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2/ 고의적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면서 한 증인의 증거만으로는 죽이지 말라니?
피를 보복하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민 35:19 30)
아무런 의도가 없었는데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은 얼마나 불운한 사람인가? “악의가 없이 우연히" "기회를 엿봄이 없이" (22절) 한 행동으로 혹은 “보지 못하고…해하려 한 것도 아닌데"(23절)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은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와는 분명히 다른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런 경우를 위한 제도가 곧 도피성 제도이다. 이것은 매우 인도적인 제도이다. 불운한 실수로 살인자가 된 사람은 도피성에 피신하여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 사실 여부가 판가름 날 때까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행위가 실수나 우연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 머물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실수로 인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실수로 인한 불행이지만 생명을 잃게 한 것은 심각한 행위라는 것을 모두 가르쳐 주었다. 또한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서 해방된 것, 도피성의 위치가 이스라엘 땅 어느 곳에서든 반나절이면 이를 수 있었던 것, 도피성 피할 수 있는 자는 타국인과 우거하는 자들도 차이가 없었다는 것 등은 이 제도의 복음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도피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잃은 생명은 되돌릴 수 없기에 살인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처형당해야 했다. 피의 보수는 친족에게 위탁되었다. 그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면 죽일 것"(19절)이었다. 이는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함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큰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30절은 이 사형을 집행하려면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규정은 신명기에서도 반복된다. 신명기 17장 6절은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신명기 19장 15절은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중인의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죄를 처리할 때에는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16) 가르치셨다.
고의적인 살인인 경우에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반드시 복수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명령은 서로 충돌되지 않은가? 만일, 살인이 은밀히 진행되어 증인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군다나 복수의 증인을 찾는 일은 더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규정이 사실상 살인자의 처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신명기19장 15절에 의하면 복수의 증인 규정은 재판에 회부될 모든 죄에 적용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는 성경이 말하는 증인의 의미가 단지 목격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해결된다. 레위기 5장 1절은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이라고 한다. 즉 증인은 실제로 범죄 사건을 본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로로든 알게 된 사람도 의미한다. 범죄자의 범죄 행위를 전후하여 누군가 어떤 경로로 그의 범죄 행위를 인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범죄 사실을 알게 된 이도 증인이다. 창세기 31장 46~49절에 보면 야곱과 라반이 화해하고 나서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것을 증거의 무더기'라 하였다. 두 당사자 간의 계약을 기록한 문서를 증인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수 24:25~26). 그러므로 증인이란 사건과 연계된 증거물, 문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건과 관련된 일을 아는 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제도는 고의적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는 것과 분명한 확증을 위해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