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 법사 백성욱 스승 친견기(親見記)
▲(사)청우불교원 김쟁웅 법사(오른쪽)
장사를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역에서 새벽 4시 10분 인천행 첫 버스를 타고 부천 소사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정진하였다. 법문을 듣고 선생님의 자비로움을 모시고 있는 순간은 경건함과 밝음이 가슴에 꽉 차도록 가득하였다.
특히 추운 겨울날 선생님을 찾아뵙던 기억은 유난히 또렷하다. 선생님을 찾아뵙기 전날 청과 시장에 가서 제일 싱싱하고 가장 좋은 과일을 골라 선생님 전에 올릴 공양물을 마련한다. 그 과일들을 하나하나 멍들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행주와 마른행주로 세 번씩 닦을 때 과향(果香)보다 더 진한 공경과 환희의 향내는 온 동네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금강경을 읽다가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싸이렌이 울리면 영하 10도의 날씨에 과일이 얼까 봐 외투와 양복을 제치고 가슴이 시리도록 차가운 과일을 내 체온으로 안고 가는 심정은 오직 부처님을 위해, 선생님을 위해 삶을 다 드리는 구도자(求道者)의 마음이다.
상쾌한 머리, 아늑한 가슴으로 거리를 걸어가면 뿌연 새벽안개처럼 은은한 흰 광명은 한적한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육신이 없는 밝은 마음만 거리 위를 미끄러지듯 가는 귀의처는 오직 밝으신 스승이다. 이는 스승의 고귀함에 눈뜬 한 나그네가 오랜 생전부터 부처님 전에 세운 서원이 이루어진 것이리라.
새벽 첫 버스는 어느덧 소사 삼거리까지 달려왔다. 버스에서 내리면 멀리 신앙촌 건물 꼭대기의 하얀 십자가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고 새벽의 찬 공기가 온 몸에 스며든다. 선생님의 지혜로운 마음 자락에 비쳐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순간도 잘 바쳐 자신이 서는 일과 못 바쳐 놓쳐버린 사건들이 또렷또렷 떠오르며 그럴 때마다 긴장된 마음은 더욱 ‘미륵존여래불’하며 바친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문패 대문 앞에 이르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듯 기다리고 계신다.
“네가 왔구나. 눈이 와서 문 열쇠가 얼었으니 더운물을 가지고 올테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차시다. 더운물을 바가지에 담아 오셔서 자물쇠를 녹여 손 수 문을 열어 주신다. 차양이 있는 두터운 겨울 모자 아래 뵙는 선생님의 환한 안광과 자비스러운 표정에 반가움이 인다. 두터운 겨울 점퍼에다 털실로 짠 회색 바지를 입으시고 털신을 신으신 모습이다.
희게 칠해진 콘크리트 벽의 긴 복도를 지나 법당에 들어서면, 흰벽이 형광등에 반사된 밝은 색깔 외에 더 희고 큰 밝음의 기운이 가득 차 있다. 따뜻한 방 온기가 얼어붙은 볼과 손을 녹인다.
선생님이 뒤 복도로 들어오셔서 방석을 네게 내어 주시고 반기는 얼굴로 방석에 앉으신다. 삼배(三拜)를 드리면 원(願) 세워 주시는 정정한 법음(法音)에 지난 일주일간의 고달픔과 고뇌가 다 녹아내리고 온몸에서 힘이 솟는다. 장궤(長跪: 두 무릎을 바닥에 꿇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들어 상반신을 수직으로 일으켜 세우는 자세)자세로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건넌방에 들어가시면 방석을 벽앞 30cm 가량 떨어지게 놓고 벽을 향해 집중적으로 미륵존여래불 정근을 한다.
▲ 장궤합장 자세
그때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선생님이 너무 반갑고 좋아 존안을 모시고 가까이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무척 많았으므로 건넌방으로 가시는 모습이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마음을 아시고는, “허, 그놈 참!”하시며 다시 앉아서 법문해 주실 때도 있었다.
정진한 지 20분쯤 지나면 등허리의 땀구멍이 따끔거리며, 더 지나면 합장한 손바닥과 등이 훈훈해지며 온몸에 땀이 흠뻑 솟아난다. 몸과 마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땀이 솟아난 뒤 선생님이 오셔서 이제 앉으라고 하면 공부를 마친다.
어떤 때는 방석을 깔지 않은 바닥에서 장궤를 하고 4시간가량 정진을 해도 나오시지 않으신다. 그때는 온몸이 땀투성이다. 또 고성정진(高聲精進)이니 목이 3시간쯤은 꽉 잡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정진하면 음성이 확 터지면서 목청이 더 맑아진다. 온몸이 지치고 무릎은 아픈 도가 지나 멍멍할 뿐이나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
정진하는 동안 처음에는 근래에 괴로웠던 일, 원통했던 일 등이 그때 그 분위기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캄캄하다가, 계속 정신이 이어지면 그 괴로움이나 캄캄함이 하나하나 엷어지고 빛이 바래면서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진다.
닦여지지 않은 무거운 마음과 닦여진 가벼운 마음이 공존하면서 서로 교체되는 상태가 한참 이어지다가 점차 속이 편안해지면서 마음이 한 곳으로 총기 있게 모여진다. 이렇게 모여들면 저절로 무념무상이 되는 데 그때에는 어떤 일의 결과를 알려고 마음먹고 그 생각에다 정진을 바치면 해답이 나온다. 더 잘 바치면 백색 광명이 눈부시게 비치는 것을 친견하기도 한다.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정진을 끝내고 공부할 때 생긴 의문들을 여쭈면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 주시고 이해 못하는 것은 그 생각에다 자꾸 바치라고 하신다. 선생님은 오랜 시간 법문을 하신다. 법문 하시는 선생님의 세계는 맑고 밝을 뿐이다. 선생님께서는 직접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그 이상을 꿰뚫어 보신다. 석가여래 회상에 계시던 인물들의 상세한 표정과 법문, 중국 곤륜산 속에 있는 어떤 골짜기의 굽어진 모양과 그 깊이정도, 그 너머 골짜기에 서식하는 나무와 풀과 화초 등에 대해 마치 그곳에 가 보신 것처럼 소상히 실감나게 법문 하신다.
그리고 우주의 생성 원리, 국가와 세계의 운명, 물리학의 어렵고 깊숙한 문제 등에 대해, 또 어떤 사람에 대해 여쭈었을 때 그 사람의 얼굴과 마음 그리고 미래에 대해 소상히 아신다.
선생님은 모르는 것을 다 바쳐 그냥 아시는 마음이다. 글로 읽지도 안했고, 말로 듣지도 못했던 사실들을 어떻게 그렇게 아시는지 감탄할 뿐이다. 소사에 들어가 공부할 때 매일매일 새로운 법문이 끊이지 않았다. 기억력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듣는 사람의 정도에 가장 알맞은 대답이 늘 새로운 표현으로 이어진다. 어떤 생소한 문제를 물어 봐도 밝으신 지혜거울에 대답이 아니 나오는 것이 없었다. 선생님은 모른다는 분별을 다 바쳐 그냥 마음이 아시는 마음인 것이다.
법문을 마주 앉아 들을 때 마음이 선생님을 향하니 그 광명을 흠뻑 받는다. 선생님을 친견하고 나면 그 기운이 일주일은 간다. 오전 10시경에 겸상을 하여 식사를 드신다. 어떤 때에 밥 짓는 분이 없으면 “내가 아침을 해올 터이니 너는 여기서 공부를 더 해라.”하신다. 더욱 황송하여
“제가 밥 지이 올리겠습니다.”하면 “아니다. 너는 부엌 내용을 잘 모르니 내가 지어 오지.”하시며 나가신다.
간소한 반찬이다. 선생님은 김치를 드실 때에도 늘 맛이 나간 푸른 겉 김치부터 드신다. 고요한 마음에 수저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식사를 한다. 맛도 바쳐진 순간이니 맛있다는 생각도 없이 식사를 끝내고 나면 그냥 배가 부른다.
12시경에
“선생님, 연탄불이 걱정이 되어 가게에 이만 가봐야겠습니다.”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응, 여기 불붙은 연탄불 가지고 가렴.”하시면 유쾌히 웃는다.
한없이 자꾸 바치라고 하신다. 삼배를 올리고 나올 때, 언제나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해 주시면서 천진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한없이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니다.
출처 : 닦는 마음 밝은 마음 (김재웅)
첫댓글 스승님을 향한 지극한 그 마음 너무 밝고 맑고 아름답습니다.
글을 읽는 중 마음이 밝아져 옴을 느낌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