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모산 자락 강남구 수서동 739-1번지에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한옥 필경재(必敬齋)가 있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증손인 정안부정공(定安副正公) 이천수(李千壽)가
조선조 제9대 성종 때(15세기) 건립한 필경재는 조선전기 전통한옥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恭敬)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
그래서 한옥의 이름을 필경재(必敬齋)라고 했다고 전한다.
한옥을 들어서면 대문에는 현판 '必敬齋'가 걸렸다. 일충 김충현의 글씨이다.
이천수가 건립할 때는 당시 개인의 가옥으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었다.
500여년을 지내오면서 한옥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나머지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1994년 해체 복원되었다. 1987년 4월 8일 당시 문공부는 필경재를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하였다.
전통한옥 필경재는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갓집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 한옥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 때 영의정 혜정공 이유(惠政公 李濡)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 이후원(李厚源) 헌종 때 우의정을 지낸 희곡 이지연(希谷 李止淵) 등
3정승을 탄생시켰다.
순종 때 장원급제를 하여 도승지를 지낸 후천 이윤종(後川 李胤鍾)까지 15명의 종손들이
모두 과거급제를 하는 등 수많은 공신들이 이 전통한옥 필경재에서 태어났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장군과 내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 이상설 열사와 힘께
망국의 한(恨)을 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활약한 이위종 열사도 적계 후손으서 많은 문무관을 배출하였다.
일제치하에서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 설립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광주분교(廣州分校)로도 사용한 유서깊은 한옥이다.
세종의 22명의 자식 중에 적출 5남인 광평대군의 증손인 이천수가 건립해서 지금 까지 광평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제사를 올리는 종가로 사용해 왔다. 지금은 19대 종손이 궁중음식을 맛보이는 고급 사교장으로 경영하고 있다.
세종은 왕비와 다섯 분의 후궁에게서 18남4녀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문종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과 정소공주 정의공주를 낳았다.
세종의 자손들이 대체로 영특하고 미모였다고 한다. 아깝게도 명들이 짧았다. 광평도 20세 젊은 나이에 졸하였다.
성종실록은 광평대군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광평 대군 이여(李璵)가 졸(卒)하였다. 여의 자는 환지(煥之)이고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니, 임금의 다섯째 아들이다.
홍희(洪熙) 원년 을사(乙巳) 5월 임신일(壬申日)에 나서, 선덕(宣德) 7년 임자(壬子) 정월에 광평 대군에 봉하였다.
나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다 통하고,
《문선(文選)》과 이태백(李太白)·두자미(杜子美)·구양수(歐陽修)·소동파(蘇東坡)의 문집들을 두루 열람하였고,
더욱 《국어(國語)》와 《좌전(左傳)》에 공부가 깊었으며, 음률(音律)과 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도
그 오묘(奧妙)한 이치를 다 알았다. 글을 잘 짓고 글씨의 필법도 절묘하였으며, 강한 활을 당겨서 멀리 쏘고,
또 격구(擊毬)에도 능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와 종부(宗簿)의 일을 총관(總管)하기를 명하였더니, 종합하고 정리함에 체제를 세웠었다.
임금이 무안군(撫安君)의 후사(後嗣)가 없음을 추념(追念)하여 입후(立後)를 시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여(璵)가 창진(瘡疹)을 앓고 있었는데,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했으나 끝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죽으니,
임금과 중궁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
여는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용모와 자태가 탐스럽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효제(孝悌)하여 비록 노복이나 사환이라도 일찍이 꾸짖지 아니하매,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다.
시호(諡號)를 장의(章懿)라고 하였으니, 공경하고 삼가고 높고 밝음이 장(章)이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현명하고 착함이 의(懿)이다. 아들이 하나이니 이름은 이부(李溥)이다.
처음 여의 병이 위독할 때 임금이 밤을 새워 자지 않았고, 끝내 죽으매 종일토록 수라를 들지 아니하니,
도승지 이승손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랜 병환이 있으신데 애통하심이 예절에 지나치십니다. 청하옵건대, 수라를 드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그리 하겠노라."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야 죽만 조금 마실 뿐이었다.
백파령(白波令)에게 명하여 상례를 주관해 보게 하고,
첨지중추원사 정척(鄭陟)과 변효문(卞孝文)·예빈 소윤(禮賓少尹) 민완(閔瑗)으로 호상(護喪)하는 일을 시키고,
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사초(李思招)를 명하여 또한 가서 보살피게 하고,
초상 중에 목욕과 염습(斂襲)과 빈소(殯所)에 관한 제구(諸具)를 다 관(官)에서 마련하였다.
정부와 육조에서 조위(弔慰)하는 전문(箋文)을 올리니, 이르기를,
"온화하고 순량한 숙덕(夙德)이 일찍이 종실(宗室)의 꽃부리었더니,
준수하고 풍우한 자태가 문득 황천의 막힘이 되었나이다.
슬픔이 깊이 대궐에 감싸이매, 아픔이 널리 민심(民心)에 맺히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의 비통하심을 너그러이 하시어 신하들의 소망에 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다.
야사에 보면, 세종께서 어느날 어린 광평의 운세를 점쟁이에게 물으니 젊은 나이에 굶어서 죽을 팔자라는 점괘를
듣고 깜짝 놀라 광평이 자손 만대에 먹고 살 대농지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강남 수서 일대의 옥토가 바로 그 땅이다.
실제로 광평은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 걸려 굶어 죽었다고 야사는 전한다.
광평대군에게는 부인 신씨와 태어난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갓난 아들 영순군(1444-1470)이 있었다.
젖먹이 아들과 함께 남겨진 스무 살의 청상과부, 이 죄없는여인에게 인생이란 고해라고 밖에 뭐라고 위로해 줄 수 있었을까.
세종 내외는 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였다 한다. 광평의 부인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비구니가 되었다.
영순군은 궁궐 안에서 세종과 소헌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여 과거에도 급제하고 유능한 관료가 되었다.
그런데 광평의 유일한 핏줄 영순군마저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영순군의 부인 최씨 또한 시어머니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고부는 광평대군 묘(필경재 뒤편 산)에 있던 견성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원당으로 삼고,
하사받았던 광대한 토지(강남 수서 일대)와 노비 절반을 희사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중종의 모친)가 선릉 동쪽 기슭에 있던 견성사를 중창하여 봉은사로 개창하였다.”
'봉은본말사지'의 기록이다. 봉은사의 유래에는 정현왕후와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모친)와 보우대사 이야기만 알려져 있지만
광평의 아내와 며느리의 슬픈 이야기도 이처럼 숨겨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서 광평의 아들 영순군 이부의 죽음 기사를 아래로 옮긴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부(溥)는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아들인데, 정통(正統) 갑자년254) 7월에 낳았고 이 해에 여(璵)가 죽었다.
세종(世宗)이 그의 어려서 고자(孤子)가 된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정부(議政府)에 전지하기를,
"광평(廣平)이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내가 심히 슬퍼한다. 다행히 유사(遺嗣)가 있어 포대기[襁褓]에서 고고(呱呱)히 우니
더욱 불쌍하다. 봉사(俸賜)와 작질(爵秩)을 친아들의 예(例)와 똑같이 하라."
하고, 나이 5세가 되도록 궁중(宮中)에서 길렀다. 일찍이 문종(文宗)·세조(世祖)에게 부탁하기를,
"너희들이 다른 때에 또한 마땅히 나의 뜻을 몸받아서 이 아이를 어루만지고 보살피어 종시에 변함이 없게 하라."하였다.
나이 8세가 되자 가덕 대부(嘉德大夫)를 주어 영순군(永順君)에 봉하고,
경태(景泰) 을해년255) 에 소덕 대부(昭德大夫)를 더하고,
천순(天順) 기묘년256) 에 흥덕 대부(興德大夫)에 승진하였다.
세조(世祖)가 세종(世宗)의 남긴 뜻을 깊이 생각하여 항상 좌우에 모시게 하고
무릇 출납하는 명령과 감핵(勘覈)하는 사무를 대개 많이 위임하였다.
성화(成化) 병술년257) 에 등준시(登俊試)258) 에 합격하니,
세조가 시권(試券)259) 을 가져다 보고 크게 칭찬과 상(賞)을 가하였다.
정해년260) 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함에 있어 부(溥)가 성산(聖算)261) 을 출납하였으므로 공(功)을 책정하여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어 현록(顯祿)에 승진하였고,
무자년262) 에 세조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여 선비를 뽑는데 부가 중시(重試)263) 제일인(第一人)에 뽑히었다.
환궁(還宮)하자 양전(兩殿)이 그 집에 거둥하여 쌀 50석(碩)을 내려 주었고,
기축년265) 에 예종(睿宗)이 남이(南怡)를 베는 데 부가 또한 참여하여 공이 있어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27세였다.
시호를 공소(恭昭)라 하였으니, 공경하고 순히 위를 섬기는 것이 공(恭)이요, 덕을 밝히고 공로가 있는 것이 소(昭)이다.
"공순공(恭順公) 이방번(李芳蕃)·소도공(昭悼公) 이방석(李芳碩)은 모두 의친(懿親)으로서 불행히 후사가 없으니,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를 방번의 뒤로 삼고,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를 방석의 뒤로 삼아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게 하라."-세종실록에서-
필경재는 한 해 약 3만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궁중음식점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과 최고 경영자, 석학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전통을 대표하는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필경재가 궁중음식점으로 바뀐 것은 1999년.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요청해 온 것이다.
“외빈들에게 한국 전통가옥의 모습을 소개하고 음식도 맛 보이는 장소로 만들면 어떻겠냐”
이렇게 제안했던 것이다.
녹천 이유의 11대 종손인 이병무(68)씨는 “양반 집안 종손이 음식점을 할 수는 없다”는 문중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고민 끝에 “나라를 위한 일이니 하자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500년 전통을 지닌 집인 필경재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정식집으로 운영하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지요. 유럽 귀족 집안도 저택이나
고성을 개조해 호텔로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너무 음식점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조리시설은 안채 뒤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했고 길가에 세운 간판에도 ‘필경재’라는
이름 석 자만 넣고 음식점 표기를 하지 않았다.
필경재 별채를 돌아 들어가면 ‘이호당(二護堂)’이 나온다. 주요 외빈들이 비공식 만찬 장소로 즐겨 사용하는 곳이다.
‘가문의 명예와 전통, 두 가지를 지킨다’는 뜻을 담은 이름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보존돼 있다.
이 가운데 이유의 영정과 숙종·헌종 등 조선시대 왕이 내린 교지와 교서는 어느 박물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유물이다.
중국 국가 부주석 시진핑(習近平)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필경재를 찾은 외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들이 보낸 감사 서신도 곳곳에 걸려 있다.
종손이 종택을 지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외로움을 느끼거나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고단함도 주변 사람들의 칭찬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집안 행사 때 종친들이 “집안 관리 잘했다”거나 관광객들이 “훌륭한 문화 유산을 잘 지켜줘 고맙다”고 하면 그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