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백고조부(伯高祖父)인
청금(聽禽) 선생이
영천(靈川) 신 선생(申先生)의 사우 건립을 앞장서 주도하였다. 이어 영천 신 선생의 행적을 꽤
자세하게 설명하며 “영천자(靈川子)께서 이곳 장흥 땅에서
오랫동안 귀양살이하며 존경하고 받든 이는 건산 처사(巾山處士) 양공(梁公)이 으뜸이다. 항상 남주
고사(南州高士)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처사공의 외손녀 김씨(金氏)가 우리 7대조 진사(進士) 부군에게 시집왔기 때문에 처사공의
유사(遺事)와 전설이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 비록
처사공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부족하지만 양 처사(梁處士)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나 말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아는 내용을 삼가 기록한다. 행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사공의 휘(諱)는 억주(億柱)이고, 자(字)는
가지(可支)이다. 시조는 탐라(耽羅)에서 시작하였는데, 신라 때
성주(星主) 벼슬을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러 대족(大族)이 되었다. 족보는 고려 때 유격장군(遊擊將軍)
보숭(保崇)을 시작으로 9세(世)에 걸쳐 벼슬이 이어져, 실로 훈도(訓導)를 지낸 처사공의 아버지 휘 효생(孝生), 찰방(察訪)을 지낸 할아버지
휘 징(澄), 부사(府使)를 지낸 증조 휘 천택(川澤)에게까지 이른다.
처사공은 자라면서 이른 나이에 문장을 이루었으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겨우 20세의 나이에 한양으로 올라가 10여 년 남짓 공부했는데, 이때 교유한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류(名流)였다. 그 가운데서도
정암(靜菴)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과 가장 교유가 돈독하였다. 연산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져 무오년(1498, 연산군4)과 갑자년(1504)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벗들은 거의 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는데 처사공은
다행히 연루되는 상황을 모면하여 은거하면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여러 훌륭한 인물이
세상에 많이 나아가자 예전에 그만두었던 과거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였다.
경오년(1510, 중종5)에
상상(上庠)에 올랐는데 신진(新進)들의 기상이 지나치게 격양된 모습을 보고 또 혼자 탄식하기를 “만나기
어려운 것이 때이고,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일이다.”라고 하고는, 곧 새로 합격한 생원 신분으로 고향에 내려가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살았다.
손님이 와도 번번이 병을 핑계 대며 거절했고, 집안사람에게는 바깥세상 일을 자신에게 말하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살던 곳인 건산리(巾山里)는
장흥부(長興府) 치소와 거리가
아주 가까웠는데, 단 한 번도 성곽에 발길이 닿지 않았다. 뜰의 대나무와 방문 앞의 매화가 어우러진
집에서 책을 읽으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니, 마침내 고을 사람들이 건산 처사라고 불렀다. 처사공이 시골로 내려온 지 겨우 10년 만에 과연
사화가 일어났다.영천 신공 잠(申公潛)이
안처겸(安處謙)의 옥사(1521, 중종16)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귀양을 와 동쪽 성곽 주변에
기거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건산 처사를 칭송하는 말을 듣고, 수소문해서 상사(上舍) 양가지(梁可支)임을 알게 되자, 바로 사람을 보내
뵙기를 청하여 서로 만나 손을 부여잡고 회포를 풀었으니, 귀양살이 가운데 진귀한 만남이라고 하겠다.
기사년(1509)에 처사공이 성균관에
있을 때 영천자는 나이 어린 뛰어난 선비였는데, 처사공을 한 번 보더니 마음이 기울어 사표(師表)로 삼았다. 처사공이 경오년(1510)에
고향으로 내려온 뒤 10년 동안 한 번도 한양에 소식을 묻지 않아 서로 생사를 전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적막하기 그지없는
바닷가에서 반갑게 만났으니, 그 기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흥이 일면 서로 만났지만 단지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었을 뿐, 당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군자처럼 사귀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정이 얼마나 친밀한지 엿볼 수 없었다.
서로
화답한 시율조차 초고를 모아 두지 않으며 “선비가 이런 세상을 만나 구차하게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이지, 이런 시를 모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홀로 달 밝은 밤마다 산책하며 장가(長歌
곡조가 긴 노래)를 읊조렸는데, 음운이 청명하기
그지없어 듣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안구(安矩)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필원(弼元)이며 사직(司直)을 지냈다. 사직 필원은 생원 간(幹)을 낳았고, 생원 간은 주부(主簿)를 지낸 자하(自河)를 낳았다.
아,
연산군 무오년(1498, 연산군4) 이후에 참으로 선비들이 은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먼 앞날에 있을 기미까지 살펴 은거한 사람은 또한 드물었다. 처사공은 홀로 궁벽한 시골의 수재로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니, 이미 보통 사람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정릉(靖陵
중종) 초년이 되어 국가의 큰 운명이 다시 회복되고, 순한 바람을 타듯
여러 인재가 세상에 나오니, 가을이 와 귀뚜라미가 우는 듯했다. 처사공은 다시 옛 책을 익히고 발바닥에 못이 박이도록
도성으로 향하였다. 도성에 처사공의 명성을 알아주는 옛 친구들이 여전히 있었고,
〈녹명(鹿鳴)〉을 새로 노래하여 훌륭한 인재가
성균관에 가득하였다.
앞길에 뜻을 두고 몇 해 동안 포부를 펼쳤다면 현량과(賢良科)에 이름을 올려
높은 벼슬에 올라
출세했을 것이니, 이는 분수를 벗어난 일이 아니다. 유독 처사공은 초연하게 멀리 내다보고 명리(名利)가
있는 곳을 떠나매 채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았으니, 어찌 속세를 벗어나 훨훨 나는 훌륭한 대장부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는 데가 산속도
강가도 아닌 교외 별장이라서 집은 성문을 마주 보고 있었고, 문은 큰길로 나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처사공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다들
‘건산 양 처사’라고 불렀으며 지나다니는 나그네 모두 처사의 오두막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만약 고명한 선비의 참된 뜻과 참된 수양이 없었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영천자는 사화를 몸소 겪게 되자
허리춤에 찬 난초를 눈물로 적시며 지냈다. 그러다 처사공이 황관(黃冠)을 쓰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이 풍진세상에 우뚝 서 있는 모습과 지난날 옥 같은 모습에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고 남주 고사라고 탄복했으니,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또
가령 처사공이 8, 9년을 머뭇거리며
벼슬살이를 했다면, 반드시
사화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책에 훌륭한 이름과 사당에 제사 지내는 영광은 갈수록 더욱 빛났을
것이니, 누가 어깨를 겨룰 수 있겠는가. 다만 물이나 땅 속에 빛을 감추고 그대로 바다와 산에 박옥(璞玉
가공되지 않은 옥)으로 묻혀, 세상을 떠난 지 2백 년이 지나자 마침내 매몰되었으니, 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기유년(1789, 정조13) 겨울에 내가
예양서원(汭陽書院)에서 《사마제명록(司馬題名錄)》을 개수할 적에 와서 책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양 진사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미 건산 처사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으니, 더러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나 혼자 탄식하며 “영천자는 도리어 이곳에
있지 않은가. 어찌 양 처사는 이처럼 심하게 매몰되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둘러 《영천집(靈川集)》을 꺼내 여러 사람에게 건산 처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 주었다.
아, 옛날
서유자(徐孺子) 역시 남주 고사로 불렸는데, 세상을 떠난 뒤 세상에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고가 이처럼
차이가 나니,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이러한 세태를 슬퍼하며 이 글을 지어 처사공의 9대손 언장(彦章)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