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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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파타루스(희망대로 주는 나무)
홀연히 날아온 씨앗 하나가 내 안에 뿌리내린다,
나를 목표점으로하여 날아온 것은 아니다, 내가 그 씨앗을 얻고자 한 것도 아니다.
심을 토양을 마련해 놓은 것은 더구나 아니다, 척박한 땅인지 자양분이 섞인 흙인지도
가늠 할 수 없는 그런 곳에 슬며시 안착하여 비바람에 휩쓸리다 그냥 묻혀 이태된
것뿐이다.
이름하여 칼파타루스(희망대로 주는 나무)라 부르고 싶다, 작은소망이거나 큰 원이거나
이루어진다는 것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좋다, 서민은 서민의 애환이 서려 있어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층층만층 삶의 깊이를 파면서 행복의 조건이 무언가 고민한다.
남들이 볼때 설령 그것이 하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들에게는 터 없는 높은 희망이며
바램 일것이다.
한여름 목마름에 애간장 녹이듯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무논 바닥처럼 애가탄다.
땡양달에 소낙비 한소끔 느닷없이 퍼붓지 않으면 혀를 빼고 축 늘어질 수밖에 없는 지경
이라도 자신을 위하여 끊임없이 욕심내는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소망대로 주는 칼라타루스는 어디서 왔는가,앞으로 어디로 갈것인가,어떤 모체의 씨앗인가,
과연 움틔우기에는 적당한 토양인가, 나도 씨앗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떠돌다가 왔는지 내 안에 생명을 안전하게 흡착시킬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다,
다만 생명을 부여받고 싶어하는 갈망만은 누구에게도 사양 못한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 우연히 정착된다면 그 생명의 자리는 그만의 영역을 확보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리는 필연이며 무수한 종족을 번식시킬것이다.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생각 물질에는 다 사랑이
충만하다, 무작정 퍼주는 기쁨과 무조건 받는 얻음의 흡족도 사랑에서 시작 된다, 수평의
관게만이 평행선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의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남을 우리는 경험
하고 있지않은가,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은 위대한 행위다,내 속에 무심하게 터 잡은
씨앗도 행운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점차 넓혀 나간다 해도 한곳에 뿌리내렸다고 하여
그곳에 영원히 착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5대 영양소가 골고루 공급되어야 하며 따라서
인연으로 연결되어지는 어떤 시발점이 첫째 조건이다,인체의 신비만큼이나 식물도 신기
하기는 마찬가지다. 땅 심을 맡은 식물의 허기채운 모습에서 큰 숨 돌리는 심호흡을 본다,
분명한것은 식물도 나도 똑같은 주인이라는 사실과 현실은 결국 사랑과 사랑의 타협점이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책길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모양좋게 자라고 있다. 누가가지 치기를 한 것도
아닌데 겉가지가 적당하게 균형을 잡아 제법그럴사하다,인간 모습도 천차 만별이듯 식물
또한 인간과 다를 게 없다. 나무든 사람이든 관심가지고 잘 키운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먹이는 정성이다.
잘 생긴 사람은 잘생기지 않으면 이 세상 살아가기 힘들고,돈이 많은 사람은 돈없이는
세상 살기 힘들어 돈이 많다고 한다, 전부 자기 변명처럼 들리지만 적극적인 운명설에
입각 하여 어쩌면 현명한 괴변인지도 모른다. 내가 못생겨도 이 세상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을 이미 부여받았기에 어깨 움츠릴 일없다.내 속에 자라고 있는 나무뿌리가 조금씩 상처를
입어가며 영역을 넓히는 것도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단련이며 굵게 살기 위한 담금
질이다. 누가 부여한 생명일까,홀씨 하나가 윤희의 끝자락에서 내게 뿌리내렸다.
나는 예전부터 나무로 다시 태어났으면 하고 소원한 바 있다. 나더러 삶에 대단한 고민이
있는 줄 알고 위로하려 드는 이도 있다.하지만 의연히 서잇는 위풍당당한 나무를 보면
작은 위로가 된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 나가다가 힘들면 땅위로도 숨구멍을 낸다. 갈증이 심하여 하강
직선으로 물길 찾다가도 서서히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물 없이도 살아 남을 수 있는
힘을 단련 시키다. 뿌리에 상처 딱지처럼 세월에 잔지러진 흔적도 간혹 남는다.
어떠랴, 나무든 인간이든 살아 남고자 하면 그 정도 인내를 감수해야 하는것을, 소원대로
주는 나무 한 그루씩 무이자로 분양 받자,상처 없는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칼파타루스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얻고 비워야 하는가를 분명 알 것이다, 유전생명공학이 최고조로 달리고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희망하는 최대의 가치 기준도 바로미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대한 희망도 조각배의 키와 노를 무시하면 어설프게 만들어 띄운 종이배 꼴이된다.
작은 솔 씨 하나가 사찰의 대웅전 기둥이 되어 수 백년을 건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도 답이 나온다.
어디를 어떻게 자리잡는냐에 따라 일년생이냐, 아니면 몇 백년을 뿌리깊은 나무로
살아 있느냐가 결정된다. 작은 씨 하나에도 위대한 순간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희망대로 주는 나무여, 육도윤희를 돌고 돈다 해도 그대 속에서 들숨과 날숨으로
바삐 뛰는 생명이다가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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