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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사 송상현 교지. 영조 17년(1741) 종일품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했다. 무인들이 도망가는 동안 평생 제대로 칼을 잡아본 적도 없는 문신 송상현이 적들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전면에서 지휘하고 수습한 서애 유성룡이 저술한 전쟁 백서다. 임란 전 국내외 정세부터 전쟁의 실상, 전후 상황까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술한다. 한반도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19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한다.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까지 들고있는 일본군에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국경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하나같이 겁쟁이에다 무능력자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경상 좌수사 박홍, 밀양부사 박진, 김해부사 서예원, 순찰사 김수는 적의 규모에 겁먹고 앞다퉈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많은 배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멀리서 왜군이 부산으로 상륙하는 것을 쳐다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산포 첨사 정발은 절영도(영도)에서 사냥 도중 급히 성으로 복귀해 적을 맞다가 죽었다. 다대포 첨사였던 윤흥신은 노비 출신이었으나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평생 글만 읽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루에서 반나절 동안 고군분투하다가 왜적의 칼에 찔려 장렬하게 숨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용궁현감 우복룡은 병마절도사 소속 군사 수백 명을 반란군이라며 몰아세워 살육했다. 군사들은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내보였지만 소용없었다. 우복룡은 그 공로로 안동부사 자리를 받았다.
학살당한 가족들은 원통한 사정을 울음으로 호소했다. 경상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총사령관 신립은 충주에서 적군이 근접했다고 보고하는 군관들을 "망령된 보고로 동요시킨다"며 목을 베어 죽였다. 이미 적들은 턱밑에까지 와 있었고 적의 급습에 우왕좌왕하다가 몰살당했다.
▲ 선조의 친필 글씨. 그의 치세에 무수한 학자가 배출되고 학문도 크게 발전했지만 임진왜란을 자초해 무능한 왕으로 비판받고 있다. 선조는 명필이었다.
처음에는 선조도 도성을 사수하려고 했다. 각 동네 주민, 천민, 말단 관리, 의원을 끌어 모아 성첩(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지키게 했다. 도성의 성첩은 모두 3만명이었으나 동원된 인원은 7000명이었다.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모두 도망갈 궁리만 했다. 지방에서 뽑혀온 군사들도 병조에 소속은 돼 있었지만 말단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선조는 신립이 무너졌다는 전갈을 받자 4월 30일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갔다. 왕이 무악재 고개에 닿을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유성룡이 머리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내 커다란 창고에 불이나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오후 8시께가 돼 파주 동파역에 닿자 파주목에서 임금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했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나중에는 임금에게 올릴 음식조차 없게 되자 파주목사와 장단 부사는 처벌을 두려워해 그대로 도주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왜군은 여주에서 한강을 건너려다 강원조방장 원호의 공격을 받아 며칠째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강원 순찰사 유영길이 그런 원호를 불러 강원도로 돌아가 버렸다. 강을 지키는 군사는 사라졌다. 적들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에서 물살에 휩쓸려 많은 왜적이 수장됐다. 왜군은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다 건너왔다. 손쉽게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팔도도원수 김명원의 부장 신각은 양주에서 민가를 약탈하던 적병 60명의 목을 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첫 승전고였다. 상관인 김명원은 장계를 올려 "신각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무고해 신각은 참형을 당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받들던 종묘 신주를 놔두고 달아나는 일도 발생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종묘 신주를 개성 목청천에 뒀는데 왜군이 서울로 밀어닥치자 다급한 나머지 신주 챙기는 일을 모두 깜박했다. 종실의 한 사람이 울면서 "신주를 적의 수중에 둘 수는 없다"고 고했다. 사람을 개성에 보내 밤을 세워 신주를 모셔왔다.
평양에서도 강물이 왜군의 발목을 잡았다. 적이 대동강을 건너오는 동안 화살을 쏘는 전략이 먹혔다. 날이 가물어 강물이 나날이 메말라갔다. 나라에서는 재신들을 여럿으로 나눠 단군사당, 기자사당, 동명왕 사당에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야속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적군은 수심이 비교적 얕은 왕성탄 쪽으로 건너왔다. 평양성은 이미 임금과 병사, 백성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성이 있다. 성안에 식량난을 대비해 세금으로 거둔 곡식 10만석을 옮겨 놓았다. 식량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평양성이 함락되자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다급해졌다. 중국에 사신을 연이어 파견해 사태의 위급성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마당에 중국에 나라를 바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임금이 국토의 북쪽 끝에서 중국만 쳐다보고 있는 사이 이름 없는 영웅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은 전주로 들어오는 왜군을 맞아 웅치고개에서 결사항전했다. 우리 군사는 무기가 떨어지자 온몸으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담, 변응정과 많은 조선병사가 전사했다. 그들의 용맹함은 적도 감동시켰다. 왜장은 조선군사의 시체를 모두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를 세웠다.
첩보전에서도 조선은 일본에 한참 하수였다. 왜는 조선인을 포섭해 간첩으로 활용했다. 간첩에는 군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유성룡은 가족과 함께 소 한 마리를 잡아먹은 전령 김순량을 잡아서 심문했다. 그는 "비밀 공문을 왜장에게 전달했으며 소는 그 상으로 받은 것"이라고 자백했다.
김순량은 또 "모두 40명이 넘는다. 간첩이 없는 곳은 없다. 일이 일어나는 대로 보고한다"고 실토했다. 김순량은 참하고 간첩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들였다. 간첩 활동이 중단돼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한 정보는 왜적에 누설되지 않았다. 명나라 대군은 평양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은 1년여 뒤인 1593년 4월 20일 수복했다. 서울의 백성은 10분의 1만 남아 있었다. 성안이 죽은 사람과 죽은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종묘와 세 대궐, 종루, 각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은 남김 없이 재로 변해 있었다.
민가들도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명나라 본대는 물러나는 왜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적들은 느긋하게 후퇴했다. 그들의 길목에 머물던 우리 군사들 역시 적이 나타나면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1593년 6월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최경희 등이 모두 전사하고 6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으며 닭과 개마저 남은 것이 없었다.
김천일은 군사에 어두워 제멋대로였으며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유성룡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비판했다.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고 이를 놓치지 않고 적들이 공격해오자 우리 병사들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촉석루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천일과 최경희는 손을 붙잡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은 이순신이 전략을 논의하던 운주당 건물에 첩을 데려와 거주했다. 장수들과 접촉이 없었으며 술을 좋아해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그때 적이 쳐들어왔다. 권율의 질책으로 출전했지만 허둥대다가 수많은 배와 군사를 잃었다. 남은 조선군은 거제 칠전도에 주둔하다가 다시 적의 기습을 받아 완전히 궤멸됐다.
원균은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지만 몸이 비대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유성룡은 원균이 혼자 있다가 왜군에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칠전도에서 승리한 왜는 남원을 거쳐 충청과 전라를 유린했다.
▲ 충남 아산 충무공 이순신 묘.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조선군 지휘관을 무시했지만 이순신만은 예외로 천하의 인재라고 치켜세웠다.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은 이순신은 고도의 전략가였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조선 장수의 권한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의 군사들도 수령들을 욕하며 마구 때렸다. 이순신은 진린이 합류하자 큰 잔치를 베풀면서 성대하게 맞았고 전투의 공로를 진린에게 돌렸다.
진린은 매우 흡족해하며 선조에게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라고 극찬했다. 이순신은 진린과 합의해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면 매로 다스리기로 하면서 군기가 엄정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성룡(1542~1607)=경상도 의성 사촌리에서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6년(중종 22) 별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을 시작했으며 1568년(선조 1) 성절사(황제·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82년(선조 25) 대사헌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라 선조를 호종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전란 수습을 총괄했다. 1598년(선조 31)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된 후 고향에 은거해 저술에 힘썼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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