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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쪽의 토석 혼축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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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포곡형 석축 및 토석 혼축 산성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의 산봉우리와 북쪽의 낮은 봉우리 및 북서쪽의 계곡을 연결하여 축성하였다. 탐방자의 미숙한 눈에도 성터로서는 최적지로 보일 정도의 지형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삼각형의 모양이며 南高北低의 형태이다.
남쪽의 성벽은 천연의 급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서북쪽의 계곡에는 수구와 문지를 두었고 남쪽 성벽의 가운데에 폭 4M 정도의 남문지가 있다. 한편 동쪽 봉우리에는 문지와 망대지가 있고 이곳 봉우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장대지가 있으며 서쪽 봉우리에도 망대지가 있다.
또한 수구에서 동쪽 봉우리와 연결되는 낮은 봉우리에 북쪽망대지가 있으며 이곳 망대지에서 동쪽 망대지까지의 북쪽성벽은 토석 혼축하였으나 부분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돌로 쌓아 불리한 지형을 보완하였고 수구에서 서쪽 망대지까지는 성벽을 토석 혼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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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구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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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쪽의 문지는 남문지에서 볼 때 계곡의 좌편에 있어 서정리와 옥각리 사이의 진터벌로 나가며 성안에는 넓은 대지가 곳곳에 있어 많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계로 짐작되는 토기편과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서산성은 성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되었으며 이웃 관산성과 함께 상주 - 옥천 - 부여(공주)로 통하는 길을 방어하는 주요한 성이며 성이 얕은 구릉위에 축성되어 있어 보민용 치소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출토되는 유물이 대단히 많아 이 산성을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가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탐방자 본인의 추측으로는 서기 554년의 신라와 백제의 사이의 관산성 전투는 이웃 관산성과 이곳 서산성을 중심으로 벌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 문 제 점 : 서산성터로 가는 입구의 안내판은 물론 유적지의 현지 안내판이 전혀 없어 아쉬우며, 또한 성안 곳곳에 민묘가 자리하고 있어 성터의 훼손이 우려된다. 우리군의 옛 치소로 생각되는 성이니 만치 옥천군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 관리해 주기를 기대한다.
■ 찾아가는길 : 삼거리(현재는 사거리)검문소에서 보은방향 국도를 따라 고속도로 밑을 빠져나가 약 150M 쯤 가면 현대공업사 못 미처 등산로 안내판 있는데 이 곳에서 좌측 산쪽으로 고갯길이 있다. 고갯마루가 서산성의 남문지이다. 또한 현 우시장 뒤의 명가(식당)에서 고갯길을 올라가면 서산성의 동문지에 이르며 서산성을 오르는 이 고갯길은 구읍(상계리)과 옥각리 사이의 옛 길로서 현 삼거리 검문소 자리가 계곡으로 험난했을 때는 이 길이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고 한다.
삼거리토성에서 바라본 삼양리토성의 모습
삼양리토성에 대해 옥천신문에 기재한 조일권씨가 글을 보면
삼양리토성(三陽理土城)
■ 위 치 : 삼양리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도로 사이의 작은 능선
■ 높 이 : 해발 140M
■ 형 태 : 포곡형 토성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5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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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문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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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토성으로서 성의 둘레를 모두 흙으로 쌓거나 능선을 이용하였으며 지대가 낮은 능선은 흙으로 높이 쌓아 보강하였다. 특이한 것은 서쪽 성벽을 본성 바깥에 또 하나의 성벽을 두어 의문을 갖게 하는데 지형구조상 그러한지 아니면 성의 방어를 튼튼히 하게 위한 것인지 연구 대상이라 하겠다.
서쪽의 바깥성벽과 남쪽 성벽의 축조 방식은 이원 현리토성의 남쪽 성벽 및 서산성의 북쪽 일부 성벽과 매우 흡사하다. 한편 성의 전체 모양은 거의 원형을 이루며 가운데가 낮고 남쪽에 수구지를 두었으며 문지는 남쪽과 북쪽에 두었는데 북문지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건너 서산성과 마주보며 남문지는 수구지와 같이 있는데 시외버스 터미널 방향이다.
장대지로 보이는 곳이 서산성이 바로 보이는 북쪽 능선에 두어 구읍 방향에서 삼거리 검문소로 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토기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양리 토성은 청성면의 굴산성과 같이 출입이 매우 용이한 작은 능선을 이용하였으며 인근에 있는 서산성 및 관산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요새를 이루는 옥천군의 옛 치소로 생각된다.
■ 문 제 점 : 삼양리토성 역시 안내판은 없으며 성안에 민가가 존재하여 축사등이 있어 성의 내부가 많이 훼손되었으며 관찰 또한 자세히 할 수 없었다.
■ 찾아가는길 :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전쪽으로 약 20M 정도가면 오른쪽으로 능선을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이 곳에서 약 30M 올라가면 서쪽의 바깥 성벽에 다다른다.
삼거리 토성에서 내려다 본 진터벌 및 고리산 그리고 석오선생
구글지도를 참조하면 석오선생 얼굴 앞 쪽의 들이 진터벌입니다. 진터라는 지명은 대부분이 군사들이 전투를 위해 진을 친 지역을 진터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고리산입니다. 고리산의 이름 고리에 대해 여러 해석을 하다가 일반 고리라 해석을 해서 고리 환자로 환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에서 고구려산성이 발견이 되고, 대전의 월평산성 발굴을 하다가 백제성터 밑부분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이 되었는데, 예산상의 문제로 발굴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또한 대전 복용동 당산마을 유적 발굴과정에서 마을이 한꺼번에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흔적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를 아마도 고구려 남하정책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하여 마을이 뷸 타버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산성트레킹- 자유게시판-잠든 시간을 깨우다 - 대전 복용동 당산마을 유적발굴 현장 글에서)
아직 정설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전권에서 고구려 흔적의 발견과 해석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연구재단 회장인 서길수 교수의 ‘고구려 국호에 관한 연구’를 보면 서기 423년 전후 高句麗에서 高麗로 국호가 바뀌었고, 高麗는 고려로 읽혀진 것이 아니라 고리로 읽혀졌다고 언급하였다. 즉 고리산이 고구려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산성은 바로 코앞까지 온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약 486년을 전후로 나제동맹을 근거로 백제 땅에 신라가 만든 산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위 내용에 관하여 추후 이야기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삼거리 토성에서 관산성으로 올라 갑니다.
관산성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래 사진의 물을 보고 산성에서 군사들이 먹었던 샘이라고 하는데, 장마철에만 생기고 갈수기에는 없어지는 물이라 군사들이 먹었던 샘으로 보기 어렵고 그당시 군사들은 금구천이나 서화천 물을 길어 먹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에 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하였고, 아직 관산성의 위치가 고리산이라는 설과 삼성산이라는 설이 있어 옥천향토사쪽에서는 어디가 관산성이라고 정하지 않아 이 곳을 삼성산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관산성 주변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돌을 쌓는 것은 자연보호 일환으로 지지할 만한 일이고, 등산을 하면서 기원하는 마음이 있어 돌탑을 쌓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면 여러명이 따라 하는 습성이 있어 돌탑을 성돌로 쌓는다면 그나마 무너진 성돌의 위치가 바뀌어 유적 파괴행위가 될 수 있으므로 제대로 복원이 될때까지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상기 4개 성의 관계를 보면, 장령지맥이 금구천에 의해 끊어지고, 아래의 지도와 같이 굽이치면 흐르다가 서화천과 만납니다. 따라서 금구천과 서화천은 자연스럽게 자연해자 역활을 하고, 평시에 다리를 만들어 관문으로 이용하다가 전쟁이나 위기 시 다리를 끊으면 자연 방어 시설이 되고, 삼거리토성에서 간단히 돌을 던지더라도 상대편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전략상 상당히 유리한 거점입니다. 삼양리토성은 그 시대 이 지역의 치소가 있는 추정이 되고, 서산성과 관산성은 정면으로 공격을 하다가 실패를 하면 우회 공격을 하는데 이 우회 공격을 막는 역활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이 4개의 성은 각각의 작전권을 갖고 독자적으로 독립된 성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며, 하나의 명령체제로 운영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한 관산성 전투 시 수만의 군사가 대치 시 신라는 백제군의 우회를 막기 위해 왼쪽으로는 관산성 보완하고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을 만든 것으로 생각이 되고, 오른쪽으로는 서산성을 보완하고, 지오리산성과 국원리산성을 만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때도 김무력장군이 중심이 되어 하나의 명령체제로 운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래 지도는 상기 4개 산성의 위치를 나타낸지도이고, 금구천이 지금과 같이 반듯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5번 서산성, 8번 삼거리토성, 10번 삼양리토성, 15번은 관산성입니다. 7번은 대원군의 척화비이고, 9번은 조선시대 역참시설의 하나인 가화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합니다.
옥천에서 관산성을 보고 찍은 겨울사진과 여름 사진입니다.(클릭하면 원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관산성에서 용봉산성으로 가면서 찍은 구진벼루 사진입니다. 구진벼루의 뜻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성왕이 구천에서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구는 구천의 개구자이고, 진은 나루진, 건널진, 벼루는 벼랑입니다. 즉 구천을 건너는 곳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서화천이 구천이 되겠지요. 구글지도와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산행 방향에 있는 장령산과 마성산의 모습입니다.
산행도중 바위가 깍아 쌓은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하나의 바위라 해서 살펴본 바위 랍니다. 철환님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바위가 계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상록수님과 고고산님도 멋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용봉산성입니다. 표지석이고요, 산성에서 성돌로 돌탑을 쌓지 말자는 의미에서 사진 찍었습니다. 유적 파괴행위입니다. 그리고 숲으로 인해 용봉산성에 대한 자세히 사진을 찍지 못했으나 용봉산성의 일부 입니다.
용봉산성에 대해 옥천신문에 조일권씨가 기재 내용을 보면
용봉산성(龍峰山城)
■ 위치 : 옥천읍 양수리 망지미마을과 군서면 하동리 옥녀봉 마을 사이의 산
■ 시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형태 : 테뫼형 석축산성
■ 높이 : 해발 437M
■ 둘레 : 약 300M
■ 탐방일시 : 2001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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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성벽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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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 남북으로 형성된 마성산 줄기중 용봉에서 북서쪽으로 능선이 하나 형성되는데 용봉과 북서쪽 능선 약 100M 정도를 테뫼형 석성으로 성을 축성하였다. 성의 동쪽인 옥천쪽은 경사가 매우 가파른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성의 동쪽에 장대지가 있으며 성의 서쪽에 망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남서쪽 성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남아있는 남서쪽 성벽에는 길이 약 10M 높이 약 2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원래의 성벽 높이는 4M 정도로 추정된다. 성의 내부 길이는 약 100M 이며 폭은 10-25M 정도로 성의 양끝은 조금 넓고 가운데는 좁은 형태의 산성이다. 성의 내부에는 대지로 보이는 평탄한 지형이 여러 곳 있으며 중간 지점에서는 건물지 또는 주거지로 보이는 지름 약 13M 정도의 타원형으로 된 우묵한 시설물이 있다. 성의 축성형태는 이웃의 동평산성과 비슷하며 토기조각 등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용봉산성에서의 전망은 주위의 모든 성이 보일 정도로 매우 좋다. 북쪽으로는 자모리성과 노고성이 가깝게 보이며 저 멀리 이백리산성과 환산성도 잘 보인다. 동북쪽으로는 가깝게는 관산성과 서산성 및 삼양리토성이 멀리는 지오리산성과 국원리산성이 보이며 서쪽으로는 성티산성과 계현성이 잘 보인다. 남쪽으로는 가까이 있는 동평산성과 조금 멀리 마성산성이 보이며 동남쪽으로는 저 멀리 마니산성까지 잘 보인다.
용봉산성은 주위의 13개성과 옥천의 들판 및 군서면 동평리 일부와 금산리를 제외한(동평산성에 가려 보이지 않음) 군서면 들판이 잘 보이는 성으로서 망루형 산성으로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웃의 동평산성이 너무 가깝게(직선거리 약 600M 정도) 축성되어 있어 두 성의 관계 및 두 성의 축성 국가와 축성 시기가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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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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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점 : 용봉산성은 옥천군지에는 전혀 기록이 없으나 일부 자료에 단지 용봉에 성터가 있다고 언급만 하였으나 금번 탐방결과 이웃의 동평산성과 축성방법 및 성의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며 동평산성과 같은 시기 또는 그 이전에 축성한 성으로 추정되며 일부에 조금이나마 원형의 성벽이 남아 있어 보존 대책이 요구된다. 한편 성의 내부 곳곳에는 예비군 참호가 있어 성이 훼손되고 있다.
■ 찾아가는길 : 군서면 하동리 옥녀봉 마을에서 용봉을 오르는 길이 있으며 양수리에서 관산성을 오르는 고개에서 마성산 줄기를 따라 용봉까지 가면 된다.
아래 사진의 중간 부분이 대천리입니다. 대천리는 대골이라고 하는데, 신라 김무력장군이 관산성 전투 시 관산성을 향하여 대군을 이끌고 행군을 하다가 대골에서 전군을 집합시켜 진을 치고, 여러날 머물면서 전력을 가다듬은 뒤에 관산성 공격에 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대천리 이야기는 처음 관산성 백제가 점령 시 신라군의 탈출로로, 성왕을 구천에서 잡아 퇴각한 길로, 일본서기 기록과 관계등 여러 이야기가 이곳 대천리, 대골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말해 질 수 있는데 그 중 일본서기와의 관계를 언급하면.
그 중 일본서기에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餘昌遂見圍繞。欲出不得。士卒遑駭不知所圖。有能射人筑紫國造。進而彎弓占擬。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發箭之利通所乘鞍前後橋。及其被甲領會也。復續發箭如雨。彌■不懈。射却圍軍。由是餘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餘昌讚國造射却圍軍。尊而名曰鞍橋君。〈鞍橋。此云矩羅賦。〉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25년(서기 554년) 겨울 12월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차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안교(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이(くろじ)라 한다].
백제 위덕왕인 여창이 후퇴를 하다가 신라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왜군 축차국조의 활 솜씨로 신라군을 저지하고 샛길로 후퇴를 했다는 말인데, 옥천에서 화인진을 경유하여 상주쪽으로 신라땅 깊숙히 들어갔다고 할 때 보은이나 청산 정도의 진격일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그곳에서 철수할 때 신라가 백제군를 포위할 곳이 없습니다. 단지 이곳 옥천 대천리에 신라군이 집결하여 관산성을 공격하는데, 백제군은 화인진에서 수복리, 구읍 그리고 관산성으로 철수하는 병사가 계속해서 관산성 방어의 군사로 이용이 되어 관산성 점령이 어려우니 신라가 증원되는 백제군를 차단하기 위해 지금의 구읍쪽을 공격을 하니 백제군의 퇴로가 막힙니다. 이에 백제군이 옥천읍사무소쪽에서 신라군을 막아내고 여창은 지오리산성과 국원산성의 사이길(요사이 도로명 각신로)로 우회하여 관산성을 경유하지않고 철수를 합니다.
저는 일본서기의 샛길이 지금의 각신로로 생각하며, 대천리 이야기와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내용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평산성 입니다.
동평산성에서 본 상중리쪽 전망입니다. 전기철탑은 상중리 산성쪽으로 올라 갑니다.
동평산성에 대해 옥천신문에 조일권씨가 기재 내용을 보면
동평산성(東坪山城)
■ 위 치 : 양수리와 군서면 동평리 사이의 성재 북쪽 100M 산정
■ 높 이 : 해발 405M
■ 형 태 : 테뫼형 석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신라계성)
■ 둘 레 : 약 3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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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성벽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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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테뫼형 석성으로 남북으로 능선을 따라 길며 동쪽과 서쪽은 매우 급경사면이다. 성의 남북 길이는 약 100M 정도이며 동서 길이는 20-25M 인데 남쪽 보다 북쪽이 좁다. 또한 성의 지형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간 높은데 성의 구조와 형태가 사양리의 사양성(계현성)과 매우 닮았다.
옥천읍 방향의 동쪽성벽과 북쪽 성벽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남쪽 성벽과 서쪽성벽은 군데군데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높이 1.5-2M 길이 100M 이상이 붕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원래의 성벽 높이는 3-4M 정도로 생각되며 다른 성들과는 다르게 원형의 모습을 제일 많이 갖추고 있는 산성이다.
한편 성의 북쪽 제일 높은 곳에 문지와 망대지가 있는데 성의 남쪽 능선과 연결되는 곳에서는 아무 곳에도 문지의 흔적이 없이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어 궁금증을 낳게 한다. 한편 성벽 틈새 곳곳에 기와조각과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고있어 현존하는 성벽은 기존의 건물과 시설물을 허물고 다시 쌓은 성벽으로 짐작케한다. 한편 성벽에 사용한 돌들의 재질 때문인지 성벽의 돌들이 다른 산성 성벽의 돌보다는 상당히 깨끗해 보여 오래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동평산성은 성의 남쪽에 있는 성재(양수리와 동평리사이의 고개)를 지키기 위하여 축성되었으리라 생각되나 성재와 연결되어야 하는 성의 출입문인 남문지가 없고 단지 관산성과 연결되는 북문지만이 있어 의문이 가는데 이곳에서의 전망이 금천리를 제외한 군서면 전체와 옥각리 방향을 제외한 옥천읍 전체가 잘 보여 단지 관산성의 부속성인 관측 목적의 보루가 아닌가 한다.
■ 문 제 점 : 관산성에서 장룡산에 이르는 능선의 등산로가 성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북문지와 성의 남쪽 성벽을 이용하고 있어 훼손이 우려된다. 한편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1/25,000 옥천지도에는 동평산성의 위치를 실제의 위치에서 500M 남쪽방향의 마성산 줄기에서 벗어난 산봉우리에다 표시하였는데 답사 결과 그곳에는 아무 흔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바 정정이 요구된다.
■ 찾아가는길 : 군서면 동평리에서 계곡을 따라 성재를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관산성에서 용봉을 지나 능선을 따라 가도 된다.
마성산쪽으로 가면서 성재에서 주민이 만들었을 것 같은 이정표
마성산을 오르면서 옥천읍이 잘 보이는 군요. 바로 앞이 대천리입니다.
주민이 만들었을 것 같은 이정표 앞에서 고고산님.
마성산 산성입니다.
마성산에서 구구산 막둥이님 반바지를 입어 다리가 풀에 쓸리어 다리를 손수건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마성산 산성의 일부 훼손되지 않은 성벽입니다. 이곳도 성돌로 돌탑을 쌓았습니다. 사진은 올리지않겠으나 성벽을 파손하는 행위는 삼가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마성산에 대해 옥천신문에 조일권씨가 기재한 내용을 보면
마성산성(馬城山城)
■ 위 치 : 대천리와 군서면 금천리 사이의 산정
■ 높 이 : 해발 510M
■ 형 태 : 테뫼형 석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신라계성)
■ 둘 레 : 약 1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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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속에 묻힌 북쪽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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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테뫼형으로 작은 규모의 석성이다. 마성산 산정의 동서로 조금 긴 능선중 서쪽 끝 부분에서 다시 남북으로 짧은 능선을 이루는데 마성산성은 남북의 짧은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으나 현재는 남동쪽의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물어져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망대지는 남쪽과 북쪽의 끝 부분에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무너진 돌의 량으로 보아 망대지는 5M 이상으로 짐작되며 나머지 성벽은 3M 정도인 것 같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옥천읍 전체와 군서면이 잘 보이며 특히 금천리 계곡 전체가 한눈에 보여 마성산성의 주 임무는 금산군 군북면에서 금천리 계곡을 따라 옥천군 군서면 또는 옥천읍으로 오는 적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이며 관산성을 신라가 장악한 후 동평산성과 함께 관산성의 부속성인 관측 목적의 보루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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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망대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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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제 점 : 동평산성과 마찬가지로 관산성에서 장룡산에 이르는 능선의 등산로가 북쪽 망대지를 지나가며, 또한 누군가가 성벽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돌탑이 4개나 형성되어 있어 방치할 경우 환산성과 같이 성의 훼손이 우려된다.
■ 찾아가는길 : 옥천읍 대천리 대골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양수리 망지미 마을에서 군서면을 넘어가는 고개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30분 정도가면 마성산성에 다다른다.
# 참고로 조일권씨의 견해가 저와 같아 올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구가 많이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올렸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름에 대전과 옥천사람들이 많이 놀려오는 장령산 계곡이고, 뒤에 있는 산은 서대산입니다.
장령산과 사목재가 보입니다.
사목재를 지나는 가을하늘 모습입니다.
우의를 쓰고 장령산 계곡으로 내려가는 회원님
거북식당에서 식사를하고 마지막 기촬을 하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좋은 답사 산행에 즐거운 하루가 됐겠습니다.
몇번째가 아람님이신가요? 궁금합니다.
제가 찍어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