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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산 교
1. 개 요
1895년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하고 주변 열강들에 의해 나라의 주권이 상실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잃고 참담한 생활을 하던 힘없는 사람들에게 후천선경(다가올 낙원)을 약속한 이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남조선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지던, 아무 곳에도 끼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 천대받고, 힘없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후천선경(後天仙境)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한 약속을 발설했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이었다. 그의 일대기와 사상이 기록되어있는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을 보면 그의 탄생의 경위부터가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본래 하늘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구천(九天)에 살고 있었는데 이마두(18세기에 중국에 가톨릭신앙을 선교했던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신부를 지칭)를 비롯한 모든 신성(神聖)과 불, 보살들이 엄청난 위험에 빠져 있는 인간 세상과 신명계를 구해 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그 호소를 들은 증산은 서천서역(西天西域)의 대법국(大法國)이라는 나라에 있는 천계탑을 통해서 내려와 삼계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서 신령들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을 보고 한국에 내려오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강림하는 구체적인 장소로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잡았고, 바로 구원사업을 하지 않고 그 불상 안에서 30년을 머물면서 일단은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에게 세상을 구하는 사업을 맡겼으나 수운이 유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에게 내어준 법을 거두고 자신이 직접 세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증산교에서는 이것이 증산 강일순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경위라고 설명은 하지만 강세(降世)의 첫 기착지인 서천서역의 대법국이 어디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없다. 혹자는 대법국이 프랑스라고 하고 천계탑을 에펠탑이라고 주석을 하지만 증산이 태어난 1871년은 에펠탑이 세워지기 훨씬 전의 일이기에 마땅한 해답이 못된다. 또한 증산교의 일파인 증산도에서는 대법국을 가톨릭교회의 성도인 바티칸이라고 또 천계탑을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 앞에 솟아있는 탑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증산이 세상에 올 때 그리스도교의 총본산을 관통했다고 설명을 하고 있으나 실제 어느 나라인지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증산에게 인간계와 신명계를 구해달라고 호소했던 신명들 중에 이마두(마태오 리치신부)가 속해 있다는 것이다. 증산교에서 마태오 리치는 서양사상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진액을 맡고 있는 거물급신령으로 대접받고 있다. 증산의 설명에 의하면, 마태오 리치는 동양으로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서양을 관통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그동안 막혔던 신명의 길이 뚫려 신명들의 동서간 교통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더 나아가 증산은 마태오 리치가 죽은 후 동양의 문명신들을 데리고 서양으로 가 그곳에다 천국의 문명을 실현시킨 공로를 높이 인정하여 마태오 리치를 그리스도교 전체를 관장하는 종장(宗長:최고 우두머리)으로 임명했다. 가톨릭교회 이천 년의 역사 속에는 내어놓을 만한 훌륭하신 성인, 성녀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마태오 리치가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우두머리 신명이 되었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증산의 가르침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그가 죽은 직후부터 계속 늘어났다. 이들 중에서 현재 신도 수에서 천도교를 제치고 한국의 6대 종교반열에 올라있고, 전철역 앞이나 한적한 공원에서 열심히 도(道)를 선전하며 보행자의 걸음을 막고 서서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 즉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나 전국 수십 개 대학에 동아리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개벽’이라는 책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증산도(甑山道)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선전 결과인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증산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럼 과연 증산은 누구이며 증산교는 어떤 종교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증산교를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2. 증산교(甑山敎) 발생의 시대적 배경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의 탄생과 성장 및 활동을 논하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증산과 증산교의 성격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시대적 상황이란 증산이 출생한 1871년부터 그가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체계화(體系化)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한 1902년까지 약 30년간의 상황을 말한다.
1) 정치적 상황
증산이 생존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시기였다. 그가 출생한 1871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은 서구열강들과 약 32개의 강요된 조약을 맺었다. 이와 같이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자 일본을 비롯한 열강제국의 세력과 문물이 국내에 밀어 닥치게 되었고, 이에 편승하여 국내의 권력 엘리트들은 보수 세력과 혁신 세력으로 구분되어 이 두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점차 그 농도를 더해 갔다. 또한 외국세력에 의지하여 형성된 친청(親淸), 친일(親日), 친러(親露)의 신흥정치세력은 저마다의 권력신장에 열중하여 결국은 나라를 정치부재의(政治不在)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렇게 볼 때, 1871부터 약 30년간의 정치적 상황은 국제적 영향과 국내적 권력 계급간의 갈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동을 가져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은 정책결정자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수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내 정책은 일관성을 상실하였고, 국가의 정체위기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계급의 비대화(肥大化) 였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이 있어났으며, 일반 민중은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며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고 관리들의 민중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반 민중의 생활은 도탄(塗炭) 그 자체였다. 그 결과 각 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하여 고종이 즉위한 1864년부터 동학 혁명이 발생한 1894년까지 약 30년 동안 전국에 걸쳐 41건의 민란이 발생했다. 민란은 관리들의 수탈이 특히 심했던 전라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데, 민란(民亂)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던 관계로 동학교도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탄압이 심한 만큼 민중의 저항도 거세어졌으며 결국 동학혁명의 기치(旗幟)를 높이 날리게 되었다. 동학혁명은 민중의 열망과 욕구가 뭉쳐진 저항운동이며 대중운동이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외국 군대의 개입과 동학 조직내의 분열, 무기의 원시성, 중간계급의 반대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혁명이 실패함으로써 혁명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재산은 압류를 당하고 극심한 탄압을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의 염원인 신정부의 수립과 복지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의 상실은 그들을 극도의 좌절의 구렁으로 내어 던져 끝내는 탈희망(脫希望) 계층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3) 종교적 상황
동학혁명 실패에 따른 사회경제적 혼란은 민중으로 하여금 신흥종교로서의 기대를 모았던 동학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와 허탈감을 갖게 하였다. 또한 재래의 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지 못했다. 즉, 유교(儒敎)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반상차별(反常差別)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일분 민중과는 거리감이 있었고, 불교(佛敎)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에 의해 그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여 일반 민중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기 어려웠으며 도교(道敎)는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렇게 조선 말기에는 일반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화된 종교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 결국 일반민중은 생의 혼란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표상체계(表象體系)와 확신체계(確信體系)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세의 영향에 의한 문화갈등현상은 기존 규범체계의 와해(瓦解)를 가져와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도덕적 규제력을 상실한 이른바 아노미(anomie)상태를 불러왔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품고 태어났으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거슬러 자신의 종교교리 체계를 확립했다.
3.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의 생애
1) 출생과 유소년 시절
증산 강일순은 1871년 11월 1일 전라북도 고부(古阜)의 신분적으로는 양반이었으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는데, 그의 일생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못했던 것 같다. 증산교의 초기 경전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은 증산을 상제(上帝)로 추앙하는 추종자들의 기록인 관계로 그의 출생이나 유소년 시절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신기한 이적(異蹟)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출생과 유소년기와 관련된 이적들은 신흥종교의 창시자들의 일생을 소개함에 있어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이다. 이런 이적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창시자들의 신적권위가 배가(倍加) 된다고 믿기 때문에, 여러 신흥종교에서 실제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내용의 이적들이 다량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이나 몰몬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스(Joseph smith)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증산의 태몽과 출생 때에 관한 이적(異蹟)이 여럿 있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몽이적(胎夢異蹟)으로는 “그의 어머니가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세달 만에 낳았다.(대순전경 3판 1장 2절)”고 한다. 또한 출생이적(出生異蹟)으로는 “그를 낳을 무렵에 그의 아버지가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대순전경 6판 1장 2절)”고 한다. 그리고 여느 신흥종교의 창시자들처럼 증산도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으며 갖가지 비범한 행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곱 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즐거이 구경했다고 한다. 이것은 농악이 농민들의 음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뒤에 그가 창교(創敎)를 하며 표방했던 그의 민중 지향성을 설명해 주는 대목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해에 그의 부친이 아들의 비범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가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과 땅 지(地)까지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이유를 물으니 “하늘 천(天)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하며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을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 주십시오.”하여 그 훈장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에피소드는 증산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당시의 유명한 위인들의 어린 시절을 설명할 때 흔히들 사용했던 민간설화이다. 증산교에서는 이 대목을 가리켜 “어려서부터 그의 비범함이 하늘을 찔렀다.”고 선전을 하고 있지만, 종교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어느 누구 하나 이들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는다. 이는 증산의 집안이 극도로 가난하여 더 이상 훈장을 들여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던 가정 사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가 가능한 이유는 증산의 가정은 부친의 부채로 인해 가세가 매우 빈곤하였고, 증산의 나이 14~15세에는 서당을 통한 모든 학업을 중지하고 사방을 주유(周遊)하였다. 이후 머슴살이와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전전했으며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서는 깊은 회한의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증산도 도전 15~17장)는 기록을 통해서 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뼈아프게 느꼈을 것이며,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머슴살이와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失調意識)을 더욱 깊게 하였을 것이고 동시에 여기 저기 머물 곳 없이 떠돌던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당시의 극심했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깊이 관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증산의 체험들은 후일 증산교의 핵심교리인 ‘세상의 틀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한 개벽(開闢)사상의 형성에 큰 밑바탕이 된듯하다.
2) 증산의 청년시대(靑年時代)와 유력생활(遊歷生活)
증산은 21세 때에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다리가 불편한 정씨 성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부인 정씨의 성격이 강하여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가정생활로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 : 세상을 위하는 자)는 불고가사(不顧家事 : 집안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가정생활을 등한시했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외지로 장시간 떠돌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결혼 후 증산은 처가에 가서 서당을 열었는데, 당시 처가에는 음양비서나 참위책 등 많은 책들이 있어서 증산은 이곳에서 한 3년 동안 많은 경(徑)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다 증산이 24세가 되는 해(1894)에 전라도 고부지방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했다. 증산이 동학에 직접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증산교단들 안팎으로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현재의 정설은 동학 혁명군을 따라다니며 싸움구경만 하고 가담은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대순전경』에 의하면 그는 동학군들이 지나가는 길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이런 무력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개벽을 이루지 못하니 몇몇 사람에게 요새 말로 하면 탈영을 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전쟁의 처절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무모하다는 생각을 깊이 했던 것 같다.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실조해소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인 방법보다는 비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비세속적인 방법은 오직 신명(神明)에 의한 도술(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儒彿仙)의 교의(敎義)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 ),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도술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통달(通達)할 수 있는 도통공부(道通工夫)에 골몰하였다. 이렇게 종교인으로서 현실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 직접적인 참여가 없이 초자연적인 힘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점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그의 개혁 방법을 지극히 현실을 무시한 도피적인 처사라고 비판한다.
증산은 27세 때에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 3년간의 함경도, 평안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유력(遊歷)여행을 떠난다. 이 유력여행을 통해 증산은 신흥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증산은 이때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체험한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 신종교의 큰 산맥을 이루었던 남학(南學)의 교주 김일부를 만난 것이다. 증산은 그에게서 후천개벽(後天開闢)에 관한 이론을 배우고 정역(正易)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정역은 증산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천지공사(天地公事)이론의 기초가 된 개벽이론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충남 비인 사람인 김경흔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서 “태을주(太乙呪)”라는 주문을 발견하고 그 후로 가장 중요한 주문으로 삼는다. 이 주문은 “흠치 흠치”로 시작되는 23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증산교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주문으로 여겨지는 탓에 증산교파들은 “흠치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렇게 3년간의 증산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 시켰는데,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도탄에 빠진 일반민중의 실태와 요구를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 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구질서와 구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유력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증산이 맨 먼저 행한 일은 조상들의 공명첩(功名帖)을 불사른 것이다. 공명첩이란 역대조상이 지낸 관직명을 적은 종이인데 이것을 태웠다는 것은 과거 조상들과 심정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증산의 득도(得道)와 교단(敎團)의 형성
앞서 밝힌 대로, 3년여의 유력생활을 통한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를 습득한 증산은 1900년 가을 본가로 돌아왔다. 이 기간까지 증산이 가지고 있던 시대에 관한 이해는 ‘우리나라의 난국은 전 세계의 난국이요, 우리 민족의 고통은 전 인류의 고통이고, 특별히 큰 환란을 겪고 있는 이 나라는 세계적인 대 변란의 중심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절망적인 대(大) 시련에 처한 이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도통공부(道通工夫)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귀가 즉시 송주수련(誦呪修練:주문을 외우면서 하는 수련)의 도통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때때로 호둔(虎遁:호랑이를 쫓음)한다 하며 밤낮없이 동리(洞里)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여겨 상대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증산은 1901년 그의 나이 31세 때, 자신이 아직도 도통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어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기 위해 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서 입산 수도하였다. 대원사에서 기도정념(祈禱正念)으로 수도하기 시작하여 7월 5일에 ‘다섯 마리 용이 불어내는 심한 폭풍우 가운데서 홀연히 광명과 지혜가 열려 천지 대도를 깨달았다’ 한다. 그러나 이 경전은 이상하리만큼 증산의 득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7월 5일 대우(大雨)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를 깨달으시고 탐음진치(貪淫瞋癡) 사종마(四種魔)를 극복하시니”라는 대목이 전부이다.『대순전경』의 다른 곳에 의하면 ‘득도한 증산이 비와 천둥과 번개, 지진과 치병(治病), 신명(神明)의 회산(會散) 등을 마음대로 움직여 천지 안의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났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비관적이다. 당시 주변의 어떠한 기록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순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양의 도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증산도 천지대도를 깨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이라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다른 때에 증산이 자신은 이전의 깨달음을 얻은 도인과 다른 점이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었다. 즉, 이전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위로는 천문에 능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능했던 반면, 자신은 인의(人義)에까지 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인의에 능하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빼었다, 찔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어떻든 증산의 득도에 대한 서술은 이게 전부이다. 이렇게 득도(得道)를 하고 집으로 돌아 온 증산은 그 해 겨울 집에서 창문의 창호지를 다 뜯어버리고, 불도 때지 않은 냉돌방에서 9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홑옷만을 입고 지내면서 무언가 괴상한 글(주문)과 그림(부적)을 백지에 그려서는 계속해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한다. 증산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천지의 도수(度數)를 뜯어고치는 작업, 곧 천지공사(天地公事)였다고 한다.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증산을 추종하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빈농(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동학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모색하던 사람들이었다. 증산이 득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이는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동학교도로 그가 동학군으로 있을 때 이미 증산과 안면이 있던 터였다. 김형렬은 김제 옆의 원평 장에서 증산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치(招致)하여 그곳을 본거지로 포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일가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교도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그 후 9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의 대권을 지닌 세상의 최고 주재자(主宰者) 상제(上帝)로 자임(自任)하면서 신흥종교의 창시자답게 말세를 주장하고 그 끝에 유토피아적인 새 세상이 열린다고 예언하였다.
4) 증산의 죽음
증산은 1901년 7월 5일 득도(得道)를 선언한 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09년 8월 9일까지 약 9년 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하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제자들 중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했다. 예컨대, 신원일이라는 제자가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인사(人事)란 기회가 있고 천리(天理)에는 도수(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어떻든 이렇게 9년 동안의 공생활을 하며 나름대로의 세상을 개벽하는 천지공사로 일관하던 증산에게 서서히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증산교에서는 죽음을 화천(化天)이라고 하는데, 증산의 화천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생의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치달은 것은 어떤 이해하기 힘든 ‘공사’를 행한 결과였다. 이 공사는 증산이 화천하기 2년 전인 1907년에 행한 것이었다. 하루는 제자에게 천지개벽시대에 일어날 전쟁을 준비할 공사를 해야 한다며,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이는 공사를 했다. 제자들에게 전쟁기구랍시고 담뱃대 20여 개를 거꾸로 메게 한 다음 부엌이나 화장실 등을 한 바퀴 돌아오게 하고, 창구멍을 뚫어 거기다 대고 총소리를 내면서 총을 쏘는 시늉을 하게 했다. 그리고 뛸 때에는 줄을 잘 서서 궁을(弓乙)형, 다시말해 태극의 형상을 지어 빠르게 뛰게 하였다. 이 공사를 하면서 증산은 말세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터인데 그때가 되면 재주가 일등이 되는 나라가 상등국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의 발생은 이 공사가 무슨 의미를 지녔는가에 있지 않고 증산에게 닥친 일이었다.
당시에는 전국 각처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날 때였으므로 나라에서는 검문체계를 강화할 때였다. 그런데 여기에 증산이 걸려든 것이었다. 누군가가 증산과 그의 제자들이 공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의병들이 훈련을 하고 있다고 관에 고발을 한 모양이었다. 그 즉시 증산과 그의 제자들은 체포되었고 힘든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제자들은 점차 증산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상의 주제자인 상제로서 천지를 개벽하고 황제에 등극해 자신들에게 높은 자리를 한자리 줄 것으로 믿었던 스승이 보잘 것 없는 세상 경찰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붙들려 와 구타와 고문 등의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감옥에서 증산이 제자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죽어도 원망은 말라.”느니, “곱게 죽는 것이 좋다.”느니 또 어떤 제자에게는 “자식이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느니 했으니 제자들의 불만과 원성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런데 붙잡아 온 제자들을 아무리 취조를 해 보아도 별다른 혐의점이 없자, 15일 만에 그들 모두는 풀려났으나 우두머리인 증산은 천지를 개벽하는 일을 했다는 등등의 황당한 말을 계속해 수감이 된지 40일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이 사건 이후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대부분 떠나고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남았다. 그 뒤에도 증산을 따르는 무리는 크게 줄어들었고, 그가 죽을 때까지도 예전의 교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증산이 최후를 맞이할 때 곁을 지킨 제자가 몇 안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준다.
증산은 자주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견했다. 직접 예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가령 자신이 다시 태어날 때에는 신선처럼 눈이 부셔 잘 못볼 것이라는 등, 또 자신이 죽은 뒤 금산사로 들어가니 보고 싶으면 금산사의 미륵불을 보러오라는 말을 남겼다. 증산은 죽기 10여 일 전부터 아예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는 기이한 행동을 했고 죽는 날 1909년 8월 9일 아침에는 꿀물 한 사발을 마시고 제자 중의 한 사람에 의지한 채 ‘태을주’를 외고는 속절없이 세상을 떴다. 이때가 증산의 나이 39세 때인데, 경전을 보면 비가 내리고 우레가 크게 일었다고 적혀 있으나 믿을 바는 못 되고, 제자들의 반응은 자신들이 신인으로 알고 따랐던 스승이 여느 사람과 별 다르지 않게 죽고, 죽은 모습도 잠자는 모습과 똑같다고 하면서 허망해 했다.
5) 증산 사후의 증산교
증산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했으며 소수만이 남아서 그의 장례를 치렀다. 증산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증산이 죽음으로써 그런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만 것이다. 즉, 종교적인면 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한 결과였다. 그러나 와해된 증산계 종교운동의 본격적인 재건의 불씨는 증산이 죽은 지 2년 뒤인 1911년에 그의 둘째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본명은 고판례:高判禮)에 의해 타올랐다. 고씨는 증산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증산의 부인이 된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를 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 증산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했으며, 증산의 ‘성령’이 자신에게 재림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고씨에게 증산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증산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모여든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고씨는 1914년 강일순을 교조(敎祖)로 하고 자신을 교주(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태을교)라는 명칭으로 증산계통의 최초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날로 번창하자 교권을 장악하려는 차경석이 고씨를 일반 신도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차경석이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고씨를 만날 수 없게끔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느낀 신도들이 차경석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고씨를 등에 업고 따로 태을교(太乙敎)라는 교단을 만드니 이것이 최초의 분열이었다.
한편 차경석은 따로 독립을 해 1921년 처음으로 보화교(普化敎)라는 이름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차경석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를 내걸고 교주로 등극하였다. 이렇게 차경석이 스스로를 천자(天子)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종교를 차천자교(車天子敎)라고 했으나 주위사람들의 질책이 끊이지 않자, 1년 뒤에는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바꿔 조선총독부의 인가까지 받았다. 황제로 등극한 후 궁궐 수십 채를 짓고 나중에 국가를 창건할 의향으로 조각체제(組閣體制)도 갖추었는데 이때 지은 건물이 아직도 서울에 한 채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의 대웅전이다. 나중에 보천교의 교세가 지리멸렬해질 때 그 궁궐 중에 건물하나를 헐값에 헐어다가 불교 조계종에서 조계사 대웅전으로 그대로 옮겨지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총독부 인가 이후 보천교의 교세는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차경석이 발급한 교첩(敎牒)이 있으면 앞으로 차천자가 정식으로 나라를 열 때 벼슬자리가 보장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보천교가 있던 정읍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경석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차경석 자신은 황제로 등극하고 싶었지만 일제 식민지 당국이 자기들의 천황을 능가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보천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차경석이 친일행각을 벌이자 신도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또 『대순전경』을 편찬한 이상호와 같은 유력 간부들도 보천교를 떠나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등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는데, 일제 시대에 보천교에서 갈라진 교파가 20개가 넘었다하니 그 교세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이런 상태의 보천교는 1936년 차경석이 죽고 곧이어 1938년의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후 교세가 크게 위축되어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1945년, 8.15해방을 맞아 지하로 숨어들었던 신흥종교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교단의 재확립은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민중의 정신적 지주의 상실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교단들은 교주들의 노쇠(老衰)에 의해 사망하게 되자 교단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교단들끼리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갈등이 심하게 대두되었다.
현재의 증산교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학계에게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학계의 동향에 따라 증산교단의 활동도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교단들은 경전을 출판하고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하는 한편, 새로운 교단들도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교단으로서는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증산도(甑山道)등이 있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증산도(甑山道)
(1)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는 증산계 교단은 대순진리회이다. 대순진리회는 산하 교당이 3,000여 개, 교직자가 5만 명이 넘고, 신도의 숫자는 자칭 600만 명이나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부설기관을 가지고 있다.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강북지역에서 신설된 대진대학을 비롯한 5개가 넘는 고등학교, 장학재단이 있고, 또한 분당 제생병원을 비롯한 대규모 의료재단, 연구소 및 출판소 등을 갖추고 있어 한국의 큰 종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순진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太極道)를 알아야 한다. 태극도(太極道)는 호가 정산(鼎山)이고 본명이 조철제(趙哲濟)라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태극도의 교주인 조철제(趙哲濟)는 증산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재의 증산계 교단에서는 조철제가 증산의 법통을 계승할 그만한 어떠한 조건도 갖추지 못한 ‘이단아’라고 비난한다. 그는 1895년 12월 4일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는데, 15세 때인 1909년 4월 28일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으로 갔다가 증산계 교단인 보천교의 교인을 만나 증산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고 입교를 했다. 1917경 귀국 후 안면도에 정착을 하여 30여 명의 신도들과 신앙공동체를 만들며 생활했다. 조철제는 이 공동체를 발판삼아 1921년 무극도(無極道)라는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개시하였고, 1925년에는 교명(敎名)을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로 바꾸었다. 교세 확장에 힘쓴 결과 예전에 차경석을 ‘차천자’라고 한 것처럼 ‘조천자(趙天子)’로 불릴 정도의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단 역시 1936년의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 때문에 해산되었다. 해방 후 다시 교단을 재건하여 1948년 부산 보수동에 근거지를 두고 교명을 태극도(太極道)라 개칭하였으며 1955년에는 부산시 서구 감천동 현 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감천동 일대는 신도 2,000여 세대가 집단적으로 생활을 하는 일종의 신앙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1958년 창도주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가 사망하자 교단은 증산 교파처럼 신·구파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였다. 신파는 조철제의 아들을 교주로 해야 한다고 한 반면, 구파는 조철제의 유언이라며 조철제의 수제자인 박한경(朴漢慶)을 교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법정문제로까지 비화되는 등 10년 이상 갈등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1968년 박한경이 용단을 내어 그곳을 나와 서울 중곡동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태극도의 이름으로 전교를 하다가 1972년 드디어 교명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로 바꾸고 태극도와는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대순진리회는 증산뿐만 아니라 조철제 역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태극도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그렇겠지만, 특이한 것은 석가모니도 그들의 숭배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증산이 선천시대의 성인 가운데 석가모니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또 자신이 금산사의 미륵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그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 도장의 영대(靈臺: 대순진리회에서 신단을 모신 건물)의 신단의 구조를 보면 왼쪽에 석가모니를, 가운데 증산 강일순을 그리고 오른편에 조철제의 초상화를 위치시켜 놓았다. 그러나 1996년 박한경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교단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세력으로 분열이 되었고 그들의 신단체계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분열은 1999년 박한경의 처남으로 대순진리회의 종무원장이었던 경석규 측의 사람들이 여주본부 도장을 급습하여 폭력으로 점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양위상제론(兩位上帝論)을 주장하여 증산과 조철제만이 상제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고, 여주본부도장 원장으로서 방심한 사이에 도장에서 쫓겨난 이유종 측의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후신이 진묵대사이고 진묵대사의 후신이 박한경이므로 박한경이 상제가 되어야 한다’는 삼위상제론(三位上帝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시 무력을 동원하여 중곡동 본부 도장을 점거했다.
현재 대순진리회는 여주본부 도장 점거파와 중곡동본부 도장 점거파로 나뉘어서 존재하고 있다. 향후에 어찌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2) 증산도(甑山道)
대순진리회와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증산계통으로는 증산도(甑山道)가 있다. 증산도는 일반보다는 대학교 선교로 유명하다. 전국 수십 개 대학에 ‘증산도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선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전국적 조직의 교수연합회도 있어 지식인 선교에 교단의 사활을 걸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교명(敎名)이 증산도(甑山道)이다보니 일반 사람들은 증산도가 곧 증산교(甑山敎)를 대표하는 교단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 교단 역시 증산 강일순의 법통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각 교단마다 자신들이 법통을 이었다고는 주장하지만 강증산은 생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법통을 넘겨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증산 강일순과 그의 둘째 부인인 고판례(高判禮)에서 찾는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를 수부(首婦)라고 부른다. 수부(首婦)라는 말은 강증산이 “내 마누라를 수부(首婦)로 부르라”고 명령한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따라서 수부(首婦)는 상제(하느님)인 강증산의 아내이고 강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에도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 (道典 3:208)”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밝힌 내용이지만 강증산이 죽은 지 2년 후 기일에 갑자기 고판례가 기절을 했다가 깨어나서는 생전의 강증산과 비슷한 목소리로 말하며 행동을 하는 등 죽은 강증산의 도통이 그대로 고수부(高首婦)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통은 그녀가 세운 보천교에 그대로 옮겨져서 신도들 사이에 면면히 전해오다가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던 안운산(安雲山)과 그의 셋째 아들인 안경전(安耕田)에게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산과 고판례의 도통을 이어받았다는 안운산(安雲山)은 누구인가? 증산도에서는 안운산을 종도사(宗道師)라고 호칭한다. 안운산은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고, 그의 조부모 때부터 가족 전체가 보천교 신자이었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증산사상을 받아들였다. 증산도의 주장에 의하면 안운산이 12세 때에 2주 동안 집에서 수련을 하던 중 만 3일 만에 홀연히 영성(靈性)이 열리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큰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증산 강일순의 대업을 잇는 것이 천명임을 알고 그 일을 자신이 몸소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깊고 큰 뜻을 품었으며,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지를 주유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는 등 숱한 천지도수를 움직이는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 8.15 해방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안운산은 증산 강일순의 이념을 세상에 선포, 전국 각지를 돌며 신도 수십만을 규합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교단의 활동중지를 선언하고 20여 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증산도에서는 이 시기를 안운산이 증산의 의통을 전수받기 위한 대휴게기(大休憩期)였다고 주장한다. 이 기간 동안 사실상 증산도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1978년에 20여 년간의 대휴게기를 끝내고 그의 셋째 아들인 안경전(安耕田)과 함께 1978년 증산교(甑山敎)라는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후 1980년 교단 명칭을 증산도(甑山道)로 개명하고 안경전을 종정(宗正)으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증산도는 1981년 ‘증산도 대학생 포교회’를 발족하여 대학생 선교에 박차를 가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1983년에는 ‘이것이 개벽이다’(상·하)라는 홍보용 책자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증산의 교의를 바탕으로 심령술과 한민족 중심주의를 적당히 합쳐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증산도가 어떤 이유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을 신자로 흡수할 수 있었을까? 이 교단에 가입하는 대학생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심령술과 같은 신비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은 유형일 것이고 또 다른 부류는 한민족 중심주의를 선호하는 유형일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서부터 ‘기 수련’ 혹은 ‘신과학’과 같은 신흥영성운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또 우리나라 고대 문화에 심취한 학생들에게 증산도는 많은 것을 제공해준다. 증산도는 기를 체험할 수 있는 기 체험 과정이 그들 수련 과정 속에 있고 우리나라가 고대에 세계 문화의 종주국이었다고 가르침으로서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또한 ‘천지개벽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다’는 교리는 학생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증산도는 그들의 경전인 도전(道典)을 영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로 번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여러 곳에 그들의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교구가 7개, 도장이 80여 개, 봉직자(교정)가 170명, 신도는 약 100만 명이라고 한다.
증산교의 교리
1. 세계관(世界觀)
종교가 삶의 다른 부분이나 여타 학문과 상이한 고유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나 세계가 갖고 있는 가장 궁극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조망하는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과 ‘인간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세계에는 왜, 어떻게 해서 악이 생겨났는가’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 문제에 대해 창시자 나름대로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증산 강일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증산이 이 문제에 대해 제시한 분석과 해결책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붓다, 공자와 같은 이들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인간 자체 또는 인간의 마음에서 찾았다. 예수그리스도는 이웃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에서, 또 붓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집착 즉 탐욕에서, 공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어짊이 부족함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증산은 인간의 마음보다는 바깥 세계에서 인간 고통의 원인을 찾았다. 인간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살게 된 것은 우주의 틀 즉, 천지도수(天地度數)가 잘못 짜여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증산은 세상의 틀이 원래 잘못 짜여있기 때문에 세상에 원한이 쌓이게 되었고, 지금은 그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 세상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사회의 모든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 우주는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도(道)가 아니라 상극(相剋)의 도(道)로 짜여있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외적인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풀 수가 없는 것이다. 증산이 이 잘못된 틀을 바꾸고 많은 생령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우주적 대화해자(大和解者)’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칭 우주적인 대화해자인 증산이 생각하고 있는 우주는 어떤 우주인가? 증산이 보는 우주는 그가 삼계(三界)라는 낱말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삼층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원한이 삼계에 가득 차 있다’느니, ‘삼계가 혼란에 빠져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문란해졌다’느니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증산이 말하는 삼계는 유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삼대요소, 즉 천(天), 지(地), 인(人)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하늘 세계, 지하 세계, 사람 세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 지하 세계에 대한 언급은 대순전경 5장 12절에 한번 인용될 뿐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천계에 살고 있으면서 인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신명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증산이 말하는 실재의 우주는 이층으로 된, 즉 천계와 인계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증산의 세계관은 한국의 무속적 선도(巫俗的 仙道)에 영항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선도 사상이 대부분 무속으로 흡수되었는데 무속에서의 세계 역시 신들이 사는 천계 또는 영계(靈界)와 인간계 둘로 나누어지고 바로 이 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중개자로서 무당의 역할이 중시되는데 이것은 증산의 세계관과 중재자(仲裁者) 또는 화해자(和解者)로서의 증산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천계(天界 또는 神界)와 인간계(人間界)는 어떠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증산에 의하면 인간세상에서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영(靈)에 의해 건설된 세계, 즉 이 땅에서 생존했던 인간의 영체가 돌아가 또 다른 삶을 누리는 세계가 천계(天界)인 것이다. 이 세계는 인간세상과 똑같은 대층을 이루고 인간세상과 비슷한 구조로 건설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증산교의 관점이다. 즉 천계(신계)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을 말하는 것, 즉 이승과 대층되는 세계이다. 그런데 신계와 인간계는 신비한 교통으로 인하여 인계에 주는 충격은 위로 치닫게 되고 신계에서 결정된 일은 아래로 인계에 파급되어 인계와 신계는 둘이면서 하나로 묶여져 있다. 예컨대 인간세상에서 사람들끼리 싸우면 천상에서 선영신(先靈神)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천상싸움이 끝난 뒤에야 인간의 싸움도 끝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산교에서는 신인상응(神人相應)의 원리라고 한다. 결국 증산교의 세계관은 현실세계(人間界)와 신계(神明界, 死靈界)로 나눌 수 있지만, 그러나 이들 세계는 엄연히 구별되거나 분리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인계(人界)니 신계(神界)이니 하는 구별도 없고, 있다면 그것은 동일한 세계의 별칭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두 세계의 중간에 대 화해자인 증산이 서 있는 것이다.
2. 신관(神觀)
증산교의 신(神)에 대한 개념이나 성격은 일반적인 종교에서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증산의 제자인 김송환이 증산에게 사후(死後)의 일을 물었을 때, 증산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혼과 넋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 신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四代)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서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대순전경 3. 93)”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증산교에서의 신은 유일신이나 절대적인 신의 개념보다는 다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원래부터 인간과 구분된 초월적 절대의 주재자(主宰者)가 아님을 뜻한다. 그들 세계의 신이란 영(靈)과 육(肉)을 지닌 사람이 이 땅 위에서의 인간적 삶을 끝내고 죽은 다음 저승 세계에 들어가 자신의 처지에 맞게 정해진 신분과 위계(位階)에 따라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증산교에는 상제(하느님)인 강증산을 제외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신들이 있다. 증산은 말하기를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대순전경 6, 99)”라고 했다.
『대순전경』에서에서 말하는 신명(神明)은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얼마 동안 살다가 죽은 자들이며, 현세의 인간들의 기억 속에 그들의 행적이 남아 있는 자들이다. 비록 죽어서 저 세상에서 활약하고 있는 존재들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개별성과 시간적 속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명들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산 사람들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지상에서 삶을 영위한 인간의 사후(死後)의 영혼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신이란 인간의 몸속에 있는 인성(人性)의 전화(轉化)이며, 신격(神格)은 인격(人格)의 꼴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신은 인간과 동일한 감정과 욕구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한편, 신의 수효는 지상에 존재하였던 인간의 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순전경』에 나타나는 신의 이름은 무려 113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사람이 죽어서 된 신들이다. 증산이 말한 신, 신명, 혼, 영, 귀신이 모든 인간영체(人間靈體)의 다른 이름들인 것이다.
또한 증산교의 신관과 관련된 독특한 교리는 신인합발(神人合發)사상이다. 즉, 신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인간계의 어떤 일에도 관여할 수 없으며 인간의 협조와 조정에 의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명들이 어떠한 일을 꾀하더라도 인간에게 응기(應氣)하여 인간과 더불어 할 때에만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증산이 말하기를 “선천(先天)에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니라.”(대순전경 6, 106)라고 했다. “신인합발(神人合發)”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 곧 신이 하는 일이고, 신이 하는 일이 곧 사람이 하는 일이라 뜻이다. 종합해 보면 증산교의 신관은 의인간적 다신관(擬人間的 多神觀) 또는 신인동형적 신관( 神人同形的 神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보면, 죽은 인간은 피조물이지 증산교에서처럼 죽은 후에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계(神界)에서도 계급이 있다고 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 신명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주재하고 인간을 도와 함께 일을 이루어 나간다고 하지만, 인간이 도통공부를 하여 신안(神眼)이 열리면 신명을 부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신은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존재, 인간에 기생하는 존재,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존재이다. 결국, 증산교에 있어 신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신관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증산교는 인간의 사령을 신으로 생각하고, 그 신을 섬기거나 부리며 주술을 행하는 다신론적 무격(巫覡) 종교라고 할 수 있다.
3. 구원관(救援觀)
1) 천지공사(天地公事)
증산교의 구원관의 핵심은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있다. 천지공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증산교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대순전경』을 집필했던 이상호(李祥昊)가 서문에서 천지공사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하고 그 뜻 역시 분명치 못한 것이 많다고 밝히는 바와 같이 그 내용을 확실히 파악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또 많은 경우 천지공사의 주요 내용이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奇行)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해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1) 의미
천지공사에서 천지(天地)는 단순한 물리적 실재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이 죽어서 가는 지하 명부세계(冥府世界)와 일체의 천상 신명계를 아울러 포함한다. 공사(公事)는 동양 전래의 치세용어(治世用語)인데, 조선왕조의 관아에서 관장이 공무를 처결하기 위해 수하관원을 모아 회의를 열 때 흔히 공사를 본다고 하였다. 증산은 자신의 행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적인 업무임을 드러내고자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천지공사는 천(天)·지(地)·인(人)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상제, 즉 절대자인 증산이 이 세상에 내려와 자신의 권능으로 그릇된 상극이치(相剋理致)의 지배를 받아서 혼란에 빠진 선천의 세계를 뜯어 고쳐, 후천 선경세계를 건설하여 사람과 신명으로 하여금 안락을 누리게 한 일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천지공사는 선천 시대의 불합리한 운행질서, 이법(理法) 등을 타파하고 후천선경(後天仙境)을 열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법을 제정하는 프로그램의 기획작업을 의미한다.
(2) 전개과정
천지공사의 이유와 방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혼란에 빠진 이 시대는 말세(末世)이다. 말세 이전의 세계는 선천(先天)이며, 말세 이후의 미래 5만 년의 세계는 후천(後天)이다. 이 시대가 말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천이 상극의 이치가 지배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즉 선천은 상극지리(相剋之理)가 인간사물을 맡았기에 모든 인사(人事)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怨寃)이 맺히고 쌓여 삼계(三界)에 넘치게 되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의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상극의 이치란 대립과 경쟁을 통하여 생존이 유지되는 이치를 말한다. 경쟁에 진 패배자는 승자와의 공존이 허용되지 않는 냉혹한 투쟁의 원리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가 유형무형의 대립관계로 얽혀져 혼란복멸(混亂覆滅)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상의 혼란은 신계(神界)의 혼란에 기인한다. 따라서 지상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신계의 혼란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방법은 천지안의 모든 신명들에게 각기 위계와 임무를 다시 정하여 주어 신계의 새로운 정부조직, 곧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세우는 것이다. 증산교에 의하면 조화정부란 천지안의 모든 신명들에게 새로운 위계와 부서를 정하여 각기 일을 주장(主掌)하게 한 다음에, 신명들과 온 인류의 뜻을 대변하는 종도들을 합석케 하여 그 자리에서 선천의 그릇된 세계를 뜯어 고쳐 후천 선경세계(後天 仙境世界)를 건설할 모든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고 결정된 바를 그대로 집행하는 우주의 통치기관이다.
새로운 정부조직을 세워 신계를 통일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신명들의 원한(怨恨)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쌓인 한(恨)이 너무 많아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다 풀 수는 없기에 원한의 시초를 찾아내어 그 매듭을 풀어야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증산은 인류 최초의 원한이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인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 임금에게 단주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다. 생소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단주는 아마 임금이 될 재목이 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설화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요 임금은 두 딸을 순(舜)에게 시집을 보내고 천하를 그에게 맡긴다. 이 때문에 단주는 큰 원한을 품게 되었는데, 그 악한 기운이 순(舜)을 창오(蒼梧)에서 죽게 하고 두 왕비는 소상에서 빠져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인류의 한은 바로 이 단주의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한은 모두 이 한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만 풀면 모든 한이 줄줄이 풀리게 되고 신계에 스며있던 모든 원한이 풀려 안정이 되고, 원한이 풀린 신명은 증산을 도와 조화정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계(神界)의 원한을 풀어 모든 신명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성한 조화정부에 참여시킨 증산은 천지간의 주재자, 대권자로서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 잡는다. 곧 천지의 도수(度數)를 뜯어고쳐 후천선경을 열어놓을 시간표를 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세계는 증산에 의해 짜여진 시간표대로 제 한도를 지키며 돌아가다가 결국은 새로운 기틀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두를 천지공사(天地公事)라 한다. 결국 우주를 주재하는 절대신인 상제 증산이 자신의 권능으로 지금까지 쌓여온 인간과 신명의 모든 원한들을 해원시키고 우주의 운행질서를 상극에서 상생으로 뜯어 고침으로써 후천선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증산은 자신이 천지공사를 행하는 것은 ‘신망강세(神望降世)의 원리(原理)’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망강세(神望降世)의 원리(原理)’란 인계(人界)의 곳곳에 큰 사회변동이 생기면 신계(神界)에서 그러한 사회변동에 대처할 만한 인물을 낸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말세에 이르러 큰 겁액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증산뿐이므로 천계의 모든 신명들이 증산에게 세상의 구원을 청했다는 것이다. 증산은 신명들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이 세상에 내려와 자신이 천지공사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산은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로되, 천지신명들이 모여들어 법사(法師)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기에 괴롭기는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다.”(대순전경 4,167)고 했다. 그러면 천지공사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주 등장하는 도수(度數)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천지공사의 이해는 도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전제된다. 증산은 자신의 천지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천지운로를 뜯어고쳐 물샐 틈 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대순전경 4,173) 이에 의하면, 도수는 음양상수(陰痒象數)의 이법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예정된 것으로서 인간과 천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우주정신의 법도로서 자연섭리요, 천지의 생존질서이고 천지운수의 설계도이자 시간표이다. 구체적으로 천계의 신명과 지상의 인간과 만물이 세월이 감에 따라, 신명들은 어떻게 역사하고 인류사회는 어떻게 발전하며 만물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그 변천의 원리와 변동의 규모와 변화과정을 빈틈없이 짜 놓은 우주의 대설계도이며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증산교에서는 도수를 인간과 천지의 운명에 관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증산교에서는 선천(先天)의 도수는 잘못된 것이었기에 뜯어고쳐야만 하며, 원래 이 도수는 불변적인 것이지만 무한한 권능을 지닌 상제 증산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수의 조정작업을 천지공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와 같은 혼란한 세계는 수습될 수 있는 동시에 천지개벽도 보다 일찍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 한다.
(3) 천지공사의 이념
천지공사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상과 이념의 특징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① 신명계와 인간계에 맺힌 원한의 기운을 해소하려는 해원이념, ② 모든 신명들을 보은 줄로 연결하려는 보은이념, ③ 모든 신명들을 협동으로 화합 집결하려는 상생이념, ④ 후천의 새 이념과 새 규범과 새 질서를 창조하여 새 세계로 진화케 할 조화이념이다. 증산은 김일부의 정양(正陽)사상을 자신의 우주관의 기초로 선택하여 우주는 선천과 후천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현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교역기 곧, 말세라고 보고 있다. 말세의 혼란은 선천의 상극이치에 의해 생긴 원한 때문이다. 말세의 혼란을 해소하는 방법은 이 세상 가득 쌓인 원한을 푸는 것이다. 천지 인간과 신명들의 원한을 풀어 줌으로써 결국에는 지상선경이 이룩된다는 것이다. 먼저 증산은 “이때는 해원시대라, 이제는 해원시대라”(대순전경 3, 61: 6, 5: 6, 134)라고 선언하여, 인류사의 온갖 원한이 풀어져서 결국은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원된 신명들은 이에 고마움을 느껴 보은을 하려하고, 보은을 하려는 상태에서는 상극의 이치를 넘어 상생의 이치로 나아가게 된다. 상생의 구체적인 실천이념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인존(人尊)이다. 인간은 하늘보다 땅보다 존엄한 존재이며, 따라서 앞으로도 원한이 쌓이지 않게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증산은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다고 하며,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라 하였다.
① 해원이념(解寃理念)
증산의 천지공사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이념이 바로 ‘해원이념’이다. 해원(解寃)이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맺힌 원한을 풀어버리고 또 새로운 한을 맺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쌓이고 쌓인 신명과 인간들의 원한을 풀어 없애고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명과 인간과 만물이 선경(仙境)에서 살 수 있도록 마련한 이념이 바로 이 해원이념(解寃理念)이라고 한다.
증산은 통일신단(統一神團)을 형성하고 조화정부를 세울 때 선천의 세계에 있는 각 족속의 여러 갈래의 문화와 종교를 통일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증산의 통일 방법은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각 종교마다 책임자를 선정하고 그 책임자들을 자신이 대표의장으로 있는 통일신단 혹은 조화정부의 일원으로 선발한다. 우선 신명의 해원조화정부에 기존의 각 종교의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는 종장(宗長)을 두었는데, 동학의 수운 최제우는 선도(仙道)의 종장, 진묵(震默)은 불도(佛道)의 종장, 이마두(마태오 리치)는 서도(西道:그리스도교)의 종장,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는 유도(儒道)의 종장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들 네 사람은 주자를 빼고는 모두가 이 세상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원신(寃神)들이었다고 주장한다.(대순전경 5, 9) 수운 최제우의 경우는 그가 동학혁명을 이끌다 참수를 당했으니 한이 맺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묵과 이마두(마태오 리치)의 경우는 증산방식의 설명이라서 결코 이해하기가 힘들다. 먼저 진묵의 경우를 보면 ,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 - 1633)는 조선조의 승려로서 생존 당시에 이미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칭송을 받았고 이적을 마음대로 보일 수 있었던 신승(神僧)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 없어 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한 상태이다. 그런데 증산은 어떻게 알았는지 진묵에 대한 매우 희한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에 의하면 진묵은 유교학자 김봉곡이라는 사람과 가까이 지냈는데 김봉곡이 진묵의 도술을 시기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진묵이 시해(尸解 : 영혼의 체외 이탈법)의 방법을 써서 서역으로 인도 철학과 불교를 공부하러 간 모양이다. 그러니 이 땅에 남은 것은 ‘정신 나간’ 그의 몸뿐이다. 그런데 마침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봉곡이 진묵을 제거할 수 있는 호기라 생각하고 진묵의 ‘몸뚱이’를 가져다가 불에 태워 버렸다. 여드레 만에 돌아온 진묵은 이 참변이 김봉곡의 소행임을 알고 가슴을 치며 한탄을 한다. 진묵은 봉곡의 질투로 인해 천하를 문명케 하려던 자신의 뜻이 좌절됨으로 인해서 큰 한을 품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증산이 그를 후천시대의 불교를 책임지는 종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앉힘으로써 진묵의 가슴깊이 사무친 한을 해원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두(마태오 리치)에 대한 관한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증산에 따르면 마태오 리치는 동양으로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서양을 관통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그동안 막혔던 신명들의 길이 뚫려 신명세계의 동서간의 교통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증산은 한술 더 떠 마태오 리치가 살아있을 때는 동양에서는 천국의 문명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들을 몰고 서양으로가 그곳에다 천국의 문명을 실현시켰다고 했다. 이렇게 마태오 리치는 동양에 와서는 하고자 했던 일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던 한이 맺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산은 그의 한을 풀어주면 자신의 일을 도와줄 것이라고 짐작한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그를 그 중요한 서양 문화의 핵심인 그리스도교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종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마태오 리치는 동양을 서양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유교의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이렇게 동양의 문화를 서양에 충실히 소개했고 성공적으로 그의 선교업무를 마친 선교사가 한이 맺혔고, 또한 죽은 후에 동양의 문명신을 몽땅 몰고 서양으로 갔다는 이야기 자체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 밖에도 의문점들은 많다. 우선 증산은 왜 선천시대의 주요 종교로 유. 불. 선. 그리스도교라는 네 종교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인류정신사를 훑어보면 위의 네 종교 이외에도 중동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있다. 그런데 전 세계를 속속들이 관장하는 상제(하느님), 증산은 이슬람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아마 증산은 한국이라는 지리적, 사상적 고립 속에서 이슬람교의 존재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증산이 제자들에게 가장 영험하다고 권한 주문(呪文)들도 그 안에 해원의 원리가 스며있다. 태을주(太乙呪)는 김경흔이라는 사람이 50년 동안 도통공부를 할 때 사용하다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한 미완성 주문이다. 또 최제우의 시천주(侍天呪)도 그의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있는 주문이다. 증산은 이 주문을 만든 사람들의 정성뿐만 아니라 이루지 못한 데에 대한 원한이 서려있어 영험한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그 원한만 풀면 그 효력을 훨씬 더 강력하게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증산은 한이 풀리면 인간 세상에 재앙을 끼쳐오던 살기(殺氣)를 막을 수 있고 상생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② 보은 이념(報恩 理念)
보은(報恩)이란 글자 그대로 입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증산의 천지공사의 전편에 흐르는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은사상이다. 증산은 “밥 한 그릇만 먹어도 잊지 말고 반 그릇만 먹어도 잊지 말라.”(대순전경 6, 40)고 했다. 한 그릇의 밥이라도 그것을 내가 먹게 되기까지에는 그 밥을 먹게 해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되고 이런 마음과 자세로 천만사물을 살펴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은혜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 내용이다.
증산은 또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지 않는다.”(대순전경 6, 132)고 했다. 이 말은 배은망덕을 하게 되면 신계(神界)에서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말인 것이다. 증산은 또 어느 때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神)(대순전경 4, 125)이라 썼다. 이 글귀는 배은망덕을 하게 되면 만 번이나 죽게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은혜를 입은 줄 알았으면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해야 된다는 도덕의 원리를 가르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증산은 수많은 보은중에서 조상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최고 으뜸으로 보아 선영제사(先靈祭祀 : 조상제사)를 특별히 강조했다. 그런데 증산은 이렇듯 일상생활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이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생활, 특히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도통천지보은(道通天地報恩)”(대순전경 4, 139)이라 하여 가장 큰 보은 행위는 수도를 잘해서 도통하여 천지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보은사상의 극치로서 마치 유교에서의 대효(大孝)나 불교에서의 출가자의 효가 큰 인격을 이루어 국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라 가르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증산교의 보은 이념 안에는 유교와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효’이념과 ‘무속의 조상신 숭배’가 하나로 습합되어 있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증산이 보은에 대하여 또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보은이념이 현재의 증산교에서는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가? 그 대답은 매우 부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증산교의 분파인 증산도나 대순진리회에서 신입회원을 모집할 때에도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상숭배를 강조하지만 그 목적은 엉뚱한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그들은 초심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대뜸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조상의 혼령이 편치 않아서 그렇다.”는 둥, 또는 “지금 당신의 어깨 위에 조상의 원혼이 올라가 앉아 있어서 무언가에 눌린 듯이 몸이 뻐근할 것이다.”라는 등등의 이상한 말을 건네고 있다. 이런 단정적인 접근에 놀라서 그 해결법이나 처방에 대하여 물으면 천편일률적으로 “한 맺힌 조상령이 분노하고 있으니 해원을 위해서 치성(제사)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치성을 드리기 위해서는 정성이 있어야 하고 정성은 곧 금전적인 요구로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증산교에 심취했다가 탈퇴를 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조상에 대한 보은을 매개로한 치성을 이유로 금전적인 편취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③ 인간존엄 이념(人間尊嚴 理念)
증산은 천지공사에 있어서 해원을 넘어서 상생을 추구한다. 원한이 해소된 상태에서 보은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보은의 자세가 있어야 상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상생이란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하나로 일치하여 남이 잘되게 하는 이타(利他)의 협동원리이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상생은 곧 인존사상으로 귀결된다. 그는 “인망(人望)을 얻어야 신망(神望)에 오를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어야 신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증산의 인존사상은 동학이 제시하고 있는 인내천 사상에서와 같이 인간과 신을 동등한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하게 됨을 강조함으로써, 신이란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조정여하에 따라서 마음대로 부려질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곧 신들은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존재이고 인간의 협조와 조정에 의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돌아오는 후천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지혜가 완벽하게 열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방세계의 모든 일을 통달한다고 했다.”(대순전경 5, 16) 그 때에 신명들이 인간을 공적으로 받드는 인간존엄의 절정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결국 증산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현대판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④ 민족주체 이념(民族主體 理念)
대순전경에 의하면 증산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천지공사를 통해 전 우주의 틀을 다시 짠 다음 온 힘을 조선(한국)에 집결시킨다. 이제부터는 모든 문화가 전초기지인 조선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조선인은 이른바 선인(仙人)이 되는 것이다. 증산교의 주장대로라면 증산이 이 세계에 내려올 때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의 미륵불을 우주목(宇宙木)으로 삼았다면 조선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잇는 우주국(宇宙國 : cosmic divine country)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산의 선민의식은 그가 신흥종교의 교주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흥종교의 교주들은 시대나 국적을 불문하고 항상 자기가 태어난 지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설파해왔다. 통일교의 문선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한국이 재림예수가 강림할 곳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른바 자민족 중심주의이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자긍심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지극히 이기주의적이고 소아병적인 자기과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전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하느님)가 바로 우리나라로 내려왔다고 믿기 때문에 증산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가장 중요한 국가이다. 증산이 우리나라를 최고의 나라로 생각한 것은 그의 언행이 적혀있는 대순전경의 여러 곳에서 보인다. 증산에 의하면 조선은 잘될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세계에 퍼져있는 한으로 똘똘 뭉쳐있던 여러 굵직한 신명들을 조선만큼이나 극진하게 대접하여 해원을 시켜준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접을 잘 받고 한이 풀린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으려고 사방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잘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증산은 조선이 모든 나라 중에 가장 으뜸국인 천자국(天子國)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천자국에만 ‘시두손님’이라는 대신명이 찾아오는데 그 ‘시두손님’이란 대신명이 자기가 행한 천지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말로 뜬 구름잡는 소리같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시두손님이란 대신명은 천연두신을 의미한다. 당시에 천연두에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이 역병은 환자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흔적으로 남기는 고약한 병이었기에 누구나 이 병에 걸릴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천연두를 두려워한 나머지 신격화하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두손님’이라는 존칭을 써서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왜 천연두가 천자국에만 찾아오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문제는 천연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전염병이었다는데 있다. 천연두가 퍼지는 나라가 천자국이라는 주장은 증산의 억지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든 증산은 이제 온 세계의 지역문화가 천자국인 우리 한국을 중심으로 통합될 것인데, 특히 우리 문화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문화의 시원적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증산은 이것을 원시반본(原始反本)이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했다.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原始)로 반본(反本)된다.”(대순전경 3, 47) 또는 “이 시대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혈통 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대순전경 6, 124)고 했다. 즉, 원래 우리 자신이 근본 뿌리가 누구인지를 찾아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증산교에서는 우리의 단군신화를 매우 중요시 한다. 단군을 우리나라의 국조로 숭배하는 것이다.
증산교에서 국조 단군을 처음으로 받든 사람은 증산의 제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병선(金炳善)이었다. 그는 치성을 올릴 때 천정에 길이 3척이 넘는 백지에 ‘강성대제(姜姓大帝 : 강증산)’라 써서 머리가 동쪽으로 가게하고 끝이 서쪽이 되게 붙이고 그 왼편 벽에는 환인천제(桓因天帝), 환웅천왕(桓雄天王), 단군왕검(檀君王儉) 3위 위패를 써 붙였다고 한다. 이후 또 다른 제자인 이정립(李正立)이 주장하기를 우리나라의 상고시대에 이미 삼신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그 신앙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원시로 반본하여 삼신신앙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회복을 위해서는 중계적 계시가 요청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삼신(三神)은 바로 환인천제,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삼위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김병선이 처음 환인, 환웅, 단군등의 국조를 받들고 이정립에 의해서 삼단 신앙체계가 이론적 정립이 된 이래로 증산교 각 분파에서는 앞을 다투어 국조 단군을 받드는 교파가 다수 생기게 되었다. 현재 증산도를 비롯한 7,8개의 증산교 교파에서 국조단군과 연관된 신앙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증산교가 주장하는 민족 주체 이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즉 조선은 상제를 맞이한 유일한 민족이며, 배달겨레인 조선은 증산의 천지공사의 결과로 후천 5만년 지상선경의 중심지로서 세계통일 종교와 세계통일 문화를 건설할 큰 사명을 수행하며, 미래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최상의 영광을 누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족 주체성에 심취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삼단신앙체계는 매우 매력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종교이론치고는 그 범위가 너무나 협소하다. 한 국가의 테두리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증산교에 대한 결론
세계관
증산교의 세계관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나 절대자에 의한 우주 창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창조론이 빠져 있는 것이다. 증산은 단지 존재하던 우주의 주재자로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즉 선천과 후천, 신명계와 인간계로 나뉘어져 있는 세계에서 구천상제로서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증산 역시 결국 하나의 피조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증산교계의 일파인 증산도의 주장에 의하면 주재자 역시 음양의 조화에서 생겨났고, 이미 있던 우주는 ‘증산’이라는 주인을 만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신 관
증산은 자신이 하느님이요, 미륵불이며, 옥황상제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기 위한 설명이었다. 즉 증산은 자신과 절대자를 동일시하는 ‘과대 망상적 병증’의 소지자로서 자기 스스로가 절대자라고 확신하게 된 허황된 종교 체험을 당시 혼란한 상태에서의 탈출을 갈구하던 민중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주장이 가장 권위 있는 말,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마지막 말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당시 민중들에게 잘 알려진 여러 가지 신적 호칭들을 자신과 결부시켰던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되어 지상에서의 역할에 따라 위계질서를 가지고, 인간과 계속해서 관계한다는 그의 주장도 허황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지 증산교에서처럼 죽은 후에 신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신명들이 원한에 쌓여있고 그 원한은 인간만이 풀어줄 수 있으며, 인간에 의해 원한이 풀린 신명들이 그 고마움을 감출 수 없어서 앞을 다투어 인간을 돕게 된다는 발상 또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결국 신은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존재, 인간에 기생하는 존재,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존재이다. 증산교에 있어 결코 신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과연, 신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단체를 종교라고 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관
증산교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 없다. 단지 지금 말세를 맞이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 특히 민중을 구해야 한다는 것 뿐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인간은 신명에게 종속되는 존재였으나, 후천시대에는 인간이 신보다 더 존엄하고 귀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후천에는 인간이 신보다 높은 인존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 인존사상은 당시 사회적 현실로 볼 때 인간이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신에게 의지하여 보았으나 실패하였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에도 의존하여 보았지만 결국 동학혁명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을 신보다도 높은 존재로 보아야만 참다운 평등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증산의 종교적 망상의 결과이다.
그러나 증산교의 인존사상은 한국인의 현세중심적인 사고에서 연역된 결과이다. 인간을 구원해 줄 뚜렷한 신,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했고, 동시에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이 귀하고 존엄하다는 사상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원관
증산교의 구원관은 매우 현세중심적이다. 이 현세중심적인 성격은 한국의 전통적인 신관과 저승관에 기인한다. 저승은 죽으면 누구든지 가야만 하는 막연한 곳으로, 이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저승의 모습은 이승의 모습이 그대로 전이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심판,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하는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히 인간 중심 사상과 현실적인 가치만을 절대시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현재의 생활이 좀 더 편해지는 것 이외의 어떠한 의미도 없다.
증산은 이러한 민족 재래(在來)의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하여, 해원을 통한 천지공사의 결과로써 후천선경,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증산의 지상낙원은 인존시대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인간중심적이며 현세중심적이다. 따라서 천지공사라는 것은 증산 자신의 실조의식(失調意識)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스스로 당시의 혼란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장길산의 미륵운동이나 동학과 같은 길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모순된 사회현실, 구조적 문제 등을 개혁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없었기에 주술, 주문, 도통과 같은 허무맹랑한 종교적인 방법을 동원했고 이러한 방법전환으로 자신의 실조의식을 해결하려 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