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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8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14. 초품 중 광명을 놓으시다를 풀이함②
【經】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상광명(常光明)으로써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니
또한 동쪽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까지 이르렀다.
나아가 시방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았으니,
어떤 중생이든지 이 광명을 만나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論】 【문】 앞에서 이미 온몸으로 미소 지으시고 털구멍으로부터 광명을 놓았거늘
어찌하여 이제 다시 상광(常光)을 놓아 시방세계를 비추는가?
【답】 사람들이 다른 광명을 보면 부처님의 광명이 아니라 하다가 부처님의 상광이 차츰 크게 비추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참으로 부처님의 광명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된다.
【문】 어떤 것을 상광이라 하는가?
【답】 부처님의 네 둘레에 각각 한 길[丈]의 광명이 있는데 보살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이것이 있다.
이는 32상의 하나로서 장광상(丈光相)이라고 한다.
【문】 부처님은 어째서 상광이 한 길을 넘지 않는가?
【답】 일체의 부처님들의 상광은 한량이 없어서 항상 시방세계를 비추시나니,
석가모니불의 신통한 몸의 광명도 한량이 없으셔서 혹 한 길ㆍ백 길ㆍ천 만 억 길에서
삼천대천세계와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채우니, 모든 부처님의 상법(常法)과 같다.
다만 5탁세(濁世)1)에서는 중생들이 덕이 적고 지혜가 적으므로 한 길의 광명만을 받는다.
만일 더 많은 광명을 받게 되면 지금의 중생들은 복이 얇고 근기가 둔하여 눈으로 그 광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마치 사람이 하늘의 몸[天身]을 보면 실명(失明)하는 것과 같으니,
광명은 치성하나 눈의 힘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들이 근기가 영리하고 복이 중해지면 부처님은 곧 그들을 위해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신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상광을 보고는 환희하며 해탈을 얻는다.
비유하건대 국왕이 항상 먹던 음식으로 남은 것을 신하들에게 내려주면
받은 자는 몹시 기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갖가지 다른 광명을 보면
기뻐하지 않지만 부처님의 상광을 보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는 것이다.
【經】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광장설상(廣長舌相)2)을 내시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으시고는 빙그레 미소지으셨으며,
그 혀뿌리로 부터 한량없는 천만억의 광명을 내셨다. 이 낱낱의 빛은 천 잎의 금빛 보배꽃으로 변하고,
그 꽃 위에는 모두 화현한 부처님이 가부좌를 맺고 앉아 6바라밀을 말씀하시니, 듣는 중생으로서 듣는 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다시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와 같았다.
【論】 【문】 불세존께서는 큰 덕이 있으시고 존귀하시거늘 어찌하여 길고 넓은 혀를 내미셔서 천박한 듯한 모습을 지으셨는가?
【답】 위의 세 가지 광명으로 시방의 중생을 비추어 해탈을 얻게 하셨다. 이제 입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나,
마하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어서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믿어 받들기 어렵다. 그러므로 넓고도 긴 혀를 내밀어 증거로
삼으셨으니, 혀의 모습이 이러할진대 그 말씀은 반드시 진실하리라는 것이다.
옛날 어느 때 부처님이 사바제(舍婆提)3) 나라에서 안거를 마치신 뒤에 아난이 부처님을 모시고 여러 나라를 유행하셨다.
어느 바라문의 성에 이르려 하니, 바라문 성의 왕은 부처님의 신묘한 덕이 능히 여러 사람을 교화하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생각하기를 ‘지금 그가 여기에 오신다면 누가 다시 나를 좋아하겠는가’ 했다.
그리고는 곧 제한하는 영을 내렸다.
“누구든지 부처에게 음식을 주거나 부처의 말을 듣는다면 5백량의 금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
그렇게 제한이 있은 뒤, 부처님은 그 나라에 도착하시어 아난을 대리고 발우를 들고 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셨다.
하지만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문을 닫고 대꾸도 하지 않으므로 부처님은 빈 발우로 성을 나오셨다.
이때 어느 집에 늙은 하인이 있었는데, 그는 깨진 질그릇에 쉰 뜨물을 담아 가지고 문 밖에 나와 버리려 하다가
불세존께서 빈 발우로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 늙은 하인은 부처님의 상호가 금빛을 이루고 백호ㆍ육계ㆍ장광이 있는데
발우는 비어 있어 밥이 없는 것을 보고는 생각했다.
‘이렇게 신비한 사람이라면 응당 하늘의 공양을 받으실 터인데 이제 몸소 내려와서 발우를 들고
걸식을 하시는 것을 보니, 이는 반드시 큰 자비를 베푸시어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기 위해서이리라.’
그리고는 신심(信心)이 청정해져서 좋은 공양을 올리려 했으나
뜻을 이를 길이 없었다. 그는 부끄러워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공양을 드리고 싶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오니,
지금의 이 쉰 음식이라도 부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받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믿음이 있고 공경스럽고 청정함을 아시고는
곧 손을 펴서 발우에 밥을 받으셨다.
이때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5색 광명을 놓으시니
천지를 두루 비추고 다시 미간(眉間)으로 들어갔다.
아난이 합장하고 무릎을 세우고 끓어 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 웃으신 인연의 뜻을 알고자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늙은 여인이 신심으로 부처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보았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늙은 여인은 부처에게 밥을 보시한 까닭에 15겁 동안 천상의 인간 사이에서
복덕을 받아 즐거우며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리라.
나중에는 남자의 몸을 얻고 집을 떠나 도를 배워 벽지불을 이루고 무여열반에 들리라.”
이때 부처님 곁에 한 바라문이 서 있다가 게송으로 말했다.
그대는 일종(日種)4)이고 찰리의 종성으로
정반국왕(淨飯國王)의 태자이건만
밥 한 그릇 때문에 큰 망어를 범하도다.
이렇게 쉰 음식에 무슨 갚음이 그리 중하리.
이때에 부처님께서 넓고도 긴 혀를 내밀어 얼굴을 덮으시니
머리카락 살피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경서(經書)에서 이러한 혀를 가진 사람이 망어를 짓는 것을 보았는가?”
바라문이 대답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혀가 능히 코를 덮는다면 그 말에 허망함이 없다.
그러니 하물며 머리카락 살피에까지 이른 것이랴.
나는 진심으로 부처님이 망어를 할 리 없다고 믿지만 보잘것없는
시주에 그렇게 과보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일찍이 세상에서 희유하고 보기 어려운 일을 본 적이 있는가?”
바라문이 대답했다.
“있습니다. 제가 일찍이 다른 바라문과 함께 길을 가다가 어떤 니구로다 나무를 보았는데,
그 그늘은 장사꾼의 5백 대의 수레를 덮고도 그늘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희유한 일인가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나무의 종자는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바라문이 대답했다.
“크기가 겨자씨의 3분의 1만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누가 그대의 말을 믿겠는가? 나무는 그렇게 크거늘 종자는 그렇게 작으니 말이다.”
바라문이 말씀드렸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와 같으니, 이 늙은 여인이 깨끗한 신심으로 부처에게 시주하고
큰 갚음을 받음을 보건대 마치 이 나무와 같아서 원인은 적으나 갚음이 많으니라.
또한 이것은 여래5)의 복전이 지극히 좋고 아름다운 까닭이니라.”
여기에서 바라문의 마음이 활짝 열리고 뜻이 풀리어 다섯 활개를 땅에 던지고
허물을 뉘우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정황이 없어 어리석게도 부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그를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설법해 주시니,
그는 초도과(初道果)6)를 얻었다.
그는 즉시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이들이여, 감로의 문이 열렸거늘 어찌하여 나오지 않는가.”
성안의 바라문들은 모두 5백 냥의 황금을 보내 왕에게 주고는
부처님을 맞이해 공양을 드렸다.
그리고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감로의 맛을 얻었거늘 누가 이 5백 냥의 황금을 아끼리오.”
사람들은 모두 금하는 법을 지키지 않고 깨뜨렸다.
이 바라문의 왕도 대신들과 함께 불법에 귀의하니,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깨끗한 믿음을 얻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넓고 긴 혀를 내 보이시는 것은 믿지 않는 이를 위해서이다.
【문】 바라문을 위해서 혀를 내어 보이실 때엔 얼굴을 덮었는데 지금의 혀에서 나는 광명은 어찌하여 삼천대천세계에 미치는가?
【답】 얼굴과 머리의 살피까지를 덮는 것은 작은 믿음 때문이거니와
지금은 반야바라밀의 큰 일이 일어나기 위한 까닭에 넓고 긴 혀의 모습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는 것이다.
【문】 이 하나의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얼굴을 덮는 설상(舌相)을 다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는 법회에 모인 대중과 나아가서는 이 지방 또는 다른 지방의 한량없는
대중이 모였는데 다 볼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는 몇 리에 불과한데 이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한다고 하니, 너무 커서 믿기 어렵지 않은가?
【답】 부처님이 방편으로 신통력을 베푸셔서 일체의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혀의 모습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한 것을 보게 하셨다.
만일 신통력을 가하지 않으셨다면 비록 10주(住) 보살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신통력을 가한다면 비록 축생일지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반야바라밀경』의 뒤의 품(品)에서 말씀하시기를 “뭇 사람들이 모두 아촉불(阿閦佛)7)의 회상을 보되
눈을 마주 대한다”고 하며, 또한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세계의 갖가지 장엄스러움을 말씀하시니
아난이 말씀드리기를 “오직 원하건대 뵙고자 합니다” 하자, 부처님께서는 즉시에 일체의 대중으로
하여금 모두 무량수불(無量壽佛)8) 세계의 장엄과 청정을 보게 하셨다.
부처님의 혀의 모습을 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부처님께서 넓고 긴 혀로써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으신 뒤에 문득 웃으셨으니, 웃으신 인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전에 이미 혀로부터 광명을 놓았거늘 이제 또한 어찌하여 혀뿌리로부터 광명을 놓으시는가?
【답】 일체의 중생들로 하여금 깊은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혀의 빛깔이 산호와 같아
투명하고 맑은 것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광명을 놓으셨다.
또한 이 모든 광명은 천 잎의 금빛 보배꽃으로 변했는데,
혀에서 이 천 잎의 금빛 보배꽃을 내고 광명이 환하게 비추는 것이 마치 처음으로 돋는 해와 같았다.
【문】 어째서 광명 속에서 이러한 보배꽃을 변화해 내는가?
【답】 부처님께서 앉으시려는 때문이다.
【문】 평상들도 좋을 텐데 어째서 반드시 연꽃인가?
【답】 평상은 세간의 속인들이 앉는 법이다.
연꽃은 부드럽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신통력으로써
능히 그 위에 앉아도 꽃이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또한 묘한 법의 자리를 장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다른 꽃은 모두가 작아서 이 꽃같이 향기롭고 맑고 큰 것이 없다.
인간 세계의 연꽃은 키도 한 자[尺]를 넘지 못하고,
만다기니(漫陀耆尼)9) 못과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 못의 연꽃은 수레의
산개(傘蓋)만큼 크고, 천상의 보배 연꽃은 이보다 더 커서 가부좌를 틀고 앉을 만하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앉으신 꽃은 이보다 백천만 배나 수승하다.
또한 이 연화대는 장엄스럽고 깨끗하고 향기롭고 묘하여 앉을 만하다.
또한 겁(劫)이 다하여 탈 때는 일체가 공하여지는데
중생들의 복덕 인연의 힘 때문에 시방에서 바람이 이르러서 마주 대하고
마주 부딪쳐서 큰물을 지탱한다.
물 위에는 천 개의 머리에 2천 개의 손과 발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위뉴(韋紐)10)라 한다.
이 사람의 배꼽에서 천 잎의 금빛 묘한 보배 연꽃이 나오는데 그 광명이 매우 밝아서
만 개의 해가 함께 비치는 것과 같다.꽃 속에 사람이 있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이 사람에게 또한 한량없는 광명이 있으니, 범천왕이라 부른다.
이 범천왕의 가슴[心]에서 여덟 아들이 태어났고 그 여덟 아들이 하늘ㆍ땅ㆍ인간을 내었다.
이 범천왕은 모든 음욕과 성냄이 이미 다하여 남음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선(禪)의 청정한 행을 닦아 음욕을 끊으면 범도(梵道)를 행하는 이라 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법의 바퀴를 굴리시는 것을 법륜이라고도 하고 혹은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이 범천왕은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그러므로 부처님들께서도 세속의 법을 따라
보배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셔서 6바라밀을 말씀하시니,
이 가르침을 듣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경지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문】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천만억의 부처님을 변화해 나투셨거늘
어떻게 일시에 설법을 하시는가? 아비담에서 말하듯이 한때에 두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변화한 부처가 말할 때에는 변화의 주인[化主]은 잠자코 있어야 할 것이요,
변화의 주인이 말할 때에는 변화된 이는 잠자코 있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일시에 모두 6바라밀을 말하는가?
【답】 그런 말은 외도나 성문의 변화하는 법이다. 부처님의 변화무량한 삼매의 힘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 자신이 말씀하실 때는 한량없는 천만억의 변화하신 부처님이 모두 동시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과 성문들이 변화해 낸 것은 다시 변화를 짓지 못하지만 불세존께서 변화해 낸 것은
다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외도들과 성문들은 열반에 든 뒤에 변화해 낸 이를 남겨 두지 못하지만
불세존께서는 자신이 열반에 드신 뒤에도 변화해 낸 이를 남겨 두시어 부처님과 다름이 없게 하신다.
또한 다시 아비담에서는 “한때에 두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데,
지금의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변화한 부처님이 말할 때에는
달리 마음이 있지 않지만,
부처님께서 마음속으로 변화한 이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고자 생각하면 즉시 모두가 말을 한다.
【문】 부처님께서 지금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려는데 어찌하여 변화한 부처님으로 하여금 6바라밀을 말하게 하는가?
【답】 6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은 한 법이어서 다르지 않다.
이 5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바라밀이라 부르지 않는다.
단바라밀(壇波羅蜜)은 반야바라밀을 만나지 못하면 세간의 유루법 가운데 빠지게 된다.
혹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도의 반열반을 얻은 이가
반야바라밀을 얻게 되면 이것을 바라밀이라 부르니,
능히 불도에 이른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6바라밀과 한 법이어서 다름이 없다.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엄(莊嚴)이요,
둘째는 장엄치 않은 것[未莊嚴]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좋은 영락을 붙여
그 몸을 장엄하는 것과 같으니,
어떤 사람이 영락을 붙이지 않았으면 미장엄이라 한다.
또한 국왕이 모든 관속을 거느리면 이는 왕이 왔다고 하지만
관속을 거느리지 않으면 홀몸이라 하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동쪽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와
나아가서는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다.
【문】 만약에 부처님에게 이와 같이 큰 신통력이 있고, 무수한 천만억의 변화한 부처님이
시방세계에서 6바라밀을 말씀하여 일체를 제도하신다면 모두가 해탈을 얻어 남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답】 세 가지 장애가 있거나 3악도(惡道)에 빠진 중생은 알지 못한다. 또한 인간ㆍ천상에 태어났어도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큰 병이 들었거나 또는 위로 무색(無色) 무상천(無想天)11)은 모두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문】 능히 듣거나 능히 아는 이들이 어찌하여 모두 도를 얻지 못하는가?
【답】 그들 역시 모두가 도를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사(結使)의 업장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결과 사가 무거워서 항상 결과 사 때문에 마음이 가리어지면 이 때문에 남김없이 도를 얻지 못한다.
【문】 시방에 계신 부처님들께서 변화한 부처님을 보내어 6바라밀을 설하게 하셔야 하리라.
우리들도 세 가지 장애가 없거늘 어찌하여 듣지 못하겠는가?
【답】 지금의 중생들은 악세(惡世)에 태어나 세 가지 장애 가운데 들어가 있다. 부처님 뒤에 태어나면
착하지 못한 업보가 있게 되나니, 어떤 세계에는 나쁜 죄의 업장이 있거나 혹은 두텁고 무거운 결사의 업장이 있다.
부처님 다녀가신 뒤에 태어난 사람들은
흔히 두텁고 무거운 결사에 가리어져 있다.
음욕은 얇으나 성냄[瞋恚]이 두텁거나
혹은 성냄은 얇으나 음욕이 두텁거나
혹은 음욕은 얇으나 우치가 두텁거나
혹은 우치는 얇으나 진에가 두텁다.
이와 같이 전전해서
서로 얇고 두터운 결사의 장애가 있기 때문에
변화된 부처의 설법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부처님의 광명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도를 얻겠는가.
비유하건대 해가 떠도 소경은 보지 못한 채 “세상에 해나 달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해에게 무슨 허물이 있으랴.
또는 우레가 쳐서 땅을 흔들어도 벙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소리에게 무슨 허물이 있으랴.
지금 시방세계의 부처님들이 항상 경법을 말씀하시고
항상 변화한 부처님을 시방세계에 보내어 6바라밀을 말씀하시게 하건만
죄업에 눈멀고 귀먹은 탓으로 법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남김없이 보지 못하고 남김없이 듣지 못한다.
비록 성인의 크신 자비일지라도 모두로 하여금 듣거나 보게 할 수는 없다.
만약에 죄가 사라지려 하거나 복이 생기려 한다면, 이때는 곧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들을 수 있다.
【經】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짐짓 사자좌에 계시면서
사자유희삼매(獅子遊戱三昧)12)에 드시어 신통력으로 삼천대천세계를 감동시키시니,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論】 【문】 이 삼매를 어찌하여 사자유희라 하는가?
【답】 비유하건대 사자가 사슴을 잡아 자재롭게 가지고 노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이 삼매에 들면 능히 갖가지로 이 땅을 움직여 여섯 가지로 진동케 하신다.
사자유희라 함은 비유하건대 사자가 유희하는 날엔 모든 짐승이 편안한 것과 같으니,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 삼매에 드시어 삼천대천세계를 진동하면 능히 3악도의 중생으로 하여금
일시에 모두 쉬게 해서 모두 안온을 얻게 만든다.
또한 부처님을 인간의 사자라 하는데, 사자유희삼매는 부처님이 즐기시는 삼매이다.
이 삼매에 드실 때에는 이 땅덩이를 여섯 가지로 진동케 하여 온갖 지옥이나
악도의 중생들이 모두 해탈을 얻고,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이것을 유희[戱]라 한다.
【문】 부처님은 어찌하여 이 삼매에 드시는가?
【답】 삼천대천세계를 움직여서 3악도의 중생을 건져내어
두 가지 길[二道]13)에 옮겨 놓으시려는 까닭이다.
또한 위의 세 가지 변화가 부처님의 몸에서 나왔지만
사람들이 혹은 이에 대해 믿음이 깊지 못하다.
이제 땅 덩이를 흔들어 보임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신통의 힘이 한량이 없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며,
능히 외물(外物)을 모두 요동케 함은
신정(信淨)의 마음을 기쁘게 해서 모두가 괴로움을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문】 아라한이나 신[天]들도 능히 땅을 흔들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의 신통력만을 말하는가?
【답】 아라한이나 신들은 충분히 요동시키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대지를 여섯 가지로 진동시킬 수 있으시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시는가?
【답】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가 공하고 무상함을 알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땅덩이와 일월과 바다와 수미산은 모두 영원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로 땅을 움직여서 이러한 인연을 보여 주시고, 덧없음을 알게 하신다.
또한 사람들이 옷에 물을 들이려 할 때엔 먼저 먼지를 털어버리듯이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먼저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신통력을 보게 해 공경하는 마음이 부드러워진 뒤에 법을 설하신다.
이런 까닭에 여섯 가지로 땅을 요동케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섯 가지로 진동시키는 것인가?
【經】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잠기고,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잠기고,
남쪽에서 솟아 북쪽으로 잠기고,
북쪽에서 솟아 남쪽으로 잠기고,
가에서 솟아 중간으로 잠기고,
중간에서 솟아 가로 잠겼다.
【문】 어찌하여 꼭 여섯 가지의 진동이 있는가?
【답】 땅의 진동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다.
하(下)로는 두 가지로 진동하니,
동쪽에서 솟아서 서쪽으로 빠지거나
남쪽에서 솟아서 북쪽으로 빠지거나
가에서 솟아서 복판으로 빠지거나
복판에서 솟아서 가로 빠지는 것이다.
중(中)으로는 네 가지로 진동하니,
동ㆍ서ㆍ남ㆍ북이 진동하거나
혹 동과 서와 가와 복판이거나
혹 남과 북과 가와 복판이 진동하는 것이다.
상(上)으로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니,
갖가지 인연이 있어서 땅 덩이가 진동케 하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덟 가지 인과 연이 있어 땅 덩이를 진동케 한다” 하신 것과 같으니, 다른 곳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네 가지 땅의 진동이 있으니,
불의 흔들림ㆍ
용의 흔들림ㆍ
금시조의 흔들림ㆍ
천왕의 흔들림14)이다” 한다.
28수(宿)에 걸쳐 달이 한 바퀴를 도는데,
만약에 달이 묘(昴)ㆍ장(張)ㆍ기(氐)ㆍ누(婁)ㆍ실(室)ㆍ위(胃)15) 등
여섯 별에 이르면 이때엔 땅이 무너지는 듯 진동한다.
이 진동은 불의 신에 속하나니,
이때엔 비가 없어 강이 마르고,
밀ㆍ보리가 익지 않고, 천자(天子)가 흉하고, 대신이 재앙을 받는다.
달이 유(柳)ㆍ미(尾)ㆍ기(箕)ㆍ벽(壁)ㆍ규(奎)ㆍ위(危)16) 등 여섯 별에 이르면
이때엔 땅이 무너지는 듯 진동한다.
이 진동은 용신에 속하나니, 이때엔 비가 없어 강이 마르고,
보리가 익지 않고 천자가 흉하고, 대신이 재앙을 받는다.
달이 삼(參)ㆍ귀(鬼)ㆍ성(星)ㆍ진(軫)ㆍ항(亢)ㆍ익(翼)17) 등 여섯 별에 이르게 되면
그때엔 땅이 무너지는 듯 진동한다. 이 진동은 금시조에 속하나니,
이때엔 비가 없어 강이 마르고, 보리가 익지 않고, 천자가 흥하고, 대신이 재앙을 받는다.
달이 심(心)ㆍ각(角)ㆍ방(房)ㆍ여(宿)ㆍ허(虛)ㆍ정(井)ㆍ필(畢)ㆍ자(觜)ㆍ두(斗)18) 등
아홉 별에 이르면 이때엔 땅이 무너지는 듯 진동한다. 이 진동은 천제(天帝)에 속하나니,
이때엔 시절이 편안하고 비ㆍ바람이 마땅하여 천자가 길하며, 대신이 복을 받고 백성이 편안하다.
또한 땅이 진동하는 인연에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한 염부제가 진동하거나 사천하, 1천ㆍ2천ㆍ3천 대천세계를
진동하되 작게 진동하는 것은작은 인연 때문이다.
복덕이 있는 이가 태어나거나
죽으면 한 나라가 진동하니, 이것이 작은 진동이다.
큰 진동은 큰 인연 때문이니, 부처님이 처음 탄생하실 때나
처음 성불하실 때나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엔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진동하니, 이것이 큰 진동이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많이 모으시려 하기 때문에
이 땅덩이를 여섯 가지로 진동케 하신 것이다.
또한 반야바라밀에서 보살들에게 수기를 주시기를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부처님은 천지의 큰 주인이시니
이때에 지신(地神)은 “나 이제야 주인을 만났도다”라며 크게 기뻐한다. 그러므로 땅이 진동한다.
비유하건대 국왕이 처음 즉위하면 신하와 백성이
모두 기뻐 경축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기쁨에 겨워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과 갈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복덕 인연 때문에 이 땅덩이와 산하ㆍ수목 등 일체의 사물이 있건만
중생들은 덧없음을 모른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복덕과 지혜의 큰 힘으로 이 세계를 움직여
중생의 복덕은 미미하고 얇아서 모두 닳아 없어지고 마침내는 무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이다.
【經】 땅이 모두 부드러워지니, 중생들로 하여금 화평하고 기쁘게 했다.
【論】 【문】 땅이 진동하는데 어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이 화평하고 기쁘게 하는가?
【답】 마음은 몸을 따르는 까닭에 몸에 즐거운 일을 얻으면 마음도 기뻐진다. 기쁘다 함은 함께 사는 사람이나
몸을 편안케 하는 기구가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 지금 이 삼천대천세계의 잡되고 사악한 중생은
그 마음이 거칠고 횡폭하여 착한 일이라곤 없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이 땅 덩이를 진통시켜 모두 부드럽게 하여
마음에 이익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삼십삼천왕(三十三天王)의 환락의 동산(歡樂園)에 신들이 들어오면 마음이 모두 부드럽고
기쁘고 화평해져서 거친 마음이 나지 않으니, 아수라(阿脩羅)19)가 군사를 일으켜서 오더라도 도무지
싸울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때 석제바나민(釋提婆那民))20)이 하늘 무리를 이끌고 추삽원(麤澀園)에 들어오면 이 동산에는 숲ㆍ나무ㆍ꽃ㆍ
열매의기운이 화열(和悅)치 못하여 거칠고 껄끄러워 나쁘기 때문에 하늘 사람들이 곧 싸우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부처님도그와 같아서 이 땅덩이가 거칠고 껄끄럽고 폐악하기 때문에 부드럽게 변화시켜
일체의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주술(呪術)을 부린 약초로 사람의 코에 쏘이면 성내는 마음이 문득 생기어 당장에 싸우고자 하거나
또는 주술을 부린 약초로 사람의 코에 쏘이면 사람의 마음을 화평하고 기쁘게 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주술을 부린 약초조차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땅이 모두 부드러워질 때이겠는가.
【經】 이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의 지옥ㆍ아귀ㆍ축생과 그리고 여덟 가지 어려운 곳[八難處]21)이
즉시에 해탈을 얻어 하늘세계에 태어났으니, 사천왕천처에서 타화자재천에 이르기까지였다.
【論】 【문】 부처님이 사자유희삼매에 드시기만 하여도 능히 지옥ㆍ아귀ㆍ축생 및
그 밖의 여덟 가지 어려운 중생을 모두 해탈케 하여 4천처(天處)나 나아가서는 타화자재천에까지 태어나게 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복을 닦고 선을 행해 비로소 과보를 받는가?
【답】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나니, 복덕이 많은 이는 광명을 보고 해탈을 얻고,
죄의 때가 깊은 이는 땅이 진동하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비유하건대 해가 돋아서 연못 위를 비추면 익은 것은 먼저 피고,
익지 않은[生] 것은 피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먼저 광염을 놓으심에 복이 익고 지혜가 예리한 자는 먼저 해탈을 얻으며,
그 복이 아직 익지 않고 지혜심이 예리하지 않다면 이 때문에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크게 자비로우시어 균등하게 일체를 제도하시어 애증(愛憎)이 없으시다.
또한 어떤 사람이 과일나무를 흔들면 익은 것은 먼저 떨어지듯이 부처님도 그와 같으시다.
이 삼천대천세계는 마치 나무와 같아서 그것을 흔드는 분은 부처님이시니,
먼저 제도되는 이는 과보가 익었고 아직 제도되지 못하는 이는 그 과보가 덜 익은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착한 마음의 인연으로 욕계의 하늘에만 태어나고 색계나 무색계에는 태어나지 않는가?
【답】 부처님께서 이 중생들을 제도하여 도의 증과를 얻게 하고자 하시나 무색계에서는 몸이 없기 때문에
설법해 주지 못한다. 색계에는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서 도를 얻기 어렵고 선정의 쾌락이 많은 까닭에 지혜의 마음이 둔해진다.
또한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감동시켜 이 삼천대천세계의 땅을 모두 부드럽게 하시는데, 중생들은 마음으로 믿어 기쁨을
얻는 까닭에 욕계의 하늘에 태어나고, 4선(禪) 및 4공정(空定)22)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색계나 무색계에는 태어나지 못한다.
【문】 5중(衆)이 무상ㆍ공ㆍ무아이거늘 어떻게 하늘이나 인간에 태어나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가?
【답】 이 일은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거니와 이제 다시 간략히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기를 “5중이 무상ㆍ공ㆍ무아이다”고 했는데,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5중의 항상함과 무상함,
공함과 공하지 않음,
유아ㆍ무아가 없다.
만약에 외도들처럼 실아(實我)를 구하고 찾아도 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거짓 이름일 뿐이다. 갖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을 뿐이다.
비유하건대 환인이 서로 죽이면 사람들은 죽은 것으로 보고,
환술로써 다시 일으키면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생사란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세속의 법에는
실로 생사가 있으나
실상의 법에는
생사가 없다.
또한 나고 죽는 사람에게는 생사가 있으나
나고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사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거나 죽지 않는 사람은
큰 지혜로써 능히 생사의 모습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불법의 모습 비록 공하나
끊어져 없어짐이 아니요
비록 태어나지만 항상한 것이 아니다.
모든 행업은 잃지 않으니
모든 법은 파초와 같아서
일체가 마음에서 생겨난다.
법에 진실 없음을 알면
그 마음 또한 공하리라.
어떤 사람이 공을 생각하면
이는 도행(道行)이 아니다.
모든 법은 생멸치 않나니
생각하기에 모습을 잃고
생각하기에 마망(魔網)에 떨어지니
생각 없으면 곧 벗어나게 되리라.
마음이 움직이기에 도가 아니고
움직이지 않음은 곧 법인(法印)이다.
【經】 이 천인(天人)들은 스스로가 숙명을 깨달아 모두가 크게 기뻐하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는 머리 숙여 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한쪽에 물러나 있었다.
【論】 【문】 신들이 태어날 때엔 저절로 세 가지 일을 알게 된다. 온 곳을 알고,
닦았던 복밭을 알고, 본래 닦았던 복덕을 안다. 이 인간이 태어날 때는 이런 세 가지 일이 없거늘 어떻게 숙명을 아는가?
【답】 인간의 길은 일정치 않아서 혹은 아는 이도 있고 혹은 알지 못하는 이도 있다.
또한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숙명을 안다.
【문】 신들은 과보로써 5신통을 얻으므로 저절로 숙명을 알며 능히 부처님께로 오지만, 인간은 비록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숙명을 알 수 있다고 해도 머무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부처님께 이르겠는가?
【답】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과보로 신통을 얻으니, 전륜성왕이나 성인 등이요, 어떤 이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린다.
【문】 사람은 열 달 만에 태어나 3년을 젖을 먹으며 열 살이 지나면 능히 혼자서 밖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3악(惡)과 8난(難)에서 모두 해탈하여 천인(天人) 가운데 태어나서 부처님께 이른다.
하늘이라면 그러하겠지만 인간의 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늘 어떻게 이르겠는가?
【답】 5도(道)의 태어나는 법이 각각 같지 않다.
하늘과 지옥은
모두 화생(化生)이다.
아귀는 두 가지로 태어나니,
태생과 화생이다.
인간[人道]과 축생은
네 가지로 태어나니,
알에서 태어나는 것[卵生]ㆍ
습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濕生]ㆍ
돌연히 태어나는 것[化生]ㆍ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胎生]이다.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비사구미가라의 어미[毘舍佉彌伽羅母]23)가 낳은
서른두 명의 아들과 같은 경우로,
이를 난생의 사람이라 한다.
어미 비사구가 서른두 개의 알을 낳았다.
알을 까니 서른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모두 장사가 되었다.
미가라는 큰 아들의 이름이며,
그 어미는 세 번째 도과(道果)를 얻었다. 이러한 것을 난생이라 한다.
습생이란
음라바리(揜羅婆利) 음녀(淫女)가
정수리로 전륜성왕을 낳은 것과 같은 경우로 이러한 것을 습생이라 한다.
화생이란
부처님이 사부대중과 함께 유행하셨는데,
비구니 가운데 아라바(阿羅婆)라는 이가 있어
땅에서 변화해 나왔으며,
또한 겁초(劫初)의 사람이 처음 날 때엔 모두가 화생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화생이라 한다.
태생이라 함은
보통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화생으로 태어난 사람은 즉시에 장대해져
능히 부처님께 이르게 되며,
사람에게는 과보로 얻은 신통력으로 능히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게 된다.
또한 부처님께서 위신력을 빌려 능히 부처님께 이르기도 한다.
【經】 이와 같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땅이 모두 여섯 가지로 진동하니, 일체의
지옥ㆍ아귀ㆍ축생 및 여덟 가지 어려운 곳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해탈을 얻고 천상에 태어나 여섯째 하늘에까지 이르렀다.
【論】 【문】 삼천대천세계에는 중생들이 많아서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거늘
어찌하여 다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중생에까지 미치는가?
【답】 부처님의 힘은 한량이 없으셔서 비록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을 다 제도하여도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시방세계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문】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큰 위신력으로 시방세계를 널리 제도하시거늘 어찌하여 다른 부처님이 필요한가?
【답】 중생이 한량이 없어 일시에 익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의 인연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니,
성문의 법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24)과 인연이 있는 제자는 사리불 이외에는 부처님이라도 제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했다.
또한 이제 다만 동쪽으로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만을 말하고,
둘ㆍ셋ㆍ넷 나아가서는 천ㆍ만ㆍ억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는 말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가 끝없고 한량없기 때문이니, 만일 끝이 있고 한량이 있다면 중생도 다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의 부처님들이어야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經】 그때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으로서 태어나면서 눈이 먼 이[生盲]는 보게 되고, 귀먹은 이는 듣게 되고,
벙어리는 말하게 되고, 미친 이는 정신이 돌아오고, 산란한 이는 안정되고, 벗은 이는 옷을 얻고,
주리고 목마른 이는 배부름을 얻고, 병든 이는 치유되고, 모습이 흉하게 무너진 이는 형체가 갖추어졌다.
【論】 【문】 중생들의 고통과 근심이 백천 가지이거늘 부처님께 신통력이 있다면 어찌하여 두루 해탈을 얻게 하지 않는가?
【답】 모두를 다 구제하지만 지금은 대략 거친 것만을 말했다.
마치 갖가지 번뇌[結使]가 있어도 간략히 말해 3독(毒)이라 하는 것과 같다.
【문】 다만 눈 먼 이가 보게 되었다고만 해도 될 것이어늘 어찌하여 ‘태어나면서 눈이 먼 자[生盲]’라 하는가?
【답】 태어나면서 눈이 먼 자는 전생의 죄가 무거운 까닭이다. 죄가 무거운 이도 보게 되거늘 하물며 가벼운 이이겠는가.
【문】 전생에 어떤 무거운 죄가 있기에 태어나면서 눈이 먼 자가 되는가?
【답】 중생들의 눈을 망가뜨리거나, 중생들의 눈을 뽑아내거나, 바른 소견의 눈을 깨뜨려도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죄과가 다해 사람이 되더라도 나면서부터 눈이 멀게 된다.
또한 불탑 안의 화주(火珠)나 등명(燈明)을 훔치거나, 아라한ㆍ벽지불의 탑에서 화주나 등명을 훔치거나,
그 밖의 복전에서 광명을 약탈하면 이러한 갖가지 전생의 업이 인연이 되어 눈을 잃는다.
금생에서 병이 나거나 혹은 구타에 의해 실명하면 이는 금생의 인연이다.
또 96종의 눈병은 사나가약왕(闍那迦藥王)도 고치지 못하는데 부처님만이 능히 고쳐주어 보게 한다.
또한 먼저 볼 수 있게 한 뒤에 지혜의 눈을 얻게 함이니, 귀먹은 자가 들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문】 태어나면서 눈이 먼 이가 있다면 어찌하여 태어나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이[生聾]는 없는가?
【답】 태어나면서 눈이 먼 이는 많지만 태어나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이는 적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문】 무슨 까닭에 벙어리가 되는가?
【답】 귀가 먹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행하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면 이런 까닭에 귀가 먹는다.
또한 중생들의 귀를 끊거나, 중생들의 귀를 망가뜨리거나,
부처님의 탑이나 스님들의 탑을 훔치거나 착한 사람들의
복전에서 종[揵稚]ㆍ방울ㆍ패(貝) 및 북을 훔치면 이런 죄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갖가지 전생의 업을 인연한다.
금생의 인연은 병이 들거나 구타당하는 일이니,
이러한 것들이 금생의 인연으로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문】 벙어리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벙어리가 되는가?
【답】 전생에 남의 혀를 끊었거나 혹은 입을 막았거나 혹은 나쁜 약을 주어서
말을 못하게 했거나 혹은 스승이나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도 그 말을 막아 끊고 비방하거나
혹은 사악한 자가 되어 죄와 복을 믿지 않고 바른 말씀을 깨뜨리면 지옥의 죄를 받고,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되어도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벙어리가 된다.
【문】 미친 자가 바르게 되었다 했는데 어찌하여 미쳤는가?
【답】 전생에 죄를 짓거나, 남이 좌선하는 것을 깨뜨리거나,
좌선하는 집을 부수거나, 주술을 써서 사람을 저주하여 성내고 싸우고 음욕을 일으키게 했기 때문이다.
금생에서는 온갖 번뇌가 두텁고 무겁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바라문이 그 복전을 잃고 그 부인마저 죽으매
즉시에 발광하여 알몸으로 벗고 달렸던 일과 같으며,
시사가교담(翅舍伽憍曇) 비구가 본래 속가에 있을 적에
일곱 자식이 몽땅 죽으매 크게 슬퍼하여 실신하고 발광한 일과 같다.
어떤 사람은 몹시 화가 났는데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서 크게 미치게 된다.
어떤 우치한 사람은 사악한 까닭에 재를 몸에 바르고 머리칼을 뽑고 발가벗고
미쳐 날뛰면서 똥을 먹는다. 어떤 사람은 풍병ㆍ열병ㆍ중병 등에 걸려 미친다.
어떤 사람은 악귀가 씌어서 미치고,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도 빗물을 마시고 미친다.
이처럼 정신을 잃어버리는 갖가지 경우를 미쳤다고 하는데,
부처님을 뵙게 되는 까닭에 광증이 낫게 되는 것이다.
【문】 어지러운 자가 안정되었다 하였는데, 미친 것[狂]이 곧 어지러움[亂]이거늘 어찌하여 구별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미치지 않았더라도 마음이 많이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것이 마치 원숭이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것을 어지러운 마음이라 한다. 또한 지나치게 일에 바쁘고
마음이 일에 집착되어 있으면 곧 심력(心力)을 잃고 도(道)를 감당해 내기 어렵게 된다.
【문】 어지러운 마음에는 어떠한 인연이 있는가?
【답】 착한 마음이 차츰 얇아지고 착하지 못한 경지를 따르나니, 이를 마음의 어지러움이라 한다.
또한 이런 사람은 무상함을 관찰하거나 죽음의 모습을 관찰하지 못하고 세상의 공함을 관찰하지 못한 채
수명에 애착하고 갖가지 사무를 계교하여 갖가지로 흩어져 달리나니, 그러므로 마음이 어지럽다.
또한 불법 안에서 내면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밖의 즐거움만을 구하여 즐거움의 원인을 따르고 쫓나니,
그러므로 마음이 어지럽다.이렇게 어지러운 사람은 부처님을 뵙게 됨으로써 그 마음이 집중되어진다.
【문】 앞에서는 미친 자가 바르게 되었다 말했는데, 이제는 벗은 자가 옷을 얻었다 한다.
광증을 제거하였거늘 어찌하여 다시 벗은 자가 있는가?
【답】 미친 것이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사람들이 다 아는 미침이요, 둘은 사악한 까닭에
스스로 벗어버려 사람들이 그가 미친 줄 모르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천축25)에 어떤 법사가 있었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5계(戒)의 뜻을 설했는데
이 대중 가운데는 많은 외도들이 숨어들어 와서 듣고 있었다.
이때 국왕이 따져 물었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듯이 ‘어떤 사람이 남에게 술을 베풀거나 스스로가
마시면 미치고 어리석은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미친 자가 많고 바른 자가 적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미친 자는 적고
미치지 않은 자가 많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때 외도의 무리들이 말했다.
“좋은 질문이로다. 그 질문은 매우 깊으니,
이 대머리 법사는 대답이 막힐 것이다. 왕은 예리한 지혜를 지녔도다.”
이때 법사는 손가락으로 외도들을 가리킨 뒤에 다른 이야기를 계속했다.
왕은 곧 그 뜻을 알아들었으나, 외도들은 다시 왕에게 말했다.
“왕의 질문이 매우 깊으시기에 저 사람은 어찌 대답할지 알지 못한 채
부끄러워서 손가락을 들어 딴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왕이 외도들에게 말했다.
“이 높은 자리에 앉으신 법사께서는 손가락을 가리켜 벌써 대답을 다 하셨다.
다만 그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말로써 드러내시지 않았을 뿐이다.
손가락으로 그대들을 가리킨 것은 그대들이 미쳤고 적지 않게 미쳤음을 말한 것이다.
그대들은 재[灰]를 몸에 바르고 발가벗었으되 부끄러움이 없으며,
사람의 해골에다 똥을 담아서 먹고, 머리칼을 뽑고,
가시 위에 눕고, 거꾸로 매달리고,
코에 불을 쏘이고, 겨울에는 물에 들고,
여름에는 불에 쪼이는 등 이 같은 갖가지 행위는 길이 아니고 모두 미친 짓이다.
또한 그대들의 법에서는 고기를 팔거나 소금을 팔면
당장에 바라문의 법을 범한다 하면서 하늘에 제사[天嗣] 지내는 동안에
소를 보시해 주면 곧바로 그것을 팔아버리면서
‘스스로의 법대로 행한다’고 말한다. 소가 곧 고기이거늘
이는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다. 어찌 실수가 아니겠는가.
또한 말하기를 ‘길하(吉河)의 물속에 들어가면 죄의 때가 제거된다’고 한다.
이는 죄와 복에 인연이 없다는 말이니, 그렇다면 고기나 소금을 팔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길하의 물에 들어가면 능히 죄의 때를 제한다 하는데, 만약에 죄를 제한다면 복도 제해야 할 것이다.
어떤 길함[吉]이 있기에 이렇게 인도 연도 없는 일들에서 구태여 인연이 되겠는가.
이것이 미친 짓이다.
이러한 갖가지 미친 모습이 그대들에게 있으니,
법사께서는 그대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시고 말씀은 안 하신 것이다.”
이것을 발가숭이[裸形]의 광증이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빈궁하여 옷이 없거나
혹은 옷이 해져서 남루하면 부처님은 신통력으로써 그로 하여금 옷을 얻게 하신다.
【문】 ‘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고 목마른 자가 물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
【답】 복덕이 얇기 때문에 전생에는 인(因)이 없었고 금생에는 연(緣)이 없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르다.
또한 이 사람은 전생에 부처님ㆍ아라한ㆍ벽지불의 음식이나 친한 이의 음식을 약탈했다.
비록 부처님의 세상을 만났더라도 여전히 주리고 목마르니, 죄가 무겁기 때문이다.
【문】 지금의 나쁜 세상에 태어났으되 좋은 음식을 얻는 이가 있고 부처님을 만나는 세상에 태어났으되
주리고 목마른 이가 있다. 만약에 죄인이라면 부처님을 만나는 세상에 나지 않아야 할 것이요,
복인이라면 악세에 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그러한가?
【답】 업보의 인연이란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뵈올 인연은 있으나 음식의 인연이 없고,
어떤 사람은 음식의 인연은 있으나 부처님을 뵈올 인연은 없다.
비유하건대 검은 독사가 마니주(摩尼珠)26)를 안고 누었는데 어떤 아라한이 걸식을 해도 밥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가섭불(迦葉佛) 때에 형제 두 사람이 출가하여 도를 닦았는데 한 사람은 계를 지키고 경을 읽고 좌선했으나
한 사람은 널리 단월(檀越)27)을 구하면서 온갖 복업을 닦았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에 이르러 한 사람은 장자의 집에 태어났고,
한 사람은 크고 흰 코끼리로 태어났는데 힘이 능히 도적의 무리를 무찌를 수 있었다.
장자의 아들은 출가하여 도를 배워 6신통을 얻은 아라한이 되었으나 복이 얇아서 밥을 빌기 어려웠다.
다른 날 발우를 들고 성에 들어가서 두루 걸식해도 끝내 밥을 얻지 못한 채
흰 코끼리의 마구까지 왔다가 왕이 코끼리에게 갖가지로 풍족하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나 너나 모두 죄와 허물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코끼리는 충격을 받아 사흘 동안이나 먹지를 않았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겁이 나서 도인의 뒤를 쫓아와 만나서 물었다.
“그대가 무슨 주술을 썼기에 우리 왕의 코끼리가 병이 나서 음식을 먹지 않는가?”
아라한이 대답했다.
“이 코끼리는 전생에 나의 아우였소. 함께 가섭불 때에 출가하여 도를 배웠는데
나는 다만 계를 지키고 좌선하고 경을 읽을 뿐 보시를 행하지 않았고,
아우는 널리 단월을 구하여 보시를 지었지만 계행을 지키거나 학문을 닦지 않았소.
그는 계행도 지키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이렇게 큰 코끼리가 되었지만, 보시의 행을 많이 닦았기에 음식과 도구가 갖가지로 풍족한 것이오.
나는 도만을 닦고 보시를 닦지 않았기에 이제 비록 도를 얻었으나 밥을 얻지 못하는 것이오.”
이런 까닭에 인연이 같지 않아서 비록 부처님 세상을 만난다 해도 주리고 목마는 것이다.
【문】 이 여러 중생들은 어떻게 배가 부르게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밥을 만들어 내어 배부르게 하신다”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광명이 몸에 닿으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하신다. 비유하건대 여의마니주와 같으니,
그것을 어떤 사람이 생각만 하여도 기갈을 면하거늘 부처님을 만나서이겠는가.”
병든 자가 쾌차하였다고 했는데,
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로 갖가지 병을 얻는 것과
금생의 냉ㆍ열ㆍ풍 등 때문에 역시 갖가지 병을 얻는 것이 있다.
금생의 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속의 병이니 5장이 고르지 못한 채 굳게 맺혀[結堅] 묵은 병[宿疹]이요,
둘째는 겉의 병이니 달리는 수레나 말에 치거나 구덩이에 떨어지거나 무기ㆍ곤장 등에 의한 갖가지 병이다.
【문】 무슨 인연으로 병을 얻는가?
【답】 전생에 채찍질하고 매질하고 고문하고 약탈하고 가두고 결박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중생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금생에 병을 얻는다.
또한 금생에 몸조심하기를 알지 못한 채 음식을 조절하지 않고 앉거나
눕기를 때 없이 하면 이런 까닭에 갖가지 병을 얻으니, 이와 같이 해서 404가지의 병이 생긴다.
부처님의 신력으로 병든 자가 나을 수 있나니, 경에 이런 말이 있다.
부처님께서 사바제(舍婆提) 나라에 계실 때, 어떤 거사가 부처님과 승려들을 집으로 청해서
음식을 들게 했다. 부처님께서 정사에 계시면서
공양을 받으시는 데는 다섯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선정에 드시려 할 때요,
둘째는 하늘 무리들에게 설법하시려 할 때요,
셋째는 여러 비구들의 방을 둘러보시려 할 때요,
넷째는 병든 비구들을 보살피시려 할 때요,
다섯째는 아직 제정하시지 않은 계법을 제정하시려 할 때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손수 문을 여시고 비구들의 방에 들어가시니,
어떤 비구가 병이 들어 괴로워하는데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이
누운 채로 똥오줌을 싸면서 거동을 못했다.
부처님께서 그 비구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얼마나 괴로우냐. 혼자서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구나.”
비구가 대답했다.
“대덕이시여, 저는 성격이 게을러서 남이 병들었을 때
전혀 돌봐 주지 않았으므로 이제 제가 병들어도 남이 돌봐 주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그대를 돌봐 주겠노라.”
이때 석제바나(釋提婆那)의 백성들은 물을 주었고
부처님께서 손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셨다.
몸을 만져 주시니 온갖 고통이 즉시 제거되고 나아서 몸과 마음이 안온해졌다.
이때 세존께서는 그 병든 비구를 일일이 부축해 일으켜서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뒤에 다시 조심스레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앉게 하셨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는 병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오랫동안 얻지 못한 일을 얻으려 하지 않았고
,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고자 하지 않았고,
알지 못한 일을 알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토록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느니라.
이렇게 하면 다시 더 큰 고통이 있느니라.”
비구가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부처님의 은혜는 한량이 없으시고,
신통력이 헤아릴 수 없으셔서 손으로 만지시자마자 고통이 곧 멈추고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신통력으로써 병들은 자를 낫게 하시는 것이다.
‘불구자는 형체가 복구되었다’고 했는데, 무엇을 불구라고 하는가?
곧 어떤 사람이 전생에 납의 몸을 망가뜨리거나 머리를 끊거나
손발을 자르는 등 갖가지로 신체를 훼손시키며,
불상을 파괴하거나 불상의 코나 그 밖의 여러 성현들의 형상을
훼손하거나 부모의 형상을 파손하면
이러한 죄로 인해 온전히 구족치 못한 형체를 받는다.
또한 불선법(不善法)의 과보로
추악하고 비루한 몸을 받기도 하고,
혹은 금생에 도적에게 해를 입었거나 형벌을 받는 등 갖가지 인연으로
훼손을 입기도 하고, 혹은 바람ㆍ추위ㆍ열병 때문에 몸에 나쁜 종기가 생겨
몸의 한 부분이 망가진 것을 불구라 한다.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입으면 모두 구족하게 되나니,
비유하건대 기원[祇洹]에 건저(犍抵)28)
건저는 진나라 말로는 속(續)이다.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그는 바사닉왕(波斯匿王)의 형의 아들로서 단정하고
용맹하고 건강하며 심성이 부드럽고 착했다.
왕의 대부인이 그를 보자 마음에 애착이 일어나
은근히 불러 자기의 뜻에 따르라 하였으나 건저는 거절했다.
대부인이 크게 노하여 왕에게 중상모략 하여 도리어 죄를 뒤집어 씌웠다.
왕은 이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그를 갈기갈기 찢어서 무덤 사이에 버렸다.
그날 밤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호랑나찰이 와서 그를 먹으려는데
그때 마침 부처님께서 그 근처를 지나시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광명을 놓아 비추시니, 몸이 곧 회복되었다.
그가 크게 기뻐하매 부처님께서 그에게 설법을 해 주시니 그는 곧 세 번째 도[三道]29)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그의 손을 끌고 기원정사로 돌아오시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제 몸이 이미 망가져 버려졌던 것을 부처님께서 다시 제 몸을 이어 주셨습니다.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과 비구 승가에게 이 몸을 보시하겠습니다.”
이튿날 바사닉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기원정사로 와서 건저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잘못을 참회하노라.
너는 실로 아무런 죄도 없거늘 사리분별을 못해 형벌의 해를 입혔구나.
이제 그대에게 이 나라의 반을 주어 다스리게 하리라.”
건저가 말했다.
“저는 이미 싫어졌습니다. 왕에게도 죄는 없습니다.
제가 전생에 지은 죄의 과보로써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몸으로써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바쳤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중생이 불구로서 구족치 못한 이가 있더라도
부처님의 광명을 입으면 모두가 즉시에 원래로 돌아온다.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불구라도 모두가 구족해진다”고 했나니, 부처님의 광명을 받으면 즉시에 원래로 돌아오는 것이다.
【經】 일체의 중생이 모두가 평등심[等心]을 얻어 서로 대하니,
마치 부모ㆍ형제ㆍ자매와 같았으며 또한 친척 같았고 선지식 같았다.
이때 중생들은 균등하게 10선업도(善業道)를 행하고
범행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어 담연하고도 즐거워했다.
마치 비구가 제3선(禪)에 든 것과 같았으니,
좋은 지혜를 얻고, 계행을 잘 지니고, 스스로를 지켜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論】 【문】 이 중생들은 아직 애욕을 여의지 못했으며,
선정도 없고 4무량심도 없거늘 어떻게 균등한 마음을 얻겠는가?
【답】 이들의 균등함이란 선정 속에서의 균등함이 아니라 모든 중생에 대하여
원한도 성냄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착한 마음으로 마주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균등한 마음이라 함은 경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균등한 마음으로 마주 본다 하는가?
곧 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기 때문에 이를 균등한 마음이라 한다”고 했다.
【문】 일체 중생을 보되 모두가 부모ㆍ형제ㆍ자매같이 여기는가?
【답】 아니다. 노인을 보면 부모와 같이 여기고, 연장자를 보면 형같이 여기고,
어린 사람을 보면 동생같이 여기며, 자매(姉妹)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한다.
균등한 마음 때문에 모두를 친한 친척같이 보는 것이다.
【문】 어찌하여 부모가 아닌데 부모라 하고 친척이 아닌데 친척이라 하는가?
이는 거짓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답】 일체의 중생은
한량없는 세상 동안 부모ㆍ형제ㆍ자매ㆍ친척 아닌 이가 없다.
또한 진실한 법의 모습 안에는
부모ㆍ형제가 없지만 사람들이 나라는 전도된 계교에 집착하기 때문에
부모다 형제다 하거늘 이제 착한 마음의 힘 때문에
마주 보기를 부모같이 한다 하여도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의(義)를 맺고 서로 친해진다면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로 섬기고 어머니가 아니지만 어머니로 섬기는 것과 같다.
형제나 자식의 경우도 이와 같다.
사람은 자식일지라도 악을 행하면 내쫓아 버리고
남의 성바지라도 선을 행하면 자식처럼 기르나니,
서로 대하는 것이 균등한 마음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남의 부인을 어머니같이 보고
남의 재물을 불같이 보고
모든 이를 친척같이 보면
이를 균등한 봄이라 한다.
‘이때 중생들이 균등하게 10선업도를 행하였다’라고 했는데,
신업도(身業道)에 세 종류가 있으니,
살생하지 않음ㆍ
훔치지 않음ㆍ
삿된 음행을 하지 않음이다.
구업도(口業道)에 네 종류가 있으니,
거짓말 않음ㆍ
이간질 않음ㆍ
욕하지 않음ㆍ
꾸밈말 않음이요,
의업도(意業道)에 세 종류가 있으니,
탐내지 않음ㆍ
해치지 않음ㆍ
삿된 소견 없음이다.
스스로가 살생하지 않고,
남을 시켜 살생하지 않고,
살생치 않는 이를 보면 찬탄하고,
살생을 피하는 이를 보면 대신 기뻐한다.
이와 같이 나아가 사견(邪見)에 이르기까지 각각 네 가지가 있다.
【문】 나중의 세 가지 업도는 업이 아니요,
앞의 일곱 가지는 업이거늘 어찌하여 열 가지 착한 업이라 하는가?
【답】 적은 편을 버리고 많은 편을 쫓기 때문에 통틀어 업도라 한다.
나중의 세 가지가 비록 업은 아니나 능히 업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한 업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통틀어 업도라 부른다.
이제 ‘범행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다’ 함을 풀이하리라.
【문】 위에서 10선업도를 행함을 설하였으니 이 이치가
이미 구족하거늘 이제 어찌하여 다시 ‘범행을 깨끗이 닦는다’고 말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10선업도를 행하기는 하나 음욕을 끊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제 다시 여기에서 범천행을 행하는 것을 찬탄하였으니 음욕을 끊게 된다.
그러므로 ‘범행을 깨끗이 닦는다’ 하는 것이다.
‘티가 없어졌다’고 했는데, 음욕을 행하는 사람은 몸을 망치고 나쁜 소문이 퍼진다.
그러기 때문에 음욕을 끊은 사람을 찬탄해서 ‘티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제 ‘담연하여 쾌적하다’ 함을 풀이하리라.
【문】 이는 어떤 즐거움인가?
【답】 이 즐거움이 두 가지가 있으니,
내적인 즐거움[內樂]과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이다.
이 즐거움은 5진(塵)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돌 틈에서 나는 샘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아서 균등한 마음씨를 행하고,
범행을 닦고, 10선업도를 얻고,
청정하여 티가 없게 되면 이를 내적인 즐거움이라 한다.
【문】 이 즐거움은 어느 세계에서 걸리는가?
욕계에 걸리는가, 색계에 걸리는가, 무색계에 걸리는가?
【답】 이 즐거움은 욕계에서는 걸리기도 하고 걸리지 않기도 하다.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걸리지 않는다.
지금 말하기를 “마치 비구가 제3선에 든 것 같다”고 했는데,
만일 색계에서 걸리는 것이라면 마치
비구가 제3선을 얻는 것 같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색계에서 걸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경지는 욕계의 마음에 희락을 내고 온몸에 가득 채우니,
마치 보드라운 풀[煖蘇]에다 몸을 담그면 몸이 유연해지며 화평하고 즐거운 것과 같다.
걸리지 않는다고 함은,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관찰하면
모든 법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아
진실한 지혜를 얻고 마음에 집착이 없이
형상 없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것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반이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제3선천의 즐거움을 말하는가?
【답】 두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느낌의 즐거움[受樂]과 느낌이 다한 즐거움[受盡樂]이다. 느낌이 다한 즐거움이란,
온갖 5음(陰)이 다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곧 무여열반의 즐거움이다. 능히 근심과 번뇌를 제하여
마음속이 환하니, 이를 즐거운 느낌[樂受]라고 한다.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제3선 가운데 가득히 들어차 있으니,
이런 까닭에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제3선천의 즐거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초선과 2선에도 즐거운 느낌이 있거늘 어찌하여 제3선만 말하는가?
【답】 즐거움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는데,
하는 초선이요,
중은 2선이요
상은 3선이다.
초선에 두 가지가 있으니,
낙근(樂根)과
희근(喜根)이다.
5식(識)30)과 상응하는 것이 낙근이고,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희근이다.
2선에서의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희근이며,
제3선에서의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낙근이다.
일체의 4계 안에서 3선을 제하고는 달리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없다.
이는 5식은 분별할 수도 없고
이름의 특징도 알 수 없어서 안식(眼識)이 생함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이지만 의식은 이미 생겨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5식과 상응하는 낙근은
만족한 즐거움이 될 순 없으며,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만이 만족한 즐거움이 된다.
이런 까닭에 3선 가운데에는 공덕이 적으며,
즐거움이 많은 까닭에
배사(背捨)ㆍ
승처(勝處)ㆍ
일체의 입(入)이 없다.
이 3선을 지나서는 다시 즐거움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비구가 제3선천에 든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제 ‘일체 중생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으며,
계행을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았다’ 함을 풀이하리라.
【문】 무슨 까닭에 즐거움에 이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다”고 말하는가?
【답】 사람이 즐거움을 얻기 전엔 능히 공덕을 지을 수 있지만 즐거움을 얻은 뒤엔
마음이 즐거움에 집착되므로 공덕을 짓지 않는 예가 많다. 그러므로 즐거움 뒤에
차례로 마음이 좋은 지혜를 얻었다 한다. 좋은 지혜란 계행을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문】 ‘계행을 지님’을 일러 ‘스스로를 지킨다’고 하며 또한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다시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는가?
【답】 몸과 입으로 짓는 선(善)은 ‘계행을 지닌다’고 하며, 마음을 거두어 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보호한다’고 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일체의 공덕은 모두 계ㆍ정ㆍ혜에 포섭되는데,
‘계행을 잘 지닌다’ 함은 계에 포섭되고,
‘스스로를 보호한다’ 함은 정에 포섭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함과
선정에서의 자(慈) 등의 공덕은 혜에 포섭된다.
【문】 누구도 ‘계행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계행을 잘 지닌다고 하는가?
【답】 바라문같이 세간법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집을 버리고 계를 잘 지킨다면, 이는 종자를 끊는 사람이 된다.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재물을 얻어 널리 공덕을 짓는다면,
이러한 이에게는 복덕이 있다. 출가한 자는
걸식하여 자신도 꾸려 나가지 못하거늘 어떻게 공덕을 짓겠는가?”
이러한 것을 일러 ‘계행을 잘 지니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법으로 다스리는데 집착되어
스스로를 잘 보호하는 사람을 꾸짖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법으로 다스려서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어야 한다.
법을 범해서는 안 되며, 존귀하고 친한 이를 버려서는 안 된다.
법을 세워 세상을 구제하면 그 이익 됨이 크거늘 무엇 때문에
자기 몸 하나만을 좋게 하려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무사(無事)에
빠져 세상이 어지러워도 바로 잡지 않고 사람이 급해도 구제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을 일러 ‘스스로를 보호하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꾸짖어 이렇게 말한다.
“원수에 보복치 못하고, 도적을 묶지 못하고, 악인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가 있어도 엄단하지 못하고, 환란을 물리쳐 구하지
못한 채 잠자코 있어 이익이 없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가?”
이러한 것을 일러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사람이 용맹하지 못하면
세상에 살아서 무엇하리오.
친한 이가 위태해도 구제 못하니
마치 땅 위에 선 나무장승이로다.
이러한 갖가지 착하지 그릇된 말을 하는 것을 일러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천인(天人)들은 모두 좋은 지혜를 얻고, 계행을 잘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러한 착한 법을 행하면 몸과 마음이 안온해져 두려움에 떨지 않으며,
번뇌[熱]도 없고 근심도 없이 좋고 착한 명예만이 있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경 받는다.
이것은 열반의 문으로 향하는 것이다.목숨이 마칠 때에 복덕스러운 모습을 보아 마음이 기쁘고
근심과 후회가 없다. 설사 열반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들의 세계나 혹은 천상에 태어난다.
이런 까닭에 ‘좋은 지혜를 얻고, 계행을 잘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