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서예의 어제와 오늘 > 한글서예가 시작된 것은 세종대왕 28년(1446)에 훈민 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 을 창제한 이후 이다. 한문서예가 고대 문자의 생성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과는 달리 한글서예는 불 과 550여년전에 만들어졌으며 조형상,구조 상에서 한문서예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문서예가 사물의 모양을 본따고 의미를 합성한데 반해 한글 서예는 天,地, 人 삼재에 근거를 두고 만든 상형문자이며 동시에 표음문자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서예는 한문서예에 밀려 그 연구 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973 김응현: 정음체, 판본체, 정자, 반흘림, 진흘림 1973 김일근: 반포체, 효빈체(모방체), 궁체(남필, 여필), 잡체, 조화체 1983 박병천: *한글서체-전서체, 예서체, 해서체(정자), 행서체(반흘림), 초서체(흘림) *인쇄체-판본고체, 판본필서체, 인서체 *필사체-정음체, 방한체, 궁체, 혼서체, 일반체 1979 중학 서예 : 판본체, 국한문혼서체, 궁체(정자, 흘림) 1982 권오실 : 한글서예 (정자 흘림 고문 ) 1985 윤양희 : 핀본체, 혼서체, 궁체(정자, 흘림(반흘림)) 1986 김양동: 정음 고체, 언문시체(선비언필체,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 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 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여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 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대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 렵다는 의견도 있다.우리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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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惠風 김광희 - 書藝術 원문보기 글쓴이: 혜풍 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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