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는 아주 가난한 집의 외아들 장남이었습니다.
그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장래와 집안에 대해 비관을 많이 하는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오빠는 증인이었던 집주인 아저씨와 성서연구를 하게 되었고 누구나 낙원에 가서 잘 살 수 있다는 교리에 매료되어 침례를 받고 증인이 되었습니다.
학급의 반장을 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했던 오빠는 대학도 포기하고 날마다 가방만 들고 전도봉사에만 빠져서 지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일도 하지 않는 오빠를 엄마가 나무라실 때도 있었지만 오빠는 때가 가까웠다는 말만하며 낙원에 대한 환상에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오빠는 회관에서 연설이 있을 때마다 엄청나게 열심히 준비를 하고 연습을 했으며 연설도 자주 맡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우리는 시흥2동의 산동네에서 살았고 오빠는 대회장이 있는 시흥의 회관에 다녔습니다.
어느날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고 오시는데 어떤 자매가 엄마께 일만하시지 말고 회관에 와서 아드님 연설하는 것 좀 한번 보시라고 했답니다...연설을 그렇게 잘할 수가 없다고....
엄마가 집에 와서 그러십니다....처먹구 할일 없는 여편네들 때 꺼리도 없는 집구석에서 일도 안하는 놈을 잘한다고 지랄한다고....
오빠가 20대 중반쯤이 넘어서자 여기저기서 자매들에게 선이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살아생전 굉장한 미남이셨던 아버지를 조금은 닮은 외모에 연설 잘하기로 대회장에서도 유명했던 오빠는 자매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매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회관에서 엘리트 형제로 인정을 받으면서 오빠는 사람이 참 많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들에서 갑자기 엘리트 형제로 신분상승을 해서 그런지 오빠는 엄청나게 교만했고 자기중심적 이었으며 점차 폭력적으로 변하기까지 했습니다.
엄마가 일 안한다고 잔소리를 하시면 집안을 부수고 밥상을 집어 던지기 일쑤였고 저에게는 회관에 안다니고 학교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때리고 욕하고 엄청나게 학대를 가했습니다.
때가 얼마 안남았는데 분별하지도 못하는 미련한 돼지 같은 년이라고 날마다 욕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집은 벽이고 천정이고 오빠가 집어던진 밥상으로 간장 고추장 김치국물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있었고 집 안에 남아나는 유리창이 없었습니다.
산동네 그 꼬딱지만한 단칸방에서.....
당시에 저는 학교에 갔다오면 집에 오빠 신발이 있는지부터 들여다 보았지요.
오빠 신발이 집에 있으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늦도록 밖에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기도 했지요......
자매들을 만나 데이트를 하려니 오빠가 돈이 필요했는 모양입니다.
회관에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돈을 빌려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직업이 없는 오빠가 돈을 빨리 갚지 못하자 돈빌린 증인들과 갈등과 분란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중 오빠가 좋아하는 자매가 가난하고 직업이 없다며 오빠에게 결별을 선언하자 오빠는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오빠에게 돈 안갚는다고 뭐라고 했던 증인들의 집에 찾아가 주정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 일로 오빠는 회관에서 책망을 받았고 증인들이 오빠에게 아는 척도 안하고 인사도 안하자 오빠는 엄청나게 분노하며 이럴줄은 몰랐다고 날마다 술만 퍼 마셨습니다.
그렇게 오빠는 증인조직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 후 오빠는 십원한장도 없이, 친구 한명도 없이 날마다 술과 폭력으로만 살아가는 그야말로 막장인생이 되었지요. 술을 갈수록 점점 더 마시더니 나중에는 십원 한장도 없이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는 무전취식으로 구치소에 수감까지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당시에 남부경찰서에서 오빠는 며칠에 한번씩 무전취식으로 끌려오는 아주 유명인사가 되었지요.
구치소에 수감되고 나면 술집 주인에게 술값 갚고 합의 봐서 자기 빼달라고 쌩지랄지랄.....
집안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가족들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견디다 못한 엄마가 따로 방을 얻어 오빠를 내보냈고 우리집은 오빠 몰래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혼자 방치되어 한달여 가까이 먹는것도 없이 술만 마시던 그는 아주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칼을 들고 귀신을 잡겠다며 동네방네를 뛰어다니다.....정신병원의 하얀 앰브란스에 실려 그렇게 병원의 철창에 갇혔습니다.
병원에 처음 실려와서 의사에게 그러더랍니다.....나는 전화가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누구랑 통화하고 싶으면 귀에서 그 사람이 바로 전화를 걸어준다고.....
이년여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오빠가 비교적 온전한 정신이 되고 회복이 되자 병원에서 퇴원을 하라고 하더군요. 엄마가 오빠를 병원에만 둘수는 없다며 퇴원을 시켰습니다.
하아...퇴원한 바로 그날부터 또 술을 마시더군요.
그렇게 또 술...술...술.... 결국 오빠는 한달여만에 다시 병원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가서 술안마시면 얼마있다 또 퇴원하라고 하고 나오면 그날로 또 술마시고.....
그러면 또 병원에 가고...
나중에는 한 병원에서 오빠를 계속 받아주지 않아 서울에 경기도에 안다닌 정신병원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병원직원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손발이 묶인 채 앰브란스에 오빠가 실려갈 때...저는 그때 세상의 욕이란 욕은 오빠의 입에서 다 들어본 것 같습니다.
네...그짓을 7년을 했습니다.
병원생활을 8년정도 하자 오빠가 이제는 병원이 아주 지긋지긋하다며 퇴원하면 다시는 술안마시고 일해서 먹고 살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하더군요.
그리고 그는 퇴원후에 술을 끊고 구두를 닦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오빠와 함께 살며 밥을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오빠는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점점 더 예전보다 더욱 심각한 알콜중독에 폭력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라도 술을 안마시는 날이 없었고 술을 마시면 냉장고에 있는 반찬과 김치를 온집안에 집어던지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노인 엄마가 허리도 구부정해 가지고 힘들게 시장에 가서 야채 사다가 지 처먹일려고 김치 담가 놓으니 술처먹고 집어던지고 행패에 지랄발광.....
그래도 그런 놈이 자식이라고 그래도 마지막까지 사람 한번 만들어 볼려고 그놈을 붙들고 있다가 엄마가 목욕을 하러간 사이 또 집안을 다 때려부수고 온 집안을 김치국물로 도베를 해놓은 어느날.....엄마가 저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십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아들과 살 수 없다고...엄마가 해주신 밥 먹어보기를 두 세해...그것도 복이라고 복을 차며 행패를 부리던 오빠는 다시 앰브란스에 실려 강원도의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엄마와 나는 아주 먼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주민등록도 이전하지 못하고 .....
우리가 이사를 한 뒤에 오빠를 퇴원시켰고 큰 언니가 오빠를 만나 엄마가 다시는 너와 살지 않겠다고 하셨다는 말을 전하며 오빠에게 돈을 백만원 건네주었습니다.
그때가 2002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렇게 오빠는 거리의 부랑인이 되었습니다.
전국의 역과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며 떠돌았고 이따금씩 큰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술값을 달라거나 엄마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자식이 엄마를 찾으니 외면할 수가 없어 엄마가 오빠를 만나시면 엄마는 체념 속에서 한숨만 쉬고 오셨습니다. 아무리 속을 썩인 아들이라도 하나뿐인 아들이 거지꼴을 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속상하셨을까요?
그러다가 몇 년후 오빠가 우리집을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상거지꼴을 하고 냄새가 진동을 하며 수시로 우리집에 쳐들어 옵니다.
그러면 돈 2~3만원 줍니다. 그러면 나갑니다. 그 다음날 또 쳐들어 옵니다. 돈 안주면 안갑니다.
어느날 우리집에 온 우리신랑 (당시에는 결혼전)에게 귓방머리 한 대 얻어 맞았습니다.
몇해 전 엄청나게 추웠던 겨울 어느날 피시방 주인에게서 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지금 남동생이 우리피시방에 있는데 영업이 끝나도 나가지도 않고 돈도 안낸다고...갈곳이 없다고 한다고....행색을 보니 참혹하기가 이루말할수 없다고..남동생 돈 좀 보내주라고.....
큰 언니가 오빠에게 돈 10만원을 보내주었고.....그것이 오빠가 가족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되었습니다.
지난 8월 24일 남대문경찰서에서 우리신랑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개씨 남편이시지요? 아무개씨의 오빠가 어제 서울역에서 사망하셨습니다. 조서를 작성해야하니 속히 경찰서로 와 주십시오....
큰 언니가 경찰서에 갔고 형사가 오빠 시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분이 동생이 맞지요? 하더랍니다.
앙상하게 마른 채 몇 년을 입었는지도 모를 꼬질꼬질하고 헤어진 옷차림으로 오빠가 흰 천 위에 눕혀 있더랍니다. 형사의 말이 부검을 하지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기간의 영양실조와 폭염으로 탈진해 사망한듯 보인다고 했습니다.
네....그렇게 늙은 엄마가 꼬부랑 꼬부랑하며 밥해줄 땐 밥상 집어던지고 김치 패대기 치더니...결국은 굶어 죽었군요.
큰 언니가 이놈은 여호와의 조직을 배반해서 장차 아마겟돈 때 부활도 못한다며 서글피 웁니다.
불쌍하게 죽은 생각하면 장례라도 치러주고 싶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성서에 나와 있으니 다 의미없는 일이고 무연고 사망자 처리해달라고 했다니....오빠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혼자 갔을 것입니다.
싸구려 관에 실려 화장된 뒤에 다른 변사자들과 함께 이름도 없이 번호만 적힌채 무연고자 납골당으로 갔겠지요. 엄마께는 오빠의 부고를 알려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추석때 딸들이 모두 모이니 엄마가 그러십니다...
이 놈은 어디서 어떻게 하고 있다냐?
큰언니가 얼른 말들 돌립니다.
엄마 나중에 아마겟돈 때 아부지랑 할머니랑 부활하면 낙원에서 모두 다 같이 살꺼지.........