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담긴 이념의 세계
1.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양반들의 고댁이 남아있기도 하고, 때론 다양한 민가들을 모아놓은 민속촌을 조성하기도 하고 있다. 조상들의 주거시설은 우리에게 과거의 삶을 복원시키는 타임캡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설을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꿈꾸게 한다. 복원된 민가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생각 중에 하나는 주거시설이 너무도 좁고 빈약하다는 인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은 현재의 주거시설을 통해 학습된 우리의 공간 감각이 적용된 결과이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시설을 설치하고 살아가는 현대의 주거시설은 내부의 공간이 클수록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반영한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그 댓가로 대부분의 집은 마당을 잃어버렸다. 전통적인 민가들의 주거공간은 방뿐만 아니라 마당도 포함되어 있다. 마당은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전통집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작업장의 기능뿐 아니라 손님들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가족들의 휴식이자 오락공간으로도 이용했다. 마당을 포함한다면 우리의 전통 가옥은 결코 좁다만은 할 수 없는 열린 공간이었다.
2. 전통 종가가문의 고댁은 유사한 기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높은 솟을대문과 문 옆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행랑채, 그리고 큰 규모로 조성된 사랑채가 있고 다시 내문을 거치면 여성들과 아이들의 생활공간인 안채가 나타난다. 고댁의 가장 중심공간은 사랑채가 있는 곳이다. 사랑채에는 넓은 마루와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외부의 손님들이 모이고 방문하는 접대의 공간이다. ‘대청육간’이라는 말은 큰 규모의 양반집에서 볼 수 있는 마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큰 마루를 가리키는 ‘청’이라는 말이 도청이나 시청과 같이 관공서를 대변하는 말로 변모했다는 사실은 ‘청’의 권위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웅장한 사랑채와 넓은 마루는 양반들의 권위와 위세를 보여주는 상징적 역할을 담당했다.
3. 사랑채가 비대해져 있는 조선시대 양반 가옥들의 특징은 조선 초기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란과 호란을 거친 중후대부터 조선 사회의 이념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이념이 사회적 구조와 경제적 성격을 변모시키면서 나타난 일련의 변화과정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문화의 가장 중요한 변동요인은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서 추동된다. 유럽의 중세가 몰락하고 부르주아지들이 영향력이 확대되고 절대왕정이 등장한 것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문화와 예술의 성격도 변모시켰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변화는 물질적인 요소 뿐 아니라 이념적 요소가 문화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4.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조선사회의 재정립을 위해 지배층이 선택한 것은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남녀의 구별, 반상의 위계적 질서, 충과 효를 비롯한 유교적 이념의 강조를 통해 질서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예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의 위치에 올라왔고 이러한 변화는 주거시설에도 명확히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을 양반가가 몰려있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안동의 하회마을에서 관찰할 수 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양반주택의 사랑채는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독립적인 사랑채보다는 집 앞쪽에 사랑방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약 200년 후에 만들어진 하회마을의 종가 주택에는 거대한 사랑채가 집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다른 시설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가문의 상속도 ‘균분상속’에서, 장자에게 올인하는 ‘종법’이 시행됨으로써 각 가문의 종가는 엄청난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게 되었고 종가의 사랑채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듯이 사람들이 모이고 토론하는 공간인 큰 마루를 가진 대청육간으로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5. 조선 후기 물질적인 변화는 부유한 상민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상층문화를 답습하면서 양반문화를 흉내냈다. 양반주택처럼 커다란 사랑채를 갖춘 집을 지었고, 거기에 더해 안채에도 ‘안사랑채’라는 건물을 지어 부를 과시하였다. 또한 양반집이 사당을 지어 위패나 영정을 모셨듯이 이들도 양반의 유교적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며 사당을 건설하였고 이러한 유교적 이념의 강조는 보통 민가에서도 마루 뒤쪽에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는 간이시설을 만들게 하였다. 성리학적 이념이 조선의 주택 구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6. 조선시대 양반주택(반가), 특히 후대에 만들어진 주택들은 철저하게 유교적 이념과 양반과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의 사회적 성격이 고스란히 투영된 공간이었다. ‘남녀유별’이라는 오륜의 원칙이 가장 내밀한 부부마저도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생활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사랑채’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소박한 공간의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사회가 점점 남성과 장자 중심의 문화로 변화면서 사랑채의 규모는 커졌고 이런 변화에 대하여 정약용도 비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랑채와 대청마루의 확대,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 공간의 분리는 조선 시대 주택에 스며든 이념의 생생한 영향력을 확인시켜 준다. 주택은 단순히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가 반영된 축소된 사회의 영역인 것이다. 현재의 아파트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여성 노동력 활용의 필요성이 반영된 것처럼 조선의 기와집은 성리학적 이념의 재현공간이었다.
첫댓글 - 고착화된 이념은 일상 생활을 간섭하고 억압한다. 실리보다는 다분히 명분을 앞세운다. 그야말로 독재 사회, 닫힌 세계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