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한 분이며 공의로운 재판관이기도 하다. 또한 전능하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기도 하다. 로마서 9장 29절과 야고보서 5장 4절에는 "만군의 주"란 칭호가 나온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만군이란 천군 천사를 포함한 모든 군대를 말하며, 이스라엘 군대를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란 표현도 있지만, '군대'라는 표현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백성의 수를 계수할 때는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했다.
"모든 진의 군대, 곧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으며" (민 2:32)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은 백성이 아니라 군인이었으며, 하나님은 그 군대의 주(主) 곧, 사령관이셨다.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서 교회는'성도'라는 표현보다는 '군사'라는 표현이 옳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거듭났을 때 우리는 주 안에서 이미 군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없는 나라라면 군인이 필요없다. 평화시에 나라를 다스를 때는 경찰을 이용한다. 그러나 전쟁이 많은 나라일수록 군인의 수가 많고, 전쟁 중인 나라는 온 백성이 다 군인인 것이다.
북한의 인구는 남한의 절반인데, 군인의 수는 두 배나 더 많다. 그만큼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100%가 군사인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신구약 성경은 온통 전쟁터와 같은 영적 싸움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끊임없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흉배를 붙이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투구와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다. 목사에게만 권하거나 형제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다. 자매도 어린아이도 들어야 할 말이다.
이 말씀은 투구를 쓰면 안 쓰는 것보다 안전하니까 쓰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검을 가지면 좋으니까 가져보라는 말씀도 아니다. 이 말씀은 만군의 주 되신 사령관의 명령이다. 모든 군인은 그 명령에 따라 전신갑주를 취해야 한다. 전쟁 중에 있는 군인은 마땅히 철모(투구)를 쓰고, 총(검)을 잡고, 완전 무장(전신갑주)을 해야만 한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의 군인은 평범한 생활과 거의 흡사하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막연히 준비하고 있는 상태인지라 긴장감도 없고 훈련도 없다. 그러나 전쟁 중의 군인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음식도 편안히 못 먹는다. 연일 긴장 속에서 살며, 먹고 마시며 즐길 여가가 없다.
하나님이 만군의 주로서 교회에 군사를 두고 계시는 목적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교회는 지금도 전쟁 중에 있고, 군사 된 성도는 긴장된 전쟁 분위기 속에서 전신갑주를 입고 살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군사 된 성도들은 대적자와 무슨 휴전 협상이라도 한 것처럼 성령의 검도 던져 버리고 투구도 벗어 버리고 흉배도 벗어 버린 채 자유롭게 산다. 우리는 전쟁 중에 있는 군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윗 왕 시대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라는 사람이 있다. 다윗은 그를 불러 발을 씻게 하고 왕궁의 식물을 풍성하게 주며, 집으로 내려가 쉬기를 명했다. 그런데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신복들과 더불어 잤다. 다윗이 그 문제를 추궁하자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찐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삼하 11:11)
라고 대답하고는 단 하루라도 집에서 아내와 즐기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이 전쟁터에 계시고, 모든 신복들과 이스라엘과 유다가 전쟁 중에 있었던 그 때에 왕궁에 남아서 육신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맹렬한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만군의 하나님과 더불어 사단과 싸우지 아니하고, 사무엘 하 11장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처럼 왕궁에 머물며 육신을 즐기고 있다. 성령의 검도 던져 버리고 투구와 흉배와 띠도 벗어 버린 채 먹고 즐기며 쾌락적인 삶을 사는 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예배당 지붕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마귀를 보았다. 우는 사자처럼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야 하는 마귀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이 이상해서 물었다.
"어이! 자네들. 왜 일 안 하고 낮잠만 자지?"
"예배당 안에 있는 자들이 다 자고 있으니까 우리들도 할 일이 없어 자는 거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태만하게 살고 있었으면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예화가 나왔겠는가?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군인답게 살지 않고 평화로운 백성이 육신을 즐기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하고 군기빠진 군대의 사령관으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는 결코 세상과 짝하여 육신을 즐기는 군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한 형제는 현재 방위병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다. 출근 시간이 일정하고 퇴근한 이후에도 집 밖으로 멀리 나갈 수가 없다. 그 형제는 완전히 군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생활이 없어지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없어졌다. 단지 그는 상관에 얽매인 부하로서 명령에 따라 살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인데, 결코 자기 멋대로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된다.
지금은 사단과 휴전 중도 아니며 휴전하기 위해 협상하고 있는 중도 아니다. 치열한 전투 중인 것이다. 적들이 쏘는 화전(火箭)이 비처럼 쏟아지는 곳에서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치열한 전쟁 중인 것이다. 불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전신갑주를 벗어 버리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자신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산다고 생각해 보라. 그 운명은 뻔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게 살아야 한다.
생활에 얽매이는 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3,4)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 훈련을 받던 동기 중 한 사람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무당이 되었는데, 어느 날 도를 터득하기 위해 깊은 산에 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3년 작정을 하고 집을 떠나셨고, 1년 만에 어머니의 소식이 들려왔다. 딴 남자 무당과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이혼을 해야 했다. 그 날 이 친구가 입대를 해야 하는 딱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너무 슬프고 살 힘도 없는데다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영장을 받았기 때문에 입대를 해야 했다.
영장을 받은 자는 어떤 형편에도 불구하고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입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만군의 주님께서 군사를 모집하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후부터 그분의 군대에 소속되어 군사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주의 군사된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명령에만 얽매여야 하며 그 앞에 목숨까지 내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선교사가 낯선 땅에 도착했다. 먼저 선교를 하고 있던 선교사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여기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그 젊은 선교사는 "저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참으로 멋진 주의 군사다운 모습이다.
군사는 그 명령을 따라 사는 동안 사사로운 생활에 절대 매일 수가 없다. 전쟁이 나면 국가는 군인의 가족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군 가족의 복지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처리해 주면서 단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사사로운 생활에 매이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세상의 군대에서도 그의 군사들을 위해 모든 것을 뒷받침하고 뒤치닥거리를 해 주며 명령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군사 된 성도들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군사 된 성도들이 결코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들을 돌보시며 보살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기만 하면 된다. 이런 군사가 좋은 군사인 것이다.
오늘날 영적 군사는 주를 따르는 데 있어서 변명할 것이 너무나 많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별별 조건을 내세워 주님 따르기를 지체하지만, 성도들이여, 분명히 알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가족들과 작별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 지금 바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몇 일이나 몇 달간의 여유를 두고 주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갈등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군사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주의 명령이 떨어졌고, 우리는 그분의 군사가 되었으며, 그분은 우리의 사령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자유롭게 살던 평민의 옷을 벗고 군복을 입으며, 전쟁하기에 합당한 신을 신고 전쟁하기에 적합한 띠를 띠고, 살기에는 불편하지만 전쟁하기에는 안전한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그분의 명령인 것이다.
세상의 군대에서도 비상 근무를 하게 되면 철모를 쓰고 탄띠를 차고 다닌다. 전쟁 중일 때는 불편하지만 전쟁하기에 좋은 복장이어야 한다. 이 시대의 영적 군인의 복장은 어떠한가? 만군의 주의 명령을 따라 전쟁하기에 편한 복장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편한 복장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선한 싸움
우리들의 싸움은 마귀들과의 싸움이다. 우는 사자처럼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데, 그 간교한 마귀의 진을 부수고 복음으로 영혼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드리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사단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단의 일꾼들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심령들을 미혹하고 있는데, 주의 군사 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함으로 한 심령을 얻기 위한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어쨌든 사단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능력을 동원하고 표적과 기적을 나타내며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그들을 미혹한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는 사명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하며 싸우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과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
고 경고하신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데,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선한 싸움을 계속 싸울 수 없는 것이다. 삼손이 들릴라와 짝하며 즐기고 있는 동안에는 블레셋과 싸울 수 없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도 없었으며,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삼손이 들릴라와 함께하는 동안 삼손은 계속 잠들어 있었다. 줄로 묶어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머리를 깎아도 무감각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선한 싸움에 잠들어 버린다면 우리는 부끄러워지게 될 것이다. 사령관 앞에 설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과도 싸워 그에게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군사로 싸우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지 못하며 결코 그리스도의 군사로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고 자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기 전에는 선한 싸움을 싸우기가 어렵고,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하기 전에는 자신의 고삐에 묶여 힘있게 싸울 수 없다.
이 모든 것들과 싸우는 싸움은 영혼을 얻는 선한 일을 위한 싸움이므로 선한 싸움이고, 선하신 하나님의 일을 위한 싸움이므로 선한 싸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