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12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참 복의 기준이 되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책임이 막중하지요? 뭔가 어떤 큰 짐이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성도 각자가 다 아브라함인데 성도 자기로 인해서 복과 저주가 된다고 하는 것이니 이게 엄청난 겁니다.
우리 인간이 가만히 깊이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만이 자존자요, 하나님 외에 전부는 다 피조물인데 이 피조물의 종류를 크게 나누어 보면 신령계에 속하는 피조물과, 물질계에 속하는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을 총 망라해서 본다고 할 때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은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은 인간 자기 외에는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금수나 목석처럼 짓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인 신의 형상대로 지었을까?
어떤 때는 보면 목석이나 금수가 부러울 때도 있어요. 아주 가난하게 살 때는 부잣집 개가 왜 그렇게 부럽게 보이지? 부잣집 개는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뜯는단 말이요. 인간이 신의 형상이면서 특수 피조물임에도 어떤 환경에 가서는 짐승보다 못한 그런 때도 있다.
또 요즘 부녀자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뭡니까? 배추 값이 올라가고, 고추 값이 올라가고, 물가가 올라가고 하니까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목석이나 금수는 그런 물가가 올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잖아요. 어떤 짐승이 자녀들의 등록비가 올라가는 것을 걱정하는 것 봤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성으로 평가하고 구별하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지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엇이 낫고’ 하는 그걸 실지로 느끼는 인간으로 지었습니다.
이렇게 짓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려고 그렇게 지은 것이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면 감사가 절로 나오는데, 그 이유인즉 우리 인간이 상상 못할 역사이니 천국의 그 세계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천국이란 그 세계에 목석이나 금수를 갖다 놓으면 그곳에서 그 세계의 쾌락을 느낄 줄 알까요? 모릅니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지요. 짐승들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본능적으로 사는 그걸 좋아합니다. 그것밖에 없어요. 돼지밥통에 그릇 씻은 구정물을 부어주면 돼지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 발까지 밥통에 집어놓고 꿀꿀 거리면서 먹습니다.
돼지나 다른 짐승들은 쾌락이나 향락을 느끼지 못하고, 비판이나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평가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런 평가를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그런 성분이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아볼까’ 해서 판자 집에 사는 사람은 양옥집으로 갈아보고, 양옥집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를 쳐다보고.
사람 사는 곳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면 그만일 텐데 그런데 올라가서 잠을 자면 더 편안합니까?
천 원짜리 옷도 입으면 따뜻한 것도 있는데 수십 만 원짜리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돋봐주느냐?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금반지를 끼고 있으면 겨울에 손이 안 시립니까? 보석반지를 끼고 있으면 손이 안 시리고, 구리반지나 납반지를 끼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요? 안 그래요? 어쨌든 인간을 평가력이 있는 그런 존재로 지었다는 것.
돼지 목에다 목걸이를 해 주면 돼지가 판단력이 좋아지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인간만큼은 값어치에 따라서 영광이 다르고, 즐거움이 다르고, 누림이 다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었느냐?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신령계에서도 그 좋은 것이 무한히 가득 있는데 인간이 그곳에서 그곳의 것을 가지고 활용하면서 느끼고 쾌락하도록 하게 하려니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로 지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 천국을 누리려면 그 하나님과 비슷해야 되지 않겠어요?
일반적인 피조물들은 임시적인 존재이지만 우리 인간만큼은 임시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한 그 나라에서 누리게 하기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지음을 받은 나이니 우리 인간이 나를 지으신 조물주 그 분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보면 ‘나는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을 흔히 말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특수한 목적으로 지었는데 ‘나는 그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목적을 내 목적으로 알고, 삼고 살아왔느냐, 모르고 살아왔느냐? 이걸 알아야지 모르면 비참해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이크를 만드는 사람이 그 마이크를 왜 만들었겠어요? 음성을 크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마이크가 음성이 크게 안 되면 불에 집어넣든지, 다시 만들던지 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 인간도 목적이 있게 만들었다 그 말이요. 그 목적을 알고 사느냐 그 말이요.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지요. 학생이 학교에 가는 것은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목적이지요. 예수 믿으면 예수 잘 믿는 게 목적이지요.
조물주의 목적을 다른 사람이 말해주지 않고, 또 다른 어떤 책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고 그 목적을 알려주는 것은 오직 성경책밖에는 없더라 그 말이요. 우리 기독자, 하나님의 자녀인 자기는 성경책이 어떤 책이라고 하는 걸 알아야 되겠어요. 그러나 열심히 학교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그걸 아는 학생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공부를 일등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공부로 책이 전부 다 자기 머릿속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어젯밤에 테레비에서 열 두 시가 넘도록 한 게 뭐지? 시사토론? 그 보면 유명한 사람들이 앉았더라마는 요새 부모를 무시하고 부모를 죽이고 하는 뉴스가 나오지? 그런 것에 대해 대담하는 말을 가만 들어보면 ‘도덕성 운운’ 하는데 그건 일반성이지. 그 일반성에서는 문제해결이 안 돼요. 거기에서는 해결책이 절대로 나오지를 않아요.
부모 형제를 죽이는 그 사람이 부모공경을 하라는 지식을 몰라서 죽인 겁니까? 문제는 속의 정신과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교육을 자꾸 공자의 삼강오륜 이런 걸 자꾸 끄집어 와서 교육을 시키려고 그래.
참 어쨌든 불신세상은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나 사건이 터져도 그게 왜 일어나는지 몰라요. 아무리 학박사라도 세상은 그걸 모릅니다. 원인을 몰라요. 알 길이 없어요. 오직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어요.
요즘 탈세 그런 것도 있잖아요? 어쨌든 세상에는 인간이 아무리 법을 만들어놔도, 그 이상 법이 없는 법을 만들어놔도 거기에는 범죄가 또 있어요.
왜 그렇지요? 법이 안 좋아서 죄를 짓는 겁니까? 법에 허구성이 있어서 죄를 짓는 겁니까? 감찰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서 감찰하는 사람 위에 또 감찰하는 사람을 두지요? 어디까지 올라갈 거야.
사람이 아담 하와 이후에 선악과를 따먹고 본능적으로 타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법으로도 안 돼요. 어떤 법을 가지고 다시 인간을 만들겠어요? 고양이에게 고기를 줘놓고 먹지 말라? 그 고양이가 먹나, 안 먹나 보려고 더 큰 고양이를 뒤에 세워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가만 보면 정답은 없어요. 안 나와요.
그래서 전 그런 걸 들을 적마다 확신이 오고 생각나는 게 그 문제의 해답은, 그걸 바로 만드는 길은 오직 성경을 이치적으로 깨우침 받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이 되면 ‘우리 교인들보고 국회의원들에게 전도하라고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들이 듣고서 믿고 안 믿고는 그 자가 할 일이지만 우리가 가진 이것은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학박사 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성경에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한 이것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물론 목적을 세상에 두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인도케 하고 깨닫게 하는 그 면에 우리의 이 교훈이 꼭 필요한 거다. 그러니까 이건 기독교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흔히들 말하는 그런 교육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질적으로 다르다.
확신컨대 이런 교훈적 사상이 한국교회에 질적으로 나가게 된다면 사회가 정화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이 돼요. 그런데 이걸 안 배우고 있거든. 그러니 교회 자체가 더 타락이 됐어요.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쨌든 일반적으로 학식 있는 사람, 유명하다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라!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그런 긍지가 있다. 이게 보통 차원이 아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줬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성경의 깨달음에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지. 그러니까 불신세상의 어떤 유명하다는 사람 앞에서도 절대로 인격적인 면으로 머리를 숙일 필요는 없는 거지요.
그래서 본문에 아브라함보고 뭐라고 하는 거지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참 그 말을 보면 기준적이고, 또 만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자라는 그런 게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또한 복의 근원이니까 자기가 잘못되면 딴 것이 자기 때문에 다 죽어버린다 그 말이지요.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불신자가 죽는단 말이요. 그걸 알아야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막중하고 무거운 책임감이 있습니다.
영원한 신령계, 완전한 신령계, 쾌락과 기쁨이 충만한 그 세계에 살 나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저것이 낫고, 저것보다 또 저것이 낫고’ 하는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성분이 없다면, 또 이걸 모르고 산다면 짐승하고 똑같습니다. ‘내가 너를 지은 것은 영원한 그 나라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라’ 그건 아니지요. 한 이치가 자기의 영원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편은 불완전이요, 시간적 임시적 세계요, 죽음 저편은 완전하고 영원 무궁적 세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인간이 그렇게 살아져야 할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못 사는가 그 말이요. 또 보면 선한 사람은 잘 살고, 악한 사람은 못 살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세상을 준 것은 누리라고 준 것은 아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이후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 살아 보자’ 하는 이것이 공통적입니다. 공통적인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어쨌든 잘 살고자 하는 그 자체는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자기가 그 점에 대해서는 인간 자기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류학교에 가야지’ 하는 게 무슨 죄냐 그 말이요. ‘계장보다 과장, 과장보다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게 무슨 죄냐 그 말이요. 이걸 어떤 도덕이나 어떤 율법이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노력껏 해서 성공하는 게 무엇이 죄냐 그 말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그것이 갈대아 우르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그 중에 하나였어요. 바울도 마찬가지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먹고 마시고 사는 면에 풍족하지 못하고, 못 누렸기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간 거지요. 학문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그 말이지요.
그러나 출세를 한 사람도, 성공을 못한 사람도 먹고 마시는 것은 매 일반입니다 그럼에도 왜 인간들이 ‘보다 더, 보다 더’ 하고 그렇게 사느냐 그 말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12장 1절로 보면 아브라함이 어디에 있었을 때 그 말을 한 거지요?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그 말을 했다 그 말이지요. ‘떠나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예수 잘 믿고 싶으냐? 남보다 돈을 더 잘 벌고 싶으냐? 성경은 돈 잘 버는 이치를 가르쳐 줍니까, 예수 잘 믿는 이치를 가르쳐 줍니까? 그런데 보면 기독교인들이 돈 잘 버는 그런 데로 많이 기울어지지요?
그렇다면 성경 글자대로 본토를 떠나고, 아비 집을 떠나고, 친척집을 떠나고 하면 되느냐? 성경 글자대로 했다고 해도 하나도 못 믿습니다. 성경문구대로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예수 못 믿습니다. 성경에 글자적으로 ‘예수 잡아 죽여라, 죽이지 말라’ 하는 그런 게 있습니까?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면서 성경으로 한다고 믿었습니까? 그 참...
그런 것처럼 ‘아비 집을 떠나라’ 한대로 실지로 아비 집을 떠났다고 해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많잖아요? 오늘날 한국사람 거의가 아비 집을 안 떠난 사람이 어딨어요? 거의 다 떠났지요? 그게 성경대로 사느라고 그렇게 떠났지요? 돈 때문에 떠났다. 조금 있으면 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찾아가지요.(주-명절) 전부 다 계시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갈대아 우르에서 사는 그 때의 아브라함에게만 그렇게 부른 겁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불렀습니까?
물론 그 때는 아브라함에게만 불렀지요.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벌써 75세 정도 되니까 보통 인생을 60평생 나이로 본다면 10년은 더 살았구만. 말하자면 인간의 나이적으로 본다면 자기 일생은 끝났다. 끝난 그 인생을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고 불렀단 말이요.
그 말씀을 하는 속에는 하나님의 기본구원은 다 포함이 돼 있는 겁니다. 창12:-22:까지는 기본구원 후에 성화구원의 장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성화구원 속에는 기본구원은 언제든지 전제되어 따라가는 거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죽은 송장보고 ‘일어나 걸어가라’ 그런다면 그게 정당한 요구요, 무리한 요구요? 넓은 홀 안에 송장이 하나 있는데 ‘좋은 옷을 입으면 살아난다’ 그러니까 그 송장이 후다닥 일어나서 옷을 입고 살아났습니다. 이 말이 이치에 맞아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라고 했으니 살아나기 전에는 송장이지요.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속을 입혀서 중생시켜서 살려놓고 ‘걸어 나가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기본구원 후에 그 일이 다 이루어진 거다 그 말이요. 중생시켜 놓고, 살려놓고 ‘떠나라’ 그 말이지. 중생을 했으니까 떠나라고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중생의 교리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하라, 마라’ 하는 것은 벌써 산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까! 죽은 아들이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그건 이미 살아난 것이 아닙니까?
‘너는 중생을 했으니 1차적으로 할 것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나님의 첫 요구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 말이요.
그렇다면 순종을 하려면 글자 그대로 하면 되느냐? 아니지요. 순종을 하려고 하면 먼저 바른 지식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본토가 뭐냐 하면 인간의 기존성입니다. 기존성에는 욕망성 추구성 취미성 지향성이 있습니다. 이건 전부 다 세상 것이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풍속 습관 버릇들입니다. 본토, 즉 기존성도 안 떠나고 예수 믿는다네. 그러고도 남을 가르친다고 큰소리치네.
친척은 뭐냐? 취미성입니다. 취미는 세상 알게 달게 꾸며놓는 것. 새색시들 집에 가면 유리거울 앞에 무슨 화장품이 그렇게 많지? 있는 것 또 사서 모으고, 또 사서 모으고, 알게 달게 조물조물 꾸며놓고, 미니큐어로 칠하고, 가발눈썹을 붙이고 하는 그 재미로 사는 것. 그렸다 붙였다 씻었다 칠했다 하는 그 재미로 사는 것. 그게 자기 친척이요. 친척집이 있으면 잘 돌아다니지. 친척집에 잘 돌아다니는 사람치고 믿음 있는 사람이 없어요.
아비 집이 뭐냐? 아비 집은 자기가 등을 기대고 있는 것. 무슨 사업이나, 기업이나, 권세나, 어떤 물질이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걸 다 가졌어요. 종교인들도 다 가졌어요. 자기의 추구성들입니다.
자기가 믿는 신들이 그런 것을 달성시켜 주지 못합니다. 설령 이루어졌다 해도, 또는 못 이루었다 해도 다 하나님이 하신 거지요. 그런데 갈대아 우르의 다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신들이 그렇게 이루어준 줄로 알지요.
우리가 그런 거 많이 들을 수 있지. 절간에 가서 100일 동안 공을 들이니 아들을 하나 낳더라! 그거 석가가 준 거요? 여자들 마음은 먼저 심리적으로 안정이 안 되면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체질이 있는 겁니다. 공들이고 하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갖자고 하는 것이 무신론자고, 신의 조력으로 목적달성을 하자고 하는 것이 이방종교인이고, 기독자는 자기의 힘도 아니고 이방신의 힘도 아닌 오직 만능의 능력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게 본토를 떠난 겁니까? 본토를 떠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사람 속에는 본토 친척 아비집이 더 깡깡해 집니다. 더 굳어져 버려요. 이것은 육을 살찌우는 겁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려고 얼마나 기도를 했나요? 에스더는 자기가 왕후가 되려고 기도를 많이 했나요? 하나님께서 보시고 필요하면 다 주는 거지요. 그러면 그것만 줍니까, 영적인 소원으로 살다보면 감옥도 주기도 합니까? 그런데 감옥이 오면 ‘그것 말고’ 라고 하지요?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교체시켜 준다고 해도 나는 그것과는 상관을 짓지 말아야 돼요. 다만 신의 성품만 잘 입고가면 되는 거요. 그런 것에 바람 타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모양으로 볼 때 완전이요, 불완전이요? 모양은 완전이로되 이미 완성된 거기서부터 성장이지요. 돼지는 고깃덩어리만 성장시키면 되지만 우리 인간은 신체적으로만 성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체 속에 지능 면이, 기능 면이 성장을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 기독자는 중생으로 거듭난 것이고,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진리지식으로 성장이 돼야 하는 거지요. 하나님으로 성품으로 성장되는 것. 그래서 보면 육의 추수성이 따로 있고, 영의 추수성이 따로 있지요.
이 세상에서 또 보면 빈부의 격차가 있어요. 천국에 가도 영적인 면에서 격차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해 놓았으니까요.
이 세상은 천국의 모형인데 차이가 없는 것이 공평입니까, 있는 것이 공평입니까? 있는 것이 공평입니다. 십일조를 떼먹는 사람과, 허리띠를 졸라 매고 예수를 믿는 사람과 천국에서 같아야 공평입니까, 달라야 공평입니까? 그런데 공평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신앙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왜 저런가’ 하며 남만 손가락질 하지 말고 나를 잘 만들어 가자 그 말이요. 나의 지혜지식성이나 추구성 소원성 목적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고 가는 그 면으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복음적 내세주의라야 하는 건데, 죽음 저편에 가서 계산하자 그 말이요. 그럼에도 본토를 떠나지 못하고, 기존적으로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영적 실질적 수입은 자기에게는 없어요. 이거는 인간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교훈은 없고 어찌하든지 열심히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충성봉사 하라는 거지요. 그거는 세상이 더 굳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 믿어가지고 십일조 내서 부자가 됐다고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예수를 잘 믿으라는 말입니까? 본토를 떠나라는 말입니까, 본토를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까? 본토를 떠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려요? 육의 것은 영의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질적으로 다르니까! 어쨌든 본토를 떠나면 추수성이 달라진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들은 뭘 다 요구하고 있느냐? 오늘날 목사님들은 신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지 않는가? 온 인류가 요구하는 대로 하면 교회부흥은 잘 되지요. 우리 교회도 그렇게 할까? 술장사 잘 하려면 술 잘 먹는 사람에게로 가야지요? 그렇지만 혈육은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했지요? 본토를 떠난 신앙과, 떠나지 못한 신앙은 분명히 갈라집니다.
본토를 떠나면 굶어죽을 것 같아도 안 그래요. 본토를 떠난 사람도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고, 본토를 안 떠난 사람도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어요. 문제는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아니다. 본토를 떠나는 것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일단 우리는 본토를 떠나야 합니다. 본토를 빨리 떠난 사람일수록 성공한 사람이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이 세 가지를 떠나면서 지시할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누냐 하면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쌍하다 그 말이요.
교역자 하나 잘못 만나면 자기는 헛일이 돼요. 자기가 그런 상황이라면 세월이 가기 전에 다른 길을 찾아야 되겠고, 또 절대로 인정 정실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영원이 좌우돼 버립니다. 또한 떠난 상태로 있지 말고 욕망과 추구성과 소원성을 가지고 가라고 그랬단 말이요.
바울이 한 말이 있지요? ‘나는 경주자다, 맨 앞에 예수만 섰도록 하고, 다음은 나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그런 경쟁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대학시험에서 한 점이 떨어지면 내 앞에 한 점을 더 맞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습니까, 여러 수십 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 하나가 딱 틀렸다고 할 때 하나 틀린 그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나보다 앞선 사람은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경쟁을 해야 된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경쟁을 해야 된다.
여러분들, 시골 산길에서 나무하러 가다가, 또는 장날에 시장에 갈 때에 ‘내가 뒤 좀 보고 가마’ 하고 뒤를 보는 사이에 같이 가는 사람들은 벌써 10리는 앞서 갑니까? 그렇게 돼요. 엄청난 거리가 돼 버려요. 내가 딴 짓 할 때 같이 가던 사람은 엄청나게 앞서가 버린다 그 말이요.
누군가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얼른 추월할 수 있다. 누군가가 중간에 빠질 때 얼른 그 자리에 가서 앉으면 자기는 그만큼 앞서는 거지요.
여러분들, 이런 경주는 한 교회 안에서도 하는 건데, 어때요? 여러분들이 신학교 다닐 때는 그런 걸 잘 몰랐지? 그게 별로 진하게 느낌이 오지도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룰구원 성화구원 면에 눈이 밝아져서 보니까 세계가 달라져 보이는데 진리집회에 참석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그렇게 차이가 납니까?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하루마다 교훈의 이치가 나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 내가 한 시간 안 들었으면 그것만큼은 못 듣는 것이다. 참석한 사람은 그걸 듣지. 그 다음날 빠졌던 사람이 왔다 그랬을 때 이제 묻는다고 할 때 이미 그 답은 어제 나왔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손해냐 그 말이요. 그런데 그 손해가 그렇게 진하게 오지를 않지. 그렇잖아요?
모르는 것이 참 불쌍합니다. 교역자 하나 잘못 만나면 자기는 완전히 헛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세월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 세월이 다 가기 전에 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바른 길을 찾는 그 면에 제일 방해 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거기에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이 뭘까요? 인정 정실 거기에 끌리면 안 돼요. 거기에 끌리게 되면 나의 영원한 것이 다 좌우돼 버린다. 그러니까 떠난 상태로 있지 말고 가라 그 말이요. 욕망을 가져라, 추구성을 가져라, 소원성을 가져라! 안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다 보면 보이는 성전은 저절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요.
구약에 보면 죽음 저편을 두고 목회를 충실히 하고 간 사람이 누굴까요? 모세! 죽음 저 편을 보고 모세가 목회를 했단 말이요. 이해가 가요?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저희들의 성화구원을 위해서 염려 걱정 하시는 것을 저희들은 압니다.
내가 나에 대한 성화구원의 염려보다 우리 주님이 더 염려하시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도 밤잠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사실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사건 환경이 돌아가고, 또 밤에도 사건 환경이 돌아가고 하는 이런 걸 볼 때에 주님이 우리의 성화구원을, 나의 성화구원을 위해 염려하시는 그 면이 확실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도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시고, 지금도 무형적으로 역사하시는 걸 진하게 느끼고 저희들 마음속에서 소원 목적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좇아 살고, 사건 환경 속에서 고상한 신의 성품을 이루면서 사는 정말 잠깐 동안의 나그네 세상에서 예수 잘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본질적으로 믿어나가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실속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행여나 풍속과 습관 등 모든 것을 갖고 와서 우리에게 유혹을 할 때에 넘어질까 두렵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어느 곳으로 가든지 믿음 잃지 아니하고 환경이 어떤 환경으로 처해졌던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아브라함의 그 고상한 깨달음의 믿음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당신의 백성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찌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