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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 紀 |
王號年數 |
典 據 |
名 稱 |
備 考 |
1425年 |
世宗7年 |
『世宗實錄』 7年 2月 15日 乙卯條 |
白磁 |
仁宗의 聖旨와 關連 |
1447年 |
世宗29年 |
『世宗實錄』29年 4月 7日 戊辰條 |
白磁器 |
兵曹判書 李宣과 關聯 |
1447年 |
世宗29年 |
『世宗實錄』29年 6月 3日 甲子條 |
白磁器 |
文昭 輝德殿의 銀器 代替 |
1460年 |
世祖 6年 |
『世祖實錄』 6年 11月 2日 甲辰條 |
白磁器匠 |
70歲 以上의 匠人을 優待 |
1466年 |
世祖12年 |
『世祖實錄』12年 6月 7日 丙午條 |
白磁器 |
白磁器는 王의 專有物 |
1468年 |
睿宗 1年 |
『睿宗實錄』職位年10月27日 癸丑條 |
白磁大鍾 |
犯人 鞠問에 記錄된 名稱 |
1490年 |
成宗21年 |
『成宗實錄』21年 9月 25日 甲戌條 |
白磁椀 |
盜賊 맞은 白磁의 種類 |
1491年 |
成宗22年 |
『成宗實錄』22年 12月 7日 己酉條 |
白磁杯 |
承政院에 下賜한 白磁器 |
*『朝鮮王朝實錄』에서 발취하였다
논문「銘文資料를 通해본 廣州牛山里 窯址群의 性格」의 분석을 위하여 3가지 개요를 설정하였다.
<1>. 역사적 전거를 무시한 연구.
<2>. 분청사기의 발생과 소멸
<3>. 기존 연구의 비판 없는 인용.
이렇게 세 가지 개요에 따라 하나하나 검토하기로 한다.
1). 역사적 전거를 무시한 연구
이 논문은 머리말에서부터『世宗實錄 地理志』「磁器所」의 생산품을 백자로 보고 “廣州 牛山里의 窯址群을 15-16세기의 요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자면 우선『世宗實錄 地理志』「磁器所」의 생산품과 조선 백자의 발생시기가 먼저 밝혀져야 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본인(논문 작성자)의 연구 없이 기존의 연구(鄭良謨)를 따르고 있다.
1). 『世宗實錄地理志』「磁器所」의 생산품이 백자인가?
『世宗實錄 地理志』「磁器所」의 생산품을 밝히기 위하여 문헌 사료로 『世宗實錄地理志』의 간행 시기를 살펴보면,
『世宗實錄地理志』의 간행(刊行)은 1454년이다. 그러나 이「地理志』의 간행을 위한 기초 자료로『新撰八道地理志』를 먼저 만들고자 자료를 조사한 기간이 1424-1432년 8년간이다.
그러나『新撰八道地理志』가 현제까지 유존된 것은『慶尙道地理志』뿐이다. 이 『慶尙道地理志』는 호조가 경상감영에 하명하여 1424년에 조사를 착수하여 이듬해인 1425년에 조사를 완료하였다.
이『慶尙道地理志』의 土産條에는 沙器로 기록된 곳이 세 곳(興海郡, 義城縣, 彦陽縣)이 있다. 이 세 곳을 『世宗實錄地理志』에는 磁器所로 수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慶尙道地理志』를 기초 자료로 만든『世宗實錄地理志』에 磁器所 로 기록되어 있으니 『世宗實錄地理志』의 磁器所의 생산품은 沙器가 분명하다. 만약 世宗實錄地理志』「磁器所」의 생산품이 백자였다면 『慶尙道地理志』의 沙器는 世宗實錄地理志』에는 陶器所로 기록 되어야 하다. 이 두 지리지에 기록된 도자기의 명칭을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慶尙道地理志』에 沙器라는 記錄이『世宗實錄地理志』에 磁器所로 修正 기록된 調査表
地 名 |
慶尙道地理志의 土産條에 記錄된 名稱 |
世宗實錄地理志의 土産條에 記錄된 名稱 |
慶尙道 興海郡 |
沙器 1 |
磁器所 1 |
慶尙道 彦陽縣 |
沙器 1 |
磁器所 1陶器所 1 |
慶尙道 義城縣 |
沙器 1 |
磁器所 1陶器所 1 |
『慶尙道地理志』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대조하면 興海郡의 경우는『慶尙道地理志』의 沙器가『世宗實錄地理志』에는 磁器所로 바뀌었다. 그러나 彦陽縣과 義城縣의 경우는『慶尙道地理志』에는 없던 陶器所가 하나씩 더 생겼다. 이는『慶尙道地理志』와『世宗實錄地理志』를 발간한 시차가 30년이니 그 기간에 陶器所가 추가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문헌으로 보면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磁器所」에서는 沙器(粉靑沙器)를 생산하던 곳이 분명하다.
이 외에도 「磁器所」의 생산품이 沙器(粉靑沙器)라는 증거가 될 자료는 또 있다. 그것은 世宗實錄地理志』의 충청도 瑞山郡의 磁器所는 沙器洞에 있고, 평안도 義州牧 정주의 磁器所는 沙器里에 있다. 이렇게 도자기의 생산지 지명은 沙器洞· 里이고 생산품은 磁器로 기록된 것은 우리 도자기가 1423년 沙器에서 磁器로 명칭이 전환될 때 실물은 沙器 그대로 인데 명칭만 磁器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拙著, 『백자청화연구(Ⅱ)』(부산: 도서출판 세화, 2010), 169-170쪽. 각주 38.참조) 『경상도지리지』와『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대조한 바로는 『世宗實錄地理志』 「磁器所」의 생산품은 분청사기가 분명하다.
2). 조선백자의 발생시기
이 논문에는 조선 초부터 백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백자의 발생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백자의 발생시기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고려백자 전승설이고 하나는 세종 조 초기 발생설이고 또 하나는 1445-1447년 발생설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는 세종대 이전부터 백자가 있었든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니 고려백자 전승설을 토대로 쓴 글이니 고려백자의 전승설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백자 전승설은 鄭良謨의 주장이다. (鄭良謨 著,「朝鮮白磁」『韓國의 陶磁器』(서울, 韓國美術 叢書 文藝出版社, 1991), 410 쪽. 그리고 이 설의 추종자는 金英媛과 金載悅이다. 이 고려백자의 전승설에는 이론적 근거는 처음부터 없고 “금강산 월출봉에서 사리함과 함께 출토된 5점의 백자(洪武 24年 銘)가 유일한 물적 전거이다. 鄭良謨는 이 유품들이 조선백자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유품은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하여 1931년에 출토되었으니 이 유품의 기형이나 자질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있다. 뿐만 아니라高麗 후기에는 白色을 금기시하였던 사료가 있다.(『高麗史』卷85, 志 卷39 「刑法二」, 636쪽.) 또 고려 후기는 몽고의 침입으로 백자의 수요자도 없었겠지만 백토를 체굴 할 여건도 아니었고, 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 후기의 백자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野守 健 著,『高麗陶磁の硏究』(東京: 國書刊行會,1972),49쪽 : (姜敬淑 著,『韓國陶磁史』, 239쪽.) 사료와 기존의 연구들이 이러하니 고려백자 전승설은 사료도 없고 유품도 없다. 다만 1931년에 태조 이성계의 발원문이 기록된 홍무24연명 백자가 있을 뿐인데 그 유물도 1931년 일제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니, 이 주장은 역사를 가정한 하나의 주장을 뿐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拙著,『백자청화연구(Ⅱ』(부산: 도서출판 세화, 2010), 159쪽.
3). 조선 초기의 도자기의 명칭으로 본 磁器
鄭良謨는 조선 초기부터 磁器는 백자라고 주장하였다. (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서울, 韓國美術叢書 文藝出版社, 1991), 410쪽)
『朝鮮王朝實錄』에 최초로 도자기의 명칭이 등제된 시기는 1407년(태종 7)이다. 이 때 도자기의 명칭은 沙器와 甆器뿐이었다. (拙著,『백자청화연구(Ⅱ)』(부산, 도서출판 세화, 2010), 178쪽, 표2참조) 그러다가 磁器라는 명칭이 나타나는 시기는 1423년(세종 5)에 중국 사신 海壽가 와서 磁器를 요구하면서부터 생겨난 명칭이다. 이 때를 기하여 우리 도자기의 명칭이 沙器에서 磁器로 일시에 전환된다. (『世宗實錄』5년 8월 28일, “中國使臣海壽求 磁器 命許之”)
이렇게 磁器라는 명칭은 1423년(세종 5) 조선이 건국되고 31년 뒤에 중국 사신이 가지고 온 명칭인데, 조선 초부터 자기가 백자라는 鄭良謨의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조선 초기 도자기에 백자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1425년(세종 7)에 명나라 황제 仁宗이 沙器를 보내라는 칙서를 사신 尹鳳이 가지고 왔다. 세종이 이 칙서를 봉행(奉行)하는 과정에 광주 목사에게 백자를 만들어 받치라고 하명한 사료가 있다. 이 기록으로 말미암아 조선백자가 세종 조 초기에 발생했다는 설이 생겨난다. 세종 조 초기 발생설은 尹龍二와 姜敬淑의 주장이다 (尹龍二 著,「朝鮮陶瓷의 變遷」『韓國陶瓷史硏究』(서울, 文藝出版社, 1993), 329쪽.) : (姜敬淑 著,『韓國陶磁史』,(서울, 韓國文化藝術大系③ 一志社, 1989), 348쪽) : 1445-1447년간의 발생설은 白富欽의 주장이다. (拙著『백자청화연구(Ⅱ)』(부산: 도서출판 세화, 2010). 189쪽.)
1425년 明 仁宗에게 보낸 白磁라는 명칭에 대하여 당시 우리나라 도자기의 명칭이 사기에서 자기로 전환된 것은 1423년이다. 그 뒤 沙器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자기라는 명칭만 쓰던 시대였다. 그러니 白沙器를 白磁로 기술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拙著,『백자청화연구 (Ⅱ)』(부산.2010,도서출판 세화),176쪽.)
조선 왕실에서 백자를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는 1447년 (세종 29)이다. 그러니 명나라 仁宗의 성지를 받은 때가 1425년이니 그로부터 22년 뒤의 일이다. 이 22년 사이에 있었던 사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明 황제의 성지를 접수한 때로부터 10년 뒤인 1435년(세종 17)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연회가 있었다. 그 석상에서 中國 도자기와 朝鮮 도자기의 품질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欽賜磁器品好 本國磁器品惡”(황제가 보내준 자기의 품질은 좋은데 본국(조선) 자기의 품질은 나쁘다,)라고 평한 것은 조선 관리의 말이다. (『世宗實錄』17年 4月 11日 壬子 3條) 이는 당시 朝鮮의 도자기는 분청사기였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해인 1436년의 사례를 보면, “이때도 문소전(文昭殿)에서 지내는 대소(大小)의 제향(祭享)에는 목기(木器)를 사용하오니, 온당치 않습니다. 이 뒤로는 주기(朱器)로 고쳐 쓰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때 백자가 있었다면 백자를 썼을 것이다.(『世宗實錄』18年 閏6月 11日. 乙亥 6條)
佔畢齋集에는, 고령현 예현리에서 1445년까지 白沙器를 생산하고 있었다. (김종직 저, 임정기,역, 『國譯佔畢齋集 Ⅲ』, (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97, 82쪽: “乙亥夏(중략) 宗瑞時以都巡察使入縣 乃余對食 金指案上 白砂器曰 貴縣砂器甚善甚善 言之再三)(후략)
1445년(세종 27)에 兵曹判書 李宣이 開城府留守로 부임한 후 전라도에서 백자기를 매입하여 숨겼던 일로 인하여 1447년(세종 29)에 그 職에서 파면된 사건이 있다. 그러니 백자를 매입한 시기는 1445〜1447년 사이로 추정할 수가 있다.(『世宗實錄』29年 閏4月 7日 戊辰條.)
조선 왕실은 1447년(世宗 29)에 文昭殿과 輝德殿에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에 쓰던 은기를 白磁器로 대체하였다. 이 때 세종의 어기도 백자기로 대체하였다는 주장이 있다.(拙著,『文獻을 通한 朝鮮白磁의 需要階層에 關한 硏究』, (동아대학교 석사논문, 1990) 5-6쪽)
이상의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1445〜1447년 사이에 병조판서 李宣이 상당한 수준의 백자기를 매입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 와서 文昭殿과 揮德殿의 은기를 백자기로 대체한 실상을 고려하면 1445년에서 1447년 사이에 조선 백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이렇게 문헌 사료로 고찰하면 조선 백자는 1445-1447에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논문에는 조선 초기부터 백자가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을 비판 없이 따르고 있다.
4). 분청사기의 발생과 소멸
이 논문의 주장처럼 조선 초기부터 백자가 있었다면 분청사기는 왜? 생겼다고 설명할 것인가?
고려는 청자시대고 조선은 백자시대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청자와 백자 사이에 분청사기가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확정적인 사실이 있으니 논문에서처럼 조선 초기에 백자가 있었다고 하면 고려백자 전승 설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에 백자가 있었는데 왜 분청사기가 생겼을까? 분청사기가 생긴 이유를 고민했어야 할 문제인데 그런 고민을 한 흔적은 없고 기존의 주장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 분청사기의 문제는 공교롭게도 다음 논문인「朝鮮時代 官窯 靑磁 硏究」와 관련이 있으니 그 장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5). 본 논문의 시대 추정
본 논문의 제목이「銘文資料를 通해본 廣州 牛山里 窯址群의 性格」이니 요지의 성격을 논하려면 시대추정은 작자 스스로의 연구가 요구된다, 그러나 본 논문에는 시대 추정을 본인의 연구로 추정하지 않고 기존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학문의 길을 걷고자하면 연구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는 일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길이겠지만 발표한 연구가 그 분야의 연구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그 논문의 가치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논문은 자기의 주장은 없고 남의 연구를 비판 없이 인용하여 정리한 글로 비친다.
글은 말과 다라서 한번 활자화되면 영원히 남는다. 지금의 연구가 후일 본인의 발전에 딛고 일어설 발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기발전에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논문을 쓰자면 선학들의 연구를 인용해야할 경우가 있다. 긍정으로 인용하건 부정으로 인용하건 그 연구를 분석하여 숙지해야 한다. 고구한 끝에 필자도 그 주장이 인정될 때 긍정으로 인용하게 될 것이다. 남의 연구를 잘못 인용하여 자기의 글이 인용한 글과 함께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도자사는 크게 수정이 불가피 할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과학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비파괴(非破壞)로 제조 연대를 밝힐 수 있는 기기가 발명 되면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를 가정한 연구는 커다란 단애(斷崖)에 부딪힐 것이라는 생각이다.
(1). ‘內用‘명 자편에 대한 기존 연구의 시대 추정
광주 牛山里의 백자요지에서 ‘內用’명의 자료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논문에는 논문 작성자의 연구 없이 기존의 연구를 인용하여 광주 우산리 요지군의 시대를 15-16세기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니 인용된 자로의 추정 년대를 검토하기로 한다. 우산리 요지에서 발굴된 ‘內用’銘 자편이 우리 도자기의 시대 추정의 표준척(標準尺)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파편에 아무런 포식(글씨)이 없는 세금파리로는 시대 추정이 어렵다. 15세기라고 해도, 16세기라고 해도, 주장자도 긍정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고, 반론자도 부정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 자료와 같이 ‘內用’이라는 명의 표식이 있는 경우는 다르다. ‘內用‘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여기의 ’內用‘명 자편은 궁중 또는 궁궐 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는 발굴자나 이론 제공자 모두가 동의하고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면 궁중에서 언제 ’內用‘銘이 각인된 도자기가 왜 필요했는가를 밝히고 언재 사용하였으며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밝혀지면 內用’ 銘 자편의 시대는 분명해 질 것이다
우산리 배자요지에서 ‘內用’銘의 자편이 출토된 요지는 여러 곳이 있으나 발굴보고서가 비교적 상세하고 제공된 이론이 있는 우산리 2호 백자요지에서 출토된 ‘내용‘명 자편의 시대 추정을 검토하기로 한다.
우산리 2호 배자요지에서 출토된 ‘內用’銘 편의 시대 추정에 이론을 제공한 金英媛의 주장과 발굴 보고서의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다음에 문헌을 사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牛山里 2호 白磁 窯址의 발굴보고서를 (『廣州 牛山里 白磁 窯址』, (海剛陶磁美術館, 1995),13-58쪽.) 요약하면
첫째. 조질 백자는 고의로 만들어‘內用’명을 각인한 것 같다.
둘째. 갑발(匣鉢)을 사용한 양질(良質)백자편이 소량 발굴되었다.
셋째. 양질백자와 중 하품의 조질 백자를 함께 생산하던 가마터다.
넷째. 조질 백자에 ‘內用’명을 각인하여 貢納했다면 양질백자도 진상의 대상이다. 라고 발굴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金英媛의 주장 요약
첫째 ‘內用’銘의 磁片이 조질(粗質)인 것은 백자의 제작 수준이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는 뜻이다.
둘째. 양질(良質)의 상품(上品) 백자편에 대하여는 언급을 회피하였다.
셋째. ‘內用’명을 고려시대의 ‘內用瓷器’와 연결하여 1390년대 이후 1417이전으로 시대를 추정하였다.(金英媛 著,「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한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47-51쪽.)
金英媛의 시대 추정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도요지를 발굴하고 그 요지의 성격을 규정하려면 발굴 유품을 빠짐없이 분석하고, 분선 된 자료를 근거로 요지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원칙인데 양질 백자편은 언급을 회피하고, 조질 백자편에 대해서는 기술이 숙달되지 못한 초기의 작품으로 주장하였다. 이는 시대 추정을 고려자기와 연결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유발캐할 뿐만이 아니라 도요지의 시대 추정이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2). 문헌 사료에 의한 시대 추정
‘內用’銘의 자기가 궁중에서 사용한 그릇이라는 견해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 궁중에서 왜 ‘內用’ 磁器가 필요했으며 언재 사용하였고,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밝혀지면 ‘內用‘명 자편의 시대는 분명해질 것이다.
궁중에서 ’내용’명 사기가 필요 했던 이유와 언재 사용하였는가를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궁중에서 사용한 그릇의 변화와 ‘內用’銘 사기의 사용
連番 |
西紀 |
『朝鮮王朝實錄』 年 月 日 |
要 旨 |
1 |
1407 |
太宗實錄 7年 1月 19日 甲戌條 |
前略. 一金銀器血 除內用國用外 下命 中外一切禁止 國中皆用沙漆器 |
2 |
1422 |
世宗實錄 4年 3月 4日 辛酉條 |
工曹啓: “闕內常用漆器, 易致破壞, 且爲人所換。 請代以鍮器。” |
3 |
1447 |
世宗實錄 29年 6月 3日 甲子條 |
傳旨禮曹 文昭·輝德殿 所用銀器 自今 代以 白磁器 |
4 |
1616 |
光海君日記 8年 4月 23日 壬戌條 |
司憲府啓曰: 士大夫所用, 許容常白器
|
<표> 1번은 조선조에서 처음 반포한 왕명이다. 국가와 왕실에서는 금·은 기를 쓰고 백성들은 사기와 칠기를 쓰라고 하였다.(여기의 칠기는 궁중에서 쓴 그릇으로 보았다 이유는 사기와 목기는 공납을 받고 칠기와 유기는 매년 사들였고, 연회에 칠기를 썼다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世宗實錄 2年 潤1月 29日 戊戌條)
<표>2번은 漆器는 파손되기 시우니 유기로 바꿨다는 기록이다.
<표>3번은 세종이 문소· 휘덕전의 상식(上食)에 쓰는 은기를 백자기로 바꿨다는 기록이다. 이 때 세종의 어기도 백자기로 바꿨다. 어기를 백자기로 바꿨어도 백자기와 유기는 구별이 되니 따로 표시를 할 필요는 없었다.
<표>4번의 『光海君日記』 8年 4月 23日 壬戌條에「士大夫所用, 許用常白器」의 조서가 반포됨에 따라 궁중에 기거하는 사대부들도 常白器(보통 백자기)를 쓰게 되었다. 같은 궁궐 안에서 임금의 어기인 백자기외 사대부들의 상백기인 백자기를 함께 쓰게 되니 임금과 신하의 그릇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로 인하여 사대부들이 쓰는 상백기를 조질 백자를 만들었다. 그리고도 구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內用‘명을 각인 하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內用‘銘 상백기를 조질로 만들어 각인하였던 것이니 그 제작 시기는 1616년 이후 즉 17세기가 분명하다.
金英媛은 宮中이란 ‘內用’명의 명문이 있으니 조선 초기에 궁에서 사용하였다는 주장으로 시대 추정을 1390-1417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수요자가 사용한 증거다. 이 ‘內用’銘 자기의 수요자는 궁중이다. 궁중에서 언제 무엇 때문에 ‘內用’銘 자기가 필요했으며 어떻게 만들어서 썼는가를 밝혀져야 한다. ‘內用’銘이 각인되었다고 해서 1390-1417에 궁중에서 사용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또 이때는 백자가 생산되지도 않던 시기이다.
그러니 ‘內用‘명이 각인된 자기는 광해군 8년(1616) 이후 즉 “士大夫所用 許用常白器”의 조서(詔書)가 반포된 후 임금과 신하의 그릇을 구별하기 위하여 조질 백자(粗質白磁)를 만들어 ’內用‘ 명을 각인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內用’ 자편의 시대는 17세기 이후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사료로 시대를 추정하면 金英媛의 추정과는 200년에서 250년의 시차가 생긴다. 이 시차는 금사리 요지에서 기년명이 분명한 청화백자 묘지와 함께 출토된 설백자 편이 있었다. 그 유품과도 200년 네지 250년의 시차가 난다.
이 논문에는 유품에 표시된 명문에 따라 분류하였다. 130쪽에는 ‘內用’‘用’‘內’銘의 백자를. 133쪽에는 ‘司’명 백자를. 135쪽에 ‘王’ ‘殿’銘의 백자를. 136쪽에는 ‘中’銘의 백자를. 137쪽에 ‘仁‘銘의 백자를. 138쪽에는 ’‘天’ ‘地’ ‘玄’ ‘黃’ 銘들의 백자를. 139쪽에는 숫자 명이 각인된 자료를 제시하고 이 모두가 15-16세기의 유품으로 주장하고 있다. 표시된 기명이 다르면 제조된 시기도 다를 것이고 기명에 따라 공납관서도 다를 것인데 이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는 없다. 개별적인 연구가 없으니 가호별로 분류는 지면을 체우기 외한 수단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작성자의 주장대로라면 세조 12년 (1466)에 왕명으로 반포된 백토의 금령이 지켜지지 않고 조선왕조는 1910까지 444년간이나 더 존속하였다는 말이 된다. 국주국가에서 왕명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야기 되었을까도 생각해 볼 문제다.
백자기의 수요층은 양반계층이라고 보아야할 터인데 계층 사회인 조선 시대에 양반과 천민인 도공들이 야합해서 백자를 썼다는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드렸으니 자기의 연구라고 하기보다는 남의 연구를 맹목적 으로 추종한 것이니 연구 논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군주국가에서 천민인 도공들이 왕명을 지켜지지 않았다면 양반계층에서 보고만 있었을까? 만약 왕명을 어기고 백자를 만들었다면 4백여 간에 상소가 있었어도 수백 통은 있었을 것이다. 도자사도 역사시대의 논문이니 사료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유품은 사료에 의하여 판단된 결과를 담보하는 자료로 활용되어야지 사료를 무시하고 발굴 유품에 따라 자의적인 해석을 하면 여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논문은 진실성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작성자가 박물관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많은 발굴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유물을 보는 눈은 남달리 예리할 터인데 그런 눈으로 기형과 굽의 형태를 연구하여 시대를 판별했어야 할 터인데 논문에는 도안만 제시하고 기형과 굽에 대하여는 설명을 피하고 있다.
우리 도자기에는 시대를 밝힐 명문이 기명된 유품이 없기 때문에 기형과 굽의 생김 세로 시대를 추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형이나 굽의 처리로는 15-16세기의 유품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으니 고의로 회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기존의 연구를 보면 尹龍二는 기형과 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마디 굽은 15-16세기, 오목 굽은 16세기 말에서 18세시까지, 수직 굽은 15-19세기까지, 넓은 굽은 17세기라고 발표한 바가 있다. 굽에 대한 주장들은 윤용이 외에도 많다.
기존의 연구에서 우산리 요지에서 발굴된 ‘內用’銘 자편을 15세기로 시대를 추정하였으나 문헌으로 고증하면 1616년 이후가 분명하다. 그러니 기존의 추정 년대와는 200년에서250년의 시차가 난다. 따라서 이 논문 작성자는 기존의 연구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기형과 굽을 스스로 연구하여 자기 논문으로 발전시켰으면 장차 딛고 일어설 발판을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논문은 미술사학연구에 발표된 논문이니 한국미술사 박사학위를 가진 정회원들의 심사를 거쳤을 것이니 한국 도자사의 현주소라고 할수 있다.
이 논문이 발표되어 도자사 발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무리 살펴봐도 도움이 될 연구라고는 할 수 없고 헐어야 할 돌탑에 돌 하나를 더 얹은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 논문을 분석하면서 도자사 전반의 재정비가 시급함을 절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