으로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 ! ”
눈 깜박 할 사이에 그 검이 자신의 목을 살짝 찌르고 있었다. 손잡이가 검끝 쪽으로 휘어진 갈고리형의 검이었다. 그 검이 지금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당세극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눈앞의 중년인은 일부로 팔에 맞은 것이었다. 자신이 검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 검 손잡이의 고리가 암기에 연결된 줄을 걸고 타고 자신 쪽으로 흘러 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사람은 자신이 날아오는 검에 신경 쓸 때 다가와 그 검을 잡아 목을 겨눈 것이었다.
증거로 옆의 중년인은 양손에 모두 검을 잡고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것으로 보아 쌍검이 아니었다.
“.............”
당세극은 손을 내렸다. 그의 철구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였다.
“어이가 없군, 우리가 그렇게 만만히 보이던가?”
중장갑을 걸친 오십대의 장년인이 당세극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얀 머리에 잿빚 수염을 기른 육척이 조금 안 되는 인물, 아유타왕이었다.
일행은 모두 사로잡혀버렸다. 당세극이 공격진은 떠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일말의 배신감마저 가지는 일행이었다. 당세극은 고개를 빳빳히 들며 눈을 감고 있었다.
손만 떨고 있지 않으면 정말 기개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아유타왕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무공이 높다지만 이다지도 오만할 줄은 몰랐다. 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은 크게 인정할 만 했다. 그는 왕이기 이전에 무인이었다.
“좋다. 간만에 좋은 구경을 한 셈치고 살길을 열어주지... 다음에 다시 만나면 심심하지는 않겠군.........”
아유타왕은 잠시 일행을 바라보았다. 몇몇의 눈길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여승들의 눈빛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색랍사의 인물들과는 달리 정광이 서린 눈빛은 정말 감탄이 일 정도였다.
“우선 누군가 한명만이라도 스스로 죽어봐라. 우리 병사 칠십여 명이 사상했다. 그 정도만 해도 서로 괜찮을 것 같은데.....”
아유타는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혹시나 했는데.....역시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손을 내리면 바로 철갑대는 이들을 참수할 것이었다.
철갑대의 눈빛이 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미타불, 하나가 죽고 여럿이 산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조일사저님....려군아........ 신니께 못난 제자는 먼저 갔다고 연통이라도 해주시구려................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 ! ”
아유타의 눈이 커졌다. 여승 중 한명이 나선 것이었다. 설마... 스스로 죽겠다는 말인가?
“커윽”
“조연사태님!”
“사매!”다급한 경호성과 함께 답답한 신음이 들렸다. 조연사태가 심맥을 스스로 끊은 것이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끝없이 흘렀다. 그녀의 신형이 천천히 쓰러졌다.
“으음.......”
아유타는 눈빛을 굳혔다. 설마 정말로 죽을 줄이야...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만인데 왜 죽었을까...... 그것이 중원의 관습인가?
아유타의 눈이 내천자를 그리며 휘어질 때였다.
“그럼 이 팔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분명히 남자 목소리인데도 가녀리다는 느낌의 음성이 들렸다. 아유타의 뒤로 한 남자가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척이 안 되는 단구의 노인이었다. 얼굴은 마치 백분을 칠한 밀랍처럼 하이얀 색이었고 흰색의 도복을 길게 늘어뜨리며 바닥의 흙을 질질 끌고 다니는 해괴한 행색의 노인이었다. 특이한 것은 나이가 굉장히 많아 보이는 데도 수염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오....... 사주(寺主)께서 오시었소? 어서오시오. 다레가 사주..”
만면 그득히 미소를 담으며 아유타가 맞이했다. 저 노인이 바로 색랍사의 사주 천년활마주(千年魔活主) 다레가였다. 과장이겠지만 천년을 살았다는 소리가 들리며 그 무공수위가 서장의 대뢰음사주지조차 한수 아래로 본다는 소문이 있었다. 중원의 청백지강호에 버금가는 무위라는 뜻이었다.
“이 아이는 우리 색랍정불의 소중한 자식이라오.... 헌데 이 팔을 이리 해 놨으니 너희들 중 누구 하나도 그렇게 해야겠지........ 어디보자.......... 오 저기 중원의 승려들이 있구만 어디 한번 해볼 텐가. 그럼 살려주지..... 아, 이런이런 이미 한명이 죽었구먼 .........좋아 그럼 다른 사람 아무나 한명 자신의 팔목과 팔꿈치를, 도합 두 번 자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 살려주지.....호호,,,”
“ ! ”
소름끼치는 웃음과 함께 다레가의 말이 끝났다. 일행의 중간 즈음에 검이 떨어져 땅에 박혔다. 일행은 모두 몸서리를 치면서 눈을 아래로 깔았다.
무인이 한 팔을 잃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혹자는 다른 팔로 무공을 익히면 된다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단 한명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두 번에 나누어서 자르라니....이건 그냥 죽인다는 말과 같았다.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오호호호호 이런이런 하기가 싫으시다...... 할 수 없지 그럼 다 함께 죽는 수 밖에........”
다래가의 입이 열렸다. 순간 그의 눈이 살기로 뒤덮였다. 그때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한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미려군이었다.
다래가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꽤나 이쁘장한 얼굴인데 팔을 자르겠다?
“안 된다 려군아! 무슨 말이냐!”
조일사태는 려군을 말리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다래가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려군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오른 손에 든 검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파앗.......윽!..........”
그녀의 손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신경이 살아있는지 손가락들이 잔경련을 일으켰다. 뜨거운 피가 비에 흥건히 젖은 대지위에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혈로 지혈을 하려했다.
“오호호 안 되지 안 돼...... 그러면 누구나 다하지...... 좀 기다리라구 내력이 아닌 순수한 사람의 힘으로 말이야...응?”
괴이한 목소리는 잔인했다. 려군은 지혈도 하지 못한 채, 흐르는 피를 그냥 바라보았다.
점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처럼 길게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죽는 길 뿐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버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사부는 죽는다.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지켜보는 병사들의 눈에도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미려군의 몸이 휘청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음이었다.
“요호호, 좋아좋아.....훌룡한 낭자군.....이제 팔꿈치를 잘라야지...응?”
은근한 목소리로 다래가가 다가와 미려군에게 속삭였다. 미려군은 흔들리는 신형을 다잡았다. 이미 눈앞의 사물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의 검을 들었다.
‘ 무정..........’
문득 그녀의 뇌리에 무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세 번이나 보았을까? 정이 쌓일 만한 일은 없었다. 자신의 알몸을 보이고 치부까지 보였지만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옆에 조용히 있고만 싶었다. 혼자서 잠자기 전에 상상해본 것도 있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낳고, 그와 같이 자고, 살고, 먹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며서 때로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허나 이젠 백일몽(白日夢)일 뿐이었다. 자신은 살아나지도 못할 것이었다. 다만 무정을 보지 못한 것,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무정을 바라다 볼 때마다 무정의 의식이 없었음을 생각해 내었다. 그 무뚝뚝한 사내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작은 입술사이로 떨리는 그녀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미안해....요....... .......정..랑(郞)........”
그녀의 오른손의 검이 백광을 뿌리며 왼손을 향했다. 미려군은 왼손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신형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문득 그녀의 눈에 흐릿하게나마 비 내리는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 끝에서나마 무정을 보고픈 소원을 비는 그녀였다.
그녀의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소?........”
나직한 무정의 소리에 여신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을 좁히며 무정을 바라보았다.
무정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다만 둘만의 이야기가 있는지 자신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려군의 안부를 묻는 소리이외에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이윽고 신니가 무정을 잠시바라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모든 아미의 제자들이 따라 일어났다.
“.................아미타불....”
무정에게 뭐라 할듯한 신니는 결국 나직한 불호성만 외고는 신형을 돌렸다. 그와 함께 그의 제자들이 따라 나왔다. 좁은 방안에 무정과 려군, 둘만이 남아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사부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일사태가 말했다. 아마도 무정과 려군 둘 다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그저 세존을 원망하거라....아미타불”
입가에 비친 미소를 지우며 신니는 조용히 말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허나 먹장구름은 여전했다. 웬일인지 삼일동안 적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마음은 적군에게 가있지 않았다. 왠지 모를 무정의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신니를 향해 예를 취하기 위해 몰려 드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한명 있었소,..........화(花)아라 불리는 여아였소...”
조용한 방안에 무정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무정은 조용히 계속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 대한 내 기억은 단 한가지요...... 목이 잘려 죽었다는 것, 그것 하나요.”
무정의 눈이 천정을 향했다. 아련한 그의 눈이 초점을 잃어버린 듯 했다.
“헌데 그 아이에 관한 기억이 모두 기억났소,. 머리칼 하나, 하나까지 .........당신........ 때문이요”
그의 눈이 천정에 한 아이를 그리고 있었다. 조그만 입술, 큰 눈, 아롱진 웃음들......그리고 .........피.........
“그런데....”
무정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 흡사 깊은 잠을 자는 듯,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또다시 화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소........”
그이 오른손의 수투가 벗겨졌다. 벗겨진 무정의 상처투성이 손이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생각하려고 하면..........”
손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무정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무정의 입가에 하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젠 당신 얼굴만 기억나오......”
무정의 손이 점차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이마에서 코, 그리고 입술을 닿을 듯이 스쳐 지나갔다.
“부탁이오....”
무정의 손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 준 손이었다.
“날 위해 여기 있어 주시오., 아니,...... 살아만......살아만 있어주시오.”
무정의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려군의 모습이 부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건 난 상관하지 않소, 그저.....그저......”
무정의 목이 메어 왔다. 무정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 울고 있었다.
“당신을 볼 수 있게만 해주시오..려군......아니 군매(妹)!”
무정은 눈을 감았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려군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가......... 일어서고 있었다.
“군매, 군매는 나에게 이 머리끈을 주었지만...... 난 군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소”
무정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문고리를 잡고 무정은 신형을 멈추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군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단한가지요........이 세상 그 누구도 군매를 건드린사람은 용서할 수 없소, 단언하건데 단 하루도 그런 자와 같은 하늘에 숨 쉴 수 없소........ 그게.....그게 내가 군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것 같소!”
무정의 눈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정의 아랫입술이 이사이에 깨물렸다. 두 눈에 힘을 주며 그는 눈물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문을 열었다. 희뿌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정은 눈을 감으며 문을 닫았다. 조용한 적막이 방안을 휘돌았다.
“흑........”
려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다. 눈앞에 무정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계속 혼절한 척 한 것이었다.
꼭 감은 그녀의 눈꺼풀 사이로 멈추지 않는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 ! ”
상귀와 하귀는 눈을 크게 떴다. 대장이....... 대장이 울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 무섭고 냉정한 대장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대장은 신(神)이다.
신은 울지 않는다. 대장은..... 신이어야만 했다. 무언가 상귀와 하귀의 가슴에 울컥한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적도 없는데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대장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만든 적들에 대한 적의였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 ”
누군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저 멀리서 은은한 뇌성과 함께 먼지 구름이 일고 있었다. 서장군의 본진이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망루를 끌며 유랑이라도 나오듯,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약 칠, 팔천가량의 병력이었다. 중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다들 진정하고 제 위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시주, 자네는 어찌 할 텐가...”
엄숙함이 깃든 구여신니의 목소리가 무정에게 향했다. 무정은 눈을 떴다. 그는 말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펄럭~”
무정이 파풍의를 벗어 던졌다. 곧 다시 비가 오려는 듯, 습하고 세찬 바람에 무정의 걸레같은 파풍의가 뒤쪽으로 날아갔다.
“부우우욱”
무정의 상의가 찢겨져 나갔다. 상처투성이의 우람한 그의 몸이 다시 드러났다. 모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둑”
오른손의 수투를 다시 낀 무정은 말위에 매여져 있는 긴 봉대를 잡아 당겼다. 안장에 매어져 있던 봉대의 가죽 끈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무, 무대장......”
고죽노인은 입을 벌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전의 무정이 아니었다. 무정의 신형이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중인들에게 갔다. 그리고는 여신스님의 앞에 섰다.
“스륵....”
무정의 머리끈이 풀렸다. 그는 그 머리끈을 여신스님에게 내어주었다. 엄청나게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여신스님은 얼떨결에 받아 쥐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 직접 다시 묶어달라고 전해주시오......”
짤막하게 여신에게 말한 무정은 뒤로 돌아섰다. 그는 봉에 감겨있는 천은 거칠게 잡아 당겼다. 한쪽에 둥근 철구가 달려있는 삼척이 좀 넘는 단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정은 걸어 가면서 등뒤에 초우를 꺼냈다. 초우의 손잡이에 봉을 돌려 끼우기 시작했다.
“끼익....끼익”
명부의 웃음소리인가........ 적막한 분위기 안에서 중인들의 귀에 그 소리가 거북스럽게 들렸다. 이윽고 무정의 신형이 멈추었다.
그와 함께 그의 오른손이 내려졌다.
“칵....”
칠척이 넘는 초우가 바닥을 찍으며 그 본모습을 갖추었다. 무정은 고개를 숙인 채 긴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끝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나.....
언제부터 내가 강호인이라고 도를 들었나....
언제부터 내가 무슨 불자라고 적을 용서했었나.......
언제부터 내가 아프다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나......
그녀 때문인가.....
그녀 때문에 내가 도를 들었나....
그녀 때문에 내가 자비를 베풀었나.....
그녀 때문에 내가 내 몸 하나 지키자고 하귀를 죽일 뻔 했나....
내가 누군가....
내가 도객(刀客)이었나....
내가 무슨 정의의 협객 이었나.....
내가 그따위 밖에는 안 되는 약골이냔 말이다.!
나는 무정이다.
나는 초우와 함께 싸운다.
나는 적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지지 않는다. 그리고 싸운다.
“나는 ......... 혈귀(血鬼)다.”
나직한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무정의 두 눈에 시퍼런 살광이 폭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묵기가 삼장이상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참마도 초우가 오른손에 잡혀 땅에서 살짝 들렸다.
"........................"
그의 두발이 땅을 굳건히 딛고 있었다. 양팔을 허리 뒤로 보내며 온몸에 힘을 주고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무정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그와동시에 그의 살기가 온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허억..”
“헉..”
“우욱...”
몇몇 어린 제자들이 심적인 충격을 입고 자리에 쓰러졌다.
“나무아미...타불......”
구여신니의 입에서 떨리는 불호가 나왔다. 엄청난 살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금정신공을 은은하게 끌어 올렸다. 그만큼 엄청난 기세였다.
무정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리한 몸이 다시금 그의 의지를 거부하려 하고 있었다.
무정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젠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죽노인.. 상귀, 하귀!”
“.............”
“따라오지 마라!.....”
“!.............”
긴 머리칼 사이로 줄기줄기 뻗치는 안광을 비치며 무정은 일행에게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말위에 올라탔다.
“후득...후득.....후드득...”
빗줄기가 서서히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무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문득 그는 상현촌이 여진족에게 말살될 때를 기억했다.
같았다. 그때의 하늘도 지금과 같았다. 시커먼 먹장구름, 검은 하늘......무정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세상을 우습게 보는 하늘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하앗”
무정의 입에서 경호성이 발하며 그의 말이 땅을 박찼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서서히 내리는 비와 함께 조금씩 흐려져 갔다.
“.......................”
상귀, 하귀, 고죽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두 팔에 쥔 무기를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장이.......대장이 혼자 떠났다. 거의 미친것처럼...
마지막일지 모르는 대장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없이 사라진 무정의 뒷모습만 노려 볼 뿐이었다.
멍한 사람들은 할일도 잃은 채 무정의 뒷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무정이 중얼거린 소리만이 메아리처럼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 혈귀(血鬼)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