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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박종의 작가
[미술여행=윤장섭 기자] 미술여행이 박종희 작가의 원작 소설 '머피의 법칙'을 매주 한편씩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한다.
'머피의 법칙'은 어떤 일이 잘못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머피의 법칙'은 1949년 미국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머피 대위가 주장한 법칙이자 심리학 용어다.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둘 이상의 방법이 있고 그것들 중 하나가 나쁜 결과(disaster)를 불러온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사용한다.”고 믿는것이 '머피의 법칙'이다. 일종의 징크스와 같은 것이다.
박종희 작가의 원작 소설 '머피의 법칙'실화를 밑바탕으로 한 어느 도박중독자의 일생과 주인공 인생의 희노애락, 남미 페루의 정치적 역정이 우리나라의 과거를 보는 듯하다. 아울러 중세기 중남미 전역을 식민지화했던 유럽제국의 종교적 횡포와 성서적 허구 및 작위성을 그린 글이다.
박종희 작가의 원작 소설에 이기원 작가가 삽화를 덧입혀 <미술여행>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머피의 법칙'원작자인 박종희 작가는 1990년 제1회 MBC 장편소설(가작)입상자 이며 삽화로 재미를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이기원 작가는 웹툰 작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다.
◈ '머피의 법칙' 1부...'도박'(5편)
(지난호에 이어~)
한번 들어서면 날밤을 홀딱 까고, 기계를 한꺼번에 여러 대 돌리면서 생 쇼를 한다는 게 눈에 띤 것이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생짜를 붙어, 잃은 밑천에 몇 배를 요구한다는 것도 금방 퍼졌다. 총무처공무원만 아니면, 손을 써도 벌써 써서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통금 중에 문 닫고 영업을 했으니 불법 아니냐며, 물고 늘어지면 게임방만 손해기 때문이었다.
시비가 붙으면, 꼭 경찰을 불러서 법적으로 따지는데, 도리가 없었다. 바지사장까지 불러다가 경찰에 대질시키며, 게임기에 승률을 조작해 돈을 긁는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럼, 하는 수 없이 다른 손님들 다 내보내고, 기계를 전부 세워 몸통을 뜯어서 설명하는 거였다. 구슬게임을 하도 많이 해서, 기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만지면, 아무리 돈을 넣어도 안 터진다는 걸 경찰에게 조목조목 따져 들이댄다. 경찰은 상대가 총무처공무원이고, 업무상 불법 게임방 감찰 나와서 단속한 것이니, 법적으로 처리해달라는 거다.
경찰이 망설이면, 당신들도 이곳 업소에서 떡값 얻어가는 거, 다 아니까 알아서 하라고 싸잡아 위협하는 것이다. 경찰은 도리 없이, 바지사장에게 귀엣말로, 업무상 단속하기 위해 사용한 경비는 돌려주고, 수고비도 좀 더 얹어주라며, 타협을 주선한다. 모 주방은 가방을 게임기 턱살에 놔두고, 잠시 담배 피우러 자리를 뜨면, 그들이 알아서 가방을 들고 나온다. 두툼한 서류봉투가 들어있는 걸 알고, 못이기는 척 받아 든 채 경찰차 조수석에 앉아 하우스 방으로 가는 것이다. 밤을 지새우려면 말이다.
영등포시장 뒷골목 게임방들도 그렇게 예닐곱 집이 쑥대밭이 되자, 그는 더 이상 발걸음을 할 수 없었다. 종로 3가에서 본 종업원들이 꽤 많아서, 얼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총무처 내부에서 터졌다.
모 주방이 화장실을 간 틈에 담당과장이 그의 책상을 우연히 둘러보다가, 열려진 서랍 안에 쌓인 돈 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돌아오자 책상을 지키고 서 있던 담당과장이 서랍을 열어보며, 이 돈들이 대체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모 주방은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돈 뭉치를 가방에 쓸어 담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표를 쓸 필요도 없는 면직이었다.
그리곤 장안동에 있는 하우스 방으로 갔다. 세븐카드가 대낮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가방을 열어 보이고, 밑천 두둑하니까 며칠 잘 놀아보자며 끼어들었다.
판돈 천원부터 시작이었다. 5구까지 하프 베팅으로 하다가 6, 7구는 풀 베팅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다섯 명이 들러붙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카드 패에 정신을 팔았다. 판돈이 불었다가 줄었다가를 반복하다가 한 놈이 떨어지면, 하우스 방장이 어디서 또 한 놈을 끌어왔고, 그렇게 열흘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담배와 커피로 찌든 몸이 녹초가 됐지만, 모 주방은 단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같이 패를 돌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걱정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체력 하나는 타고난 위인이었다. 172Cm의 별로 크지 않은 체구에 덩치도 마른 타입이었는데, 웬만해서는 쓰러지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하기는 해도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또 하나, 그의 특이한 체질은 여자와 섹스를 해야 잠깐이라도 자는 버릇이 생겼다.
스페인왕립 부속음악고등학교 유학시절 모나코를 비롯해, 유럽대륙 카지노를 전부 순회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구소련과 동구권만 못 들어가 보고, 다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유럽 귀족들과 중동 석유부호들은 주로 바카라를 즐기는데, 그들은 졸음을 참기 위해 게임 중에도 코카인을 하는 습관이 있다. 모 주방도 그 때 서너 번 코카인을 코로 당긴 적이 있고, 그런 영향이 있어서인지, 서울 게임방 에서는 커피를 100잔에서 150잔까지 마셔댄다. 담배도 한 두 보루가 보통이고.
아무튼 그는 도박판이라면, 자기 모친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우연히 집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가 모친이 위암으로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하우스 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곤 몇 개월 뒤, 모친이 돌아가셨는데도 큰아들로서의 상주 노릇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백방으로 모 주방의 소재를 수소문하고, 찾았지만 전화 한 통 하고는 그만이었다. 발인에서 화장까지 전부 초등학교 동창들이 대신했다.
부친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큰아들이 도박에 미쳐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한 채, 그저 다른 일이 바빠서 그러려니 했다. 총무처를 그만 두고 나서, 다른 사업을 하나 해보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로 3가와 영등포시장 뒷골목 게임방에서 뜯은 돈을 다 소진하고, 남산공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대며, 다시 유럽으로 날아갈 궁리를 했다.
여권은 있고, 비자신청과 비행기 표만 있으면, 언제든 한국을 뜰 수 있었다. 스페인왕립 부속음악고등학교 출신이라 시민권은 있으니, 대사관에 가면 비자는 금방 나온다.
헌데, 가서 무얼 하나 싶었다. 왕립고등학교동창들은 대부분 상류층이라 가업과 예술계에 종사하고 있을 터고, 또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학교에 같이 다닐 때도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또 엄연한 귀족들 아닌가.
그래서 생각한 게 프랑스 외인부대였다. 월급 800달러다. 생명수당까지 포함한 액수다. 그 정도면 유럽에서 버틸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후암동 집이 코앞인데도 들러보지 않고, 곧장 스페인대사관으로 향했다. 한남동 주택가에 있으니 걸어서 40분이면 간다. 비행기 삯은 제일 싼 뒤꽁무니 좌석을 예약하면 된다. 여행가는 것도 아니고, 사업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스페인에 도착한 모 주방은 곧장 열차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갔으며, 외인부대 모집 관을 만났다. 백인 대위는 그의 이력서를 보고, 즉시 합격을 통보했다.
그는 공군대위출신이지만, 한국군에서 군 생활을 오래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외인부대를 운영하는 것은 18-19세기 아프리카 식민지 때, 자국 병사보다 외국인으로 군대를 조직해 프랑스령을 다스렸다.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부분 독립을 했지만, 몇 몇 지역은 아직 치안유지가 안 돼 유럽 국가들의 간접적 지배를 받았다.
외인부대는 프랑스 오지에서 6개월 동안 유격훈련과 산악전투, 고공낙하, 그리고 해안에서 상륙훈련은 물론, 수중 폭파와 침투훈련을 받고, 북아프리카 모리타니 내전에 투입됐다.
외인부대는 계급이 없다. 자국에서 어느 지위에 있었다는 경력은 상관없고, 오직 전투원으로만 대접했다. 전투지휘는 프랑스 군사령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만, 외인부대는 리더를 선발해 국지전은 자체적으로 수행하게 돼 있었다.
아프리카 날씨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낮에는 40-50도를 오르내리고,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자칫하면, 감기에 거릴 정도였다. 그리곤 모기를 비롯한 각종 벌레에 물리지 말아야 한다. 모리타니에 도착하기 전 황 열병과 말라리아 예방주사들을 맞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부족 간의 종교내전은 정말 치열했다. 모리타니는 무어 계 흑인과 순수 흑인, 그리고 무어 계 백인이 뒤섞여 있는데, 그 중 60%를 차지하는 이슬람 흑인들이 집권층인 기독교계 프랑스 베르베르 혼혈 백인 계와 헤게머니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다.
상대 종족을 여자건, 아이들이건, 무조건 잡아다가 사내 녀석들은 군인으로 키우고, 여자들은 성노리개로 삼았다.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랐다. 좀 과장해서 눈 깜박하는 사이 총알구멍이 나는 상황이었다.
외인부대의 주 임무는 모리타니 정부군을 지원해 시아 파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슬람국가인 모로코지원을 등에 업은 반군 세력이 수도 누악쇼트를 제외한 전국토를 거점 식으로 장악한 터여서 피아간의 대치전선이 없었다.
외인부대는 겨우 1개 대대 총 800명 가량 됐는데, 1차 교전에서 벌써 20명을 잃었다.
사막지대에 잘못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서 1개 중대가 전멸할 뻔했다. 다급한 지원요청에 헬기를 띄워 겨우 빼내왔지만, 시아 파 반군들의 공격력은 생각보다 막강했다. 더구나 모리타니는 전 국토의 3/4 이 모래사막이라, 익숙지 않은 외인부대는 전투수행에 큰 곤란을 겪기 일쑤였다.
냉전시대 구 소련이 무기를 모로코를 통해 공급하고 있어서 화력이 만만치 않았다.
모 주방은 2차 교전에 선발되었는데, 서사하라를 우회해 대서양 해안가를 점령한 반군과의 전투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각종 물자를 차단 해야하는 터여서 탈환이 시급했던 것이다. 수중침투조로 나선 그와 외인부대원들이 해안방어진지를 뚫기는 했지만 소용없었다.
1개 중대병력으로 반군을 잠시 밀어내기는 했으나, 그들의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퇴를 수중으로 하지 못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반군들이 추격하면서 교전을 벌여 상당수가 희생됐다.
사망자는 8명, 부상자가 23명이었다. 혼자 행군하는 것도 힘든데, 부상자들까지 후송하느라 중대 전원이 버거워했다.
겨우 누악쇼트 외인부대 진지에 귀환했으나, 지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돈도 좋지만 제 명에 못 죽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계약기간 2년 동안은 외인부대 진지를 벗어날 수 없다. 1년에 열흘 주어지는 휴가 외에는 모리타니 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음식도 안 맞는 건 고사하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야간에 반군들이 로켓포나 박격포로 진지를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정부군이 진지 밖을 경계하지만, 소용없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또 모 주방을 비롯한 특수훈련을 받은 10명을 한 조로 해 야간전투에 투입했다. 수도권 외곽까지 파고들어온 반군의 지휘부를 공격하라는 거였다. 헬기로 이동해 자일을 타고 레 펠로 지휘부 건물 꼭대기로 침투하라는 것이었다.
그 건 미친 짓이었다.
헬기소리를 듣고 경계에 들어간 반군은 기관총으로 응사하며, 극력하게 저항했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할 수 없었다.
외인부대의 명령은 일반 자국군의 군령보다 더 강하다. 항명은 곧 총살이다. 너희들은 돈을 받고, 전투하기 위해 선발됐으며, 목숨까지 담보한 이상 불평불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헬기를 타고, 반군 지휘부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건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외곽에서 레펠하는 건 가능했다.
헬기 조종사도 죽기 싫었는지, 반군지휘부 건물 밖에 내려주었고, 귀환은 알아서 하라며, 돌아갔다. 반군지휘부를 반드시 타격하고, 점령하라는 것이다.
그게 어디 쉬운가. 겨우 10 명 인원으로 반군지휘부를 에워싸고 있는 게릴라들 수백 명을 쓸어내라니 말이다.
불가능했지만, 전투지역에 떨어진 이상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는 교전할 수밖에 없었다. 반군은 AK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로켓포 등을 총동원해 외인부대 접근을 완강하게 저지했다. 총알이 빗발치고, 귓전을 세차게 때렸다.
특수요원 10명은 나무와 바위, 건물 뒤에 은폐하고, 엄폐해, 사망자는 없었지만,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프랑스 지휘부에서 받은 작전은 반군지휘부 건물 곳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후퇴 하라는 것이었는데, C4 폭탄을 붙일 장소도 확보하지 못한 채, 2시간 동안 총알 세례만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군 병력도 실탄이 떨어졌는지 잠잠해 졌고, 특수요원 10명은 반군지휘부 건물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은밀히 건물과 나무 사이를 오가며, 가까이 다가갔다 싶으니까, 또다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반군 경계병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다시 은폐와 엄폐물을 찾아 납작하게 엎드려있어야 했다. 하늘은 벌써 여명이 드리우기 시작해 웬만한 근거리는 물체를 식별할 수 있었다. 낭패였다.
1시간여 뒤엔 동이 틀 텐데 정말 난감했다. 무전기로 의사소통을 하던 특수요원들은 가부를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전멸할 것 같아서였다.
심사숙고 끝에 2인 1조로 산개해 1개조를 엄호하는 방식을 택했다. 도시게릴라전에서 흔히 써먹는 전진작전인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호 경계하며 말이다.
외인부대원 10 명도 응사를 시작하며, 조금씩 움직였다. 반군지휘부 건물을 사방에서 접근해가자 게릴라들도 당황한 했는지, 방어선이 엉성해졌다.
저격 조는 건물 외벽에 숨은 반군들을 하나 씩 제거하고, 다른 침투 조는 로켓포와 수류탄으로 건물 내부를 타격했다. 그러나 특수요원들의 접근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동이 튼 것이다. 반군들 시야에 그들이 발각된 때문이었다.
한 순간 노출이 사망과 직결됐다. 특수요원이 하나 둘 쓰러졌다. 남은 건 겨우 6명이었다. 팀장격인 모 주방이 무전병에게 본부의 철수 허가를 요청하라고, 다그쳤다.
작전은 실패했고, 사망자 3명, 부상 1명임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밤 23시에 작전을 개시했는데, 익일 새벽 6시까지 공격을 못하고, 사상자만 발생했다면, 반군지휘부 폭파는 실패라고 인정했는지, 즉시 그 지역을 빠져 나오라고,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곤 헬기를 투입할 장소를 지정해주고 교신은 끝났다.
특수요원들은 헬기와 접선지역까지 이동하는 것도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상자들을 들춰 메고 7-8Km를 30분 안에 구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반군들이 도처에 매복해 있을 것이기에 더 긴장됐다. 아무튼 날이 더 밝아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군들이 건물에서 튀어나와 무차별 난사를 해댔다. 소총과 기관총, 로켓포까지 쏘아대며, 바짝 뒤 쫒았다.
그 때 상공에 헬기 두 대가 나타나 엄호를 시작했다. 특수요원들은 이제 살았구나 싶어 발길을 재촉했다. 한 대는 반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고, 로켓포까지 동원해 최대한 반군의 추격을 저지해주었다.
접선지점에 겨우 당도해 헬기에 오르는 순간 특수요원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반군은 끝까지 소총을 쏘아댔다.
외인부대 캠프에 돌아오자, 모두들 긴장이 풀려 늘어졌다. 밤새 눈 한 번 못 붙이고, 꼬박 귀청을 째는 총소리에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직도 머리가 울 먹 댈 만큼 외상 성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아무 말도 없다. 작전 실패에 대한 추궁도 없고, 수고했다는 치하도 없다. 그 건 너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임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특히, 미군 출신들이 사망자를 많이 냈다. 그들은 전쟁광이다. 월남전에서 겪은 것에 비하면, 여기는 약과라며 같은 팀원들을 닦달한 것이다. 곁에서 동료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는다. 죽는 건, 네 운명일 뿐, 내 탓은 아니라는 투다.
외인부대 병력이 사망자로 줄면, 프랑스는 그 만큼의 숫자를 보충해주곤 작전을 계속 진행했다.
계약만료로 떠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계약연장을 하지 않으면, 계약만료가 다 되가는 부대원이 전투 중에 사망하는 경우다.
프랑스가 외인부대를 내전지역에 파견하는 것은 외교적인 술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국 정규군을 투입하면, 국제사회로부터 과거 식민지를 다시 지배하려 한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월남전도 마찬가지다. 영국지배 령에서 프랑스가 군사력으로 밀어낸 뒤, 내전이 시작됐는데, 얻은 것 없이 국가재정만 파탄 나 게 생겨, 미국에 떠넘겼듯이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국군사력을 파견하면, 군사비가 막대하게 소요되고, 자국국민이 희생되면, 내부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어서, 외인부대를 운영하는 것이다. 돈은 적게 들고, 자국의 희생도 없이, 상대국과 맺은 우호협정을 명목상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동구권 붕괴 이전에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여타 분쟁지역에 미군을 파견하려는 걸 매우 꺼려했는데, 그 빈자리를 프랑스가 떠안은 것이다.
아프리카 내전은 쌍방에 전혀 이득이 없는 소모전인 경우가 많다. 부족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비화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국가를 쇄신해 발전을 꽤 하겠다는 비전도 없다. 문명화되기 이전의 영토 확장과 대량의 사냥감 확보 따위로 활과 창으로 육박전을 치루는 것과 하등 다른 게 없다.
아프리카 난민은 각국의 내전이 불러온 부산물이고, 이유 없는 살육과 국가지배로 말미암은 부정축재가 전부다.
독재자를 축출하기 위해 무장하고, 봉기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다. 자국민들의 기아해결이나 에이즈예방책에 전심전력하는 게 아니라, 서방국가에서 들어오는 무상원조를 빼돌리기는 매일반이다.
그게 내전을 반복하게 만드는 이유이고, 양측의 주축부족들이 서로 상대방을 싹 쓸어 내기 전엔 피 튀기는 인종청소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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