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간도참변의 현장, 장암동 참안
1920년 10월 5일, 일제의 간도침입으로 간도참변의 한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11월 30일 까지 연길, 훈춘, 왕청, 화룡에서
1차 토벌을 진행하면서 잔악한 방법으로 한인들을 학살하였다.
아래는 한인 학살의 비보를 듣고 진상을 밝히고 기록하며 쓰신 글 중에 나오는 박은식 선생의 탄식이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사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간도토벌 당시 용정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마틴은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견문기>를 남겼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들이 야소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략~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중략~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중략~ 큰 나무 아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 였다. ~ 중략 ~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36개와 시체들을 목격하였다.
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쳐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를 다시 소각하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조사한 연길현 경찰 제5분소 순경 “총진하”는 장암동참안에서 조선족주민 33명이 사망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
일제 측 자료는 장암동과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화전사 허문동 과 함께 모두 불령선인의 소굴로 불리 우고 있는데 동지방의 영신학교 및 화전사의 배영학교 등을 불령행동의 획책장소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대부분은 예수교신자들이며 불령행동의 주모자들은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고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 불령자들로 부터 꾸며지고 있다.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 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나라(일본)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 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 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 후 시체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
독립신문의 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장암마을에서 71명이 피살당했으며,
61채의 가옥이 불탔으며,
영신학교와
1911년에 세워진 장암교회도 불탔다.
인간 사냥꾼 일제에 의해서 죽임당한 조상들을 추모하며,
두 번 다시 이런 비참하고 생지옥 같은 일이 우리 역사에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삼고자 한다.
2019.11.9. 토
우담초라하니

언덕 위에 서 있는 장암동 참안 유지비

비에 새겨져 있는 장암동 참변에 피살당한 내용이 적혀 있다. 피살자 수가 독립신문의 내용과
다르다.



유지비 뒤쪽으로 커다란 봉분이 있으며 봉분 뒤의 커다란 공터가 마을, 학교, 교회의
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