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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산
2024년 02월 11일(일요일)
산행코스 : 칠장사주차장(07:30) - 칠장산(08:20) - 칠현산(09:10) - 칠장사주차장(10:00)
산행거리 : 6.7km
칠장사 일주문 앞쪽
일주문에는 '七賢山七長寺(칠현산칠장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일주문 편액 글씨는 칠장사 표석과 마찬가지로 칠장사 주지를 지낸 도광(道光) 스님 작품입니다.
일주문 뒤쪽
칠장사 주차장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 (龍珠寺)의 말사입니다.
천왕문
칠장사 사천왕문(四天王門)에는 좌우로 각 2구씩 모두 4구의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상은 모두 악귀(惡鬼) 위에 걸터 앉아 두 눈을 부라린 험상궂은 얼굴로 칼 · 창 · 비파 등 무기를 든채 나쁜 무리를 몰아내는 당당한 기세를 하고 있습니다.
높이 342cm의 소조상(塑彫像)이며, 1726년(영조2)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 부의 조각 장식에서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모습으로 머리에는 꽃이 달린 관을 쓰고 몸에는 혼갑 (昏甲)·흉갑(胸甲)등 치밀한 무늬로 새긴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장군의 늠름한 자세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 중에서 비파를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과 보검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반대편에는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과 창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이 있습니다.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사천왕상은 창만 들고 있습니다.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하는 법당으로 불법에 의하면 죽은 이가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10명의 심판관 앞에서 살아있는 동안 행적을 심판받는 곳 입니다. 그래서 시왕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장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안성 칠장사의 명부전에는 가운데 지장보살이 있고 그 좌우에 각 5명씩 시왕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녹색의 민머리에 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좌측에 도명존자, 우측에 무독귀왕이 보좌합니다. 시왕상은 모두 보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염라대왕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그 위에 책을 올려두고 있습니다. 저승사자는 무관복을 입고 깃발을 들고 있으며, 명부전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칠장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제중루(濟衆樓)
아래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2층 누각처럼 보입니다. 제중루의 후면과 측면에는 통풍과 채광을 위해 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죽림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 강성원 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 선생의 기증으로 2005.11.28. 현재의 위치로 이전 설치하였습니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75cm이고, 상대갑석은 하나의 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습니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한 면에는 둥근 문고리를 조각하였으며 탑신마다 모서리기둥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상륜부에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습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웅전(보물 제2036호)
안성 칠장사 대웅전의 최초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90년(정조14년), 1828년(순조28년)이건되 건물로서, 경기도권의 조선후기 사찰 중심 불전의 건축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정면3칸, 측면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공포형식은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각 칸마다 2개의 간포가 있습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중앙에는 석가삼존불을 모셨습니다.
대웅전 편액
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이 삼존불은 1685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불상의 크기는 150cm입니다. 불상의 신체비례와 조각수법을 볼 때 불상 3구 모두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불상입니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구구정한 모습입니다.
17세기 전, 중반에 제작된 불상과 비교해 볼 때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있는 아미타수인을,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진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양 협시보살은 모습이 거의 흡사하나 우부처인 제화갈라보살이 약간 작고, 좌부처인 미륵보살은 연화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영산회상도(후불탱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영산회상도란 석가여래가 영위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모습을 그린 불화입니다. 칠장사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화기를 통하여 금곡영환에 의해 1886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화의 크기와 형태는 가로 259cm, 세로 268cm의 거의 정사각형의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화면은 상단에 석가모니와 협시보살을 크게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나한상등을 그렸으며, 하단에 보살과 사천왕을 크게 배치하였습니다. 녹색과 적색을 중심 색으로 쓰고, 청색, 백색, 황색 등을 보조 색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색채의 사용과 존상의 배치를 볼 때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웅장한 영산회상의 장면을 의식하여 화려하고 공간감 있는 화면구성이 특징입니다.
석가여래상
대웅전 닫집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 탱화
대웅전 약사여래 탱화
칠장사 동종(향토유적 제25호)
동종의 상단 용뉴는 쌍룡으로 옆에 지름2cm의 원공이 있으며,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상대에는 원형으로 문양을 마련하여 그 안에 범자를 8군데 새기고, 범자 밑에는 유곽을 4군데 두었습니다.
유곽 둘레에는 사선문양이 있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마련하였습니다. 명문을 통해 정조 6년(1782)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종의 규모는 전체 높이가 120cm이고, 밑둘레 222cm, 밑지름 75cm, 밑두께 6.5cm입니다.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3호)
이 석불입상은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1980년경 칠장사옮겨온 것입니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66.5cm이고, 총 높이는 206cm입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습니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의 화불을 새기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됩니다.
원통전
관세음보살의 협시(脇侍)로는 남순동자(南詢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들지만, 이들은 조각상으로 봉안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의가 후불탱화에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칠장사 관세음보살상의 좌우 협시는 최근에 조성하여 모신 것으로 보이는데, 설명문이 없어서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원통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좌상과 관세음보살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속의 서방정토 부처인 아미타여래불
아미타여래불은 관세음보살이 존경한 부처로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한 것을 상징합니다.
국사전
국사전 내부
중앙이 인목왕후의 위패, 좌측은 칠장사 중창조인 혜소국사, 우측은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위패입니다.
공덕전
공덕전 내부
공덕전 경내 승탑
나한전
나한전의 내부 - 일반적으로 불단이 마련되는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전각을 마치 'ㅗ'자(한자 고무래 정자를 차용해서 쓰는 정자각<丁字閣>을 뒤집어 놓은 형태)처럼 만들어 안쪽 깊숙한 곳에 혜소국사와 교화된 일곱 산적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한전 나한과 박문수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던 박문수가 이곳 칠장사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미 칠장사 나한전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기도를 많이 해 급제를 했다는 영험이 전해지는 유명 기도처였습니다. 박문수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유과를 나한전에 올리며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번 과거에 출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날밤 꿈에 "나는 칠장사 나한인데 그대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과거를 볼 시제를 보여 줄테니 잘 기억하시오" 하고는 시제를 써 내려갔고 마지막행은 스스로 완성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는데, 꿈에 본 시제가 또렷이 뇌리에 남아있었고, 과거를 치러는 날 시제를 보고는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날 밤 꿈에 본 시제가 그대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박문수는 병과 진사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칠장사 '몽중등과시'입니다.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
귀부·비신·이수가 하나로 조합된 탑비였으나, 현재는 각각 따로 해체하여 보존·전시되고 있습니다.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웅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83세가 되던 고려 문종 8년(1054)에 입적하였습니다.
고려 문종 14년(1060) 혜소국사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이 비는 김현이 글을 짓고 민상제가 글씨를 썼는데, 비문에는 대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의 높이는 241m이고, 폭은 128m이며,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납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의 비신은 중앙부가 절단된 채로 전해지던 것을 1975년에 보수한 것으로, 비신이 깨진 배경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화가 전해집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 가 칠장사에 왔는데, 어떤 노승이 나타나 그를 꾸짖었습니다. 화가 난 가토 기요마사가 칼을 빼들어 노승의 목을 베자 갑자기 노승은 사라지고, 혜소국사비가 피를 흘리며 토막이 나있었습니다.
혜소국사비 귀부
귀부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귀부의 얼굴은 용의 형상으로 묘사되었으며, 등에는 육각형 모양의 귀갑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귀부의 등 중앙에는 비좌(비신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비좌의 윗부분에는 연꽃 문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비신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앞면에는 정현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고, 뒷면에는 정현을 기리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대 문장가였던 김현이 비문을 지었고, 민상제가 구양순의 해서체를 따라 글씨를 썼으며, 배가성·이맹 등이 비신에 글자를 새겼습니다.
비신의 좌·우 측면에는 용이 구름 위를 날아가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했고, 비신의 상단 중앙에는 '贈諡慧昭國師碑銘(증시혜소국사비명)' 이라는 전액을 새겼습니다. 비신의 좌·우 측면에는 용이 구름 위를 날아가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했습니다.
혜소국사비 이수
이수는 탑비의 머리 부분으로 장식적인 역할과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액(비석의 명칭이나 비석의 주인공을 새긴 부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이수 전면에 용·구름 등을 조각하여 장식했습니다.
어사 박문수 합격다리
칠장사 입구 0.13km, 칠장산 1.2km, 칠장사 0.15km
칠장사에서 올라오는 등로길
칠장사 입구 0.3km, 칠장산 0.9km
칠현산이 보입니다.
칠장사갈림길
옥정재 11.4km, 칠현산 2.1km, 칠장사 0.7km, 칠장산 0.5km
칠장산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칠현산으로 진행합니다.
52계단
칠장산 0.3km, 칠장사 0.9km, 3정맥분기점 40m
3정맥 분기점
칠장산 0.3km, 한남정맥, 바사리열두고개 0.8km, 한남금북정맥, 칠장사 1.0km, 금북정맥
좌측 칠장사, 우측 관해봉
칠장산 정상
칠장산
칠장산 정상 상고대
금광저수지 방향
다시 돌아온 칠장산 삼거리
칠현산으로
안성베네스트GC
칠현산 1.7km, 칠장사 0.8km, 칠장산 0.9km
뒤돌아본 칠장산
가야할 칠현산
안성베네스트GC
부부탑 칠순비(중고개)
칠현산 1.1km, 칠장산 1.5km
사유지 철조망을 따라서
조릿대길
칠현산 전위봉
나무사이로 보이는 덕성산
칠현산 정상이 보입니다.
칠현산 정상
옥정재 9.3km, 명적암 1.0km, 칠장산 2.6km
명적암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칠현산 정상 상고대
명적암 갈림길
명적암(신대마을) 0.36km, 칠현산 정상 0.74km, 극락마을 1km
눈덮힌 급경사 하산길
명적암(신대마을) 0.2km, 칠현산 정상 0.9km, 극락마을 0.84km
명적암
칠장사 부도군(향토유적 제29호)
이 부도군은 칠장사에서 약500m 떨어진 칠장리 어귀 오른쪽 산기슭에 14기의 부도가 횡렬로 나란히 위치해 있습니다.
산기슭을 평평하게 만들고 1~2m 간격으로 부도를 배치하였는데 형태는 모두 석종형입니다.
방형과 8각 또는 원형으로 지대석을 조성하고, 그 상면에는 높고 낮은 괴임대 등을 만들어 탑신을 받들고 있습니다.
재료는 모두 화강암으로 다음은 형태가 부드럽고 형태도 가지런합니다.
탑신의 표면에는 별다른 시문이 없고, 상단부에는 보주를 장식했습니다. 보주의 처리는 석종형 부도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부도에 따라서는 보륜을 조각하여 보주를 장식한 것도 보이며, 보주 하단 가장자리에 연꽃무늬를 돌린 것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형이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칠장사 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당간은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둡니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총 높이 9.7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된 2.9m 지주 사이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 철당간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칠장사 외에 청주 용두사지와 공주 갑사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습니다.
총 높이 11.5m, 직경 40cm, 지주 높이 3m입니다.
당간이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장엄용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합니다.
지주는 동서방향의 장축을 지닌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은 모두 3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습니다.
지주는 상면 바깥의 모를 주경 둥글게 처리하고, 그 위로 1조의 종선을 표현한 것으 외에는 장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간은 원래 30개의 원통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15개의 원통이 남아 있으며. 제일 아래칸은 길이 68cm, 지름 45cm의 원통으로 하단에 각 칸칸 연결을 위한 폭 6cm의 반구형 마디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철당간은 몇 개의 마디마디 속에 튼튼한 나무를 넣고 당간을 끼운 것입니다.
마디마다 작은 철띠로는 당간의 무게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 세번째 칸에 十六, 한 칸 아래 十三라고 쓴 글자가 뚜렷이 보입니다.
지금은 15마디가 남아있지만, 처음 만들었을때 그대로 30마디가 온전히 남았다면 엄청 놓겠습니다.
칠장사 사적비(향토유적 제24호)
칠장사로 들어가는 입구 철당간 옆에 위치한 화강암 석비입니다. 비좌는 자연석의 상면을 고르게 다듬어 마련하였으며, 비신은 상부를 둥그렇게 활모양으로 깎았습니다. 비신의 앞면에는 중수기록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사적비는 칠장사의 창건 연대와 중수 과정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건립 시기는 비신의 전면 우측에 음각되어 있는 명문을 통해 현종 12년(167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은 안면노가 짓고, 이석징이 글을 썼으며, 이구가 전액하였습니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23cm, 폭 106cm,두께 28 cm 입니다.
산직마을회관 주차장
주차장에 세로로 쓴 칠현산칠장사(七賢山七長寺) 표석이 서 있습니다. 이 글씨도 도광(道光) 스님이 썼습니다.
칠장사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