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은 현대격투역사에서 의미있는 시간임에 분명하다.
바로 THE 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약칭 UFC)이라는 무한격투 시합이 개최된 때이기 때문이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 대회는 눈을 찌르는 것과 물어뜯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격을 가해도 좋다는 무제한 격투시합이었다.
이전에도 이종격투시합이나 무한격투 시합이 있었지만 UFC만큼 룰에 대한 제한이 자유로운 대회는 고 대 그리스,로마시대 이후 처음이라 해도 좋았었고(브라질을 제외하고) 초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대부분이 하이레벨의 격투인들이 아니었음에도 세계 격투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무척 센세이셔널한 대회였다.
약간의 룰과 심판이 있다고는 하나 거의 스트리트 파이팅과 다를 바가 없던 이 시합에 가라데,킥복싱,프로레슬러,유도등이 참가해서 유혈이 낭자한 경기를 펼쳤다.
그때 이 들을 모두 손쉽게 물리치고 첫 챔피언에 오른 이가 바로 호이스 그레이시 (ROYCE GRACIE)로 엘리오 그레이시(HELIO GRACIE)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다.
처음 UFC대회가 열릴 때만 해도 호이스가 우승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했었다.
단 그레이시 가문만 빼고는 말이다..
왜냐하면 UFC 초창기에는 비교적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켄 샘락이라는 출중한 실력의 프로 격투가가 있었고 또하나 패트릭 스미스라는 한때 앤디훅(K-1 챔피언을 차지한적 있던 영웅적인 가라데 선수.2000년에 사망하였음)을 ko패 시킨 헤비급 킥복서도 출전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앤디훅을 패트릭이 다운시킨 것은 그 후의 일이다) UFC에 참가했던 거구의 선수들에 비해 호이스는 신장은 조금 큰 편이었지만(183cm) 근육은 볼품없이 빈약했고 외모도 연약해 보였다.
그런 그가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 않고 쉽게 거구들을 제압하여 삼회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자 사람들은 호이스와 그의 기술에 열광하고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전 무술이라면 가라데나 킥복싱처럼 오직 치고받는 것만 전부인줄 알았지 바닥에서 구르며 엉켜싸우는 그래플링의 기법에는 생소했었고, 그건 그 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타격기 선수들도 비슷했다.
그런 상황에서 호이스는 유도와는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그래플링 방식을 선보이면서 이런 것이 브라질 쥬지추이며 발리투도룰(vale tudo:모든걸 허용한다의 포루투갈어)의 실전 격투라는걸 보여주었다.
그 이후 일본이나 미국의 격투계에서는 그래플링에 관해 중점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더 많은 발리투도룰의 대회의 등장과 그래플러들이 활발히 시합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UFC에서 호이스와 브라질 유술의 등장은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레이시 주짓수(유술의 일본발음)의 본고장인 브라질에서는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브라질 유술의 대표격인 그레이시 가문의 유술은 역사가 칠십년이상에 달하며 그것을 실질적으로 체계화하고 개발한 엘리오 그레이시는 브라질에서도 유명한 '그랜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시 유술로 대표하는 브라질 주지츄를 이해하려면 근대 유도의 성립과 유술을 브라질에 전한 마에다 미츠요(前田光世), 그리고 그것을 배운 브라질인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근대 유도의 성립에 대해서는 유도의 역사란에서 자세히 기술하도록 하고, 마에다 미츠요나 그레이시 유술에 대해서는 그레이시 주지추의 역사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레이시 유술의 성립과 특징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 하겠다.
그레이시 유술을 설명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에다 미츠요,혹은 마에다 에사이,브라질에서의 애칭인 '콘데 콘마'로 통하는 일본인이다.
그는 원래 스모와 일본 고류유술을 배운사람으로 도쿄에 올라와 고도깡(講道館)에서 가노 지고로에게 근대유도를 수학후 일본내에서도 삼위안에 드는 강호로 성장한다.
그후 그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미국등 세계를 돌며 프로레슬링이나 복싱등의 이종격투전을 벌이며 실전에서의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유도의 스포츠화와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본산 고도깡의 규칙을 어기면서 까지 이종격투전을 펼치던 그는 결국 파문을 당하게 되고, 유도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당시 브라질에 흘러들어가 유도를 유술(주지추)이라 부르며 가르치게 되었다.
이 브라질에서 마에다 미츠요는 일본식(혹은 콘데 콘마식 실전유술이라고 해야 하나?)유술을 카를로스에게 전했고, 카를로스가 제자들에게 유술을 가르치는걸 보고 배운 엘리오 그레이시가 일본 유술을 보다 합리적이고 세련되게 다듬어 체계화 시킨 것이 그레이시 유술이라고 한다.
엘리오 그레이시는 상당히 단신에다 몸이 몹시 허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몸집이 작은 사람도 기술의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할 수 있는 합리적인 무술을 연구하였고,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전적인 유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엘리오는 도장에 찾아오는 어떤 사람하고도 실전 대결을 펼쳤고 작은 체구의 그는 항상 이겼다.
그가 패한건 일본의 전설적인 유도인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일패와 더불어 그의 제자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와의 대전에서의 포함 단 2패였다고 한다.
기무라와의 시합에서는 당시 그는 팔이 부러지는 중상중에도 네시간여동안이나 사투를 벌였다고 한다.
산타나와의 시합때는 엘리오 그의 나이가 43세임에도 불구하고 3시간이 넘는 혈투를 벌렸다고 한다.
왜소한 몸의 엘리오가 싸움에서 거구들을 제압하는 걸 본 브라질인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유술이 브라질에 널리 퍼지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