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초대받은 것 자체가 영광일 때가 있습니다. 초대된 자리가 너무 과분한 영광이고, 그 자리가 불편할지도 몰라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극히 관심 있던 자리에 초대된 상황이라면, 거절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행운이고 가슴 벅찬 초대입니까?
이런 우리의 심성을 고려해서 오늘 복음을 보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을 초대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 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초대처럼 보입니다. 다시 재차 초대하자,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짜증스럽게 반응하며 초대하러 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초대보다 ‘지금의 자기 것’이 더 중요한 상황입니다.
왕이 베푸는 혼인 잔치에 관심이 없다는 징후가 너무도 뚜렷합니다. 초대에 관심이 없는 것이 뭐가 그리 중죄냐 싶으시겠지만,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관심이 없을 수 없듯이, 거부할 수 없는 초대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부여된 생명력의 목적에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인정과 성취에 목말라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근거 없는 자부심에 휩싸여 ‘생명력의 근원’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지금의 ‘현실’에 ‘자만감’으로 콧대를 높입니다.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망치거나 ‘이 이번 생 생은 망 망했다!’ 라고 한탄하며, 지금을 허비하고 미래를 버려갑니다.
같은 맥락에서 잔치에 입장했어도 예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역시 비슷한 의미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일상, 생각에 사로잡혀,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뜻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력을 입고 살 수 없는 모습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매일의 미사는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잔치 음식이 별로라고, 가 봐야 별 뾰족한 재미가 없다고 평가하며, 하느님의 초대보다 내가 해야 할 일과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설사 하느님의 초대에 간신히 응한다 해도,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여 얻기 위해 하느님 초대에 맞는 예복이 아닌 자기 멋대로의 의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초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우리 멋대로 입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옷으로 단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허석훈 루카 신부 / 한강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