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회 공수부대 만행 / 여관 난입 신혼부부까지 구타 연행
19일 오전 시위군중인 학생,시민들은 공수부대원의 잔악성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력과 잔악성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쌓아온 공수부대원에게 맞서는 자체가 무리였다.
오전 錦南路를 가득 메웠던 군중들은 피신하기에 바빴다.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은 전날처럼 지나는 행인은 물론 사무실과 주택으 로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자 여자를 가리지않고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팬 후 질질 끌고 나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끌어올려 싣기 시작했다.
40대 부부가 금남로 길에서 붙잡혔다. 두 부부는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 러내린 채 붙잡혀 갔다. 죄가 없다며 호소하는 부인의 애원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아랑곳하지않았다. 밝은 색 옷을 입은 이들 부부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금남로 주변 2,3층 건물유리창을 통해 이러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지켜 보던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를 의식했는지 공수부대원들 은 마이크로 주택과 빌딩을 향해 문을 닫아라 커튼을 치라 내려다보면 쏘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의 상가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일찍 문을 닫고 철 수했고 관공서와 회사들도 낮 12시가 되자 직원들을 퇴근시켜며 몸 조심 하라고 타일렀다. (사계절刊 金泳택 著 10일간의 취재수첩중에서 발췌)
달아나는 시위군중을 뒤쫓던 공수부대원들은 상가,여관,민가등 어디든지 난입했다. 시위군중에 포함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난 사자마냥 젊은 사람만 보면 닥치는데로 곤봉으로 후려치고 개머리판으로 찍어댔다.
96년 1월 光州지검의 5.18현장조사 당시 피해자로서 참고인조사를 받았던 朴弼鎬씨(당시 25세.光州시 南구 月山동)는 미도장 난입사건의 현장 목격자 다. 朴씨는 당시 미도장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일 오전 10시 30분에서 오전 11시 사이로 기억한다. 갑자기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여관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곧바로 뒤따라 13~15명쯤으로 보이 는 계엄군들이 들이닥쳤다. 붙잡힌 청년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맞아 죽어나가는지 알았다.
이 상황을 말리던 지배인,경리과장등 직원 5명까지 무작정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여관방에도 들어간 이들은 신혼부부가 늦게나 온다며 신랑을 폭행하고 끌고 갔다 朴씨도 이 광경을 지켜보자 공수부대원으로부터 사람 숨겨놨지라는 말에 안 숨겼다고 응답하자 곤봉으로 손을 때리고,군홧발로 허리를 차고 대검으로 쿡쿡 찌렀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도장 2층 객실담당이었던 張翊秀씨(당시 23세)는 이 청년과 맞닥뜨 린뒤 201호 객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곧이어 뒤따라온 군인들이 객실문을 차부수려고 해 욕실로 피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군인에게 곤봉세례와 함께 짓밟혀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5층에서 객실 청소를 시작하고 있던 金榮大씨(당시 23세) 역시 영문도 모른채 군인들의 발길에 채이며 구르다 쫓겨내려왔다. 그리고는 1층에서 張 씨와 청년이 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얻어맞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40대 투숙객 2명도 저와 같이 끌려 내려왔는데 손님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들은 가톨릭센터 앞으로 양손이 뒤로 돌려지고 팬티만 입은채 끌려나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린 속칭 원산폭격을 받았다. 쓰러지면 또다시 곤봉이 날라들고 발길에 채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날 영문도 모른 채 계엄군에게 끌려간 미도장 직원 5명은 21일 모두 풀 려나 박윤식외과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후유증으로 아직까 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미도장에 난입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비슷한 시각 금남로 일대의 주변 건물에서 속출했다. 오전11시가 넘어 무등고시학원으로 시위대에 쫓긴 학생들이 뛰어들어갔다.
金낭(木변에 良)浩씨(당시 21세.光州시 北구 新安동)의 증언이다. 계엄군에 쫓긴 시위대 3명이 학원으로 들어왔다. 이후 계엄군이 뒤따라 들어와 당 시 학원에 있던 1백98명의 학원수강생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연행 당시 곤봉및 개머리판으로 머리와 왼쪽어깨를 얻어 맞았다. 31사단으로 이송,조사 를 받은뒤 21일 풀려났다. 29일 학원에 가 보니 계엄군의 강제연행 당시 학원생 10여명이 3층과 4층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무등고시학원 수강생이었던 朴時炯씨(당시 19세.麗水시 德忠동)도 연 행됐다가 21일 풀려난 경우. 계엄군이 할아버지를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한 학원생들이 야유하자 계엄군 10여명이 학원에 몰려들었다. 막 깍은듯한 박 달나무로 학원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끌고 갔다
19일 낮12시를 조금 넘긴 시각 광주은행 뒷편 실내야구장에서 바둑을 두던 崔炳貴씨(당시 29세.光州시 西구 良동)도 아무 이유없이 공수부대원들 로부터 구타당했다. 실내야구장내 평상에서 친구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학생들이 계엄군에 쫓겨들어왔다.
바로 뒤따라온 계엄군이 다짜고짜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곧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YMCA앞이었다. 당시 그 곳에는 시민 7명이 기합을 받고 있었다. 헌병에게 연행된 순간 또 다시 개머리판으로 발목부분을 얻어맞았다.
헌병 소령이 와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했고 헌병들이 부상당한 학생 1명과 함께 인근에 있는 홍안과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았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순간 순간 착검 상태의 계엄군들이 곤봉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장면이 계속 눈에 띄었다
당시 光州시 東구 大仁동 朴仁天씨 집앞의 양화점직공이었던 崔영철씨 (당시 20세)도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몸서리를 쳤다. 19일 출근할 때부터 거리에 공수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날 갑자기 밖에서 와 하는 함성과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코가 맵기 시작 했다.
밖을 내다보니 공수대가 학생 시위대를 밀고 내려오면서 사람을 닥치 는대로 때리고 짓밟는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안면 을 때려 넘어뜨리고는 지근지근 밟아버리는가 하면 교련복 입은 학생의 온 몸을 후려쳤다. 또한 박인천씨 집안에 숨어있던 여학생을 끌어내어 뺨을 때 리는 광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19일 오전 시위군중을 향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진압은 금남로뿐만이 아닌 인근 상가,학원,여관등지의 건물에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골목 골목으 로 달아나면서도 공수부대의 잔학성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항쟁의 도화선 을 이룬 이날 오후 대반격을 위해 또다시 도청을 향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