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光熈門)이다. 광희문은 청계천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문(水口門)으로 이용되었다.
또 시신이 나가는 시구문(屍軀門)으로 활용되었다.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관문으로 알려졌다.
빛처럼 빛나다는 이름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짙은 통곡문(痛哭門) 또는 시신문(屍身門)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 성 밖으로 상여가 나갈 수 있는 문은 두 개가 있었다 그 문이 바로 서소문인 소의문과 광희문이다.
1880년대 서울 도심 장안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감염되어 앓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면
이 문 밖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이 비극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그 중
어린 여자 하나를 데려다가 치료하여 이화학당에 다니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규태의 서울 600년> (조선일보사, 1993)에서-

광희문은 한자로 光熙門이 아니다.
빛광(光) 갈고리궐변이 좌측에 붙은 빛날 희(熈) 자의 光熈門이다.
이 희(熈자)는 빛날 희(熙) 자의 고자(古字) 또는 속자(俗字)로 나와 있다.
광희문은 1396년 한양도성이 완성될 때 창건되었으며 정도전이 광희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광희문 현판은 사진으로 전해내려 오던 것을 1975년 11월 서예가 김응현(金膺顯)씨가 재현해 문루에 다시 달았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와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괄의 난 당시 한양도성을 점령했다가 이틀 만에 도주한 이괄과 그 잔당이 이 문을 통과하여 도망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이괄은 부하 장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 의해 살해당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급한 나머지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달아났다고 해서 비웃음을 받았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명종 9년(1554)에는 광희문 밖 일대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밤이면 인마(人馬)가 통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명종 때는 남소문이 막혀 있으므로 도적들이 낮에 이 부근에 숨었다가 밤이 되면 성벽을 넘어 도둑질을 하므로
이 문을 열어 피해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연산군 10년(1504) 7월에 “국왕이 살인과 음행(淫行)을 저지르므로 인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돈다는
익명(匿名)의 투서가 있자 노발대발한 연산군은 투서한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도성의 모든 문을 닫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창의문에서 서대문·남대문·광희문을 거쳐 동대문·동소문까지 이르는 한양도성 위에 군사들은 물론
궁중의 내관까지 배치하여 15일 동안 대대적인 수색을 한 일도 있었다.
조선 말 광무 3년(1899)에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 개설로 서울성곽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광희문에서 동대문까지의
한양도성이 모두 헐려 옛 모습을 잃게 되었고, 일제 때인 1915년 경 광희문 문루(門樓)가 무너져 내려 홍예(紅霓)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조선 초부터 실시된 통행금지로 광희문 등의 한양도성문은 밤이면 닫혔다.
조선 말 광무 3년(1899)에 전차가 개통되고, 1915년 경에는 도로 개설로 한양도성이 헐리면서 옛 모습을 잃게 되었다.
설상가상 6.25전쟁으로 광희문 문루와 여장(女墻)이 파괴되어 육축(陸築, 성문을 짓기 위해 큰 돌로 만든 성벽)과 홍예(紅霓)만
초라하게 남았으며, 광희문 부근은 수구문 시장이 되었다.
광희문 문루가 무너진 지 60여년 후 서울시는 퇴계로를 확장하면서 1974년 12월~이듬해 11월까지 이 문의 홍예를 남쪽으로
약 15m 이전하고, 문루를 복원함으로써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나 광희문은 철책에 갇혀 있어서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39년간 철책으로 봉쇄했던 광희문은 중구청의 ‘광희문 관광자원화 정비사업’으로 2014년 2월부터 개방하여 시민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한양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오직 두 문을 통해서만 시신이 운구되었다.
바로 광희문 일명 시구문과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서소문이었다.시구문 밖 일대는 무당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신당(神堂) 당집 무당골 무원(巫院) 수당(水唐)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남산 기슭의 약수골에서 발원하여 이 동네 한 가운데를 지나 청계천 본류에 합류하고 있는 개천을 무당개울 (巫堂川)로
이 개울을 건너는 다리 역시 무당다리(巫堂橋)로 불렀다. 무당다리를 한자로 수당교(水唐橋)라고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당이라는 말을 즐겨 쓰지 않았고 오히려 꺼렸다. 무당 무(巫) 자 대신에 물 수(水) 자로
집 당(堂) 대신에 당나라 당(唐) 자를 써서 이와 관게가 없는 척 했다.
신당리(神堂里)라는 지명은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을 인근에 공동묘지와 화장터가 있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전용 화장장까지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신당동의 명칭은 광희문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에 시신은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도성 시신을 운구하는 문으로 광희문이 많이 사용됐다. 이 문 밖에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무당을 찾는 이들이 많아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모여 살았고, 그래서 이곳은 신당이 모여있는 동네 즉 ''神堂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후 이 이름은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洞)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광희문 밖의 고개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리아리(멀고 먼)한 고개'라는 뜻에서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북망산천과 서방정토로 가는 길목과도 같은 고개로 도성안 주민들에게 아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이 시구문 밖에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처음 문을 세울 때부터
경복궁의 황천문이라 하여 옮긴 그 자리가 결국 숙명적으로 서울 백성들의 황천문이 된 꼴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한국군을 신식군대로 만든답시고 구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불응한 군인 1천2백명이 의거를 일으켰다.
그들은 서소문과 남대문 사이의 성벽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120여명이 전사했다. 이때 가담했던 1천2백명의 병사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기위해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를 모아둔 광희문 밖으로 몰려들어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 가거던 시구문 돌가루 긁어오라'는 시골사람들의 인사말이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寃鬼)에 단련된 광희문에는 꼼짝도 못할 것”이라고 하여, 광희문의 돌을 빻아
가루로 만든 것을 '수구문 돌가루'라고 하여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수백년 동안 수 많은 참사와 죽음을 지켜본 광희문이었기에
그 문의 돌가루가 영약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광희문은 '광희'=명(明:밝고 빛남)이 되므로 '광명의 문'이라는 뜻이 될 뿐더러 조선조의 마지막 연호가 '광무(光武)'와
'융희(隆熙)'로서, 이 연호의 앞뒤 글자를 맞추면 '광희'문의 '光熙'와 일치하는 것도 신기하다.

서울의 좌·우포도청의 옥과 형조의 전옥 등은 박해시기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모진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며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일찍이 자신의 옥살이 체험을 바탕으로 ‘감옥’이야말로 이 세상에 현존하는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 안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온갖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매를 맞아 죽거나 목이 졸려 죽었다.
굶주림과 역병으로 옥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1878년 좌포도청에서 신자들과 함께 옥살이를 하던 리델 주교는 건장한 신자 2명이 굶주림과 학대로 옥사하고, 고열에 시달리던
한 신자가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가 옥졸에게 쇠침을 박은 몽둥이로 가슴을 죽도록 맞아 숨을 거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찬 감옥에 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세상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온순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조용한 천주교 신자들을 매일 상당수 목 졸라 수백 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그 옥졸에게 들었다고 했다.
순교자들은 비참한 옥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고통을 겪었으며, 아무 말 없이 다른 죄수나 옥졸의 욕설을
참고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멸시하고 욕설까지 하며 괴롭히던 다른 죄수가 병들자 그를 밤낮으로 따뜻하게 보살펴,
광희문 밖은 박해시기에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들 가운데 794위의 순교자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곳이다.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각각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 병인양요(1866),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2) 등으로 거듭 박해가 격화되던 때에 순교한 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광희문 밖은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의 시신이 유기되고 묻혔다.
그 중에 794위에 달하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사실은 조선시대에 서울의 중부·남부·동부 관내에서 적발된 무연고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 묻었던 관례와, 중부 관내에 자리한 좌·우포도청의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지고 매장된 구체적인 사례들의 확인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가 서려 있는 광희문 밖 성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매장된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한정관 바오로 신부를
초대 성지담당 신부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