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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구석기,신석기,청동기) ~ 삼국시대
1. 역사(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시대를 ( 선사시대 )라고 한다.
2. ( 고고학자 )들은 옛날의 유물이나 유적을 연구해서 옛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역사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에 대한 다음의 설명 중에서 맞는 것은 O, 틀린 것은 X 하시오.(3~10번)
3.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자연에서 처음으로 찾은 도구는 나무와 돌 정도였다. ( O )
4.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불을 피우지 못했다. ( X )
5.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1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는 ‘움집’에서 살았다. ( X ) 막집
6.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조각을 하고 그림도 그렸다. ( O )
7.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업은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린다. ( O )
8.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한 가족이 살 만한 크기로 땅을 파서 만든 ‘막집‘에 살았다. ( X )
9.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식물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서 입었다. ( O )
10. 신석기 시대 대표적인 유물은 빗살무늬토기이다. ( O )
11. 청동기 시대에는 신석기 시대보다 농업이 훨씬 발전했는데도 괭이나 돌칼 같은 농기구는 여전히 ( 돌 )과 ( 나무 )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12. 석기 시대까지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주로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에 와서는 물이 많은 호수와 강 주변에 논을 만들어 ( 벼농사 )를 짓게 되었다.
13.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 민무늬 ) 토기는 높은 온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의 ( 빗살무늬 ) 토기보다 얇으면서도 더 단단했다.
14. ( 고인돌 )이라고 하는 지석묘는 세계적인 큰 돌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 강화도와 고창, 순창 지역의 것들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런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권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알리고 싶어 했다.
15. 청동기 문화를 가진 ( 고조선 )은 랴오둥(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세력을 크게 키워 나갔다. 이 나라는 왕 아래에 상, 대부, 장군 등의 신하들이 있었다. 굳건한 방어력을 갖춘 ( 왕검성 )이 도읍지였고, 강한 군대도 있었다.
16. 고조선의 준왕을 속이고 왕위를 빼앗은 ( 위만 )은 주변나라들이 한나라와 교역할 수 있도록 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러한 이익을 바탕으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한 군대를 더 많이 다스릴 수 있었다.
17. 고조선 북쪽에 있던 ( 부여 )라는 나라는 뒷날 고구려와 백제의 어머니가 되는데,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8. 삼한에는 천군이 사는 ( 소도 )라는 신성한 곳이 있어서, 죄를 지은 자가 이곳으로 도망치면 아무도 잡지 못했다.
19. 동예의 ( 무천 )이라는 행사는 고구려의 ( 동맹 ), 부여의 ( 영고 )와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행사였다.
20. 동예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옥저에는 여자가 10살이 되면 약혼을 하고 신랑이 될 사람의 집에서 살다가 신랑이 신부 가족에게 돈을 지불한 후에 결혼하는 ( 민며느리제 )라는 풍습이 있었다. 반면 고구려에는 결혼하면 사위가 처가에서 몇 년간 살다가 남자의 집으로 돌아오는 ( 서옥제 )라는 풍습이 있었다.
21.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나라들의 시조는 고구려의 ( 주몽 ), 백제의 ( 온조 ), 신라의 ( 박혁거세 ), 금관가야의 ( 김수로 )이다.
22. 부여는 만주 일대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평야 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농업도 잘되고, 가축 기르기도 잘했다. 부여 왕 아래에는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은 말과 관련 있는 ( 마가 ), 소와 관련 있는 ( 우가 ), 돼지와 관련 있는 ( 저가 ), 개와 관련 있는 (구가 )라고 했다.
23. 고구려는 BC 37년에 홀본(졸본) 지역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유리왕이 ( 국내성 )으로 도읍을 옮겼다.
24. 백제는 고구려가 아닌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내세웠기에 왕의 성씨를 ( 부여 )씨라고 했다.
25. 백제 고이왕은 ( 율령 )이라고 하는 법체계를 고구려, 신라보다도 빨리 정비했다.
26. 경주 땅에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모여 6개의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 부락들은 ( 사로국 )이라는 나라이름으로 불렸다.
27. 신라 2대 왕인 남해는 ‘남해차차웅’이라고 불린다. 이때 ‘차차웅’은 ( 무당 )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종교지도자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28. 신라는 박씨만이 아니라 석씨와 김씨도 왕위에 올랐다. 석씨의 시조는 ( 탈해 )이고, 김씨의 시조는 ( 알지 )이다.
29. 신라에는 8월 15일 대보름날에 모여서 춤과 노래를 비롯한 온갖 놀이를 즐기는 ( 가배 )라는 축제 한마당이 있었다. 이 행사가 이어져 와서 추석이 된 것이다.
30. 건국 초기에 가야가 신라보다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첫째 품질 좋은 ( 철 )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둘째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있어서 ( 해상 )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31. 고구려의 고국천왕은 평범한 농부였던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했다. 을파소는 봄이 될 무렵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양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갚도록 한 ( 진대법 )을 실시하여 고구려를 튼튼한 나라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2.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은 ( 근초고 )왕이다. 이 시기에 박사 고흥은 백제의 역사를 정리한 『서기』라는 역사책을 썼다.
33.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기관인 ( 태학 )을 설립했다.
34. 고구려의 ( 광개토태 )왕은 서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해군기지인 관미성을 빼앗고,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공격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
35. 고구려의 장수왕은 도읍을 국내성에서 ( 평양 )으로 옮겼다. 이곳은 주변에 넓은 평야가 있고 날씨가 따뜻했으며, 대동강을 통해 바다로도 쉽게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제국의 도읍으로 알맞았다.
36.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 법흥 )왕은 금관가야를 신라 땅으로 삼는 등 점차 나라를 백제, 고구려와 맞설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37. 신라의 ( 진흥 )왕은 백제의 성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을 빼앗은 후,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다.
38. 백제의 무령왕 다음 왕인 ( 성왕 )은 도읍을 웅진에서 좀더 넓은 사비(부여)로 옮겼다. 이는 백제를 더 큰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39.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의 힘이 약해지자, 고령에 위치한 ( 대가야 )가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새롭게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40. 삼국시대에 일본 열도의 여러 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삼국 중에서 특히 ( 백제 )는 왜국의 요청으로 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는데, 아직기는 왜국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 등을 전하며 학문을 가르쳤다.
41. 고구려 평원왕의 둘째 딸 평강 공주와 결혼한 ( 온달 )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아 오겠다며 전쟁터로 나섰다가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42.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와 결혼한 백제 ( 무왕 )은 불교를 국가의 중심 이념으로 삼고,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힘을 키워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42년간의 노력으로 백제의 국력은 크게 성장했다.
43. 612년 수나라 양제는 무려 11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 을지문덕 ) 장군은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시를 써서 보냈을 뿐만 아니라, 살수에서 수나라 별동대를 크게 무찔렀다.
44. 신라는 632년 진평왕이 죽자 화백회의를 열어 진평왕의 큰 딸인 덕만 공주를 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인 ( 선덕 ) 여왕이다.
45. 백제의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한 다음 해인 642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군사 요충지인 ( 대야성 )을 차지했다.
46. 당나라 태종은 645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대를 랴오둥 지역에 묶어 놓고 당군의 식량 공급 길을 막아버렸다. 당 태종은 먹을 것을 찾아서 고구려의 ( 안시성 )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해 돌아가다 병을 얻어 죽었다.
47. 백제의 ( 계백 ) 장군은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48. 고구려는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 연개소문 )이 죽자, 그의 아들 3형제가 서로 싸웠다. 첫째 남생은 당나라에 항복한 후 당나라 100만 대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고구려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 남부를 공격하였다. 668년 고구려는 멸망했다.
49.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게 함락되지 않은 요동성, 안시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전쟁을 벌였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 보장왕 )을 다시 랴오둥 땅으로 보내 유민들을 다스리고자 했으나, 그는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고구려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
50. 6세기 무렵 신라 진흥왕 때 정식으로 탄생한 ( 화랑도 )는 지도자인 화랑과 그 밑에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체 생활을 통해 강한 우정과 충성심으로 뭉친 이들은 전 국토를 찾아다니며 씩씩한 기상을 닦았으며, 원광 스님의 세속오계를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았다.
51.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토는 서쪽과 북쪽으로 크게 넓어졌다. 그래서 도읍인 금성이 나라의 동남쪽에 치우치게 되자, 이를 보완하고 지방을 잘 통치하기 위해 통일 전에는 중원경 하나뿐이었던 ( 소경 )을 북원경, 서원경, 남원경, 금관경까지 포함하여 5개로 늘렸다.
52.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명주, 삭주, 한주, 상주, 웅주, 전주, 무주, 강주, 양주 9개의 ( 9주 )로 나누고, 그 밑에는 군과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역을 다스렸다.
53.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해상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 진 )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두었다. 이들은 외적을 방어하고 신라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곳이 청해진과 패강진이다.
54.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해에 죽었고, 김유신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에는 나이가 많아서 명예사령관으로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었다. 실제로 삼국 통일을 완성한 사람은 김춘추의 아들이며 김유신의 조카인 김법민, 즉 ( 문무 )왕이다.
55. 원효와 의상은 불교를 더 배우기 위해서 당나라 유학길에 함께 올랐다. 하지만, 원효는 도중에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돌아와 불교를 쉽게 풀어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으며, 의상은 당나라로 가서 많은 경전을 공부하여 불교의 한 종파인 ( 화엄종 )을 신라에 처음 전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56. 9세기에 신라의 승려들은 중국에 건너가서 새로운 불교를 배워오는 데 바로 ( 선종 )이다. 이는 경전의 가르침보다는 불교의 근본적인 깨달음을 더 중시하는 종파이다. 신라 불교는 이 종파의 발전으로 백성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57. 통일신라시대에 신라 상인들은 산둥 반도 해안가와 대운하 일대의 교통 요지에 (신라방 )이라 불리는 집단 거주지를 이루어 살며 일본과 중국, 아라비아, 동남아의 상품들을 서로 이어주는 중계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8. ( 장보고 )는 신라 사람들이 해적에 납치되어 노비로 팔리는 것을 알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해적을 소탕하겠다며 군사를 청하였다. 흥덕왕은 그에게 1만의 군사를 내주고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물리치게 했다.
59. 통일신라시대 말에 이르러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왕권 다툼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서 지방에서는 ( 호족 )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내려온 귀족, 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은 해상 세력, 지방 군대를 배경으로 힘을 키운 세력 등으로 스스로를 ‘성주’나 ‘장군’이라 칭했다.
60. 신라에는 ( 골품제 )라는 신분제도가 있어 태어날 때부터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신분이 나뉘어졌다. 이에 따라 자신이 살 집, 사용할 물건의 종류,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의 등급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다.
61.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옛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이 있었다. 그의 아들 ( 대조영 )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쑹화강 건너편 동모산에 이르러 발해를 세웠다.
62. 발해의 첫 도읍지인 구국은 옛 고구려의 동부 지역이다. 발해는 백두산 부근의 중경현덕부, 가장 오랜 도읍이었던 ( 상경용천부 ), 동해에 가까운 동경용원부, 그리고 다시 ( 상경용천부)로 계속해서 도읍을 옮겼다.
63. 발해는 2대 ( 무왕 ) 때에 급속히 영토를 확장했다. 말갈족이 많이 사는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늘려 나갔는데, 그러다보니 발해 사람들 가운데 말갈족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64. 발해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고구려, 즉 ( 고려 )라고 불렀다. 발해 문왕이 일본에 보낸 문서에 자신을 ( 고려국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일본은 발해로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발해만이 아니라 일본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한 것이다.
65. 발해는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를 지나 동해안을 따라 신라로 이어지는 ( 신라도 )라는 교통로뿐만 아니라, 상경용천부에서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열도로 가는 길인 ( 일본도 )라는 교통로도 발전시켰다.
66. 중국 지린성 화룽현 용두산에 있는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인 ( 정효 ) 공주의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서양에서 전해진 놀이인 ‘폴로’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인물 그림이 있다.
67. 발해는 10대 선왕 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려 ( 해동성국 )이라 불렸다. 이는 ‘바다 동쪽의 번영한 나라’라는 뜻이다.
68. 거란족의 지도자 ( 야율아보기 )는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발해를 공격해 왔다. 힘이 강해진 거란은 926년 1월에 발해의 부여부를 공격한 후 불과 보름 만에 발해의 항복을 받아낸다.
69. 발해 유민이 세운 ( 정안국 )은 수십 년간 거란과 싸우다가 986년에 멸망했고, 고영창이 세운 대발해국은 1115년 거란이 멸망할 무렵에 등장했다.
70. 발해 부흥 운동을 이끌던 발해 태자 ( 대광현 )을 비롯한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다. 1117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