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을 좋아하는 팬들한테는 꿈 속에서나 있을 법한 장면이다. 1월 20일 넥센 히어로즈 입단 기자회견에서 이장석 대표가 김병현에게 등번호 49번이 새겨 있는 유니폼을 입혀주고 있다.(사진=일요신문 우태윤 기자) |
인터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색깔을 가진 선수들을 만나게 된다. 이름과 얼굴, 성격이 다르듯 인터뷰도 선수의 성향에 따라 매번 다른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 수많은 인터뷰이이들 중에서 기자한테 가장 크게 각인된 선수가 있다. 바로 김병현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병현에 대해 궁금증을 드러내며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김병현은 어떤 사람이야?’ ‘좀 까칠하다면서?’ ‘기자들을 싫어한다던데?’ 등등 그동안 언론에 자주 노출되지 않았던 김병현의 실제 모습을 알고 싶어 했다. 그때마다 했던 대답이 있다.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손해 본 게 많은 사람’이라고. 서른 세 살의 ‘아저씨’와 ‘순수’란 단어가 쉽게 연결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김병현은 야구에 관한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다. 그래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매번 돌아가는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을 경험해야 했다.
일본 코치, 김병현 멱살 잡아
지난 해 8월 초, 일본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선수들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가 센다이에서 김병현을 만난 적이 있었다. 라쿠텐 골든 이글스 2군에서 뛰고 있었던 김병현과 식사를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다음날 그가 등판할 지도 모른다는 귀띔에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2군 경기를 보기 위해 센다이 인근의 리후야구장을 방문했다.
섭씨 36도가 넘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낮 1시에 치러진 경기에 관중들도 선수들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열기를 느끼며 조금씩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불펜투수였던 김병현은 경기가 5회로 접어들자 야구장 한켠에서 몸을 풀며 언제 있을 지 모를 등판 준비를 시작했다. 경기가 9회로 접어들었지만 감독은 김병현을 마운드에 세우지 않았다. 결국 공 한 번 던져보지 못하고 땀만 뺀 김병현은 짐을 싸들고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센다이로 항하는 택시 안에서 김병현에게 감독이 왜 등판 기회를 주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다. 김병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언젠가 한 번 투수코치랑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등판 기회를 줘서 나름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고, 안타를 맞고 잠시 위기가 있었지만 잘 마무리하고 경기를 끝냈다. 그런데 그때 코치가 날 불러선 ‘왜 제대로 공을 던지지 않느냐’고 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통역한테 ‘뭐라고 그러는데?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야?’하고 물었다. 통역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그런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코치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일본어로 크게 화를 내며 뭐라고 하는데 난 도저히 그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고, 내가 왜 걔네들한테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나도 그래서 한국말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뭐가 문제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장면을 코칭스태프랑 선수들, 감독이 보게 됐다. 만약 내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불러서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오랜만에 마운드에 올려 놓고, 제대로 공을 던지지 않았다고 몰아붙이는 건 무슨 경우고, 어린 선수도 아닌 나이 서른 넘은 외국인 선수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러대는 건 또 어느나라 법인가? 그때 너무 놀랐다. 일본 야구에 대해, 일본 지도자들에 대해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지난해 8월, 라쿠텐 이글스 2군 경기에서 특유의 투구폼을 선보이고 있는 김병현의 모습(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왜곡된 이미지 더 이상 만들기 싫어
김병현의 얘기를 듣다가 기자가 더 흥분이 됐었다. 어떻게 코치란 사람이 프로 선수한테 그런 매너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기자가 더 강하게 항의를 하지 왜 가만히 참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만약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선수였다면 그때 제대로 들이댔을 것이다. 그런데 난 메이저리그에서부터 좋지 않은 이미지를 안고 살았다. 만약 내가 코치랑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전처럼 그 배경과 원인은 생략된 채 김병현이 일본 코치한테 소리지르며 난리쳤다는 얘기만 기사화될 것이 뻔했다. 그 코치가 내 멱살을 잡았다는 건 일본 언론에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그 내용이 한국에 그대로 전달되면 난 또 다시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꾸렸고 예쁜 딸도 태어났는데, 더 이상 내 이미지가 왜곡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꾹 참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등판을 시키지 않더라. 화가 난 건 나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나 다름없는 출전권을 들고 나를 바보를 만들었다.”
김병현은 당시 이런 내용을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냥 잊고 싶은 일이라서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슴 아파할 것이라고 말해서 당시 인터뷰 기사에는 이 내용을 담지 않았다.
김병현이 이번 넥센 입단 기자회견에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일본에서 실패해 돌아왔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실패란,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져보고 타자를 상대한 다음에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난 일본에서 몸이 아프지 않았고 자신도 있었지만 게임에 나가지 못했다. 난 지금도 그 부분이 아쉽다”며 라쿠텐 이글스 2군에서의 생활에 대해 언급했다. 현장에서 김병현의 인터뷰를 들으며, 당시 센다이에서 김병현이 털어놨던 그 얘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일본에서 코칭스태프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던 김병현.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자신의 이미지가 또 다시 이상하게 왜곡될 것을 우려해 당시의 상황을 속시원히 밝힐 수 없었던 사연을 안고 있다.(사진=일요신문 우태윤 기자) |
가족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김병현은 당시 기자에게 일명 ‘벨트 사건’에 대해서도 털어놨었다. 미팅 시간에 벨트를 채우며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감독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내용이었다.
“한 번은 미팅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유니폼을 갈아입다가 미팅실로 뛰어가면서 벨트를 채우며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감독이 날 보고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게 아닌가. 통역이 전달한 내용에 의하면, 신성한 야구장에 오면서 벨트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들어온 데 대해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벨트를 채우며 미팅실로 들어간 게 아침부터 감독이 화를 냈을 정도의 대단한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야구장이 신성한 곳이라고 일본 선수들은 야구장에서 침도 안 뱉나. 그렇다면 야구장에서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면 안 된다. 그런 곳에서 야구를 배운 조지마는 시애틀 시절 타격훈련할 때 모자를 거꾸로 쓰고 훈련했다.”
김병현은 라쿠텐 2군 감독(나무라 카오루)이 자신한테 한국에서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고 해도 일본에 오면 2군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하면서 감정을 자극시켰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어이없는’ 팀 분위기 속에서도 김병현이 시즌 마칠 때까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 같으면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팀을 뛰쳐나왔겠지만 사랑스런 아내와 딸이 있다 보니 야구선수의 자존심을 내세우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는데, 내가 아내와 아이를 위해 그 정도도 못 참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야구인생의 ‘해피엔딩’을 위해 2년 만에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내가 마운드에서 공 던지는 모습을 아내와 딸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금까지 참고 견뎠다. 주위에서 한국에서의 야구생활을 자꾸 언급하시는데, 내가 갈 데가 없어서 가는 한국행이 아닌 내가 (공에 대해)자신있을 때 한국으로 가고 싶어서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공을 던질 수 있을 때 한국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런데 김병현은 2012년 1월 20일, 넥센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팬들 앞에 섰다. 수많은 이유들 중에서 분명한 건, 그가 자신의 공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넥센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야구가 하고 싶고, 가족들을 위해서 야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의 공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김병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금은 ‘대충’하는 것도 필요한데 이상하게 전 야구에 있어선 그게 잘 안 돼요. 선수가 ‘운동’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아트’를 하려니까 그게 문제예요”라고. 올시즌은 ‘아트’보다는 ‘운동’을 하는 김병현을 보고 싶다. 그래야 마운드에 오르는 김병현을 자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한국에서 이렇게 '쭈욱'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일들만 가득하길 바란다. 김병현 파이팅이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일본에서 겪은 ‘아픔’이 한국에서는 경험과 깨달음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김병현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김시진 감독이 존재하기에 김병현의 2012년은 '느리게 걷기'의 보폭으로 푸근하게 이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