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201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한 ‘천당과 지옥’에 대한 비유를 입담 좋게 소개한 내용을 기고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평생을 타인에 모범적이며 헌신적으로 살아온 착한 사람이 죽은 후에 간다는 천당과 지옥이 너무 궁금하여 매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마침내 살아생전에 지옥과 천당을 방문할 수 있는 초청장을 받았다.’
이승에서 알고 있던 지옥은 예상과는 달리,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린 잔칫상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니 이런 곳이 지옥이라니!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질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까닭인즉, 자신의 팔 길이보다 훨씬 긴 숟가락으로 반드시 숟가락 끝을 잡고 먹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꼴이 된 셈이다. 맛난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을 앞에 두고 혼자서는 먹을 수 없어 영원히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곳 이었다.
이번에는 천당을 방문하였는데 놀랍게도 지옥에서 본 것 같은 잔칫상에 사람들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아니, 천당과 지옥이 똑같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곳 천당 사람들은 서로 마주 앉은 상대방에게 음식을 먹여 주면서 덕담을 즐기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포크의 끝을 잡아 상대방에게 먹여 주면서 맛난 음식을 공유하여 즐기고 있었던것이다.
요약하면 혼자서 獨食(독식)하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인 지옥은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인데 반하여, 협력하고 공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천당에서는 서로 도와가며 차려진 음식을 즐기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메시지였다.
현실에 비유해 보면, 잔칫상을 차릴 수 있는 선진 경제권역 중에 역동적 복지 체제를 도입하고 포용적 사회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은 천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부(富)를 1%의 소수가 국가 경제를 쥐락펴락하니 대다수 국민은 지옥에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의 현실사회는 천당과 지옥의 중간으로 천당의 협력적인 인간군(群)과 지옥의 이기적인 무리가 함께 섞여 살아가고 있다.
개별적인 인간 역시 대체로 복잡한 감성적 모순을 지닌 채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동기와 박애적이고 헌신적인 의무감이 뒤섞여 공존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이기적 본능과 충동적 동기가 없는 개별적 삶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력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수만 년 인류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기적인 본능의 에너지를 다스리면서 대화와 공감과 상생의 지혜로 수렴하며 이를 담아낼 다의적 도덕과 공동체적 규범을 발전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근현대에 이르면서 강제력을 동반한 국가라는 틀 속에서 법치사회의 시민으로 도덕과 규범에 기초하여 본능을 다스리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적 판단과 공동체적 자유를 고즈넉이 지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숨겨진 본능과 이기심이 폭발하는 것도 자주 목격한다. 또한 우리의 내면적 갈등 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교대로 속삭이며 서로 자신이 옳다고 유혹하는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천당은 아니더라도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공간이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각자가 개별적 존재로서 탐욕적이고 이기적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웃과 함께하는 선한 의지가 자신을 인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고 교육과 실천을 통해 생활 속에 습관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함께 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개인의 선한 행위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형성되도록 유도하는 공동체적 관습과 상생적 문화의 정착일 것이다.
선한 행위가 결국, 보상받으며 이웃에 무관심하면 위에 예시한 지옥처럼 자신에게 불리하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다. 반드시 합의된 규정에 따라 처벌받는다는 원칙이 정치, 경제, 사회의 강제력으로 제도화되고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악마와 천사를 가슴 속에 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