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코시는 도야마현 도야마시에 주 공장을 둔 기업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회사 기록에 의하더라도 당시 조선 전역에서 최소 1,089명이라는 규모가 여자 근로정신대로 동원됐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규모가 300여 명 정도이니, 근로정신대 동원의 최대 주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제기된 소송은 2011년을 끝으로 모두 끝나고 피해자자와 유족들은 서울과 광주에서 각각 소송을 제기했는데, 일부는 대법원에 계류 중입니다. 김성주 할머니의 동생 김정주 할머니, 광주에 계시는 오경애 할머니, 나주에 거주하시는 주금용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중 원고 안희수, 전옥남, 최희순, 김옥순 할머니가 올해 차례로 별세하셨습니다.
지난 18일 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해 온 일본 지원단체 ‘후지코시 강제연행 강제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주최로 도야마에서 3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올해 별세하신 네 분을 기억하며 추도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추도사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이 문제를 대하고 있는지 느껴집니다. 광주 시민모임 소식과 윤석열 정권 내 한국 상황도 언급돼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호쿠리쿠연락회 회원들을 보면 머리가 숙여집니다.
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님과 이노우에 준 선생님은 그동안 몇 번 광주에 오셨는데, 코로나로 3년 남짓 교류가 끊어졌습니다. 내년에 다시 소통을 이어가야겠습니다.
소식을 공유하기 위해 몇 자료를 올립니다.
후지코시(不二越) 강제 연행 희생자 추도식
(2022년 12월 18일)
<추도사>
1992년 후지코시 강제 연행 소송이 시작된 지 31년 만입니다. 200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차 소송과 한국 소송 원고 32명 중 올해 새로 4명의 원고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할머니의 분노와 억울함을 우리 자신이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2015년 전쟁법에 이어 안보체제를 대전환하는 역사적 분기점에 있습니다. 아시아를 향해 침략을 공공연히 선언한 것입니다. 원고들이 인생을 걸어 일본의 침략전쟁을 탄핵하고 전쟁 책임을 추궁해 온 것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돌아가신 분들의 모습을 되새깁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내려 쌓이는 와중에도 후지코시 정문 앞에 계속 선 원고들, 법원 구내에 앉아 부당 판결에 분노하며 눈물로 규탄했습니다.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을 선언하고 일본대사관 앞이나 대법원 앞에 서서 한국에서도 투쟁을 계속 했습니다. 원고들의 한국 소송 승소는 촛불혁명에 나타난 민중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입니다. 미쓰비시 국내자산 현금화를 막고 인권을 무시하는 윤석열 정권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 책임과 역사날조를 인정할 수 없는 한국 여론이 있습니다.
동시에 이태원 사고에 대해서도 추모만 강요하고 책임 소재를 밝히지 않는 윤 정권의 자세에 분노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책임자가 처벌받는 것이 진짜 추도라고 매주 토요일 10만이 넘는 시민이 영하 10도의 서울에서 촛불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정권연명을 위해 안보정책의 대전환을 한 기시다 정권을 발밑에서 무너뜨리는 끈질긴 투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강제연행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의 실현은 바로 일본의 미래를 묻는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투쟁 중반에 돌아가신 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후지코시 강제연행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실현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며 추모사로 삼겠습니다.
2022년 12월 18일
후지코시 강제 연행·강제 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추도식에 즈음하여
올해 원고 4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사과 한마디 받지 않은 채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 억울함을 헤아려보면 할 말도 없습니다.
징용공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바꿔놓고 강제 연행을 부인한 일본 정부입니다. 이제 적 기지 공격을 향해 반격 능력 보유로 역사적 대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적을 상정하여 공포를 부추기고 아시아 침략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사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단언했고, 한국의 윤 정권은 일본의 대변자가 되고 있습니다. 피해자도 한국 민중도 그 분노는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인 우리는 원고의 억울함과 분노를 우리 것으로 침략전쟁 준비를 절대 저지할 것입니다. 패배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31년 전인 1992년 9월 강제연행 피해자들이 흰색 민족의상을 입고 후지코시 구내에 농성했습니다. 소녀들을 속이고 강제 연행해 인생을 파괴한 분노를 가슴에 품고 원한의 후지코시 구내로 왔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이 주저앉은 사태에 놀란 것은 기업 이상으로 지원자들이었습니다. 전시하 강제연행으로 지금도 실종이 많아 유골마저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 고뇌의 인생을 거쳐 후지코시 구내에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 마음을 지원자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시 파업으로 고문당하고 장애를 입은 김경석 원고단장은 식민지 지배의 입을 닦는 일본 사회의 기만을 규탄하기 위해 목숨을 건 각오로 뛰어든 것입니다.
규탄받고 있는 것은 한 기업과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였습니다. 일본 민중과 양심적인 사람들도 전후 식민지배와는 싸우지 않았느냐며 불신과 절망을 떨쳐내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탄핵한 것입니다. 조선 특수, 베트남 특수, 고도 경제성장의 환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대로라면 부패한 일본은 '다시 아시아를 향해 침략전쟁을 벌인다'고 외쳤습니다.
호응한 몇 명의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피해자가 적국인 일본 도야마로 쳐들어왔다"고 전쟁의 현실을 경험한 전직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사지를 뚫고 전후 민주화 투쟁과 레드 퍼지, 탄압과 좌절의 세대에는 징용공 투쟁을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지코시 소송 '지원자' 속에 '큰 의식 단절'이 깊어졌습니다. 그들이 저를 재촉하여 원고단을 만나게 하고, 연락회를 구성하지 않자 원고단은 일본 지원자들을 규탄하고 귀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락회」의 결성이 실현된 것입니다.
호쿠리쿠 각 현의 「재일」은, 이민법·지문 날인·국적 조항 철폐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참정권 소송의 원고 이진철 씨가 '연락회'의 공동대표입니다. 「재일」의 존재와 투쟁이, 연락회를 식민지 지배와 싸울 수 있는 「연락회」로 만들었습니다.
연락회'는 국적 조항을 돌파하는 조직으로 만들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전후 혁신세력은 '일본인' 조직이 되어 '재일교포'를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국내 식민지는 '류큐 아이누'에서 시작되어 국외 식민지로서 조선·대만을 획득하기 위해 청일·러일 전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1996년, 호쿠리쿠 3현 「재일」을 대표로 한 「식민지 지배·강제 연행·전후를 생각하는 연락회」를 결성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의 담당자인 일본 민중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배외주의를 스스로 극복하는 징용공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근대 일본 150년을 뛰어넘는 시작과 꿈을 그렸습니다. 그 길은 다난했고 지금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추도식을 통해 우리는 투쟁의 중반에 가신 여러분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그 생각을 이어갑니다. 일본이 공공연히 아시아 침략을 선언한 지금, 후지코시 투쟁도 새로운 결의를 다집니다.
전후의 오랜 기만으로 가득 찬 시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식민지 지배는 과거라는 '귀신의 가죽'을 스스로 벗어 던진 것입니다. 원고단과 같은 입장을 맹세하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시다.
150년에 이르는 부끄러운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타파하는 시대입니다.
안희수씨·전옥남씨·최희순씨·김옥순씨 앞에 맹세하면서 추모사로 대신합니다.
무라야마 카즈히로(村山和弘)
최희순 씨
김옥순 씨
전옥남 씨
안희수 씨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새로운 생활에 이제 익숙해졌나요? 원망스럽겠지만 일본 도야마에 대한 추억, 또 서울과 목포 등 괴로운, 그러나 억울함에 대한 아쉬움에 지금도 가슴과 마음이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이 움츠린 뇌리는 여러분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달라붙어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꿈으로서, 강한 추억의 단편으로서, 때때로 확 눈을 뜨게 해줍니다.
일본에서, 또 서울에서 만났을 때의 여러분의 상냥하고, 그러나 통렬하고 애틋한, 수많은 추억들은 깨어날 수 없는 꿈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다마나미 씨의 더듬거리는 일본어에 이끌려 무릎을 꿇은 것은 몇 번 있었습니까, 그 온기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멀리 일본에 오면서 도야마 지방재판소, 또 가나자와 고등법원에서 선고된 일본의 냉혹한, 그리고 책임감이 결여된 법리의 잔혹함은 견딜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해 기업 후지코시에 대한 원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납니다, 재판이 한국으로 넘어갔을 때 맛본 그 멋진 감격, 기운 넘친 모습은 잊을 수 없습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고교생 150여 명이 법정에 나와 열심히 들어줄 때의 감동, 또 서울 법정에서도 법관 스스로 판결문에서 날카롭게 후지코시의 불법 비리를 파헤치고, 심지어 피고는 사람의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자, 우리가 존재하는 한국, 그리고 일본, 이 한일 동아시아의 정치적 정세는 우리의 길고 애틋한 바람조차 잃을수 있는 큰 정치체제의 변화로 인해, 밝은 조짐을 보이던 징용공 문제의 해결조차 멸시될 수 있는 위기적이고 정체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올해 들어 힘차게 다시 세 번 전진을 시작한 한국의 서울과 광주를 선두로 하는 시민 청년 노동자들, 그리고 농민들이 결집한 집회와 시위에서 과거의 촛불혁명과 촛불혁명 못지않은 힘과 강인함을 느끼고, 과거 일부라 해도 그 격동 속에 몸담았던 것으로서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년이야말로 한국·서울 다시 광주를 방문하여 여러분의 묘소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함께 하지 못한 데 대한 용서와 함께 건재하신 분들을 만나 가능한 미래 발굴에 힘쓰고자 합니다.
이상 과거의 생각을 말할 뿐이 되어 버렸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웠습니다。
이노우에 준(井上淳)
<12.18 추도회 소식을 전하고 있는 호쿠리쿠연락회 블로그>
https://fujisosho.exblog.jp/
원고 이자순 할머니(인천 거주) 영상 인터뷰
https://drive.google.com/file/d/1kQxT85oPi6fc1xl7lzSCvXeF48Ov9HiF/view?usp=share_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