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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우상화와 종교적인 폭력
<로마서8:37>(신연식, 드라마, 15세, 2017)
이미 소문으로 들었던 일들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얻는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언론에 보도된 것이라 해도 그렇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소문이나 언론 내용은 누군가에게는 진실 게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유발하는 사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자극적인 말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소문은 소문으로만 남는다.
그런데 들리는 말들이 영상으로 재현된다면 사정은 다르다. 영화는 단지 정보전달만을 위한 매체가 아니고 오히려 관객들의 경험을 겨냥하기 때문에 소문이 영화로 재현되면, 그것은 보는 자들에게 사건이 될 수 있다. 과거 <실미도>나 <도가니>에서 볼 수 있었듯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영화를 통해 간접적이긴 하나 사건으로 경험하는 일은 영화가 지닌 매력적인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프리미어’에서 상영되어 호오가 분명히 갈리는 평을 동시에 받았던 <로마서 8:37>은 영화의 이런 매력을 활용한다. 신연식 감독은 윤동주의 생애와 고뇌를 그의 시와 더불어 잘 표현한 <동주>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기독교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기대할 수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37>은 비록 모태신앙인이라도 다만 미디어나 소문으로 들었을 뿐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을 교회의 각종 치부들을 경험하게 만든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 교회 재정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일,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뿐 아니라 우상시하는 일, 교회 내 목사 편과 반대 파 교우들의 갈등, 여성 교우들에 대한 성폭행 및 성추행, 목사 사모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우울증, 가나안 성도 등.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베일에 감춰져 있는 사건들이다.
영화적인 속성상 한 인물 안에 여러 상황에서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담으려다 보니 괴물이 된 것이 조금은 아쉽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영화를 단순하게 관람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그저 영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허구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 한 가지 문제는 있을 수 있다 해도 그 정도야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식의 오독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연식 감독은 여러 교회에서 발생하고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일들이 실제임을 확인하고 이 내용을 영화로 재현했다. 그렇다고 교회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그나마 비판받는 교회에 비판을 더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의도치 않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주인공 기섭(이현호)의 동선과 시선을 따라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을 고려한다면 결코 그런 목적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로마서 8:37을 향해 나아가다 귀결되는 마지막 장면, 곧 기섭의 설교와 기도 내용과 관련해서 제시되는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접하다 보면, 관객들은 종교적인 폭력과 타인의 죄를 보고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죄로 가득한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목회자의 타락과 교회의 온갖 불의로 점철된 종교적 폭력이 목사를 우상시한 교우들에게도 있음을 폭로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님의 편에 서길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강조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얼마나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고 또한 그래야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교회의 각종 의혹들을 직접 경험하며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고 있는 기섭에게 집중한다. 기섭의 시선으로 영화를 볼 때 정리되는 건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 있음)
기섭은 열정적인 청년 회장의 시기를 거쳐 목회자를 꿈꾸고 있는 전도사로서 작은 가정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라도 현실과 타협하면서 불법을 묵인하며 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하게 살려 노력하기 때문에 그의 정직성은 오히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며 갈등하는 아내로부터 외면당한다. 게다가 형편상 아내가 일해야 하는 처지라서 딸 양육은 외할아버지에게 맡기는 형편이다. 아내의 노골적인 불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감독은 왜 관찰자이면서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이끌고 가는 기섭을 이런 상황에 놓인 캐릭터로 설정했을까? 그것은 분명 기섭이 말씀에 충실한 신앙을 부각시키려는 것이고 또한 기섭에게 볼 수 있는 현실적인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모습을 구체화하려는 의도가 아닐지 싶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는 바대로 실천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요구하며 사는 캐릭터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캐릭터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추적하는 것이 영화 감상의 팁이다.
이런 기섭에게 아내의 오빠이면서 자신의 모교회인 부순 교회 담임목사 요섭(서동갑)이 간사 직을 제안한다. 기섭은 청년시절부터 형이라 부르며 따랐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웅이었던 요섭의 제안이기에, 비록 교회 사역이라기보다 교회에서 일어난 각종 현안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해도 요섭을 돕는다는 생각에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교육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청년 회장에서 간사의 직분으로 바뀌어 모교회로 간 기섭은 청년 시절의 교회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을 접한다. 현상적으로는 과거 은퇴목사가 교회 재정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교회 측에 맞서 이단적인 내용의 설교라는 의혹으로 요섭을 노회에 제소한 은퇴목사를 지지하는 교우들과의 대립이 첨예해진 상황이다. 기섭이 간사의 일을 시작하게 된 때는 이미 양쪽으로 분열된 교우들 간의 갈등이 고조된 때이다.
교적부를 정리하며 과거 청년회에서 활동을 했던 청년들 중에 요섭을 지지할 사람들을 찾던 중에 기섭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들을 하나 둘 씩 발견한다. 물론 처음에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언론에 제공된 성추행의 진위를 따지면서 대응 전략을 짜기 위한 것이었지만, 기섭은 언론사가 녹취했던 피해자 인터뷰 내용을 듣고는 그것이 은퇴목사 측에서 조작한 비방성 의혹제기가 아니라 사실임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는다. 관련 피해자 여성들을 직접 찾아가 과거 요섭이 여성 청년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은 물론이고 성폭행까지 했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섭 아내의 죽음이 사실은 그가 이미 미국 유학 시절부터 있었던 여자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중에 일어난 자살이었음을 알게 된다.
기섭은 아무리 목사이고 또 아내의 오빠라도 결코 묵과할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는 내부고발자로 나선다. 피해자들의 인터뷰 녹취를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며 요섭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사과는 전혀 없이 단지 요섭의 담임목사직 사임으로 일은 마무리 되는 것 같았지만, 이것은 다만 면직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당회는 기회를 노려 요섭의 담임목사직을 회복할 것을 은밀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임 결정을 책임지고 있는 노회 관계자들과의 미팅에서 요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줄 알았던 은퇴목사의 태도가 돌변하여 오히려 요섭의 편에 서는 것을 충격적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 담임목사를 포함한 당회가 은퇴목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해자나 정의를 요구하는 개인은 사라지고 조직만 남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내부고발자로서 기섭이 서 있을 공간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성도는 없고 오직 조직을 유지하려는 종교인들만 가득한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섭이 서 있을 공간은 없었다.
영화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드러내려는 부분은 스스로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요섭의 욕망과 목사인 그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가족들, 그리고 그를 우상시하며 따르는 교우들의 태도다. 영화적인 서사에 따르면, 그 피해는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그를 우상시했던 여성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외도하는 남편의 목사직을 지키고 보호하려던 그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트라우마로 말을 잃은 요섭의 동생 역시 요섭을 위해 기도하다 불에 타 죽는다. 동생의 죽음을 대속의 의미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본다. 동생의 죽음은 요섭의 불의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기도한 사람이 겪는 피해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목사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섬겼던 당회원은 그의 부조리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 밝혀진 사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회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부조리한 일을 행한 목사가 계속 담임목사직을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일련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요섭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요섭은 아내가 왜 죽었는지, 동생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성폭행과 성추행의 피해 여성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그는 자신의 목회적인 욕망을 실현하려 안간힘을 쓸 뿐이다.
이런 모습은 종교적 폭력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종교적 폭력은 자신이 가해자인지 혹은 피해자인지도 모르게 연루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요섭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교회를 위한 헌신으로 자신의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를 우상시하는 교우들 역시 같은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폭력에 노출되어 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종교적 폭력의 속성이다.
기섭의 입장이 아니라 누가 되든 목회자의 부패와 비리가 오직 교회와 노회의 정치적인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조적인 악순환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기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바로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기섭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죄를 넘어 인간의 죄를 인지하고 고백한다. 그리고 영화는 로마서 8잘 37절을 인용하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영화에서 이 구절은 핵심 메시지로 작용한다. 기섭의 진실과 정의를 위한 노력은 좌절하고, 오히려 노회와 교회의 야합으로 요섭의 뜻이 관철되는 듯이 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곧 부조리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정의가 모든 것을 당신의 뜻에 따라 회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주려는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외적인 문제를 내면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런 오독을 피해야겠지만, 영화의 관건은 우리 안팎으로 죄가 가득해 있고, 특히 교회에서 개인(목사) 우상화가 끼치는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폭로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내면의 종교로만 머물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불의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만 올바로 서 있길 노력하는 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다. 세상은 부조리에 침묵하고, 또 죄에 묻혀 자신의 죄를 볼 수 없는 상태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침묵할 수 없으며, 숱한 죄에 파묻혀 지낸다 해도 자신의 죄를 인지하는 일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일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각종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라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8:37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해도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끊임없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된 메시지다.
문제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인지할 뿐 아니라 교우들에 의해 그렇게 우상시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숱한 영웅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탈쯤으로 여긴다. 그들의 죄 고백은 단지 보이기 위한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결여된 퍼포먼스일 뿐이다. 불의에 침묵하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태어나기보다는 우상화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폭로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기섭을 통해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 교회를 떠나 사회와 연대하여 교회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인간의 죄는 물론이고 먼저 우리 안의 죄를 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던지도록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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