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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속공연 짧은 영상 모음 몽골여행 제 3신
자료출처 다음백과 사전에서
자막 및 첨부 : 몽골민족의 문화
의복 · 음식 · 주거형태
몽골족의 생산방식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며 그들의 의상은 생산방식의 영향을 받는다. 남녀노소 모두 가죽으로 된 긴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며 허리띠를 두른다. 긴 두루마기를 몽골치포(蒙古袍)라고도 한다. 몽골치포는 비교적 헐렁하기에 말을 타거나 할 때 무릎보호대 역할을 하며 추위를 막아주고 밤 휴식을 취할 때에는 이불담요의 역할도 한다. 몽골치포의 소매는 약하고 길어 승마 시에는 고삐를 잡을 때 유용하며,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주고 여름에는 소매로 벌레를 쫓을 수 있기에 몽골치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의복 색상을 보면 몽골족은 백색을 숭상한다. 그것은 백색이 신성하고 순결하며 장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매년 명절이 되면 백색몽골치포를 입고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명절의 기쁨을 나눈다.
몽골치포는 현재 무대복장과 민간복장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민간복장은 주로 붉은색, 노란색, 짙은 남색으로 된 천 혹은 털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옷깃, 소매, 테두리 등에 정교한 꽃무늬를 수놓는다. 몽골치포를 입을 때 반드시 허리띠를 둘러야 한다. 허리띠를 두르는 방식도 매우 까다롭다. 허리띠에 사용하는 재료는 천, 비단 등이다. 허리띠의 색상은 몽골치포의 색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허리띠를 두르면 허리의 늑골이 수직으로 되어 안정을 유지할 수 있기에 말을 탈 때 몰려오는 피로를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장식작용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미혼 여자의 상징이자 장식품이기도 하다. 몽골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가죽장화를 즐겨 신는다. 가죽장화는 말을 타고 내릴 때 매우 편리하며 종아리의 마찰을 감소할 수 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초원에서 걸어 다닐 때에 저항력을 감소시키며 또 추위를 방지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몽골족 여자에게는 “하부터거(哈布特格)”라는 독특한 장식품이 있다. 이는 몽골치포의 오른쪽 위에 옷깃 단추 옆에 걸어주는 주머니식의 작은 장식품이다. 일반적으로 길이는 3촌, 넓이는 2촌가량 된다. 그 형태는 가지각색으로서 정방형, 장방형, 삼각형, 원형, 타원형 모양이 있다. 이러한 작은 쌈지(荷包) 형태의 “하부터거(哈布特格)”는 풀색을 올린 단단한 천을 재료로 하여 가운데 솜을 넣고 비단으로 다시 포장한 뒤 꿰맨 작은 주머니이다. 겉에는 금, 은실로 몽골족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안을 수놓는데, 예를 들면 아름다운 산단(山丹), 연꽃 혹은 날짐승과 동물들이다. 윗부분은 열려 있고 아랫부분에는 술로 장식하였으며, 중간에는 비단끈이 있기에 사용 시 아래위로 잡아당기면 된다. “하부터거”에는 향료, 약물, 코담배병, 담배, 바늘과 실 등을 넣고 다닌다. 이러한 “하부터거”는 유목생활에서 매우 실용가치가 있는 장식품이며 또 몽골족 젊은 여성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나무그릇, 허리에 차는 칼(腰刀), 부시(火镰) 이 3가지는 몽골족 남성들이 몸에 차고 다니는 물건들이다. 몽골족은 나무그릇을 사용하기 즐긴다. 나무그릇은 원목으로 제작된다. 겉에는 백은으로 테를 둘렀으며 무늬가 매우 아름답고 정교롭다. 밥을 먹을 때 한집 식구일지라도 모두 각자의 그릇을 사용한다. 손님도 자신의 그릇으로 식사를 하여야 한다. 자신의 그릇을 갖고 다니지 않는 자는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나무그릇, 허리에 차는 칼, 부시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관습은 몽골족의 장기적인 유목생활과 역사상 여러 차례의 전쟁난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상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며 또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의상 자체는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따라 변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옷감, 스타일, 장신구 예술 등의 변화에서 표현된다. 전통 의상의 유행범위는 점차 축소되고 변화되었다.
음식은 인류 생존의 첫 번째 수요이다. 따라서 음식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며 각 민족의 음식은 생태환경 및 자연자원과 사회생산력 발전수준의 영향하에 독특한 색, 향, 맛을 가지는 식단을 형성하게 된다. 몽골족은 장기간 북방초원에서 유목을 위주로 생활해왔으며 독특한 민족특색을 띤 음식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들의 주요 식품은 볶은 쌀을 제외하고 백식(白食)과 홍식(红食) 등 설도 있다.
백식(白食)은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몽골족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백식(白食)은 식품과 음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우유로 만든 음료는 생우유, 요구르트, 발효시킨 우유(生熟酵酸奶), 혼합주(混合回顾酒) 등이 있다. 유제품으로는 젖두부(奶豆腐), 요구르트두부, 치즈, 버터크림, 크림, 황유, 우유부스러기, 황유부스러기, 백젖두부 등이 있다. 몽골족이 백색을 숭상하고 있기에 귀중한 손님을 접대할 때마다 백식을 대접하곤 한다. 경사로운 연회를 베풀 때 혹은 명절을 보낼 때마다 손님들에게 젖두부 혹은 우유피자를 올려 기원의 뜻을 표시한다. 만약 친인들이 먼 길을 떠나면 백식을 올려 먼 여행길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홍식(红食)은 육류식품이다. 그 주요 원료는 소고기와 양고기이고 다음으로는 염소고기와 낙타고기이다. 먹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고기, 양고기찜, 양고기구이 등이 있다. 연회석에는 정양석(整羊席)을 준비하는데 몽골통양구이(蒙古烤全羊), 회로양고기구이(挂炉烤羊) 등이 있다.
파오거(穹庐居)는 유목민족이 창조한 것이다. 파오거의 장점은 쉽게 분리하고 조립하는 데 있다. 이는 이사할 때 매우 편리하고 폭풍 · 폭설에의 저해력을 감소시키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족에게는 매우 적합한 것이다. 파오거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며 여진족(女真人) 사이에서도 한동안 유행되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몽골족들은 여전히 파오거를 계승해왔다. 파오거의 속칭은 몽골포(蒙古包)이다. 그 외형은 마치 펼쳐진 우산과 흡사하다. 파오거의 윗부분에 지붕창이 있는데 그것은 공기를 유통시키고 햇빛을 받아들이며 밝게 비추는 작용을 하다. 또한 불을 지필 때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 작용을 하기도 한다.
파오거의 외곽 주위는 탄자를 둘러 원형벽을 만들었다. 몽골포는 대부분이 하얀 탄자를 외곽에 두르고 그 위의 사면을 밧줄로 안정적으로 묶어놓는다. 몽골포의 높이는 약 7~8척이고 직경은 약 장여가량 된다. 몽골포의 크기는 60두, 80두, 90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몽골포 내의 뼈대구조(骨架结构)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평행사변형 모양의 교차형으로 된 벽으로서 그물망주머니처럼 잡아당겨 늘릴 수도 있고 좁힐 수도 있다. 잡아당기면 높이가 4~5척이 되고 넓이가 약 6~7척이 된다. 연결한 뼈대구조가 크고 많을수록 몽골포의 크기도 따라 커진다. 원형 지붕창과 몽골포 골격구조 사이는 통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집 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장(房顶)을 중심으로 방사선식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든든한 줄을 벽에 고정시켜 받쳐준다. 몽골포의 나무문은 밧줄에 의해 양옆의 그물모양의 벽에 고정되었으며 문밖에는 또 한 층의 털담요로 포장되었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이 구비된 몽골포가 구성된다.
몽골포를 지을 때에는 모두 동남방향을 향해 짓는데 이는 태양을 숭상하는 몽골 민족의 신앙과 연관되며, 중요한 것은 엄동설한의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북방초원은 고한대(高寒带)기후 지역에 속하기에 겨울에 서북풍이 많이 불기 때문이다. 몽골포의 건축은 몽골인민들의 지혜와 창조정신을 표현하였다. 예전의 전통관습에 따르면, 초원 유목민들은 작업과 휴식 시간을 늘 몽골포의 천장을 통하여 비추어 들어온 태양 빛의 그림자로부터 판단해왔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동남 방향을 향해 지은 몽골포는 60여 개의 지지대가 있는데 이 두 받침대 사이에 이루어진 각도가 6도 정도 된다고 한다. 이는 현대 시계의 시간 각도와도 일치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실천하는 중에 기하학 원리를 파악한 몽골족인들이 천문학지식을 자신들이 거주하는 건축예술과 실제생활에 응용하였음을 말해준다.
몽골족은 물과 풀을 따라 생활하고 있기에 말은 제일 중요한 교통도구이자 생활의 좋은 도우미이다. 유목과 사냥, 전투는 모두 말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몽골족은 말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막지대에서는 낙타가 중요한 교통도구이며 “사막의 배(沙漠之舟)”라고 불린다. 현시대의 유목민들은 지금도 말을 타고 경마 경기를 하며 말을 사랑하지만 오토바이나 지프 등 기타 차량들을 소유하고 있는 가정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철도, 고속도로, 항공 등 교통운수업이 신속히 발전되면서 교통수단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혼인 · 가정과 상 · 장례
몽골족은 족외혼제도를 주장하고 있어 아내를 맞아들이려면 반드시 다른 씨족의 여자를 물색해야 하며 본 씨족에 시집온 여자는 남자 측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맞아들인 여자들이 전 씨족의 능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빼앗거나 혹은 전 씨족의 재물을 모두 합하여 쉽지 않게 맞아들인 여자이기에 단속하여 씨족 내에 귀속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남편이 죽은 후 아내가 재가하려면 반드시 남편 측의 가족구성원과 결합하여야 한다. 『몽골비사(蒙古秘史)』에 따르면, “해도(海都)의 큰아들 백승확아다흑신(伯升豁儿多黑申)이 죽은 후 그의 아내는 버썽훠얼뚸헤이씬의 동생인 찰척해영홀(察刺海领忽)의 아내로 되었다(海都的大儿子伯升豁儿多黑申死后, 其遗孀被其亲弟察刺海领忽收嫂为妻)”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계모가 자신의 아내가 되는 상황도 있다. 일반적으로 귀족 신분 중의 부친은 수많은 처첩을 데리고 살기 때문에 계모의 나이는 본처가 낳은 자식의 나이와 비슷하다. 그리하여 부친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면서 망부의 왕비와 첩을 마찬가지로 재산처럼 계승받는다. 칭기즈칸이 죽은 후 그 형제들이 칭기즈칸의 후첩들을 쟁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원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몽골족들은 형제가 죽으면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는 풍습을 보존해왔다. 명나라 시기의 알탄칸(俺答汗)이 죽은 후 그가 총애하던 삼낭자는 선후하여 그의 장자와 장손에게 재가하였다. 이에 반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더욱 보편적으로 성행되는 것은 미혼인 어린 남동생이 과부가 된 형의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혼수도 절약하고 인정에도 부합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몽골족의 혼인에는 역사상 부녀자를 강제로 약탈하여 혼인하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약탈혼(掠夺婚)이라고 한다. 만주족이 흥하기 전에 북방의 여러 종족은 이러한 단계를 모두 거쳐 왔다. 여인을 약탈하는 것과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마찬가지로 여겼으며 이것은 부락지간에 전쟁을 치르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또한 차지한 여인이 많고 적음과 한 남성의 지위의 높고 낮음은 정비례를 이루었다.
칭기즈칸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최대의 낙은 적들을 눌러 복종시키고 적들과 싸워 이겨 뿌리를 뽑아버리고 준마를 타고 아름다운 안해(아내)와 첩들을 맞이하여 잠자리를 시중들게 하는 것이다(男子最大乐事, 在于压服敌众和战胜敌人, 将其根绝······骑其骏马, 纳其美貌之妻妾以侍寝席).” 이는 그 당시 남성들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칭기스칸의 모친 역시 다른 남성의 신부로 출가하는 도중에 칭기즈칸의 부친이 신속히 약탈하여 데려온 아내라고 한다. 칭기즈칸의 처도 한때 멸아걸인(蔑儿乞人)에게 납치되었었다.
그 당시 몽골 각 부락 사이에는 난투극과 약탈혼의 기풍이 성행하였는데, 저명한 역사 서사시 『강격이(江格尔)』의 『홍고이의 혼인(洪古尔的婚姻)』 제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홍고이는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분주히 다니면서 잠부말라칸(扎木巴拉可汗)의 딸 산단거르러(山丹格日勒)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산단거르러가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이 생겨 머뭇거리다가 후에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너는 이미 만 18세를 지나왔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먼 곳을 마다하고 고생하여 미인을 찾아갔는데 신부의 그림자도 못 보고 뒷걸음질만 하면 영웅이라는 단어에 모욕을 주는 것이 두렵지 아니한가.” 이 서사시의 기록에 따르면 약탈혼인은 당시에 있어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영웅적 행위라고 여겨졌으며 신부를 빼앗긴 신부의 부모는 사위가 영웅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현재 몽골족의 혼인은 일부일처제를 실시하고 남녀가 모두 자유롭게 연애한다.
유목 시기에 몽골인들은 고정적인 묘지가 없었다. 장례풍습에는 주로 야장(野葬)과 원지장(原地葬)이 있다. 야장 의식은 사람이 죽은 후 시체를 굴레차(勒勒车, 몽골족 수레)에 싣고 초원을 돌아다니다가 시체가 들판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 묻었다. 그런 다음 시체를 들판에 버리고 차를 끌고 몽골포에 다시 돌아오면 장례의식이 끝났다. 원지장은 친인이 죽은 후 시체를 친인이 살았던 곳에 두고 제사를 지낸 다음 식구들이 모두 함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이것도 실제는 야장에 속한다.
이후에 몽골족도 한족과 기타 민족의 영향을 받아 고정된 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한 사고 없이 자연사한 사람들은 토장(土葬)을 실행하고 사고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화장(火葬)을 실행한다. 장례를 치를 때 목관을 사용한다. 관목의 모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와관(卧棺)으로 일반인이 죽으면 와관을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좌관(坐棺)인데 좌관의 모양은 매우 특별하다. 외형은 마치 자그마한 절 모양과 흡사하다. 모두 세 층으로 나누어졌으며 윗부분은 처마식의 지붕이고 중간층은 장방형 모양이며 아래층은 정방형 모양이다. 입관할 때 죽은 사람을 다리를 틀고 관에 앉게 하며 엉덩이 아랫부분은 밑층에 놓이게 하고 몸과 허리부분은 중간층에 놓이게 하며 머리 부분은 맨 위층에 놓이게 한다. 오직 활불(活佛), 갈근(葛根), 라마(喇嘛), 여승 그리고 불교를 특별히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믿는 사람만이 좌관을 사용할 수 있다.
몽골 사람들이 토장을 실행한 후 친인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전에 집에서 영혼을 잠시 머무르게 하고 3, 5, 7일 동안 제사를 지낸 후에 장례식을 치른다. 장송하는 방식에는 만약 노인이 사망한 후 관은 사람이 들고 중년과 청소년이 사망하면 차로 영구를 실어 묘지에 보낸다.
명절과 체육
몽골족에게 있어서 가장 성대한 전통명절은 나담페어축제(那达慕大会)이다. 명절은 초원에 풀들이 무성하고 가축들이 살쪄 있는 매년 음력 7월과 8월 사이에 진행한다. 나담페어축제의 의미는 “오락”과 “노는 것”이다. 집회가 열리는 시기는 3일, 5일 혹은 6일, 7일인데 이는 대회의 규모에 따라 일정하게 변화된다.
나담페어축제의 역사는 유구하다. 역사 기재에 의하면 칭기즈칸이 화자자모(花刺子模)를 정복한 승리를 경축하기 위하여 포합소제해(布哈苏齐海)에서 성대한 나담페어축제를 진행하였고 경축대회에서는 활쏘기시합을 진행하였다. 그 후 원 · 명 시기를 거쳐 활쏘기, 씨름, 말타기는 남자들이 나담페어축제에서 자웅을 겨루는 항목이 되었으며 그중에서 씨름과 말타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었다. 씨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수매(독수리)라는 명예를 얻었고 제일 먼저 결승선에 이른 기수는 초원에서 제일 숭배하고 존경하는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나담페어축제는 점차적으로 정기적으로 소집하는 조직성이 있고 목적성이 있는 오락활동으로 변해갔다.
나담페어축제는 현재 몽골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되고 성스러운 명절이다. 씨름, 활쏘기, 말타기 등 고전적인 항목을 제외하고 사격, 밧줄 당기기, 가무공연 그리고 물자교환, 초원관광, 초원문화절 등 내용들이 증가되었다.
나담페어축제를 제외하고 몽골족에게는 또 대중성적인 두 가지 중요한 명절이 있다. 즉, 음력설(大年)과 소년(小年)이다. 몽골족은 음력설(春节)을 상절(上节)이라고 한다. 섣달그믐날 초원의 유목민들은 한 가정이 모두 모여 “수파육(手把肉)”을 먹는다. 저녁이 되면 새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몽골 장기를 두고 연예인이 마두금(马头琴, 몽골족의 현악기)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샤라카[嘎拉卡, 양의 뼈로 만든 놀이-양골괴자(羊骨拐子)]를 놀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손아랫사람들은 손윗사람들한테 사세주(辞岁酒)를 올린다. 그리고 온 가족이 난로를 에워싸고 모여앉아 물만두를 먹는다.
정월 초하루에 사람들은 색상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통복장을 입고 향을 피우고 폭죽을 터뜨린다. 그리고 말을 타고 놀거나 혹은 친척과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서로 새해의 축복을 주고받는다. 농업지역(农区)의 몽골족들은 음력설 기간에 연등회(灯会), 그네 타기, 씨름, 민족가요 등 여러 가지 오락체육활동을 벌인다.
소년(小年)은 음력 12월 23일이다. 이날은 바로 부뚜막신(灶王爷)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그리하여 이날을 제조(祭灶), 제조신(祭灶神), 제화(祭火)라고도 한다. 집마다 부엌에서 향을 피우고 제물을 준비하는데 제물에는 백식과 홍식이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온 가족이 모두 부뚜막신에게 절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연장자는 기도문을 읊고 비호를 해주기를 기도한다.
몽골족의 명절에는 음력설, 정월 대보름(정월 15일), 한식(寒食), 청명, 불교 관불회, 단오, 칠석, 중원(음력 7월 15일), 추석, 중양절, 동지, 납일, 제오보, 제천, 나담축제, 소년 등 전통명절들이 있다. 이상 열거한 명절 중에서 일부는 몽골 민족이 공동으로 경축하는 명절이고 일부분은 거주하는 지역의 명절이다.
몽골족의 씨름은 체육 유형의 한 종류로서 이 풍습은 북방의 여러 민족이 모두 진행하는 풍습이다. 예를 들면 다우르족, 카자흐족, 조선족, 살라족 등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씨름은 그중에서도 남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다. 몽골족의 속담에 “초원의 남자는 세 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씨름, 말타기, 활쏘기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중 씨름은 세 가지 재주 중에서 가장 손꼽히는 재주이다.
씨름은 몽골족 인민들이 용감하고 슬기로운 성격의 상징으로서 활력이 넘치고 민족특색이 농후한 운동이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13세기에 씨름은 이미 몽골족 지역에서 대단히 성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씨름은 군사 체육 운동 중의 하나이며 또한 대중적인 오락활동의 하나였다. 옛날 각 부락 사이에서는 화합과 단결을 꾀하기 위하여 늘 씨름 시합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몽골족의 씨름 시합은 대부분 명절(예를 들면 나담축제)과 수확을 경축하는 날에 많이 진행한다. 의식이 성대하며 광경이 열렬하다. 시합 전에 덕망이 높은 연장자가 씨름 선수의 체질과 연령에 따라 시합소조를 편성하고 짝을 지어준다. 성대한 시합이면 씨름 선수들이 초원에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많을 때에는 100명 이상에 달하며 거기에 열정적인 관람객들까지 모여들면 그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씨름 선수들의 옷차림을 보면 위풍당당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위에는 소가죽(혹은 낙타가죽)으로 된 몸에 붙는 반팔 조끼를 입고 아래옷은 테두리에 꽃무늬 도안이 새겨진 검은색 바지를 입고 신은 검은색 장화를 신는다. 어떤 선수들의 목에는 많은 채색띠가 걸쳐져 있는데 이는 그가 지난 시합에서 우승을 하였다는 상징이며 또한 개인 실력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경기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경기가 시작될 때 씨름 선수들은 연장자의 인솔하에 위풍당당하게 경기 장소에 도약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연장자는 “아” 자로 노래를 부르면서 선수들에게 축복을 준다. 이때 주위의 관중들은 마두금의 현악기소리를 모방한 “태양의 노래(朝日歌)”를 부른다. 씨름선수들이 서로 허리를 굽혀 상대방에게 경례를 한 후 경기는 정식으로 시작된다. 이때 경기장의 모든 노랫소리는 멈추고 관객들의 시선은 모두 씨름 선수들한테 집중된다. 한차례의 씨름 경기가 끝날 때마다 관중들의 노랫소리는 또다시 울려 퍼지며 이러한 형식이 반복 순환되면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거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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