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의 비밀 / 백봉기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워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야기지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솔직히 고백하고자 한다.
지난 2009년 연말에 10여 명의 친구들과 송년모임을 가졌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노래방과 가맥집을 거쳐 결국 4차에서 생선탕에 소맥 몇 잔씩을 더하고 11시경 헤어졌다.
내 차로 같이 가야할 친구가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차안에서 시동을 걸어놓고 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연말이라는 핑계로 평소에는 10,000원을 받던 곳인데 15,000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10여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취소하고 다른 단골을 부르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내 머릿속에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아무리 연말이지만 경찰도 사람이니까 단속을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정읍에서 온 친구가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그곳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리운전을 취소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친구들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자랑이라도 하듯
“야, 나는 술 먹고 면허증 땄다. 무서우면 내려라!”
큰소리를 치고 유유히 차를 몰고 나왔다. 3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아니 번쩍번쩍하는 교통신호봉 수십 개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차안은 “어어~ 단속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쥐죽은 듯 적막이 흐르고 “어떻게 하지?” 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뛰다 못해 멈출 것 같았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단속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이 사람 취했다!” 고 소리치는 말과 함께 몇 명의 전경이 달라붙었다. 한 사람은 차키를 뽑고 다른 두 명은 내 팔을 끼고 길 건너편에 있는 닭장차로 끌고 갔다. 닭장차 안에는 두 명의 경찰이 있었다. 한 명은 이파리가 4개, 한 명은 전경인 듯싶었다. 그리고 조금 있었더니 경찰 한 명이 음주측정기를 들고 올라왔다. 면허증을 뺏고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차 앞쪽에 있는 글을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음주측정을 거부하면 업무방해로 곧바로 구속하겠다는 경고문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이 잡혀온 것이 안됐던지 물 한 컵을 주더니 측정기를 내 눈앞에 대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빨간불이 들어올 때까지 불고 숫자가 0.05를 넘으면 음주운전으로 입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숫자 올라가는 것을 직접 확인하라고 측정기를 대어 주었다.
사실 0.1이 나오면 면허취소에 벌금이 수백만 원, 0.05만 나와도 면허정지 100일에 벌금이 50만 원 이상이다. 경찰서와 검찰청에 왔다 갔다 해야 되고 음주운전 전과범이라는 기록이 평생을 따라다녀야 한다.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운전하지 말라고 말리던 친구들, 서울에서 큰아들가족이 왔는데 밖에 나간다고 투덜대던 마누라! 후회막심이었다. 하얀 빨대를 입에 갖다 댈 때는 체념한 상태였다. 될 대로 돼라. 면허가 취소되면 말고 벌금 내라면 내면 된다는 생각.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눈앞에 있는 빨대를 힘껏 불었다. 0.01, 2, 3, 4까지는 빠르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0.04부터는 서서히 올라가더니 어느새 0.046, 7, 8까지 올라갔다. 그때부터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0.05까지 올라가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분명 9자를 보았는데 0.049에 멈추면서 삐~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경찰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을 0.001 차이로 훈방초치 하겠습니다. 하지만 운전은 하지 말고 대리운전으로 가십시오.” 하더니 친절하게 길 건너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것은 운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조상의 은덕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도무지 나 같은 졸필은 이런 때 쓸 수 있는 적절한 낱말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키를 돌려받고 차가 있는 데로 갔다. 지금도 그 친구들은 닭장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믿지 않는다. 자초지종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도 믿지 않는다. “네가 먹은 술이 얼마인데 훈방조치라니, 혹시 무릎을 꿇고 빌다온 것 아냐?”고 묻는 친구도 있고, 내 배후에 경찰서장 쯤 되는 어마어마한 백(back)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기쁜 날, 봉기가 무사히 귀환한 날,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술 한 잔 더해야 한다며 나를 덕진광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또 술을 마셨다. 오늘은 0.001이 덜 나온 비밀을 공개하지 않겠다. 다만 이번에는 대리운전사를 불러 무사히 귀가했다는 사실만 밝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