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고구려, 삼족오, 그리고 주몽유감 | |||||
| |||||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는 어디인가? 충청남도 부여 말고 저 만주땅에 있었던 부여말이다. 북부여, 동부여, 가섭원 부여... 많이들 알고 있네!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이다. 요컨대 부여는 본래 고조선과 같은 나라인 것이며, 고조선의 종통이 부여를 통해 고구려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 고대사의 2% 부족한 부분이다.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강단사학자들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실증사학]을 통해 한단고기를 버리고 역사기록이 없는 고대사에 그 무시무시한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배우는 국사교과서에서는 부여를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맥을 끊어 놓고 있다. 수많은 열국들 사이의 그저 하나인 부족국가로 만듦으로써 종통 맥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사이에 파고든 중국의 한국사 침탈을 막아줄 예방주사이기도 하다. 뭐 다 좋다. 한단고기나 삼성기 등의 기록이 정사냐 아니냐 토달 사람들, 단군이 신화냐 역사냐 딴지걸 인간들, 단군은 우상이라며 목 따는 매국노들, 그 철딱서니 없는 잡것들 다 이해(?)하기로 하고 할 말만 하겠다. 듣는 사람도 그냥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었으면 한다. 따지지 말고... 고조선 후반기에 와서 8조법금으로 알고 있는 초대 단군왕검의 도법이 많이 무너졌다. 급기야는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란 사람이 나타나서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지름에 43대 단군이 피신 중에 돌아가시고 나라가 하도 혼란해지자 5가에서는 상장군 구물(丘勿)을 44대 단군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이에 구물 단군께서는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을 ‘대부여’로 바꾸기에 이른다고 한단고기 등은 적고 있다. (장당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티벳에서부터 개경에 이르기까지 분분함) 그리고 계속되는 한단고기의 설명...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께서는 50여년에 걸친 치세 끝에도 혼란을 걷잡기 힘들어지자, 오가(五加)에 나라를 맡기고 은거를 하면서(BCE 238) 오가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이 무렵 종실(宗室)인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나라이름을 ‘북부여(北夫餘)’라 하였다(BC 232). 이로써 대부여의 종통은 북부여로 이어졌다. 48대 단군이 된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44대 구물단군이 대부여라 한 것처럼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 단군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는 ‘대부여’ 곧 단군의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부여 다음으로 나타난 국가는 동부여(가섭원 부여)와 졸본부여(고구려)의 양대 부여라고 할 수 있는데, 고조선의 분단전인 북부여까지는 단군이라는 왕의 칭호로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여나 북부여에서도 5가라는 부족국가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5가가 부여나 고구려의 5부제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때 고조선, 부여, 고구려가 다 부족국가 연합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부여의 시조가 된 해부루왕은 해모수의 자손이다. 그럼에도 꿈에 천제로부터 “내 자손이 거할 땅이니 물러나라”는 지시를 받고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긴 일이 있다고 한다. 이를 역사에서는 동부여 또는 가섭원 부여라 칭하는데, 왜 적통을 가진 왕이 이유없이 천제의 자손이 거할 땅이라 하니 곱게 물러났을까? 이 부분을 좀더 설명해주는 내용이 한단고기에 나온다. 북부여의 4대 단군인 고우루(高于婁)때 한 무제가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고우루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한편, 이 때 본래 북부여 고우루의 동생이자 단군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하니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뉘게 된다. 해부루가 천제의 자손을 위해 나라를 내주고 갔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이렇게 복원되는 것이다. 한편 북부여의 5대 단군이 된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5대 고두막한의 뒤를 이어 6대 단군에 오른 것이 고무서(高無胥)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나,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니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 단군 때에 막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과 고주몽이 동일인이라는 얘기는 역사기록이 없는 신화시대에 있어서 100여년 정도 기간에 걸쳐 벌어진 일들이 축약되는 과정에서 잘못 알려진 것이다. 물론 새로 나라를 세운 고주몽이 해모수의 자손을 칭하고 동명성왕을 칭했을 수도 있으나 광개토왕비에 나타난 기록에 토대할 때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으로 추정된다는 면에서 한단고기의 기록은 무시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무튼 한단고기에 의하지 않더라도 신화해석 기법의 역사를 추정해보더라도 해모수 다음 대에 북부여 왕실에서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왕권을 잡은 쪽이 해씨를 고수하고(동부여 왕 해부루를 보면 안다), 밀려난 쪽이 고씨로 姓轉換을 한 채 제후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 등은 고주몽이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자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라고 한다. 이미 그 시절 고구려라는 나라가 서기 전에 고구려후라는 직위가 있었음을 볼 때 고구려라는 북부여의 제후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계속적인 권력다툼 끝에 고씨 쪽이 세를 불려감에 따라 해씨왕조가 가섭원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이 부분을 한단고기는 명확히 증거하고 있지만...)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든지 해모수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고구려후 자손인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금와왕의 부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한단고기에서는 명백하게 나오고 있지만 신화만 놓고 본다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부여가 물러난 북부여 땅에서는 약간의 공백이 있었고, 그런 와중에 고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금와왕의 첩으로 들어갔음직하다. 인질인지 아니면 동부여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고씨 세력이 잠시 약화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들이 아니라 자손일 것이다. “나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我是北夫餘天帝之子)”(광개토대왕비문)이라고 한 것은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자식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손 정도로 말한 것일 듯하다. 여하튼 동부여와 고구려는 건국초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왕과 고구려 주몽,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 그 손자인 대무신왕의 3대에 걸친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지금의 남북처럼 분단국간의 분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 치열한 싸움은 주몽의 손자인 대무신왕에 의해 대소가 죽음을 당한 후에야 일단락된다. 물론 그 이후에도 고구려와 동부여간에는 200여년 이상 부여의 적통를 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으며, 그 치열한 싸움 속에 동부여는 갈사부여로 위축되다가 광개토대왕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졸본부여를 중심으로 북부여의 영역을 차지해갔기 때문에 북부여의 종통은 고구려로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초기 개국공신들간의 왕권다툼 과정에서 졸본부여계인 온조와 비류가 북부여계(유리)에 밀려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건국의 기여자라 할 수 있는 소서노와 그 남편인 우태왕의 기록이 나온다. 한단고기와 연결해보면 북부여 6대 단군 고무서의 딸인 소서노와 그 남편 우태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라는 설이 타당할 것도 같다. 이후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칭한 바 있고, 왕족도 부여씨로 역시 부여를 계승하고 있고, 사소한 듯 하지만 부여라는 지명도 있지 않은가? “고조선-대부여-북부여-동부여(갈사부여)/졸본부여(고구려-발해/고려)-남부여(백제-후백제)-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바로 잡을 때 고조선에서 우리가 배운 고대국가까지의 끊어진 역사의 혈맥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부여를 복원시켜야만 정신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혈통줄이 동일한 선영과 후손으로서의 직계조상의 혈맥을 타고 발전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삼족오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우리는 최근의 고구려 사극붐(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으로 삼족오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임을 알게 되었다. 이 참에 삼족오를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삼자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으니 그나마 기여한 바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삼족오는 일본 천황가의 문양이며 일본 축구 대표팀의 엠블렘이기도 하다. 거기다 일본에서 까마귀는 우리의 까치처럼 길조로 여겨지고 있고 우리는 반대로 까마귀를 흉조로 알고 있으니 삼족오가 우리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밖에 삼족오 신화를 가진 나라는 중국도 있다고 하여 삼족오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또라이들이 좀 된다. 그 또라이들을 위해 하나의 가설을 보여주련다. 이제 삼족오를 우리의 대표 문양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런 의문점을 풀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첫째, 삼족오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고구려 고분과 만주의 홍산 고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무서운 노림수를 보게 된다. 홍산고분은 중국 땅으로 되어 있지만 대표적인 동이족의 신석기 유적임을 알 수 있으며 부여유적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다. 그런데 발견되자마자 중국은 다른 나라의 고고학자들을 몰아내고 숨어서 연구했는데, 이제 북경올림픽을 계기로 이를 세계만방에 공개할 것이라고 한다. 부여사까지 몰아가겠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삼족오 신앙은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고구려, 정확히는 부여의 삼족오가 또 다른 부여임을 자처한 남부여(백제)로 이어졌고 유난히 고구려와 백제의 문물을 많이 흡수한 일본에 전파됐음은 자명해 보인다. 왜 일본은 까마귀를 길조로 삼는데 한국은 흉조냐 하는 것도 해석이 가능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부여계통에서 좀 먼 나라고 고구려와는 적대적이었으니 통일 후에 고구려 흔적 지우기에 광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나 까마귀를 흉조로 여겼을 것이 아닌가? 반면 일본은 고구려와 백제를 흠모했고 반도계 도래인이 지배계층이 된 나라니 그걸 기리고 까마귀를 길조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삼족오의 의미도 뜻도 모르는 채 숭배하는 것이다. 마치 단군 이전 시대 동이족 천황인 치우를 신라가 기왓장에 묻어둔 반면, 도깨비로 몰아갔던 중국에서는 조상으로 복권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그렇게 치우천황도 빼앗아간 지금 삼족오마저 빼앗길 수는 없잖은가? 가만히 앉아서 조상을 빼앗기는 놈들이 머리 들고 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을 말했다. 그러나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우리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잘 나가는 그래서 연장방송까지 계획되고 있는 사극 주몽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동북공정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표방했지만 동북공정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컷던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몽 하나만을 띄우기 위해 너무 많은 산탄을 날리고 있다. 우선 주몽의 신격화를 위해 해모수의 자식으로 만든 것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해모수가 해부루 자식인 금와왕과 친구였다는 발상은 한단고기가 아니더라도 신화만 생각하더라도 명백한 날조인 것이다. 그렇게 해모수를 해부루 아들 급으로 격하시켜야 스토리라인이 유지될 정도로 허접한 작가들인가? 물론 북부여 말기 동부여와 북부여가 갈리는 시점에서 부여의 멸망을 막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의 정신을 사극 주몽에서 해모수와 주몽이 이끄는 다물군의 항쟁으로 묘사되기는 했다. 그래서 날조는 했더라도 정신은 살아있다는 평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까지 날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시아의 강국이자 강자였던 부여왕 대소를 권력에 눈이 어두워 나라와 민족까지 팔아먹는 중국의 개로 만들고 있다. 뭐 부여만 아니라 나오는 부족국가들이 다 중국에 복속되어 서로 이간질하고 싸우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런 사극을 왜 만들었는가? 그러면서도 부여가 황제를 칭했다고 하니 앞뒤도 안맞는다. 중국보다 훨씬 앞서 철기문명을 이룬 부여가 청동기 부족국가여서 한나라 철기병 하나 상대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니 이 또한 역사 날조 아닌가? 그리고 날조는 그렇다 치고 주몽군은 애써 빼앗은 철기갑옷을 안 입고 산적처럼 동물가죽만 걸치고 싸우는가? 유리왕이 가져올 징표인 칼 조각 하나 전하려고 중요 참모진 다 끌고 갔다가 몽땅 잡히면 어쩌려고 부여궁까지 들어가며, 일국의 왕궁을 그리 쉽게 들어갈 수는 있단 말인가? 그런 짓거리 하려고 연장방송을 한다는 말인가? 역사교육이 부재한 시대, 근본적으로 논픽션이 되기 어렵고 고작 팩션일 수 밖에 없는 사극을 놓고 뭘 그리 말이 많으냐면 할 말은 없지만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긴 뭐 역사기록도 더 많은 한참 후 시대를 다룬 연개소문의 날조를 보면 주몽은 그래도 낫다 싶기는 하지만.... http://www.dailian.co.kr/deanto/debate/d_view.html?dno=73163&page=7&t_name=debate&kind=&keys=&sel=tot&search=slekcj&listurl=/deanto/debate/d_list.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