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34
ㅡ 삼국시대에 대한 궁금증 2 ㅡ
(삼국시대 삼국 언어는 서로 통했고, 자유롭게 왕래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까지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의심조차 안 해왔다. 그래서 서로 언어소통이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앞 편에서 정리했다시피 당시 삼국사람들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이 문제 궁금증을 살펴 보자.
첫 째, <서로 언어소통은 어떻했을까? 서로 통역없이 언어소통이 가능했을까?>
앞 편에서 우리 민족은 '우랄 알타이' 산맥부근에서 온 '북방계'와 토착민족인 '남방계'가 혼혈되어 '단일민족화'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학창시절에는 한국어가 '우랄ㆍ알타이' 어족에 속해 있다고 배웠다. 현재는 교과서에서도 사라지고 다른 설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어쨌든 한 뿌리를 가진 삼국 언어형태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수 백 년을 떨어져 있다보니 언어는 서로 다른 방언이나 언어적 차이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준익' 감독 영화 '황산벌'을 보면 이 언어와 관련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백제군사들이 말한 '거시기'라는 말을 신라첩자가 듣고 무슨 말인지 몰라 중요한 암호로 생각하고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거시기' 빼놓고는 서로 자유자재로 소통이 된다. 특히 욕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제대로 소통한다.^^
이 영화부분은 잘못된 장면이다.
기록이나 음성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유자재로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로 사신 간 대화를 할 때는 통역이 필요했다고 추정 한다. 우리가 지금 제주도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면 거의 못 알아 듣는 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도 대략 소통은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 방언이나 북한과도 분단된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리는 통역없이 소통은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삼국 언어는 공통적인 조상을 가진 고대 한국어 계통에 속해 기본적인 어휘나 문법 구조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런 유사성 때문에 몸짓 손짓을 통해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국 언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점점 더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어와 신라어는 지리적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차이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신라어 사이에 위치해 있어, 두 언어의 중간적 성격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반 삼국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손짓 발짓 포함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완전히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특정한 지식이나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즉 공식적인 외교나 군사교류에서는 통역이 필요했을 수 있다. 삼국이 서로 오랜 기간 동안 접촉하고 교류했기 때문에, 특정한 직업(상인, 외교관 등)에서는 서로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삼국통일이 되고나서야 신라어를 바탕으로 한 통일신라어가 사용 되면서 중세 한국어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어는 후대 중세 한국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리이다. 신라어는 삼국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언어로, 향가와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그 특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삼국시대 사람들과 요즘 사람들이 만나면 소통이 가능했을까?
불가능 할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하는 경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향가 푸는데만해도 양주동같은 천재가 나와서야 가능했다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
여러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로 간다한들 소통이 안 되었을 것이다.^^
둘 째, <서로 자유롭게 왕래는 할 수 있었을까?>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왕래는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따라 달랐으며, 전반적으로 자유롭지 않았다. 삼국은 서로 거의 전시단계나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왕래는 제한적이었고, 주로 외교, 무역, 또는 특정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삼국 간 불완전한 왕래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문화적 교류는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불교와 같은 종교는 삼국에 모두 퍼졌고, 예술과 기술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역시 제한적이고 간헐적인 교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은 때때로 외교 관계를 맺고, 동맹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사신이 오가고, 왕래가 가능했다. 예를 들어,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서동설화'에서 보듯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왕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전쟁 중이 아니거나 긴장 상태가 비교적 낮은 시기에는 상인들이 삼국 간에 왕래하면서 무역도 했을 것이다. 무역을 통해 삼국은 서로의 상품과 문화를 교류 했으며, 이는 삼국 간에 제한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허가나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 간 왕래는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적인 시민들의 왕래는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왕래는 주로 외교, 무역, 또는 특정한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쟁이나 갈등이 있을 때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처럼 삼국이 서로 제한적 상태에서나마 교류한 것은 확실하다.
삼국 언어소통이나 교류 관련 재미있는 설화가 향가로 남아 전해져 온 것을 소개한다. 티브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서동요'이다.
'서동설화'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는 삼국시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동설화'는 진위 논란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 학설들이 난무할 정도로 정설이 없다.
그래도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 현재 가장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는 우리가 정설처럼 알고있는 '서동설화'에 대해 알아 보자.
[서동은 곧 백제 '무왕'이며, 왕후는 신라 '진평왕'의 3녀 '선화공주'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훗날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薯童)이라는 청년이 신라 경주에 가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꾀를 내어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노래를 짓고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이에 동요가 도성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이런 이유로 '서동'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결혼한 후 우연하게 얻은 금으로 사찰을 창건한다는 이야기가 서동 설화이며, 이 서동설화에 등장하는 노래가 향가 '서동요' 이다.]
이처럼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향가'이다. 민간 설화가 향가로 승격된 예 중 하나이다.
이 '서동설화'로만 본다면 백제 신라가 서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으며 언어적으로도 완전히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삼국유사 기록대로 한다면 이 시기는 '나제동맹'(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해 맺은 왕족끼리 혼인동맹으로 120년 간 지속)기간이었기에 왕래는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소통은 '글쎄요?' 이다.
오늘의 주제는 거의 추정된 것이다. 기록이 너무없어 이러한 게 확실하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인지하고 내 글을 읽었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의견있음 댓글로 올려주시길 바란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