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3:1-16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나이아가라 폭포에 줄타기를 잘하는 서커스 단원이 줄타기 시범을 보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튼튼한 와이어 줄을 쳐놓고 줄타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해 하며 구경을 했고, 무사히 줄타기를 여유 있게 마치자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줄타기를 마친 후 서커스 단원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 중 한명을 어깨에 올린 후 줄타기를 성공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할 수 있을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어깨에 타보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요, 제가 하겠습니다."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도 서커스 단원은 여유 있게 줄타기를 마쳤고, 사람들은 더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소년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애야, 무섭지 않았니? 어떻게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니?" 소년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무섭지 않았어요. 저분은 제 아빠거든요. 아빠를 믿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사람들은 어깨에 사람들 태우고도 줄타기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론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빠를 신뢰하였기 때문에 행동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과 신뢰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교훈 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세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했고 시내산에서 2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2년 2개월 20일이 되었을 때,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고 열하루 만에 가데스바네아 즉, 바란광야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나안을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접경지역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요단강을 건널 필요 없이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 도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 바란광야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지휘관을 불러서 가나안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모세가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세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으로 시작된 정탐이었지만 사실은 모세가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킨 것과 하나님이 시키신 것과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환영하면서 자신들의 집과 성과 들판을 내어주고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갈 리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전쟁을 전제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관이었던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낸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적절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의 지형과 군사적 시설과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정찰은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명령에 의한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지휘관이신 하나님이 모세처럼 적의 상태를 알지 못해서 정탐을 보내셔야만 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알지 못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까지도 아시며 가나안 땅의 실과 하나하나의 개수 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가 궁금하시고 뭐가 필요해서 정탐꾼을 보내셨을까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왜 하나님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셔야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지휘관들이 내리는 명령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정탐꾼들이 전쟁을 위해서 얻어야할 정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탐꾼으로의 파송이 전쟁을 위한 정보수집이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열두 지파의 지휘관들을 선택해서 그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한 지파의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분명 탁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정탐꾼의 역할을 각 지파의 어느 누구보다 월등히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각지파마다 더 용맹하고 민첩하며 자신을 방어하면서 정보를 수집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능성을 다 배제하시고 하나님께서 각지파의 지휘관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일반적인 정탐의 원리에 적합하지 않은 결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왜 더 나은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정탐의 목적이 일반적인 정탐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위한 단순한 정보수집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첩보로서의 정탐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을 보내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가지 목적밖에 없습니다. 가나안땅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해 주신 땅입니다. 그리고 그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입성하게 될 땅이기도 합니다.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피 흘림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깊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은 여호와의 전쟁에 의해 하나님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땅은 이스라엘이 거주할 땅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를 지휘하는 지휘관들에게 그 땅을 먼저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 지를 보여주시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살게 될 그 땅에 대한 미래와 청사진을 갖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비전을 각지파의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며 힘 있게 그 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은 그 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다르지 않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데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열 명은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기겁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백성들을 낙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가나안 땅의 입성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낙자손과 같은 거인족들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왜소하게 보였는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을 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땅을 정탐하러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땅을 보고 용기를 얻고 축복을 사모하고 희망을 갖고 돌아와서 광야에서 지친 백성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낙심하여 돌아와서 백성들을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온전히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에 부딪힌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눈앞에 장대한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는 분명한 사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은 잊은 것입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메마른 광야에서 먹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들의 상황에 연결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과 그들의 불신앙적 보고를 듣고 큰 소리로 통곡하며 “하나님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서 칼로 죽게 하신 것이냐?”라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거역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거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40일 동안 정탐한 날 수를 연수로 계산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 않아도 될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갔더라면 그들에게 열렸을 가나안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니 가나안은커녕 불신했던 성년 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맙니다. 그들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가나안 땅이 열린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화근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본문 4절부터 16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사밧과 갈렙과 이갈, 그리고 호세아와 발디와 갓디엘과 갓디입니다. 또한 암미엘과 스둘과 나비와 그우엘이 있습니다. 물론 열두 명 모두가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땅을 주셨으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일 뿐이라는 담대함을 선포합니다. 이 두 사람은 성년 세대 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간 인물들이며 하나님이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한 열두 명의 이름은 두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대로 기록되어 수치스런 이름이 된 열 명과 영광스런 이름을 남긴 두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환경만 바라본 열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았고, 또한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게 했고 그들도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촉구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가자고 주장한 결과,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고 새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열 명의 정탐꾼과 같은 이름을 남기시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이름을 남기시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불신한 열 명의 정탐꾼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거대한 족속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모두가 부정적으로 말하고 불신앙적인 방법을 찾을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자라고 외치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