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안에 오직 에너지의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이다. 연결하면 권력이 있고 단절하면 이득이 있다. 권력과 이득의 갈림길에서 권력을 따르는 것이 다르마의 길이다. 그것은 나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유하는 집단의 권력이 가지는 기세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집단의 치고 나가는 기세에 의지하는 것이 다르마다. 바이든이 후보를 사퇴하여 민주당의 기세를 살려낸 것이 다르마의 길이다. 집단이 무언가를 공유하면 에너지의 효율이 발생한다. 효율을 이용하는 것이 권력이다. 공유의 불씨를 꺼트리지 말아야 한다.
석가의 자등명 법등명과 같다. 무엇에 의지하여 의사결정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의지에 의지하고 다르마에 의지해야 한다. 내가 소속될 집단을 결성하고 선택하는 것이 자등명이고 집단의 공유효율에 의지하는 것이 법등명이다. 집단을 선택하고 집단의 효율성에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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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의지 뿐이다. 자유의지는 내가 소속될 집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로 얻는 것은 만남이다. 만나면 공유하고, 공유하면 격발하고, 격발하면 복제되고, 복제되면 지배한다. 지배하는 힘은 권력이다. 만남은 권력을 낳고 우리는 권력에 의지한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주권이 있고 인권이 있다. 권력을 만드는 것은 만남이다. 인생에 오직 만남 뿐이다. 만나면 공유한다. 권력은 공유의 효율성이다. 우리는 공유에 의지한다. 집단의 공유하는 팀플레이의 기세를 깨지 않는 것이 다르마의 길이다.
구조의 딜레마는 움직이는 것은 방향전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방향전환이다. 방향전환은 에너지를 단절시키고 에너지가 끊어지면 죽는다. 외부의 도움 없이 의사결정 못한다. 에너지는 원본에서 복제본으로 전달된다. 방향전환 하려면 원본에 의지해야 한다.
의사결정은 단절을 낳는다. 독립하면 부모와 단절되고 졸업하면 스승과 단절된다. 여친을 사귀면 친구와 멀어진다. 방향전환은 최소화 되어야 한다. 의사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에 한 번은 반드시 단절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적의 장소와 타이밍이 필요하다.
방향전환은 불가능하지만 팀 안에서는 가능하다. 혼자서는 못하는데 만나서 의지하면 가능하다. 집단 속의 개인은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전달되어 방향전환을 돕는 힘이 권력이다. 개인은 집단에 의지하고 집단은 천하에 의지하는 것이 다르마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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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본질은 변화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의 지배다. 변화는 방향전환이다.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사건이 격발되기 전에 미리 점유하는 것은 만남이다. 만남은 그 자체로 약속이며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다르마다. 다르마를 따르는 삶이 진실하다.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관성력 때문이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관성력은 권력이다. 권력은 의사결정권이다. 나의 의사결정의 주체가 자아다. 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권력이 자유의지다. 권력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자유의지는 침해된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결정론과 같다. 비행기 안에서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자유의지는 자신이 어떤 비행기를 탈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날지는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으나 만난 다음에는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결정한다. 환경을 만나고 직장을 만난다. 만나는 때와 장소는 내가 결정한다. 만난 다음은 돌이킬 수 없다. 제대로 만나야 한다. 만났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실 제대로 만나지 않은 거다. 만남에 따른 보상은 없고 만남의 완성이 있을 뿐이다.
만나면 격발되고 격발되면 낳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의지 뿐이고, 자유의지로 얻는 것은 자기복제 뿐이고, 자기복제로 얻는 것은 자기완성 뿐이다. 악기는 연주자를 만나서 작품을 낳는다. 작품을 낳아서 완성된다. 만나서 낳는 것이 아니라 낳음이 만남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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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나 쾌락이나 사랑은 만남을 학습시키는 유전자의 장치다. 그것은 말을 물가로 데려가는 것이다. 말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만남과, 소통과, 격발과, 낳음과, 권력이다.
만남에서 시작된다. 만나면 통하고, 통하면 격발하고, 격발하면 낳고, 낳으면 권력이 따른다. 작품을 낳으면 저작권이 따르고, 자녀를 낳으면 양육권이 따른다. 인간은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권력을 원한다. 권력은 결과의 보상이 아니라 원인의 힘이다.
인간은 부와 명성과 성공을 원하지만 그것을 결과 측 보상으로 보느냐 원인 측 힘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결과 측의 보상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것이며 그 이유는 허무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원인 측으로 보면 부와, 명성과, 성공은 만남의 확률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윤리 도덕과 합리성은 만남의 장으로 가는 이정표다. 윤리와 도덕을 결과 측으로 보면 바보 짓이다. 도덕은 필요가 없다. 선악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원인 측으로 봐야 의미가 있다.
윤리 도덕과 합리성은 만남의 확률을 높인다. 결과 측의 도덕은 기득권 갑질이고 원인 측의 도덕은 삶의 길잡이다. 평등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만남의 광장을 만든다. 만남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바른 이념이고 만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나쁜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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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상, 모든 철학, 모든 이념, 모든 가치, 모든 도덕이 결국 하나의 바다로 모인다. 그것은 만남에 의한 상호작용 총량증대다. 상호작용 총량이 증대되면 옳은 것이며 상호작용 총량이 감소하면 나쁜 것이다. 범죄와 혼란과 전쟁은 확실히 상호작용을 감소시킨다.
루소와 맹자 – 성선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선을 지향한다.
홉즈와 순자 – 성악설. 교육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므로 악한 상태로 시작한다.
로크와 고자 – 성무선악설. 강체는 방향이 없으므로 선악이 없다.
우주에는 에너지의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 선악이란 것은 없다. 성무선악설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연결은 선이고 단절은 악이다. 인간에게는 성선설이 옳다. 교육은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교육이라는 특수 영역으로 좁혀서 바라보면 성악설이 맞는다.
각자 잣대가 다르다. 자신의 관점에서는 자기 말이 옳으므로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로 보면 성선설이 옳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방향이 있다. 성무선악설은 강체에 해당되며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유체다. 인간사회는 성선설에 의해 작동한다. 우주도 성선설이 맞는다.
강물에 좌우가 없는 것은 성무선악설이고, 물이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성선설이고, 교육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성악설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도 할 수 있고 악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 언어의 상대성이지 사실의 상대성이 아니다.
강체로 보면 상대성이고 유체로 보면 절대성이다. 이는 인간의 관측 문제이지 자연의 사실 문제가 아니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태계는 진화하고, 문명은 진보하고, 인간은 사회화 한다. 인간의 사회화는 선이다.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간다. 권력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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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는 오직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이다. 인생에는 오직 만남과 헤어짐이 있을 뿐이다. 사건은 에너지의 연결로 격발되고 에너지의 단절로 멈춘다.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도 하고 혹은 진보라고도 한다. 혹은 그것으로 이념을 삼기도 하고 혹은 그것으로 도덕을 정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권력이며 곧 자유의지이며 다른 말로는 자기결정권이다. 인생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각별한 것은 결과 측이 아니라 원인 측이라는 점이다. 같은 도덕, 같은 이념이라도 결과 측이면 망하고 원인 측이면 흥한다. 출발점의 평등은 흥하고 도달점의 평등은 망한다.
민주당의 자유는 원인 측의 자유다. 국힘당의 자유는 결과 측의 자유다. 방종이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같은 자유를 다르게 해석한다. 남을 해칠 자유는 없다. 결과 측의 평화는 원시사회와 같다. 부족민의 삶은 평화롭다. 국가가 없으므로 전쟁도 없다. 뭐든 결과 측이면 거짓이다.
석가의 깨달음, 니체의 선악의 저편, 바가바드 기타의 다르마가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으나 에너지의 작동원리를 모르면 오해하게 된다. 강체의 관점을 넘어 유체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무기를 나누어준 다음 만날 자유를 주어야 한다. 방치해놓고 자유라고 선언하는게 보통이다.
범위를 좁혀서 보면 성악설이 옳고 보수가 옳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게 보수다. 진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것이다. 크게 넓혀서 보면 성선설이 옳고 진보가 옳다. 멈추면 보수가 옳고 움직이면 진보가 옳다. 세상을 유체로 보는 깨달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의 딜레마
방향전환이 안 된다는 것이 구조의 딜레마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사건 밖에서는 방향전환이 되는데 사건 안에서는 안 된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닫힌계 안에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방향전환을 할 수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따라 왕, 장군, 장교, 부사관, 사병이 있다. 왕은 병이 될 수 있지만 병은 왕이 될 수 없다. 사병이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 로마의 군인황제, 고려의 무신정치, 삼국지의 동탁, 일본의 전국시대, 5호 16국에 5대 10국의 하극상이 그렇다.
방향전환이 된다면 왕, 장군, 장교, 부사관, 사병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징기스칸은 카불칸의 증손자로 태어날때부터 왕자였다. 배다른 형을 죽이고 노예가 되었다가 금나라로 도망쳐 백부장이 되었다. 다시 몽골로 돌아와 혈통 덕분에 자동으로 칸이 되었다.
노예부족 출신인 징기스칸의 라이벌 자무카는 훨씬 어렵게 칸이 되었고 그나마 오래가지 못했다. 나폴레옹도 하급귀족 출신으로 여러 신분을 경험했다. 왕족 출신 징기스칸이 단번에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것과 달리 나폴레옹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은 사병 출신 히틀러가 총통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넌센스다. 히틀러가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군들에게 맡겼을 때는 잘 되었는데 직접 지휘를 하자 망했다. 장군들이 일제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신분이 다르므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알렉산더와 곽거병은 태어날때부터 왕족이었으므로 사병 신분을 겪어보지 않았다. 무리한 장거리 원정을 시도하다가 일찍 죽은 것이 공통점이다. 인간은 방향을 바꿀 수 없으므로 여러 신분을 겪어봐야 한다. 왕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사병이 되어야 제대로다.
표트르 황제가 그랬다. 신분을 감추고 유럽 여행을 했다. 포병 하사가 되어 대포를 끌고나니는가 하면 조선소에서 일하며 목수 일도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잘 나오는 캐릭터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공주 선덕이 민중들 속에 섞여서 개고생을 한다는 식이다.
왜 군자의 길이 아니면 안 되는가? 왜 천하인이 아니면 안 되는가? 왜 역사와, 진리와, 문명과, 진보의 편에 서는가? 제왕학과 같다. 왕의 마음을 배워둬야 한다. 인간은 원래 방향전환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다. 루틴을 지키려고 한다.
진보에서 보수로 미끄러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보수에서 진보로 올라서기는 불가능하다. 진보와 보수 두가지 카드를 지니고 있다가 차례로 카드를 꺾어야 한다. 장기전은 진보로 하고, 단기전은 보수로 가다가 적절히 단기전을 버린다. 장기전은 버릴 수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동시 착수다. 왕노릇은 마음 속에 설계만 하고, 장군 노릇은 기초만 다지고, 장교 노릇은 1층만 올리고, 부사관 노릇은 3층까지 완성하고 사병 노릇은 인테리어까지 마감한다. 낮은 신분에서 얻은 경험으로 높은 신분을 완성해야 한다.
사병을 겪어보지 못한 부사관은 망한다. 장군을 겪어보지 못한 왕도 망한다. 부사관이 되어 사병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망한다. 왕이 되었는데 장군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망한다. 로마의 군인황제 시대와 고려의 무신정치 시대가 혼란했던 이유다.
김대중이 김종필과 손잡은 것은 왕의 외교다. 노무현은 왕이 아니므로 대연정은 무리였다. 한동훈이 좌파와 손잡고 김대중 흉내를 내면 죽는다. 왕이 졸병 흉내를 내는 셈이다. 적을 포용하는 것은 왕만 할 수 있는 결정이다. 장군이 적군과 내통하면 죽는다.
김어준처럼 졸라와 씨바를 구사하는 것은 부사관 캐릭터다. 김어준이 계속 음모론으로 밀어붙이면 평론계의 왕이 될 수 없다. 정봉주 하는 짓이나 이명박의 꼼수는 부사관이 보급품 빼돌리는 얌체짓이다. 부사관이 고지식해서 원리원칙을 따지면 곤란하다.
병사들이 소대장 길들이기를 하는 이유다. 고지식한 소대장이 내무반 분위기를 망친다. 윤석열은 고시 아홉번 떨어지고 아버지한테 뒈지게 맞아서 왕의 마음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준석 쳐내고, 유승민 쳐내고, 한동훈과 다투는 것이 왕의 마음이 없어서다.
영조는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된다. 사도세자를 카리스마로 찍어누르지 못하고 앙앙불락한게 사실은 자기 스트레스를 떠넘긴 거다. 소론이 영조를 인정하지 않고 게장을 안먹겠다고 덤비니 사도세자가 유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