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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泰安寺
곡성 태안사(泰安寺)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이며, 다른 한자로 태안사(太安寺)라고도 한다. 양녕대군(讓寧大君 ... 세종대왕의 형)이 이곳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대안사(大安寺)가 태안사(太安寺)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즉 이곳 '태안사'는 '국태민안'에서 두 글자를 따온 이름이다. 처음에 선종(禪宗)사찰로 창건된 태안사는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송광사(松廣寺), 화엄사(華嚴寺)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을 말사(末寺)로 거느리고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松廣寺)가 선종(禪宗)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寺勢)가 크게 위축되었다.
태안사, 창건연혁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 .. 위 사진)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이름은 대안사(大安寺)라고 하였으며, 천보원년 임오 (天寶元年 壬午 .. 742년. 신라경덕왕 원년) 2월, 세 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철대사(慧徹大師)가 이곳에 주석하기 전에 이미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은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寂忍禪師 照輪淸淨塔碑)'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유사명왈대안기사야 (有舍名曰大安其寺也) ... 라는 기록인데, 사(舍)라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규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철대사(慧徹大師)가 주석 이후 이곳 태안사는 매우 번창하게 된다. '혜철대사'가 이곳 동리산(桐裏山)을 선문(禪門)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대안(大安)이라 하였다. 그 절은 수 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속세(俗世)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선사(禪師)가 석장(石杖)을 들고 와서 둘러 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교화(敎化)의 장(場)을 열고, 자질있는 사람들을 받아 들였다. 라고 하였다. 즉, 경치가 매우 좋으며,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수행하기 좋다는 것이 이곳에 산문(山門)을 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 '혜철대사'가 이곳에 산문을 열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847년 이전에는 이곳에 주석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의 사찰 현황은 알 수 없다. '태안사지(泰安寺誌)'의 편사(片史)에는 혜철대사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 (廣慈大師 允多)'이 중창한 당시의 이 사찰 현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 태조 20년경 광자선사 중창 당시 불상간각 (重創當時佛像間閣) ...이라는 제목 하에 여러 전각들에 대한 매우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금당(金堂)의 당주(堂主)가 ' 약사여래좌상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식당의 당주(堂主)도 '약사철조좌상'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태안사는 초기에 약사여래를 매우 중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규모가 총 40여 동의 건물에 110여 칸이었다고 한다. 이때 태안사가 가장 번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광자대사 ' 윤다(允多) '의 입적(入寂) 이후 1684년까지의 세부적인 역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224년 무신정권(武臣政權) 당시 집권자있었던 최우(崔禹)가 태안사를 중건하였다는 것과 조선 초기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태안사에 머물렀었다는 것은 여러 사료(史料)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이 태안사는 그 사세(寺勢)를 유지해 오다가 6.25 한국전쟁 당시 태안사는 능파각(凌波閣), 일주문(一柱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 당시 곡성경찰서를 이곳 태안사(泰安寺)로 옮겼으며, 여기서 계속적으로 항쟁(抗爭)을 계속하였고, 최후까지 저항하였으나 모두 순직하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태안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15개동의 거의 대부분 전각을 잃게 되었다.
동리산문 桐裏山門
동리산문(桐裏山門)은 신라시대에 혜철(慧徹)이 전라남도 곡성의 대안사(大安寺 ..현재의 태안사)에 개창한 산문(山門)이다. 즉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풍수지리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도선국사(道詵國師)를 배출하였다고 하여, 고려 왕실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고 널리 알려졌다. 선각도선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도승(道乘)과 여(如)가 법을 이었으며, 그들은 각각 경보(慶甫)와 윤다(允多)를 제자로 두었다. 윤다(允多)는 13세 무렵에 출가하여, 33세 이후부터 대안사(大安寺)의 주지(住持)가 되었고, 경보(慶甫)는 921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도움으로 전북 전주의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다가, 견훤(甄萱)에게 요청하여 스승이 머물던 전남 광양시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는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思惟)를 강조한 선종(禪宗)을 산골짜기에 전파하면서 당대의 사상계(思想界)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인 승려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 (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에 눈을 떠 (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文字)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 (不立文字), 번잡한 교리(敎理)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의 의미를 따로 전한다 (敎外別傳)는 4구(句)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태안사 오르는 길
태안사로 가는 숲길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매우 유순하다. 숲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하고, 길 옆을 따라붙는 계곡(溪谷)은 깊어 대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절 입구부터 일주문(一柱門)까지 포장되지 않은 산길은 한없이 부드럽다. 초록 이끼로 가득한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많지도, 적지도 않아 돌돌거리며 내려가는 물소리가 마치 독경(讀經)소리와 같다.
우르렁거리며 소리르 집어삼키는 계곡 물소리를 가진 다른 절과는 사뭇 다르기만 하다. 그저 유순할 뿐이다. 누군가 이 길을 둘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걷는다면, 말소리 사이사이에 물소리가 깔리되 이야기는 방해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듯 순한 산길은 걸어야 제 맛이다. 가파르지 않고 곧지 않은 길을 천천히 타박타박 걸어서 오르는 것은 이곳 태안사(泰安寺)를 제대로 만나기 위함이다.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고작 1.8km, 사람들은 그 길을 좀 덜 걸어보겠다며 악착같이 차(車)를 타고 오르지만, 그것은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절반쯤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태안사의 문화유적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1925년 이곳 태안사를 둘러보고 ' 신라 이래의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과 같다 '고 태안사를 극찬한 바가 있다. 태안사에는 현재 보물 제274호인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 보물 956호인 태안사 바라(大鉢), 보물 1349호인 태안사 동종(銅鐘) 등 보물급 문화재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82호인 능파각(凌波閣), 제83호인 일주문(一柱門), 문화재자료 제170호인 삼층석탑이 현존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과 태안사
6.25 한국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의 대부분이 북한군(北韓軍)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당시 곡성경찰서장(谷城警察署長)은 전 직원과 함께 이곳 태안사(泰安寺)에 올라 유격전을 결심하게 된다. 1950년 7월29일 북한군 기갑부대가 경남 하동에서 곡성(谷城)을 지나 전북 남원(南原)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들은 하동에서 남원을 향하는 국도상(國道上)에 있는 압록교에 매복하여 북한군 55명을 생포, 사살(死殺)하고 북한군의 이동을 저지하는 커다란 전과(戰果)를 올린다.
북한군(北韓軍)이 기습을 당하고도 상대 전투병력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당황해 하고 있던 즈음, 곡성경찰서장과 함께 태안사(泰安寺)에 올라있던 한 젊은 경찰관 한 명이, 도저히 두고 온 연인(戀人)을 잊지 못하여 한밤에 하산(下山)하여 연인과 밀회(密會)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연인(戀人)은 젊은 경찰관이 은거(隱居)하는 장소를 밀고(密告)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고, 곡성경찰(谷城警察)은 8월 6일 새벽에 북한군의 불의(不意)의 기습을 받아 48명이 산화(散化)하고 나머지 병력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후 10년, 전투에 참여하였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은 매년 8월6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합동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영향으로 일주문(一柱門)과 능파각(凌波閣)을 제외한 모든 전각(殿閣)들이 소실(燒失)되었다.
신숭겸(申崇謙)장군과 태안사
태안사는 고려시대 신숭겸(申崇謙)장군과 인연이 깊다.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신숭겸(申崇謙)장군이 무술(武術)을 연마한 곳이 바로 이곳 태안사를 중심으로 한 산 속이었고,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살리기 위해 왕건(王建)으로 변장하고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하여, 잃은 목을 그의 애마(愛馬)가 모시고 와서 슬피 울면서 쓰러져 죽어간 곳이 바로 태안사의 뒷산이었다. 그리하여 신숭겸장군의 머리만을 모신 묘(墓)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역사상 유명한 장수들이 많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목이 달아나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묻힌 얄궂은 운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신숭겸(申崇謙)장군이 유일하다.
능파각 凌波閣
산사(山寺)로 가는 길이 끝날 즈음 계곡에 걸쳐있는 누각(樓閣)이 보인다. 누각형(樓閣形) 다리인 능파각(凌波閣)이다. 옛 스님들은 멋이 있었던 듯하다. 그냥 다리만 놓아도 될 일인데, 누각(樓閣)으로 만들어 잠시 쉬었다 가게 배려한다. 그것도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면서 ...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리를 놓은 뜻은 부처님이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세속(世俗)에 관한 모든 번뇌(煩惱)와 일들을 물로 씻어내리라는 의미이다. 예전 스님들이 계곡에 멋들어지게 걸친 누각(樓閣)에 앉아서 쉬다보면 세속(世俗)이 그리워 절집으로 들어서지 못했을 것 같다.
능파각(凌波閣)은 이곳 '태안사'의 금강문(金剛門)으로 여겨지는 누각(樓閣)을 겸한 다리 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아름다운 여인(女人)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고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世俗)의 번뇌(煩惱)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進入)함을 상징하고 있다. 능파(凌波)란 말은 중국의 조식(曺植)이 지은 낙신부(洛神賦)에서 나온 말이다.
조식 낙신부 曺植 洛神賦
중국 삼국시대 조조(曺操)의 三男 조식(曺植)이 견후(甄后)를 좋아했는데, 그녀는 형인 조비(曺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얼마후 곽씨에게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였고, 조식(曺植)은 그녀의 유품인 베개를 형인 조비(曺丕)로부터 받아 임지로 돌아오는길에 낙수(洛水)가에 이르렀다. 그때 조식(曺植)은 견후(甄后)의 모습을 회상하며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다. 조식의 '낙신부' 원문에는 ' 능파미보(陵波微步) '라 되어 있지만, 이곳 능파각의 '능파'는 능파(凌波)로 되어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자태는 놀란 기러기처럼 날렵하고 노니는 용과도 같아 / 가을의 국화꽃처럼 빛나고 봄날의 소나무처럼 무성하구나 /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 멀리서 바라보니 아침 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 가까이서 바라보니 녹빛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네 / 섬려한 모습과 아담한 키마저 모두가 알맞고 적합하니 / 그 어깨는 일부러 조각한 듯하고 그 허리는 흰 비단으로 묶은 것 같구나 / 길고 가녀린 목덜미에 절로 드러난 흰 살결은 향기로운 연지도 호사한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구나 / 구름같은 머리를 뫂이 틀어올리고 그 아미는 가늘고 길게 흐르며 / 붉은 입술은 밖으로 빛나고 백옥같은 이는 입술 사이에서 곱구나 / 눈웃음치는 눈동자는 아름답고 그 보조개는 능히 마음를 끄나니 / 그 맵시가 고와 이를 데 없고 그 거동이 고요하여 윤기가 흐리니 / 그 부드러운 마음에 가먈픈 자태에 말투 또한 더욱 아름답구나 / 그 모습 되찾기를 바라며 작은 배를 몰아 강에 오르니 / 아득한 강물에 배 띄우고 돌아갈 길 잊으니 생각은 연이어 그리움만 더하고 / 밤은 이미 깊었는데 잠들지 못하고 엉킨 서리에 젖어 새벽에 이르노라 / 마부에게 명하여 수레를 내게 하고, 이제 나는 동로로 돌아가려 하에 / 말고삐 잡아 채찍을 들었으나 그 마음서운하여 돌아서지 못하네
능파각(凌派閣)은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慧徹禪師)'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왕건(王建) 24년(941)에 광자대사(廣慈大師)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후 파손되었던 것을 1767년 (조선 영조 43)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裝飾)을 겸하는 공포(共布)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가지 동물상(動物像)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門) 즉 누각(樓閣)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태안사에 오르는 길에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많이 있다. 속세(俗世)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세속의 번뇌를 씻고 지혜를 얻으라는 '반야교(般若橋)' 깨달음을 얻어 도(道)를 이루라는 '해탈교(解脫橋)' 등 하나하나의 다리를 건널 때마다 다리의 이름을 되뇌이며, 내 안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네 개의 다리를 건너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다섯 번 째의 다리가 바로 능파각(凌波閣)이다. 다린인 듯 싶으면서도 정자(亭子)인 듯, 정자(亭子)인 듯 싶으면서도 다리인 곳, 계곡 양쪽의 바위에 큰 통나무를 걸쳐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지었다. 다른 다리는 태안사로 향하려면 모두 건너야 하지만, 능파각은 절집으로 가는 길 옆에 세워져 있어, 이 다리를 건너면 암자로 길을 잘못 들고만다. 절집에 가닿으려면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인 것이다.
능파각은 계곡을 건너는 목적보다는 길옆으로 물러나 다리 위에 걸터 앉아 다리 아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기 위해 세워놓은 것은 아닐까... 산사(山寺)를 찾는 마음을 씻을 일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능파각(凌波閣)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법하다. 길을 잇는 다리가 아니면서도 사람들을 가장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셈이다. 미련도, 욕심도 없이 가볍고 우아하게 걷는 신선(神仙)의 걸음걸이를 능파(凌波)라고 한다. 능파각 위에서 오래도록 앉아있다 보면 그 능파(凌波)의 걸음걸이를 닮을 수 있을까 ?
개울 위에 다락을 세웠으니 누각(樓閣)이요
개울 위에 다리를 놓았으니 교량(橋梁)이요
개울 위에 절문을 열었으니 산문(山門)이다
동리산 계곡 물 위에 뜬 봉황(鳳凰)의 집이라
시인 임보(詩人 林步)는 능파각에서 위와 같은 시(詩)를 읊었다. 아주 짤막한 시에서 능파각의 성격까지도 잘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동리산(桐裏山)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오동나무가 우거진 숲 ..이라는 뜻이니, 능파각(凌波閣)을 계곡 물 위에 뜬 봉황(鳳凰)의 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제 자동차를 타고 태안사를 찾으면,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도 곧바로 절 마당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금 걷더라도 계곡의 운치를 느끼면서 시인(詩人)이 ' 봉황의 집 '이라고 감탄한 능파각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것이 절을 찾아가는 마음일 것이다.
능파각(凌波閣)의 누각(樓閣)다리는 계곡 양쪽의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약간의 석축(石築)을 쌓아 교대(橋臺 ..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로 삼고, 그 위에 큰 통나무(길이 10m, 둘레 1.6m) 두 개를 보(湺)에 걸쳤으며, 그 직각 방향으로 굵은 바닥판을 우물마루로 깔았다.
다리에 노면(路面)을 겸하는 바닥에 주춧돌을 대신하는 장방형(長方形) 침목 한 단을 하인방으로 얹고 두리기둥을 올렸다. 기둥은 민흘림이다. 누각(樓閣)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이며 맞배지붕에 겹처마집이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내외 일출목이고, 창방의 외목도리 및 화반 사이에 여러 모양의 동물상을 조각해 넣었다.
다리 길이는 10m, 폭은 3.5m이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다닌다는 뜻으로 미인(美人)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른다. 더불어 파도를 헤쳐나간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바, 사찰의 다리 이름에 붙인 능파(凌波)는 세파(世波)의 고해(苦海)를 헤치고 해탈(解脫)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누석단 累石壇
일주문 一柱門
절집으로 들어서는 일주문 .. 그 문으로 드는 길은 이끼가 낀 낮은 돌계단 길이다. 절집을 향하여 걷는 오솔길의 끝, 돌계단 길이 살짝 왼편으로 휘어져 있어 일주문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동리산 태안사 ' ... 거의 일주문 앞에 당도하였을 때에야 고색창연한 문에 매달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순서대로 점수를 매기자면, 초록 이끼로 무성한 돌계단 길이야말로 능파각(凌波閣)과 1, 2등을 다툴만 하다. 하지만 차(車)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은 가로질러 일주문과 절집 사이의 중간 길로 바로 접어들어 일주문의 운치(韻致)를 보지 못한다. 이 길은 눈 밝은 이에게만 제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1683년(조선 숙종 9)에 각현선사(覺玄禪師)가 중수하였고, 1917년 영월선사(暎月禪師)가 다시 중수한 것을 1980년에 보수하였다. 지름이 60cm 정도되는 원목(原木)을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으며, 앞뒤로 팔각기둥을 세웠고, 창방과 평방을 겹쳐서 일주문 전후에는 3구(具),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空間布)가 받치고 있다. 앙서(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로 된 살미첨차들, 화려한단청, 상부의 용머리 장식이 한층 풍취를 돋우고 있다. 내3출목, 외4출목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전면에는 '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이 일주문(一柱門)과 능파각(凌波閣)만이 소실(燒失)되지 않고 남았다.
봉황문 鳳凰門
봉황(鳳凰)은 중국에서 닭의 머리에 제비의 턱, 뱁의 목,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등 여러 짐승의 형상을 조합시켜 만들어낸 새로, 6척의 키에다 몸과 날개는 오색(五色)의 빛이 찬란하고, 오음(五音)의 소리를 내면서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竹)의 열매를 먹으며 예천(醴泉)의 물을 마시고 산다는 상념적인 큰 새이었다.
또 성스러운 천자(聖天子)가 세상에 나타날 때면 나타나는데, 뭇짐승이 따라서 모인다는 새 중의 새라는 것이다.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을 뜻하면서 용(龍), 거북, 기린과 더불어 불리는 사령(四靈)의 하나이기도 하다. 봉황무늬는 진(秦), 한(漢) 이래로 각종 기물(器物)과 복식(服飾) 등에 쓰였는데, 주로 왕가(王家)의 상징이 되었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정면 1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어서 그 무게를 분배하였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裝飾)인 공포(共布)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多布式)이다. 이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 씩, 옆면에는 1구 씩 공포(共布)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布)로 가득찬 느낌이다.
일주문 기둥은 외벌대를 사용하였고, 초석(礎石)은 막돌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하부가 두껍고 상부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만든 민흘림기둥이 아니고 원목(原木)을 조금만 가공해서 사용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굵은 기둥 이외에 4개의 기둥이 더 사용되었는데, 이 4개의 기둥들은 너무 세장(細長)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조적인 기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 기둥들은 상부의 지붕과 공포를 지지해주는 보조기둥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할 것이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다포(多布)의 공포를 짜올렸다. 공포는 외4출목을 사용하였고, 쇠서의 모양은 앙서이다.
앙서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共布)를 짜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고 있다. 이 작은 일주문 안에 이렇게 화려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一柱門)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龍)의 머리를 양편에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 안에 청룡(靑龍)과 황룡(黃龍)이 마주하고, 속세에 찌든 사람들의 몸을 정결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게 된다.
사찰의 일주문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문(門)이다. 기둥 두 개에 의지해서 문(門)을 만들고서는 주변담장도 없다. 문을 들어가도 되고, 옆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문이라고 말하지만, 문을 들어가는 사람이 문이라고 인정하여야 문(門)이 된다. 그리 크지 않은 포근한 동리산(桐裏山), 봉황(鳳凰)이 살기에 알맞은 오동나무가 많고,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한 자태를 하고 있는 곳, 그곳에 태안사가 자리하고 있으니 천년을 간직한 선기(禪氣), 그 염원을 이어갈 것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태안사 내 연못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태안사 내의 광자대사(廣慈大師) 부도 앞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과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이었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이고 있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面)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塔身)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 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 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均衡)과 안정감(安定感)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안사지(泰安寺誌)의 편사(片史)에 의하면, 광자대사(廣慈大師) 당시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금당(金堂)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금당(金堂)의 당주 또한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예불(禮佛) 대상 또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현재의 건물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태안사 동종 泰安寺 銅鐘
보물 제1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안사 대웅전에 봉안하고 있는 동종(銅鐘)이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에 의하면, 천순 원년(天順 元年... 세조 3년. 1457년)에 처음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만력(萬曆) 9년 4월(선조 14년. 1581년)에 파손되어 다시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불교가 탄압 받던 시기에 왕실(王室)의 도움이 없이 사찰 불사(佛事)의 일환으로 조성된 범종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신(鐘身) 위에는 용뉴(龍紐)와 음통(音筒)이 있다. 이전의 종(鐘)에서 뚜렷하게 만들어졌던 음통(音筒)은 이 동종의 경우 많이 축소되어, 그 크기가 작게 표현되어 있어 과도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또한 용(龍)의 조각은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각 부분이 모두 세밀하게 표현되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다. 동종(銅鐘)의 최상부에는 1단의 연꽃무늬를 돌출되게 만들어 놓았으며, 바로 아래 단(段)에는 커다란 2겹의 연꽃무늬를 종(鐘) 전체에 돌려 장식하였다.
또한 그 아래에는 또 하나의 띠를 두르고 원형(圓形)의 무늬와 더불어 원(圓) 안에 범자(梵字)를 새겨 넣었다. 모두 4군데에 유곽(乳廓)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넣은 다음, 그 상부에 유두(乳頭)를 솟아오르게 달아 놓았다. 하대(下帶) 부분은 다른 종(鐘)과는 다르게, 종의 끝이 아닌 높은 위치에 만들어졌고, 그 조각에 있어서 매우 화려한 당초문(唐草紋)을 조각하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종(鐘)으로서는 드물게 매우 화려한 조각을 갖추고 있고, 그 형태에 있어서도 매우 정교하게 조성되었다. 또한 여러 부분에서 과도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으며, 또한 종(鐘)의 외부에 명문(銘文)을 남기고 있어, 정확한 조성연대, 주조자(鑄造者), 시주자(施主者) 등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 ' 한국종 (韓國鐘) ' 연구에 필수적(必須的)인 태안사 동종이다.
종(鐘)의 몸체 중앙에 위 사진과 같이 명문(銘紋)이 양각(陽刻)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천순원년(天順 元年) 6월에 큰 종을 만들었으나 망가졌고, 또 만력(萬曆) 9년 4월에 큰 종을 주조(鑄造)하니 금(金) 400여근이 주조하는데 들어갔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銘紋)은 해서체(楷書體)로 되었는데, 이 내용에 따르면 1457년에 주조(鑄造)한 것이 깨져 다시 금(金) 400근(斤)을 넣어 158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81년은 계룡산 갑사(甲寺)의 동종(銅鐘) 주조 연대보다 3년을 앞선 시기인데, 그 당시 조선시대 '한국종 (韓國鍾)' 양식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동종이다.
부도밭 浮屠田
부도를 스님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도밭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부도밭은 또 하나의 설법전(說法殿)이다. 삶과 죽음은 본래 둘이 아니어서, 삶 속의 죽음을 바로 보아야 하고 죽음 속의 삶을 형형하게 알아차려야 함을 가르치는 법문(法文)이 울려퍼지는 것이다. 부도는 붓다 혹은 불타(佛陀)에 다름 아니다. 단순히 입적(入寂)한 수행승의 사리(舍利)를 모셔 놓은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깨달은 자 '의 깨달음이 응축되어 있는 결과물이다.
한 수행자가 진리의 원음으로 몸에 가득 채우고 앉아 자비(慈悲)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래서 바라보기만 해도 몸 속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녹아내리는 듯 하다. 중생(衆生)의 눈과 귀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이 고요한 부도밭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적인(寂忍)의 힘을 전해주는 도량이고 허공을 가득 채운 저 아침나절 새소리는 적인선사(寂忍禪師)가 들려주는 법문(法文)인 것이다.
대발 大鉢
바라는 인도(印度)에서 유래한 악기로 자바라, 제금, 발자(鉢子), 동반(銅盤)이라고도 한다. 자바라는 중동지방의 찰파라(chapara)의 한자표기로 우리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크기에 따라 요발, 동발, 향발 등이 있으며, 행사 내용에 따라 쓰임새도 각각 다르다. 궁중에서 향악정재(鄕樂呈才)를 출 대나, 불교의식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을 출 때 그리고 불전(佛殿)에 향(香)을 올릴 때, 설법(說法)을 하거나 큰 집회, 장례의식 등을 치를 때 수행자(修行者)가 울렸다.
서양악기 중 '심벌즈'와 비슷한 바라는, 접시모양의 엷고 둥근 1쌍의 놋쇠판으로 되어 있다. 재료는 놋쇠 또는 놋쇠와 무쇠의 합금(合金)이고, 형태는 평평한 접시모양이다. 중앙의 불룩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내고 끈을 맨 뒤 그 끈을 손에 잡아 양손에 한짝 씩 잡고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이 악기가 쓰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956호
2점 모두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지니고 있는 1조(組)의 '바라'로서, 그 중 한 점은 외연(外延)에 약간의 손상을 입었다. 지름은 92cm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바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표면의 중심부에는 손잡이로 보이는 원반형의 굵은 돌기(突起)가 솟아 있고, 그 중앙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손잡이를 중심으로 2조(組)의 융기동심원문(隆起同心圓紋)을 두 번 중첩 시문(施紋)하여 3구로 구획하였다. 바깥쪽 동심원문(同心圓紋)의 바로 옆에 붙어 철끈을 끼워놓은 작은 고리가 한 개 씩 부착되어 있으며, 외연부(外延部)는 그 끝단을 안으로 접히게 처리하였다. 내면에는 중앙부의 돌기 손잡이에 해당하는 크기만큼 안으로 움푹 파여 들어가 있을 뿐 장식(裝飾)은 없다.
바라 표면 각각의 외연부(外延部)를 돌아가며 연점각(連點刻)으로 ' 동리산태안사대발정통십이년정묘팔월일조성대공덕, 주요년대군시주안성이씨 ... 桐裏山泰安寺大鉢正統十二年丁卯八月日造成大功德, 主孝寧大君施主安城李氏 '로 시작되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있다.
즉 이 바라는 1447년에 태종(太宗)의 차남(次男)인 효녕대군(孝寧大君)이 발원(發願)하여 만든 태안사의 대발(大鉢)로서, 1454년에 다시 개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효녕대군이 세종(世宗)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직경(直徑)이 92cm에 달하는 바라의 중량(重量)으로 미루어 손에 들고 치기보다는 범종, 반자(飯子) 등과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 고정해 놓고 사용한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명칭을 '대발(大鉢)'로 표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금고 金鼓
태안사 혜화당 마루에 걸려 있는 이 금고(金鼓)는 1770년(영조 46)에 능가사(綾伽寺)에서 주조된 것으로, 절의 사적기에는 '대지전'에 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금고(金鼓)의 크기는 지름이 1m가 넘는다. 금고는 반자(飯子)라고도 말하며, 쇠로 만든 북의 일종이다.
금고(金鼓)는 옛날 군대(軍隊)에서도 사용하였으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형태는 농악기(農樂器)인 '징'과 비슷하며, 금구(金口 또는 禁口)로 불리기도 한다. 대부분 옆면과 위아래에 2~3개의 고리가 있어 매달아 치게 되어있다.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여 둘레에는 보상문이나 구름, 여의주, 당초문(唐草紋) 등의 무늬를 새기고, 옆면에는 제작연대나 사찰의 연혁, 시주자, 발원문(發願文) 등의 글자를 새겨 넣는다. 사찰에서는 급한 용무가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알리거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일에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탑비 寂忍禪師 照輪淸靖塔, 塔碑
태안사(泰安寺)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고 할 수 있는 혜철선사(慧徹禪師)의 부도(浮屠)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배알문(拜謁門)을설치하여, 몸을 숙이고 들어가게 함으로써 혜철선사(慧徹禪師)에게 예의(禮儀)를 표하고 있다.
배알문 拜謁門
하심 下心
문(門) 하나 있었다. 그 누구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그 문(門) ..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 하심(下心) '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門),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拜謁門)이다. 무명 저고리 옷고름처럼 순정한 비포장길, 정심교(情心橋), 반야교(般若橋), 해탈교(解脫橋)을 지나 신선의 걸음걸이(능파 .. 凌波)로 건너야 할 듯 싶은 능파각(凌波閣), 그렇듯 고즈넉하고 맑은 것들을 오롯히 지키고 있는 태안사, 그곳에 문(門)이 하나 있었다.
동리산(桐裏山) 자락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일으킨 혜철(慧徹)의 법신(法身)을 봉안하고 있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 (寂忍禪師照輪淸靖塔)', 그 부도탑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끝에 내려 앉은 문(門)이 있었다.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辱)된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쓰는 마음 .. 낮은 자리에 앉고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언제든지 고되고 천(賤)한 일은 내가 하는 마음, 그 마음 ' 하심(下心)'을 가르키는 배알문은 그 뜻만큼 겉 모습도 아름다웠다. 커다란 나무를 켜서 천연스럽게 궁글린 곡선(曲線)의 아름다움은 어지간한 인내(忍耐)와 신심(信心)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이었다.
복원 전의 배알문
이러한 '배알문'을 잃었다. 기둥이 썩어 들어가고 기와가 흘러 내렸다. 그대로 둘 경우 붕괴(崩壞)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보수(補修)를 하되 최대한 옛 모습을 살리려 했다 ...는 것이 말끔하게 단장한 새로운 배알문에 대한 사찰과 곡성군청 문화예술담당의 한 목소리이었다. 그럼에도 기둥과 지붕을 통채로 바꿈으로써 원형(原形)의 참뜻을 상실해버린 배알문을 바라보는 심정은 차라리 애통할 뿐이다. 온전히 구부리지 못해, 온전히 저를 낮추지 못해, 온전함을 잃은 지금의 배알문은 나를 버린 피안의 세계, 적멸(寂滅)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로서는 한 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이 부도탑은 태안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고 할 수 있는 혜철선사(慧徹禪師)의 부도이다.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慧徹)은 신라 원성왕 원년인 785년에 태어나, 861년(신라 경문왕 원년)에 입적(入寂)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는 '적인선사'가 입적(入寂)한 861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도를 스님들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도밭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부도밭은 또 하나의 설법전(說法殿)이다. 삶과 죽음은 본래 둘이 아니어서, 삶 속의 죽음을 바로 보아야 하고, 죽음 속의 삶을 형형하게 알아차려야 함을 가르치는 법문(法文)이 울려퍼지는 곳이다. 부도는 붓다 혹은 불타(佛陀)에 다름 아니다. 단순히 입적(入寂)한 수행승들의 사리(舍利)를 모셔 놓은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깨달은 자 '의 깨달음이 응축되어 있는 결과물이다.
이 부도는 현재 태안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련한 대지 위에 잇으며, 부도 옆에 탑비(塔碑)가 부도를 바라보면서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도 앞에는 계단을 마련하고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문(門)을 두어 부도가 놓인 곳의 격(格)을 높이고 있다. 부도는 지면(地面)에 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기단(基壇)을 별도로 조성하여 그 위에 봉안하였다.
기단은 원래 가구식(架構式)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우주(隅柱)가 제 위치에 있지 않는 등 많은 부분이 교란되어 있다. 또한 기단 주변으로 초석(礎石)들이 위치하고 있어, 부도를 중심으로 한 부도전(浮屠田)이 꾸며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정면에 위치한 갑석(甲石)의 형태가 특이하게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계단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지대석은 방형(方形)인데, 2단으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상단의 지대석은 네 모서리의 각(角)을 살짝 죽인 점도 다른 석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상하 두 단으로 만들었다. 아래 단은 넓은데, 각 면에는 두 개 씩의 안상(眼象)을 새겨 넣었다. 하대석 상당는 아래에 비하여 위를 넓게 하여, 각 면이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형태적인 안정감(安定感)을 강력하게 부여하고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없어서 사자(獅子)를 고부조(高浮彫)로 새겨 놓았는데, 뛰어 놀고 있는 모습,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 매우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대석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평면의 크기가 줄어드는 쇠시리 4단을 마련한 위에 중대석 본체를 만들었다. 4단의 쇠시리 중 맨 아래 단의 쇠시리를 다른 단(段)에 비하여 높게 만들어 안정감(安定感)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다. 중대석 본체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사자상 獅子像
상대석 上臺石
옥개석(屋蓋石)은 팔모지붕을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 하부에는 각 모서리를 따라 추녀와 사래를 표현하였고, 각 면마다 서까래와 부연(付椽 .. 작은서까래)을 촘촘히 조각해 놓았다. 서까래 아래쪽에는 볼록한 부분이 1단의 쇠시리로 구성된 옥개받침까지 연속되고 있다. 이 부분의 모서리에는 살미로 보이는 부재가 양각(陽刻)되어 있다. 목조건축(木造建築)의 출목이 있는 공포대를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붕 윗면 역시 기와지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붕면은 반곡(反曲)이 삼한 편이며, 내림마루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 기와골과 막새기와까지 모두 표현하고 있다.
상대석은 크게 두 단(段)으로 이루어졌다. 아래 단(段)은 탑신이 놓인 곳의 격(格)을 높이기 위하여 연화좌(蓮花座)를 표현한 것으로, 아래에 3단의 층급받침을 새기고, 각 면에 3개 씩 모두 24엽(葉)의 앙련(仰蓮)을 새겨 넣었다. 연꽃은 3중(重)으로 구성한 위에 간엽(間葉)까지 새겨 넣은 아주 화려한 모습이다.
연꽃 위에는 가구식(架構式)으로 구성한 기단(基壇)을 형상화하고 있다. 팔각형 평면으로 지대석과 갑석 그리고 그 사이의 면석(面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에는 우주(隅柱)나 탱주(撑柱)를 새기는 대신 각 면에 두 개 씩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꽃을 새겨 넣었다. 갑석(甲石)의 윗면에는 3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목조건축의 기단을 석조(石造) 부도의 형식에 맞추어 번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륜부는 앙화(仰花), 복발(覆鉢), 3개의 보륜(寶輪), 보주(寶珠) 등 모든 부분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신라 말기에서 건립되기 시작한 부도 초기의 작품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거대(巨大)한 것과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안정작(安定的)인 조형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조각에 있어서도 기품(氣品)을 잃지않고 있어, 수수하면서도 당당(當當)한 우리나라 부도(浮屠)의 명작(名作)이라고 할 수 있다.
탑신석 塔身石
탑신(塔身)은 팔각형(八角形) 평면으로 아래부분에 비하여 윗부분을 약간 좁게 만들어 형태적인 안정감(안정감)을 부여하였다. 기둥과 인방, 문비(門扉 .. 문과 자물쇠) 등을 조각하여 목조건축(木造建築)을 표현하고 있다.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고, 상하에는 기둥을 연결하는 수평재를 조각하였다. 아래의 것은 하인방이 분명하나, 위에 있는 수평재는 탑신석(塔身石) 상면에서 아래로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만큼 기둥이 위로 솟아 있어 창방인지, 상인방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寂忍禪師 照輪淸淨塔碑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위 사진) 옆에 부도를 바라보며 세워진 비석이다. 훌륭한 선사(禪師)의 경우,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탑비(塔碑)를 옆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통하여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 상황 및 선사(禪師)의 일대기를 알 수 있다. 탑비(塔碑)는 귀부(龜趺)와 이수로 구성되는데, '적인선사탑비'는 비신(碑身)이 결실(缺失)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태안사에 전해내려 오는 비문(碑文)을 가지고 복원해 놓았다.
이수( 위 사진)는 양편에 두 마리의 용(龍)이 구름 사이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정면 중앙 두전(頭篆)에는 '적인선사(寂忍禪師)'라고 써놓았다. 배면(背面)은 정면과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4마리의 용(龍)이 구름을 배경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상에는 보주(寶珠)를 얹어 마무리하였다.
귀부(龜趺)는 당당하게 앞발을 들어 무거운 비신(碑身)을 너끈히 버티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하였고, 등에는 매우 가는 선(線)으로 거북의 등껍질을 표현하였다. 귀부(龜趺)의 등껍질은 다른 탑비(塔碑)의 것과 다르게 끝부분을 단순히 원형(圓形)으로만 조각한 것이 아니고, 호형(弧形 ..활 모양)을 그리며 물결 치듯이 마감되어 있어 더욱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상부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꼬리는 말아 올리지 않고 아래로 늘어트리고 있다.
광자대사 부도, 탑비 廣慈大師 浮屠, 塔碑
태안사 일주문 오른편 부도밭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 광자대사(廣慈大師)의 부도탑으로,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신라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945년에 82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자(字)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이 부도는 광자대사가 입적한 후 5년이 지난 고려 초기 광종(光宗) 원년(950)에 세워졌다.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두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屋蓋石) 및 상륜(相輪)을 올린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팔각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지대석의 가장 아랫단을 상부와 틀어지게 구성하였음이 특징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하였던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사례에 속한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상부에 3단의 쇠시리를 두어 기단받침을 삼고 있다. 하대석은 상대석과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상중하 세 단으로 구성하였다. 하단에는 물결무늬와 더불어 날아가고 있는 용(龍)을 매우 화려하게 조각하였고, 그 아래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지대석 상면의 쇠시리와 연속되는 기단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광자대사탑비 廣慈大師塔碑
광자대사 부도 옆에 있는 부도비(浮屠碑)는 비신(碑身)이 파괴되어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새겨진 글자도 마모되어 판독(判讀)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 이나 '해동금석원' 등의 책자에 전문(全文)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는, 효공왕의 측근에서 불심(佛心)에 대한 문답(問答)을 한 일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1941년 펴낸 '사적기'에 의하면 ' 1928년 중건(重建)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의 이수와 광자대사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귀부(龜趺)는 각각 세부에 수 많은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다. 머리의 표현에 있어서 매우 사실적이며, 목에 그려진 주름무늬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또는 비(碑)를 받치고 있는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빼곡히 조각하여 두었다. 등에는 아직도 거북의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을 향하여 말려 있도록 조각되었다.
이수의 한가운데에는 가릉빈가(迦陵頻伽)를 표시한 듯한 새의 몸통이 조각되어 있으나, 얼굴 부분은 사라지고 없어 현재는 없다. 새 모양 조각 하부에는 이 탑비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 있었을 것이나, 많이 훼손되어 있어서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사방 모서리 부분에는 각각 용(龍)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이수의 정상 부분에는 중앙과 좌우로 3개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이것은 장식(裝飾)의 효과와 더불어 가릉빈가(迦陵頻伽)와 각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는 용(龍)의 배경으로 작용하도록 조각한듯하다. 배면(背面)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조각하였으며, 곳곳에 용(龍)의 몸통을 조각해 놓아 각 모서리에 조각된 용(龍)과 조화를 도모하였다.
가릉빈가 迦陵頻伽
가릉빈가(迦陵頻伽)는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칼라빈카'의 음사(音寫)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 정토만다라(淨土曼茶羅) 등에 따르면 극락정토의 설산(雪山)에 살며, 머리와 상반신(上半身)은 사람의 모양이고, 하반신(下半身)과 날개, 발, 꼬리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 선조(仙鳥) 등의 별명이 있다. 이 새의 무늬를 조각한 불교가 성행하였던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 기와들과 구리거울(銅鏡)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연곡사 부도(국보 제54호),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의 상대석 안상(眼象) 안에 각각 이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