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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보고 배운 학문의 길- 최재석 선생님과의 만남
이창기/ 사회학과
어느 철학자는 인생은 만남이라고 설파했다. 사람의 한살이는 수없이 많은 만남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 수많은 만남 중에서도 시대와의 만남, 사상과의 만남, 인물과의 만남이 인생을 엮어 가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특정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가 제공하는 사회적 과제에 대응하고, 특정한 사상과 접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고, 특정한 인물과 교유하면서 삶의 질과 내용을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호걸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필부에게도 이러한 만남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거창하게 시대와 사상까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누구와 만나서 어떤 관계를 교환하느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가 살아오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삶의 교훈을 얻고 어려운 고비마다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최재석 선생님과의 만남을 가장 첫머리에 들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2016년에 만 90세로 타계하실 때까지 가족사회학, 농촌사회학, 고대한일관계사 등의 분야에서 논문 369편과 저서 26권의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긴 사회학자이시다. 선생님은 나에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경제적 지원과 함께 격려와 채찍을 아끼지 않으셨다. 항상 가까이에 두고서 학문하는 자세와 방법을 몸으로 가르치셨다. 선생님의 학문적 경지에 비하면 나는 선생님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할 처지이지만, 그래도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선생님의 뒤를 따르고자 안간힘을 쏟았던 것은 선생님께서 베풀어 주신 가르침의 그늘이 그만큼 짙고 길기 때문이라 믿고 있다.
첫 만남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69년 대학 입학 면접 고사장에서였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복을 입은 채 잔뜩 긴장해서 면접고사장에 들어선 나에게 선생님은 대뜸 ‘사회학과는 취직이 잘 안 되는데 왜 사회학과를 지원했느냐’고 물으셨다. 간단한 상식이나 테스트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대학교수가 되어 계속 학문을 하겠다는 나름의 뜻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더라도 계속 공부를 하겠다고 주저 없이 답변을 드렸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그날의 모든 면접생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셨고, 학생들도 모두 한결같이 취직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답변을 드렸다고 한다. 선생님의 이 질문은 면접 때 그냥 한 번 던져보는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선생님의 강한 집념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점차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게으르거나 과제가 너무 많다고 불평이라도 하는 날이면 선생님께서는 ‘입학할 때 공부만 하겠다고 약속 했잖아!’ 하고 우리를 압박하셨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선생님의 말씀에 항변할 수 없었다. 긴장 속에서 철없이 한 약속이 대학 4년 내내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날의 이 짧은 대화가 막연하게 가슴에 품고 있던 장래 진로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기정사실화하고 다시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달포나 지났을까? 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일요일 날, 선생님께서는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일요일은 물론이고 설과 추석 명절날에도 연구실을 지키기로 유명했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께서는 질문을 쏟아부었다.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느냐, 왜 사회학과를 지망했느냐, 사회학자 중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다, 학문의 길은 배고프고 고달픈 가시밭길인데 그래도 학문을 계속하겠느냐 등등 심문과도 같은 질문이 오전 내내 이어졌다. 아직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등골에 땀이 고일 정도의 고역이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이 날의 면담은 학문의 길을 거스를 수 없는 나의 길로 각인하게 만들었다.
원고 정리를 통한 실습
첫 개별 면담이 있은 후 나는 자주 선생님에게 불려가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 드리게 되었다. 주로 원고 정리와 자료 심부름이었다.
선생님은 논문 초고를 시험용 8절지 갱지에 볼펜으로 작성하셨다. 때로는 광고 전단 뒷면이나 편지봉투를 뜯어서 그 이면에 메모한 것들도 있었다. 중간에 첨가할 내용이 있을 때는 가위질을 해서 풀로 덧붙이기도 하였다. 위치와 순서를 찾아가는데 혼동이 없도록 번호나 별표를 붙여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흡사 누더기를 꿰어맞추는 듯했다. 게다가 써야 할 내용은 많고 성품은 급해서 글씨는 쉽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난필이었다. 이러한 논문의 초고를 200자 원고지에 정서하는 일이 나에게 부여된 중요한 임무였다. 처음에는 몹시 힘들고 혼란스러웠지만 한 번 두 번 거듭하면서 요령이 생겼다. 필체의 획도 점차 눈에 익기 시작했다. 일이 반복되면서 다른 학생들이 판독할 수 없는 원고도 나는 쉽게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학자들보다 엄청나게 많이 발표하시는 그 많은 원고가 이 시기에는 거의 내 손을 거쳐서 정리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원고 정서 작업은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고를 정서하는 작업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원고를 정서하기 위해서는 원고 전편을 정독하여야 하고 전후 문맥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누구보다 먼저 논문을 읽는 첫 번째 독자가 되는 것이다. 논문의 구성이며 논리의 전개 과정, 자료의 처리 방법 등에 대해서 충실한 학습의 기회가 된다. 문장력이 매우 약했던 내가 논문작성의 능력을 제대로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원고 정서 작업이 큰 힘이 되었다. 가장 값진 수련의 과정이었다.
선생님께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심부름해야 할 일들도 적지 않았다. 다른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계시는 선생님들을 만나 자료를 빌려오거나 원고를 전해드리는 심부름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선생님을 도우면서 배우는 기회가 늘어나자 나는 아예 선생님의 연구실 한쪽에 책상을 마련하고 들어앉게 되었다. 왼 종일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는 개인 조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의 첫 선물
선생님의 원고를 정서하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원고 정서와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주문을 하셨다. 대학 2학년이 되는 1970년 1학기 초로 기억한다. 그날 받아온 원고 초고도 난필에 복잡하기는 종래의 초고와 마찬가지였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이 빠져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서론과 본론을 읽고 결론을 직접 써서 정서해 오라고 명하셨다. 그동안 몇 편의 원고를 정서하였다고는 하지만 이제 갓 2학년이 되는데 선생님의 논문에 결론을 써오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극구 사양하였지만,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수정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써보라 강권하셨다. 아마도 족히 두 주일은 넘게 고심해서 결론 부분을 써서 제출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출판된 논문의 별쇄본을 받아 보았을 때 그 논문의 결론 부분에 내가 쓴 문장은 단 한 줄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논문작성의 능력을 테스트할 겸 훈련을 시키고자 시도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선생님께서는 새로이 인쇄된 『韓國家族硏究』의 재쇄본을 선물로 주셨다. 1966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 책은 이때 매진이 되어서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70년 5월에 초판의 지형을 활용해서 다시 인쇄하여 간행하였는데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증정한 세 권 중에 한 권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책 옆머리에 <贈呈 民衆書館>이란 증정인이 찍힌 이 책 첫 장에 <李昌基君/著者>라고 직접 서명을 해서 주셨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책을 저자로부터 증정을 받았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책상 앞 제일 가운데 자리에 꽂아두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설렘을 되새기곤 하였다.
그런데 이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변고가 생겼다.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내 친구를 가장한 도둑이 들어 다른 몇 권의 책과 함께 이 책을 훔쳐 간 것이었다. 책 한 권 사기도 어려웠던 당시의 내 형편에 여러 권의 책을 도난당한 것이 여간 마음 상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특히 선생님께서 직접 서명해서 선물로 주셨던 『韓國家族硏究』를 도난당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기말고사가 진행 중이었음에도 나는 이 책을 찾아 나섰다. 시중 서점에서는 이 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초판본은 이미 구할 수 없었고, 재쇄본은 아직 시중에 배포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시중 어느 서점에 이 책이 있다면 그것은 분실된 내 책임이 분명할 것이란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첫날 청계천 헌책방과 안국동 고서점을 다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아 나섰지만 역시 허탈한 가슴을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세 번째 찾아 나선 길에 청계천 어느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서가에서 책을 뽑아 들었다. 책 옆머리에 <贈呈 民衆書館>이란 증정인이 선명했다. 첫 장을 펼쳤다. 선생님께서 직접 써 주셨던 <李昌基君> <著者>란 서명은 예리한 면도칼에 긁혀 지워져 있었다. 내 책이 분명하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대학생 교복을 입은 어느 학생이 가져와서 구입했다고 하였다. 그 학생에게 지불했다는 돈을 내가 대신 지불하고 책을 되찾았다. 이때의 날아갈 듯한 기분을 나는 지금까지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서려 있는 이 책은 지금도 선생님의 서명이 긁힌 채 내 서가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첫 현지조사 참여 ― 경산군 남천면 금곡동의 수리집단 조사
선생님의 논문 초고를 원고지에 정서하는 일을 주로 돕던 내가 현지 조사에 따라나서게 된 것은 대학 3학년이던 1971년 7월 초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자 선생님께서는 경산에 있는 저수지의 수리집단을 조사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시고 나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본가가 대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한 원고 정서를 넘어서 현지 조사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 조사 내용, 예상 논문 목차, 그리고 수리집단에 관한 관련 자료를 한 보따리 주시면서 일주일 이내에 모두 읽고 머릿속에 정리해 두라고 하셨다. 자료가 많지는 않았지만, 현지 조사의 경험이 전혀 없는 대학 3학년의 능력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자료를 읽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지 조사가 거듭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조사를 떠나기 전에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몽땅 전해주시고는 현지에서 조사할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도록 예비 학습을 시켰다. 선생님의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와 정보를 내 머릿속으로 옮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선생님께서 주시는 자료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정해진 기간 내에 읽기조차 벅찰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사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이보다 더 능률적인 방법은 없을 듯하다.
조사대상 지역은 경산군 남천면 금곡동이었다. 경산군은 전국 시군 중에서 저수지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는데, 금곡리에는 두 개의 저수지가 있었다. 각 저수지에는 물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몽리민의 조직이 구성되어 있고, 물을 분배하고 공동으로 이용하는 규칙과 질서가 매우 엄격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현장 조사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마을 유지들과 각 수리집단의 역원들을 면담하고 그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때로는 산골짜기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비탈진 밭고랑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둘째 날 아침. 조사 나갈 준비를 하는 나에게 선생님께서는 오늘 조사는 혼자 다녀오라고 하셨다. 몸이 불편하여 현지에는 못 가겠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현지 조사에 따라나선 나를 보고 혼자 조사를 다녀오라니. 아! 이 일을 어쩌나! 눈앞이 아득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명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뒷날 생각해 보니 그날 선생님께서 몸이 불편하단 말씀은 사실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짐짓 칭병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어쨌든 그날 나는 혼자서 마을을 헤매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떠나기 전에 숙지해 둔 내용과 어제 선생님께서 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며 두서없이 하루 일과를 마쳤다. 혼자서 질문하고, 이야기 듣고, 메모하는 일이 꽤 힘이 들었지만 처음의 두려움도 점차 가셨다. 메모가 쌓이면서 조사 내용도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선생님께서 떠나기 전에 왜 자료를 모두 읽고 머릿속에 정리해 두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갔다.
망각도는 시간에 비례한다.
조사를 마치고 경산을 떠나는 시각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망각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경구를 상기시키면서 나에게 두 가지를 지시하셨다.
첫째는 대구에 있는 집에 들러서 일주일만 쉬고 상경하라는 것이다. 조사 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자료정리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겨울방학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중간에 한 번도 집에 들리지 못했다. 부모님과 동생들도 보고 싶고 만나야 할 친구도 많은데, 한 학기 만에 처음 귀가하는 제자를 일주일만 쉬고 상경하라니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선생님의 지시니 따를 수밖에.
선생님의 두 번째 지시는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상경 후 두 주일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자료를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리 학습한 예상 목차에 맞추어 논문의 틀을 완전히 갖춘 보고서를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그동안 선생님의 원고를 정서하면서 꽤 여러 편의 논문을 읽어보기는 하였지만 아직 한 번도 논문을 써보지 않은 대학 3학년에게 선생님의 이 지시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일주일을 채우지도 못하고 서둘러 상경하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왔다고 보고서 작성 작업이 제대로 진척될 리가 없었다. 약속된 두 주일은 걱정만 하다가 후딱 지나가고 말았다. 선생님의 재촉과 질책이 빗발쳤다. 만날 때마다 ‘보고서 다 되었냐?’ ‘뭐 하느라 그렇게 꾸물대느냐!’ “망각도는 시간에 비례한다고 했잖아!” 하며 채근하셨다. 선생님을 뵙기가 무서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마도 한 달도 훨씬 더 넘어서야 보고서를 완성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습작이지만 내가 논문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작성한 보고서는 선생님의 손질을 거쳐서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인쇄된 논문에 내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 상당 부분 살아남았다. 일 년 전 결론 부분만 썼던 글이 대부분 사라지고 한 줄만 달랑 살아남았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지 조사와 보고서 작성의 훈련은 1970년대 초반의 농촌 조사와 1970년대 후반의 제주도 가족 조사로 이어졌다. 조사 때마다 “망각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경구는 늘 나를 긴장시켰다.
저명 종족마을 양동 조사 수행
1971년 여름방학 때 경산에서 수리집단을 조사한 후부터는 방학 때마다 선생님의 현지 조사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방학에는 경주 인근의 유명한 양동마을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번 조사에는 단일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는 복합조사였다. 반상관계, 지주소작관계, 권력구조, 농촌계층 등이 조사의 주요 내용들이었다. 조사의 내용이 복잡한 데다가 양동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반촌이라 더욱 조심스럽고 힘이 들었다. 게다가 현지 마을에는 숙박시설은 고사하고 식사할 수 있는 식당도 없었다. 2~3㎞ 떨어진 안강읍에 숙박을 정하고 출퇴근했다. 점심 식사는 빵과 우유로 때웠다.
양동마을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여강이씨와 월성손씨가 세거하는 유명한 반촌으로 반상 차별의식이 매우 강하고, 두 성씨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매우 심했다. 이런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자기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이고 일시적인 면접만으로는 사회조사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종손을 비롯한 두 문중의 주요 지도자들과 이장을 비롯한 마을의 공식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야 하고, 신분이나 계층별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청취해야 한다.
그런데 지나간 여름의 경산 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동에서도 선생님께서는 3일만 같이 조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남은 나머지 조사는 나 혼자서 마무리 해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고되게 훈련 시키겠다는 의도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걱정이 안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름에 혼자서 조사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일단 부딪쳐 보기로 하였다. 혼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상민 출신의 개발위원도 만나고, 정자의 고직이 부부도 만났다. 양반 출신의 한 인물에게서는 스스로 밝히기 어려운 양반가의 부끄러운 얘기들까지 들을 수 있었다. 외지 출신의 전직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느 선생님하고는 밤늦게까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양반을 비판하는 얘기를 듣다가 막차를 놓치고 한밤중에 형산강의 칼바람을 맞으며 먼 길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혼자서 해내기에는 벅찬 일이기는 하였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현지 조사는 긴 시간에 걸친 참여관찰과 비공식적인 접촉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1971년의 경산과 양동 조사 이후 선생님께서는 경북뿐만 아니라 경기도 여주, 강원도 원성, 충남 청양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로 현지 조사의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갔다. 그때마다 나도 선생님을 수행해서 현장을 돌았고, 때로는 나 혼자서 조사를 수행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이렇게 축적된 현장 조사의 경험은 내가 오늘날까지 농촌 주민들의 마을생활과 문중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지속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매우 부끄러운 작품이지만 졸저 『영해지역의 반촌과 어촌』(경인문화사, 2015), 『한국종족집단연구』(경인문화사, 2023)는 바로 이러한 선생님의 가르침과 현장 학습의 흔적이다.
제주도 조사연구
1975년부터 선생님께서는 제주도의 가족과 친족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셨다. 1975년 5월 10일부터 6월 7일까지 29일간 진행한 제주도 친족 연구의 제1차 현지 조사에 나는 직장에 근무하고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1975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22일까지 40일간 진행된 2차 조사부터는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2차 조사 이후 나는 여러 차례 제주도를 왕래하며 가족유형, 상속제도, 혼인의례, 촌락내혼과 친족조직, 양자제도, 이혼과 재혼, 첩제도, 사후혼, 조상제사, 장례와 친족조직 등 제주도 가족제도의 전반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조사 내용들은 선생님의 저서 『濟州島의 親族組織』(일지사, 1979)에 수록되었다.
선생님의 제주도 친족 연구에 현지 조사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한국 문화가 동질적일 것으로 믿고 경상도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 가족을 이해하고 있던 나에게 한반도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매우 상이한 제주도 가족의 모습은 경이로움과 동시에 충격이었다. 제주도의 동쪽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에서 추운 겨울 한 철을 보내면서 이국적인 제주도의 풍광보다도 신비로운 제주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때의 충격과 학문적 호기심이 오랫동안 나를 제주도 연구에 천착하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1980년부터 3년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근무하게 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고, 제주대학을 떠난 이후에도 제주도 연구를 계속하여 『濟州島의 人口와 家族』(영남대출판부, 1999)을 펴냈다. 제주문화와 제주사람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제주학회의 회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단계적이고 치밀한 도제식 훈련
선생님께서는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한없이 깊고 넓지만, 학문의 영역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셨다. 현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생님의 제자 훈련 방법은 매우 치밀한 계획 아래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자를 선택할 때 먼저 원고 정리를 시켜서 학문적 기초소양을 파악하고, 현지조사를 떠나기 전에는 관련 자료를 충분히 숙지토록 하는 확실한 예비학습을 시키고, 현지에서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 주민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며, 조사를 마친 후에는 망각도가 작동하기 이전에 보고서 완성해서 제출하도록 독려한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해 마지않으면서도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 나 또한 선생님의 일을 거들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선생님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은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문의 길을 선택하고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서 나를 다잡아 주셨다. 따뜻한 격려와 함께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격려와 지원이 있어서 오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선생님 내외분이 대구까지 내려오셔서 참석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을 하객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집안 어른들과 의논하여 혼주석 뒤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선생님 내외분을 모셨다. 학문의 자식으로 나를 길러주신 선생님을 나는 부모의 예로 모시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에 당신께서 심혈을 기울였던 학문 영역에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후진 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2016년 가을에 갑자기 돌아가심으로써 그 뜻을 펴지 못하셨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모님께서 유산을 정리하고 거금 10억 원을 한국사회사학회에 기증하여 ‘최재석학술상’을 제정하였다. 2020년부터 본상(저작상)을 비롯하여 우수박사학위논문상, 우수학위논문계획상, 공동연구과제상을 시상하고 있다. 나는 이 상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선생님의 영전에 작은 정성을 보태고 있다. 이 사업이 선생님의 유지를 계승하는 데 일조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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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귀한 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달음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재석 교수님의 책을 읽기도 했지만, 더욱이 그분이 <삼풍창영의 신화 연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실 때, 제가 토론자로 끼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엄청 길고 격한 열정을 담아서 쓰신 글이었습니다. 한국고대사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셨지요. 그분을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합니다. 스승님의 제자를 공부시켜가는 단계, 그 단계를 믿고 꾸준히 따라가신 제자 교수님의 생애, 그 전개 과정이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현장 조사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구나도 배웁니다. 널리 읽히도록 예쁜 책을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