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13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Janmeda 광장에서 열린 출정식. 위기에 처한 나라를 돕기 위한 강뉴부대 파병 출정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돕고자 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은 6.25 전쟁이 발발한 아시아의 또 다른 약한 나라를 돕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군함에 몸을 실었습니다.
강뉴부대는 16개국 참전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5차에 걸쳐 6,037명의 참전 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어떤 참전용사들은 월급을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줬다고 합니다.
강뉴부대원들은 이름도 모르는 나라로 목숨 바쳐 싸우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명 강제로 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중의 전쟁터로 향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Desta와 Mekonen, 조국 에티오피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생각하며 세계 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 위해 황제근위병이란 멋진 자리도 버리고, 만류하는 가족들까지 뒤로한 채 죽음이 기다리는 땅을 향해 형제가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64년이 지난 바래진 사진 뒤에 암할릭어의 친필로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열악하였다. 무엇보다도 생전 처음 겪는 눈이라는 물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으나,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전쟁터에서 형 Desta씨는 싸늘한 주검이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한 것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정말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목축업으로 살아가던 에티오피아에서는 7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가 채 되지 않았을 때,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넘었던 에티오피아 경제가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멩게스투라는 군인은 그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스스로 지원했던 강뉴부대원들은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25 참전 용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에티오피아, 그 에티오피아에서도 더욱 비참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