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空妙有(진공묘유)
眞(참 진):匕(化의 획줄임)+(거꾸로 된 首)의 회의자(會意字)이다.
空(빌 공):穴(구멍 혈)+工(만들다 공)의 형성자(形聲字)이다.
妙(묘할 묘):女(여자 여)+少(젊을 소)의 형성자(形聲字)이다.
有(있을 유):(오른손 우)+月(肉 : 고기 육)의 회의자(會意字)이다.
진공묘유를 직역하면, ‘참으로 비우면 묘하게 있다’ 정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진공’과 ‘묘유’라는 명제(命題)가 따로 따로 별개의 것이 아닌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空’(빔)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有’(있음)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일체 모든 것(五蘊=色·受·想·行·識)은 그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因緣)에 의존된 것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무(空無)한 것임과 동시에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도 없고(無我), 너도 없으며(無人), 우리도 없고(無衆生), 영원함도 없는(無壽者) 연기의 법칙 속에 오직 진실의 완성인 원만실성(圓滿實性=妙有)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없으면(心無妄念) 그대로 ‘진공’이며 ‘묘유’이기 때문에 일여(一如)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생(小生)이 우언(迂言)컨대 ;
一念寂靜(일념적정) 不學而知(불학이지)
한 생각 고요하고 고요하면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고
諸行如然(제행여연) 無得而得(무득이득)
모든 행실 참으로 그러하면 얻는 것 없이 얻게 되리라
欲見一切(욕견일체) 先爲眼空(선위안공)
일체를 보고자 하면 먼저 눈이 비어 있어야 하고
願知人生(원지인생) 方是心空(방시심공)
인생을 알고자 하면 바야흐로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하리.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가나
분명히 현상으로 작용하나니
자비 베풀며 세상을 살아가야
불교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그 속에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는 존재의 어느 순간을 잡아내어 ‘이것’이라고 잡아낼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섬진강을 들어보자. 섬진강은 시시각각으로 흘러가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나날이 다르며, 아침저녁으로도 달라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의 섬진강을 딱 잘라내어 ‘이것이 섬진강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순간만을 섬진강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순간이외의 섬진강은 섬진강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고정된 실체로서의 섬진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섬진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섬진강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섬진강은 분명히 존재한다.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현상으로서의 섬진강은 분명 존재한다. 존재하면서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물고기를 갈무리하고 있으며, 토사를 운반하면서 흘러내려가고 있다.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한다고 한다.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다.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다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할지니라.”
여기서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그리고 이슬과 번갯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생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섬진강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선가(禪家)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마곡보철 선사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데, 스님은 어째서 부채질을 하고 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바람의 본질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아는지 몰라도,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치는 모르고 있구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사는 아무 말 없이 부채질을 계속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空)에 떨어진 것이다. 더위는 본래 없다. 그러나 더운 현상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부채질을 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부채질을 떠나서 바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찰나생멸한다. 그 안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현상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사랑을 베풀며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결국 무아(無我)이며 연기(緣起)이고 중도(中道)이자 공(空)인 불교적 지혜는, 자비로써 실천된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